# 119
& 피의 운명을 따라가세요. (1)
그들이 향하는 곳은 서두르면 삼일 정도가 걸리는 곳이었다.
24번 광산은 평야에서 홀로 불룩 솟아있는 산에 형성된 것이었다.
구리 매장량이 풍부한 곳으로, 적지 않은 인원이 거기에서 일하고 있었다.
그러던 와중에 오크가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결정적인 실수를 저질러 버렸다.
첫 번째 실수는 근처의 감시탑 하나를 부수는 데 성공했으나, 상대적으로 아주 멀리 있던 감시탑에는 소홀히 한 것이었다.
이는 글리터의 연락 체계를 알지 못해서 벌어진 실수다.
일정 시간 내에 다른 감시탑에서 연락이 없는 경우가 있다.
이때 파수병은, 무조건 다른 감시탑에 일이 생겼다고 신호를 보내게 되어 있었다.
신호를 보내는 동안, 다른 파수병은 24번 광산에 접근하여 동태를 살폈다.
그리고 오크들이 그곳을 점령한 것을 알아차렸다.
오크들이 저지른 두 번째 실수는 그곳을 떠나지 않은 것이다.
거기에서 멀지 않은 거리에 23번 광산이 있었다.
그곳을 점령하고 수를 합쳤다면 힘이 불어났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식으로 계속 행동한다면 충분한 외부 위협이 된다.
그러나 이 오크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광산의 식량을 탐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래서 소중한 시간을 소비하고 말았다.
이는 계획적으로 머리를 쓸 줄 아는 오크를 배제한 덕도 있었다.
조금이라도 꾀를 굴릴 줄 아는 놈들은 모두 글리터의 감옥에 있었다.
멀리 24번 광산이 있는 붉은 산.
바위산이 보이자 세인은 명령했다.
그 명령은 당장 돌격하여 저 광산을 탈환하자는 것이 아니었다.
“흩어져라.”
달려온 병력으로 인해 광산 내부가 떠들썩해졌다.
세인은 데려온 병력을 빠르게 양옆으로 나누었다. 그리고 둥글게 산을 감쌌다.
결국, 24번 광산은 포위된 것이다.
그러고도 세인은 공격을 명령하지 않았다.
그는 시퍼런 하늘을 잠시 보더니, 야영지를 만들라고 지시했다.
그래서 광산의 오크들은 두 눈을 빤히 뜨고, 인간들이 밖에서 전열 가다듬는 것을 지켜봐야만 했다.
광산은 말 그대로 광산이지 무슨 정예 요새가 아니었다.
당연히 밖으로의 공격 수단도 없다시피 했다.
설령 안에 활이 있다 하더라도, 에워싼 거리가 이미 화살의 범위 밖이었다.
그렇게 포위와 진영을 형성한 세인은, 그 후로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휘이잉하는 바람 소리와 함께, 바위산 앞의 땅에는 먼지 뭉치만 굴러다녔다.
새라도 나타나 정적을 깨뜨리면 좋으련만, 그런 날짐승조차도 안 보인다.
무거운 침묵.
다시 무거운 침묵의 연장선 안에서 두 세력은 서로 대치 상태였다.
세인은 병사들이 끌어다 놓은 나무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 천막들과 엉성하지만 뾰족한 목책이 세워지는 것을 구경했다.
일단 야영지가 완성되자, 맥은 세인에게 허락을 구한 후 식사를 준비하도록 했다.
급하게 달려오느라 끼니를 몇 번이나 걸렀기 때문이다.
말도 사람들도 상당히 지친 상태였고, 이들에게 필요한 건 음식과 수면이었다.
밥 짓는 연기가 피어오르고 첫 번째로 완성된 푸짐한 식사가 세인에게 전달되었다.
하지만 그는 고개를 가로젓는다.
“병사들 먼저.”
“알겠습니다.”
광산에 숨어있던 오크들은 식사가 끝난 후 당연히 글리터의 인간들이 쳐들어올 줄 알았다.
