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은 왕 마검의 주인-118화 (118/307)

# 118

& 글리터 (6)

검은 성에는 ‘글리터 룸’이라는 공간이 있었다.

그리고 세인은 그곳에 있었다.

넓고 단단한 방 안에서 그자 자주 하는 일은, 마검 오버 더 데스를 휘두르는 일이었다.

그는 처음에 방을 물로 채워 넣는다던가, 무거운 납을 몸에 달고 단련을 했다.

그러나 검을 휘두르면서, 그런 수련은 필요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 마검은 나중에 자유자재로 무거워지기까지 했기 때문이다.

그 칠흑의 검은 세인과 같이하는 시간이 늘어날수록, 주인에게 호응하며 말을 거는 듯했다. 두 존재는 서로에게 점점 긴밀히 결속되고 있는 중이다.

하지만 완전한 결합을 이루기에는, 좀 더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할 듯싶었다.

주위 사람들은 세인이 틀어박혀서 수련한다고 생각했다.

글리터 룸에서 벌어지는 일도 그런 생각과 다를 건 없었다.

다만 세인의 눈빛은 언제나 필사적이었을 따름이다.

수련이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몰입한 감이 없잖아 있었다.

게다가 글리터가 만들어지는 과정보다 자신의 수련을 중시한 다는 건, 평소 그의 태도와도 맞지 않았다.

하지만 글리터의 최고 권력자는 세인이었으므로 아무도 그에게 뭐라고 하지 못했다.

기사들도 술과 여자로 밤을 지새우는 것도 아니고, 심신을 수련하겠다는데 거기에 대해서 어떤 충언을 올리기가 난감했다.

적어도 밑 사람들이 본받아야 할 행동인 것이다.

사람들은 세인을 영주님이라고 불렀다.

나중에 합류한 난민들은 아레이즈에 대해서 몰랐지만, 원주민들이 그렇게 부르니 의미도 모르고 따라 불렀다.

그러나 여기에서 세인의 위치는 왕이나 마찬가지였다.

난민들이 볼 때는 언데드나 마찬가지인 존재들이 세인에게 보내는 맹목적인 충성심. 그리고 열광은 이해하기가 힘든 구석도 있었다.

물론, 지배자에게 피지배자가 취해야 할 모습이 있긴 했다. 하지만 보통 저렇게 몸과 마음을 바쳐 우러나올 정도는 아니었다.

“물론 우리도, 우리를 받아들여 주시고 보듬어준 이곳의 영주님에게 정말 감사하죠. 하지만 언데드들은 좀 과장이 심해…. 아무리 그래도 밀림 지역에서 하루아침에 성이 생겼다는 말은 놀리기 위해서 지어낸 거 같지 않아?”

곤혹스러워하면서도 우상숭배 비슷한 집단에 이의를 제기하지 못하는 난민들이었다.

세인이 이런 상황에서 뭔가를 원하고 명령한다면, 글리터에서 그게 이루어지지 않기가 오히려 힘들었다.

하지만 그는 어떤 무리한 요구도 하지 않았다.

가끔 아비게일에게 정원 같은 게 있으면 좋을 거 같다고 말하는 정도였다.

그리고서는 글리터 룸에 틀어박혀 마검을 휘둘렀다.

안 그래도 정상 범주를 훨씬 벗어나 있던 몸은, 고된 훈련에 능력이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민첩성과 힘이 비약적으로 늘었다.

이제 그는 수천 번씩 바람 가르는 소리를 내며 검을 휘두를 수 있을 정도였다.

아무리 몸이 마족화 되었다고 해도 엄청난 능력이다.

세인은 최근에서야 아비게일을 통해 사람들이 언데드가 아니라, 마족화가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마족이라는 게 정확히 어떤 상태인데?’

‘자세한 건 저도 모릅니다. 거기에 대해서 아는 것은 조금뿐입니다. 마족에 대한 정의는 태고의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태고의 시대.’

‘마족은 어둠과 인간이 혼합한 존재로 묘사될 때가 많습니다. 그 당시에도 당연히 환영받진 못했지만, 분명 존재했다고 나와 있습니다. 그렇다고 아예 배척하지도 않았죠. 그걸 보면 완전한 괴물은 아닌 거로 여겨집니다.’