하지만 그런 낌새조차 없었다.
그런 상태가 하루 이틀도 아니고 무려 사흘 동안이나 이어졌다.
세인은 그동안 가장 앞쪽에 의자를 세워 놓고, 거기에 앉아 있었다.
투구를 옆에 벗어 놓은 그는 몸을 약간 웅크리고 뭔가를 생각하는 듯이 보였다.
나머지 병사들은 무기를 손질하거나 식량을 간수하며, 그런 세인의 등을 힐끔거릴 뿐이었다.
도중에 맥이 식사와 물을 가지고 옆으로 다가갔지만, 세인은 물만 받아서 마실 뿐이었다.
음식은 손도 대지 않았다.
보다 못한 맥이 입을 열었다.
“뭐라도 드셔야죠. 그래야 힘을 내서 싸우죠.”
“내가 웃긴 이야기 하나 해줄까?”
말투나 표정으로 보아 전혀 웃긴 이야기가 될 것 같지 않았지만, 맥은 식판을 든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고개를 약간 들어 전방을 보았다.
차가운 바람이 불고 있는데도, 24번 광산이 있는 산은 꿈쩍도 하지 않은 채 그대로였다.
겉은 저렇게 그대로지만, 오크들은 피가 마를 것이다.
광산의 식량이라고 해봐야 글리터의 원조가 없으면 뻔한 수준이니까.
“만약에 말이야. 당신이 고립되었어. 그런 당신을 구하기 위해 내 희생을 감수해야 한다면, 나는 그렇게 하지 않을 거야.”
“그런 말씀이셨습니까?”
“웃기지 않나? 그러고도 내가 함께한다고 생각되나?”
“그 자리에 있으면서, 저를 구하러 오지 않는 건 당연한 겁니다. 그런 선택을 해야만 한다면 그렇게 행동하셔야죠. 세인님이 앉아 계신 자리는, 바로 그런 자리입니다.”
맥은 식판을 든 채로 계속 말했다.
“살릴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건 세인님 탓이 아닙니다. 아시지 않습니까.”
맥이 말한 살릴 수 없는 대상들은, 다음날 병사들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포위한 모두가 지켜보는 가운데, 오크들은 소리를 지르며 비틀거리는 인간과 드워프들을 앞장세웠다. 그리고 잔인하게 처형했다.
그들이 포로를 때려죽이는 모습에서, 상당히 악에 받쳐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굶주림과 당황스러움이 거기에 반영되어 있었다.
동시에 인간을 때려죽인 오크들의 행동에는, 협박과 어떻게든 이 상황을 타개하려는 뜻이 내포되어 있었다.
그러나 맥과 병사들도 그렇고 세인은 눈을 부릅뜬 채 지켜볼 뿐이었다.
비명을 지르며 죽어가는 드워프와 인간들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야성이라고 부르기도 끔찍할 정도의 본능을 가진 오크들은 협상 테이블의 대상이 아니었다.
설사 백 보 양보해서 협상 테이블에 앉는다 해도, 오크들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어차피 지금 돌격해도 저들은 맞서 싸우기 전에 안의 포로들을 다 죽일 것이다.
그런 그들의 생리 정도는, 오래전에 파악하고도 남음이었다.
오크들은 외부의 동태를 살폈지만, 세인과 병사들이 꿈쩍도 하지 않자 코를 벌렁거릴 뿐이었다.
그리곤 다시 입구 쪽으로 사라져 버렸다.
살해당한 시체들은, 바닥에 쓰레기처럼 버려진 상태 그대로였다.
그리고 그날 밤 눈이 내렸다.
세인은 어두운 밤 속에 홀로 앉아 있었다.
호위를 서겠다는 사람들은 다 물린지 오래였다.
그는 의자에 앉아 차가운 칼바람을 맞으며 시간을 보냈다.
아무도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몰랐다.
어렴풋이 짐작만 할 뿐이다.
밤이 되기 전 맥이 식판을 들고 왔다. 그러나 세인은 그것을 받지 않으며 지나가듯이 말했다.
“지금 이런 상황이 될 줄 몰랐다고 한다면 그건 거짓말이야.”
“….”
맥은 뭐라고 더 위로하려다가 그만두었다.
높은 자리에 앉은 자는 언제나 최상의 선택을 고려한다.
하지만 그 선택이 어떤 부작용도 일으키지 않을 거라고 장담하는 것은, 동화에서나 가능한 이야기였다.
그는 세인에게 자책감을 느낄 필요는 없다고 말해주고 싶었지만 그만두었다.
마검의 힘에 대해서도 당연히 이야기하지 않았다.
마검을 휘둘러 이 상황을 타개하려 한다 해도, 광산 안의 포로들에게 있어 바뀌는 것은 없었다.
오크들은 당연히 문젯거리가 될 수 있었다.
그걸 알면서도 세인은 그들을 선택한 것이다.
오크들의 노동력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건 예상했던 효과를 불러일으켰다.
엄청난 규모의 도시가, 성이 완성되어 가고 있었다.
그리고 오늘 포로들이 죽었다.
남은 포로들은 저 안에서 예정된 죽음을 상상하며 공포와 함께 있을 것이고 말이다.
바람이 그의 검은 머리카락을 귀찮게 잡고 흔들었다.
그 덕분에 시야가 가려졌지만, 세인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마치 이대로 얼어붙어 조각상이 된 것만 같았다.
그때였다.
그의 앞에 펼쳐진 어두운 공간 속에서 희끄무레한 것이 모습을 드러냈다.
처음에 작은 점이었던 하얀 물체는, 점점 가까이 다가와 사슴이 되었다.
언제인가 한 번 본 적이 있었던 것 같은 사슴이다.
그게 언제였지?
세인은 곧 폭포 소리와 사슴을 기억해 냈다.
그렇다면….
지금도 깜박 잠이 든 것인가?
여긴 꿈속이겠군.
하얀 사슴은 가까이에서 보니 상반된 모습이 공존하였다.
하얀 몸체와 긴 목은 순수함 그 자체였다.
온몸의 털도 하얀빛을 뿜고 있어 신성하게 보였다.
그러나 사슴의 붉은 두 눈은 지나치게 붉었다.
그리고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당신은 언제나 예상을 벗어나는군요.”
사슴은 그렇게 말하더니, 지나칠 정도로 가까이 다가와 목을 길게 뺐다.
그리곤 세인의 얼굴을 관찰하듯이 들여다보았다.
사슴의 붉은 눈. 그리고 젖어있는 콧잔등을 본 세인은 사슴이 걸어온 쪽을 보았다.
역시나 발자국이 없었다.
‘정말 꿈속인가 보군.’
이런 밤에 잠이 들었다면 얼어 죽을 수도 있겠는데.
“나는 당연히 당신이 고통의 용광로를 얻으려 내게로 다가올 줄 알았어요. 내가 찾지 않아도 그걸 위해 허겁지겁 뛰어올 줄 알았거든요. 그런데 제가 움직이게 만들 줄이야. 왜 용광로에 목을 매달지 않죠? 그게 최우선이잖아요?”
사슴의 물음에 잠시 침묵하던 그는 상투적인 질문을 던졌다.
“넌 누구지?”
그러자 사슴은 웃었다.
정말로 사슴의 머리를 하고 인간처럼 웃어 보인 것이다.
“당신은 이미 알고 있어요.”
“그렇게 이야기하지 마. 난 네가 누구인지 모르는데.”
“저보다는 당신의 운명에 관해서 이야기하려고 여기까지 온 거예요. 가끔 꿈을 꾸지 않나요? 그 꿈속의 여인은 어떤 모습인가요? 눈에 초록색 꽃이 피었나요? 그런 상징적인 모습으로 머리맡에 아른거리나요?”
“….”
잠시 알아듣지 못할 말은 하던 사슴은, 태연하게 세인의 발등에 자신의 머리를 올려놓았다.