‘….’

고개를 끄덕인 세인은 과거, 자신들과 같은 존재가 있었다는 것에 묘한 위안을 얻었다.

적어도 미지 상태인 처음은 아닌 것이다.

자세히 알진 못해도 과거에 비슷한 종족이 있어 살아갔다는 건, 한숨 놓이는 일이었다.

격렬하게 검을 휘두르던 그는 땀범벅이 되어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리고 정신을 가다듬었다.

얼마나 쉬었을까?

세인은 호흡을 가다듬고 일어섰다.

그리고 문을 열고 나와 아래로 통하는 계단을 지나갔다.

그 계단은 성의 지하로 이어져 있었고, 가까이 다가갈수록 부글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보초를 서던 병사들은 세인이 다가오자 부동자세를 취하였다. 그리고 창을 자신들의 몸쪽으로 당겨 세웠다.

쇠창살로 만든 문들을 지나가자 부글거리는 소리가 점점 커졌다.

이제 천장은 천연암석으로 변해 있었고, 물에 반사된 빛들이 여기저기 무늬를 그려놓고 있었다.

신발을 벗은 세인이 맨발로 부드러운 모래의 감촉을 느끼며 계속 걸었다.

지하부터 시작해 일 층까지 조성된 인공 정원은 온천을 품고 있었다.

광산에서 가져온 대리석을 여러 각도로 다듬어, 조각상이나 계단으로서 배치했다. 그리고 그것들은 에메랄드빛 물을 가두어두는 역할을 했다.

물길도 만들었는데, 세인은 그 옆을 따라 걸었다.

온천은 후원으로 이어졌고, 성의 후원은 당연히 외부인들이 들어올 수 없도록 차단되어 있었다.

알몸이 된 그의 신체에 땀을 냉각시키는 차가운 바람이 불었다.

그리고 간밤에 내린 눈이 쌓인 나무와 땅이 펼쳐진다.

새하얗게 변한 경관 속에서 그는 온천에 발을 담갔다.

조금씩 떨어지는 눈송이들을 맞아 김을 모락모락 피우는 온천은 아주 따듯했다.

몸을 담그자 잠시 타는 듯한 열기가 느껴졌지만, 그야말로 잠깐이었다.

온천에 들어간 그는 두 손으로 물을 담아 머리 위에 퍼부었다.

그리고 얼굴을 씻었다.

마지막으로 물에 들어와, 커다란 돌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그러자 몸을 지배하던 피로가 씻겨 내려가는 기분이었다.

눈 내리는 정원에는, 어디선가 날아온 눈 새들이 가지에 앉아 작게 지저귐으로 노래를 불렀다.

그 새들은 눈이 파랗고 몸집이 솔방울처럼 작았다.

옹기종기 모여 앉아 작고 귀여운 부리를 벌리는데, 흘러나온 소리의 무게에 가냘픈 나뭇가지들이 축 늘어진다.

그리고 아래로 후두두 소리를 내며 눈들이 쏟아졌다.

세인은 뜨거운 온천 안에서 차가운 겨울 하늘을 올려다보며 눈을 맞았다.

혼자서 이렇게 온천을 즐기는 게 그의 유일한 낙이나 마찬가지였다.

술도 여자도 밝히지 않았으니까 말이다.

온몸에 힘을 빼고 멍하니 하늘만 바라보고 있을 지금 이때가, 그에게 있어 방해받고 싶지 않은 유일한 시간이었다.

“생각해보면 굳이 여기가 아니더라도, 이런 건 얼마든지 할 수 있을 텐데.”

그의 중얼거림대로 온천에 몸을 담그고 하늘을 바라보는 것 정도는, 다른 곳에서도 얼마든지 할 수 있는 것이다.

번우드 지역도 그렇고, 거기가 아니더라도 세상에 온천은 많을 테니까.

과거에 다크엘프 엘라이저에게 말했던 것처럼, 그렇게 산다는 게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당장이라도 마검을 내려놓자.

그리고 멀리멀리 떠나는 거다.

괴물도 인간도 없는 곳에서 사는 것이다.

거기에서 자신이 좋아하는 여자와 만나 사는 것이다.

뿌린 대로 거둔다는 말은 틀렸다.

뿌린 대로 거두려면 자연과 싸워야만 했다.

하지만 그런 싸움이라면 환영이었다.

적어도 피를 보지 않는 싸움이니까.

한 여자를 사랑하게 되고, 그 여자와 살을 비비며 살 것을 상상해 보자.

전율과도 같은 느낌이 몸을 잡고 흔들었다.

“사랑하는 사람과 이불 안에서 알몸으로 서로 끌어안고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소곤소곤 이야기를 나눈다면 얼마나 즐거울까. 내 손가락으로 상대를 느끼고, 귓결에 서로의 숨을 불어 넣는다면 그것보다 더 가치 있고 황홀한 순간은 없을 텐데.”

세인은 어렸을 적부터 못 볼 꼴을 너무나도 많이 보았다.

그러다 보니 그 대비 선상에서 자리한 행복이란 의미와 실체에 대해서, 더욱 잘 느끼게 되었다.

그는 자신에게 있어 행복이란 것이 무엇인지를 명확히 알았다.

하지만 문제는 정작 그 행복을 향해 걸어갈 수가 없다는 사실이었다.

가끔은 모든 것을 내려놓고 자신에게 물어보고도 싶었다.

방법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행복해질 수 없다는 것을 아니까.

혹, 절망하느냐고 말이다.

사람들을 외면하고 자신의 행복을 추구하겠다는 게 아니라.

단지 한 번 정도 물어보고 싶었다.

그것뿐이다.

그러나 그렇게 자신에게 물음을 던지는 것조차 꺼려지는 이유는, 그 마음가짐이 자리에 맞지 않는 배반으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런 생각조차 그가 거느린 사람들에 대한 양심의 가책이었다.

그렇게 비스듬히 누워 있는데, 뒤에서 발소리가 들린다.

다가오는 사람이 누구인지는 향수 냄새로 알았다.

그래서 세인은 멍하니 앞을 응시하는 시선을 거두지 않은 채, 입만 움직여 이야기했다.

“이봐. 이쪽으로 오는 건 곤란해. 난 알몸이라고.”

세인의 뒤로 모습을 드러낸 세리스는 쟁반을 받쳐 들고 있었다.

기사인 그녀가 할 일은 아니지만, 이 모든 게 마플의 계략이었다.

마플은 요즘 독신이 죄악이라도 되는 양 행동하고 다녔다.

어쩌면 독신은 죄라는 새로운 종교에 빠진 것일는지도 모른다.

그녀의 계획의 단점은 너무 눈에 뻔히 보이는 수작질이란 것이지만, 어쨌든 효과는 있었다.

지금처럼 세리스의 손에 쟁반이 들려진 걸 보면 말이다.

세리스는 고개를 작게 끄덕이더니 이런 말을 했다.

“하지만 발로 움직이지 않으면, 이 차를 거기까지 전달할 수가 없어요.”

“….”

놀라운 설득력이다.

결국, 세인은 마지못해 다가오라고 손짓을 했다.

그런 그의 곁으로 다가온 그녀는 세인에게 옥수수 차를 건네주었다.

화룡석 조각이 들은 차는 아직도 뜨겁다.

그것을 후후 불고 있는데, 세리스가 세인이 바라보는 방향을 함께 하며 물었다.

“뭘 그렇게 보고 있어요?”

“아무것도.”

그리고 침묵이 흘렀다.

정확히 말하자면 완전한 침묵은 아니다.

둘이 나란히 앉아서 차를 후루룩거리는 소리는 존재했으니까.

그 어색함을 깬 것은 세리스였다.

“처음에 이곳으로 온 사람들은 절망하는 표정을 지었어요. 그런데 지금은 오히려 행복을 빼앗길까 봐, 두려워하는 표정이에요.”

“그들은 어떤 현재가 주어져도, 언제나 고통스럽게 살고 있군.”

“신전에서 들어보니, 어떤 사람들은 아주 좁은 곳에서 가축처럼 살았다고 하더군요. 돼지들처럼 한데 모여서 말이에요. 노예처럼 취급하고, 밤낮 가리지 않는 고된 노동을 강요받았다고 해요. 그런데 여기에서는 자기 집도 생기고, 생업에만 종사하면 되니까…. 인생이 격변한 거죠. 미지에 대한 공포와 위협을 견뎌낸 보상, 그것을 받는 셈이에요.”