“검은 왕. 그대는 왜 저 광산을 힘으로 부수지 않죠? 마검을 휘두르세요. 그게 당신의 운명이에요. 단숨에 저길 부수라고요.”
“난 이 검을 완벽히 제어할 수가 없다.”
“학살에 있어서 힘을 제어할 필요가 있어요?”
세인은 계속 사슴을 내려다보며 그의 정체에 대해서 골몰했다.
그러면서도 순순히 대답을 해주었다.
대화가 끊기면 아무것도 안 되니까.
“여기는 글리터의 터전이야. 그런데 생물이 살지 못하는 지옥도를 만들어 놓을 수는 없지. 바보라도 그건 알 거야.”
사슴은 사슴대로 세인의 대답을 들으며 머리를 굴렸다.
그리고 다시 입을 열었다.
“당신은 두 가지 중 하나를 택했어야만 했어요. 알고 있잖아요. 첫 번째는 고통의 용광로를 찾아서 내게 오는 것이었어요. 난 기다리고 있었는데, 당신은 전혀 나를 생각하지 않았죠. 그건 참 이상한 일이랍니다. 두 번째도 첫 번째처럼 확실하고 고민할 필요 없는 방법이에요. 생각해 보세요.”
사슴은 목을 움직였다.
그런데 그 목이 마치 뼈가 없는 연체동물처럼 출 늘어나더니, 기분 나쁘게 위로 향했다.
세인은 자신의 턱 밑으로 다가오는 불가사의한 생물의 눈빛을 보았다.
붉게 일렁이는 안광 안에서는 광기와 고통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과거의 몬스터들이 이 세상에 나타나기 전에, 당신이 할 수 있는 일 말이에요. 생각해 보세요. 알고 있었잖아요. 그 검을 휘둘러 드레퓨스든 가이더든. 남부에서 팔자 좋게 자기들 안위만 챙기는 나라든 다 정복해 버리는 거예요. 모두 무릎 꿇리고 엎드리게 해서….”
“해서?”
“다가올 위협에 대비해야죠. 일단 하나가 되어야 그 위험을 물리칠 수 있지 않겠어요? 그걸 하지 않는 건 당신이 태만하다는 뜻이에요. 최우선 과제는, 과거로부터 달려올 멸망에 대한 대비에요. 그것을 위해서는 물불을 가리지 말아야죠. 설마 그 같잖은 양심과 윤리 때문에 망설이고 있나요?”
“….”
이 눈앞, 생물의 말대로 한다면 세상 전체가 피로 잠길 것이다.
소환된 몬스터들이 나타나기 전에, 더욱 몬스터 같은 세인에게 짓밟히는 셈이었다.
하지만 세인은 그 어떤 말에도 동의하지 않았다.
다만 상대의 정체가 뭘까 하고 생각해 보았다.
그리고 머리에 섬광처럼 스치는 깨달음이 있었다.
‘이 녀석은, 설마….’
세인은 그제야 상대가 누구인지 알아차렸다.
그 사이에도 사슴의 말은 계속되었다.
“왜 이 시대에 마검이 깨어났을까요? 그걸 생각해 보세요. 그리고 그 길을 따라가세요. 당신이 세상을 피로 물들이지 않으면, 결국 분열된 이곳은 몬스터들에게 멸망할 거예요. 그런 희생 없이, 몬스터들을 막을 순 없어요.”
“그게 나의 운명이란 건가.”
“그렇죠. 모두가 운명을 가지고 있어요.”
사슴의 운명은 바로 빛과 어둠을 가진 자에게 죽임을 당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되도록 그 운명을 피하고 싶었다. 그 때문에 세인이 그녀의 뜻대로 행동해주길 바랐다.
그런데 세인은 아무런 것도 하지 않았다.
왜일까?
고통의 용광로를 위해 자신을 찾아오지도 않았다.
그렇다고 세상을 향해 칼을 빼든 것도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