“세리스.”

“왜 글리터 룸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지는 모르겠지만, 나오셔서 지금 이룬 것들을 보셨으면 좋겠어요. 사람들이 지금 얼마나 행복해하는지. 고마워하고 있는지. 그 대상을 찾을 때, 그 자리에 서 있어야 하는 건 아비게일이 아니에요. 하다못해 동상이라도 세워야 하지 않을까요? 아비게일에게 물었더니 말리셨다고 들었어요. 힘을 하나로 모으기 위해선 세인님을 내세워야 하시는 것을 잘 아시잖아요.”

“세리스.”

세인이 재차 이름을 부르자, 그제야 세리스는 말을 멈추었다.

그리고 앞을 응시하며 그의 말을 기다렸다.

“상황이 그렇게 낙관적이지만은 않아.”

그때였다.

멀리에서 그들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급하게 뛰어온 병사들은 감히 이곳까지 걸어들어올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래서인지 멀찌감치 물러서 두 손을 입에 대고 소리를 질렀다.

그 소리에 세인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물들이 뚝뚝 흐르고, 세리스는 황급히 주위에서 그가 벗어 던진 옷가지들을 주워다 주었다.

몸의 물기를 닦을 생각도 하지 못하고 옷을 입은 세인은, 그녀와 함께 성의 홀로 올라갔다. 그리고 거기에서 모여있는 사람들의 보고를 들었다.

“광산이 함락당했다고 합니다.”

더이스가 핼쑥한 얼굴로 그렇게 말했다.

다른 사람들의 낯빛은 당연히 좋지 않았고 불안해하는 모습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광산을 차지한 것들이 바로….

“오크들입니다. 오크들이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세인은 흥분하지 않고 침착하게 물었다.

“몇 개나?”

“예?”

“어디의 광산이고 몇 개나 점령당했지?”

더이스가 순간 말을 못 하자, 옆에서 행크가 대신 대답했다.

“하나고 구리 광산입니다.”

금광이 아니라 다행이라는 말 대신, 세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나갈 채비를 하라 일렀다.

출발할 병력의 수도 말하는데, 세리스가 끼어들었다.

“직접 가시려고요? 제가 대신 가겠습니다. 가서….”

세인은 고개를 흔들었다.

“내가 선택한 일이다. 그리고 네 생각대로 흘러가진 않을 것이다. 내가 가야만 하는 일이야.”

“그럼 저도 동행하겠습니다.”

“내가 이곳을 비우면 다른 사람들이 이곳을 지켜야지. 이봐, 맥.”

그의 부름에, 사람들에게 바삐 뭔가를 지시하던 맥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다가왔다.

“나와 함께 가자.”

“알겠습니다.”

이렇게 되니 세리스와 다른 사람들은 끼어들고 싶어도 끼어들 수가 없었다.

이미 세인이 결정을 내린 이상 토를 다는 것이 어려웠기 때문이다.

글리터의 내성문이 열리고 기마가 질주했다.

외성의 성문은 아직 건설 중이었다.

오크들과 인부들이 뒤섞여 있는 그곳을, 마차와 병사들이 통과했다.

그다음은 일자형의 대로였다.

완성되어 가는 도시의 중앙으로 선을 그은 이 길은, 훗날 킹스 로드라고 불릴 계획이었다.

그래서인지 일반인들은 지나가지 못하게 미리 통제하고 있었다.

바닥에 깔린 돌들은 아주 평평한 정림석이었다.

진동을 흡수하며 내구성이 뛰어나다.

그 위를 세인과 다른 사람들이 빠른 속도로 지나쳐 갔다.

말 위에서 검은 망토를 휘날리던 세인은 투구를 쓰고 있었다.

투구 옆으로 건물들이 휙휙 소리를 내며 스쳐 지나갔다.

투구 안에 들어있는 그의 얼굴은 굳어 있었지만, 다른 사람들은 투구에 가로막혀 그의 그런 얼굴을 볼 수 없었다.

선두에 선 세인과 부하들 뒤로, 수백 명이 넘는 병사들이 빠르게 출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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