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7
& 글리터 (5)
시간이 흐를수록 글리터 성은 차츰 자신의 모습을 찾아갔다.
검은 암석들 속에서 태어나는 강철의 성채는 스스로 인지하고 자신을 외부에 어필하는 듯 보였지만, 실은 다 드워프의 공이다.
첨탑 역할을 하던 것은 유난히 뾰족하고 긴 침들 이었다.
아주 멀리에서 보면 크고 굵은 기둥으로 보였으므로 왕관을 연상케 하기도 했다.
왕관에 박힌 보석 역할을 하는 것은 비정상적으로 큰 창문들이었다.
“저기… 아무리 디자인의 자율성을 강조한다고 약속은 했지만요. 창문이 홀의 크기를 넘어가는 건, 진짜 너무한 거 아닙니까?”
마치 사기를 당한듯한 얼굴로, 아비게일이 설계도를 들고 쫓아다니자.
그 등쌀에 못 견딘 울프크릭은 이렇게 말해 버렸다.
“모르면 가만히 있어! 이게 바로 드워프 풍이야! 한낱 자네 따위가 낭만과 멋을 알겠어?”
한낱?
“….”
겉으로는 투박해 보이나 튼튼하고 아주 복잡한 내부를 가진 이 검은 성이었다.
그리고 아레이즈의 성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크고 웅장하게 자리를 잡았다.
또한, 큰 창문 역할을 하는 공간 외에도 길고 날카로운 세로 선들이 내성에 자리 잡았다.
그 선을 중심으로 초록색이나 붉은 유리가 기묘한 대비를 보였고 말이다.
“이제 반 정도 진행한 것 같군. 그러니까 말 시키지 마. 집중해야 하니까. 나머지 반은 정말 중요한 거라고.”
그러면서 크릭은 아비게일이 알아듣지 못할 내진설계 등등을 지껄여 댔다.
물론 아비게일은 그 말을 믿지 않았고 말이다.
크릭의 말처럼 그냥 지진도 아니고, 대지진에도 무너지지 않는 집은 있을 수가 없었다.
아비게일이 보기에 크릭과 드워프들은, 성을 통해 자신들의 작품 혼을 불태우고 있는 것 같았다.
“제 말은 설계 도면과 맞는 게 너무 없단 말입니다. 지금 제대로 하시고 있는 거예요?”
“것 참 더럽게 윙윙거리네.”
둘은 자주 투덕거리면서도 사이가 나쁘진 않았다.
오히려 가까운 편에 속했다.
일례로 주점에서 얼큰하게 취한 크릭은, 뒤따라온 아비게일에게 농을 던지기도 했다.
시작은, 일단 주변에서 독한 술을 마시는 드워프들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자 봐봐. 보라고.”
그럼 다른 드워프들은 이렇게 말한다.
“에이.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그렇게 말할 리가 없어. 취한 건 우리인데 왜 그런 소릴 해.”
“이봐-. 아비게일! 자네는 이 땅이 둥글다고 생각하지?”
“예?”
도면을 펼쳐 들곤, 얼굴을 찡그리고 있던 아비게일에게 크릭이 재촉했다.
“우리가 밟고 있는 땅이 공처럼 둥글다고 생각하잖아. 그렇지?”
그러면 아비게일은 정색을 하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는 게 아니라, 정말로 땅은 둥근 겁니다. 공처럼요.”
그러면 드워프들은 눈을 크고 동그랗게 떴다가, 서로 어깨를 치면서 껄껄 웃어대기 바빴다.
주먹으로 탁자를 두드리고, 짧은 다리로 탁자 다리를 차느라 난리였다.
그중 가장 크게 웃는 자는 바로 크릭이었다.
그는 보란 듯이 아비게일을 손가락질하며 다른 드워프들에게 소리쳤다.
“봐봐! 내 말이 맞지? 참 재미있는 친구야. 미쳤는데 일 하나는 잘한다니까?”
“….”
뭐 씹은 표정이 된 아비게일 앞에서, 드워프들은 코를 잡고 술을 마셨다.
후추를 섞은 술이라 재채기를 피하기 위해서였다.
북부 허리띠 지역의 계절은 하나뿐이라, 시간의 흐름을 느끼는 게 더딜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시간은 꼬박꼬박 흘러갔다.
글리터는 나날이 발전했으며, 튼튼하고 높은 건물들이 비가 온 후의 대나무 순처럼 자라나고 있었다.
처음에는 오크들을 보곤 글리터에 온 것을 후회하던 난민들도 금방 안정을 되찾았다. 그러면서 행동에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여기에서라면 마음 놓고 생업에 종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 * *
따사로운 햇살이 하늘에 가득한 오후.
아비게일은 해시계 용도로 만든 건물에 있었다.
4층에서 소파에 드러누운 그가 커다란 책을 읽고 있었다.
여가를 즐기는 그의 얼굴은, 전보다 몰라보게 얼굴빛이 좋았다.
세인은 막상 글리터의 건설에 대해 참견하지 않았다.
한때는 아비게일이나 다른 사람들이 그의 의견을 듣고자 메모지를 들고 따라다녔지만, 고작해야 ‘공원 정도가 있으면 좋겠군.’이라는 게 의견이었다.
어찌 보면 너무나도 당연한 그 의견은 물론 즉각 이루어졌다.
세인은 내부의 사정에는 신경 쓰지 않고, 병사들을 뽑아 훈련하는 것에만 신경을 할애했다.
그리고 대부분 시간은 혼자서 보내는데, 그때는 꼭 마검과 함께였다.
기사들은 병사들을 훈련시키는데 시간을 많이 할애했다.
결국, 내부 건설은 아비게일이나 드워프들의 몫이었다.
그리고 아비게일은 여기에서 처음으로 보람을 맛보았다.
사람들이 사는 터전을 만들어 나가고, 계획하는 기쁨을 알아버린 것이다.
아름다운 건물들을 상상하고 현실로 옮길 때.
그 즐거움은…. 무언가 디테일한 구조물을 구획에 맞게 채워가고, 그 안에 사람을 들여놓을 때의 쾌감이란…. 정말, 해보지 않고서는 모르는 것이었다.
그 재미에 맛을 들인 아비게일은 혈색이 좋아졌고 본인은 모르지만, 전보다 훨씬 능동적으로 변해가는 중이었다.
물론, 여기에는 윗사람의 전폭적인 지지와 드워프들의 도움이 있어서였다.
“전폭적인 지지…라고? 그, 그렇지. 방임이 아니라 지지였지. 뭐 그렇게 생각하는 게, 자네 정신건강에도 좋을 거야. 그럼 이만.”
파이를 양손에 든 행크는 그렇게 말하며 아비게일을 스쳐 지나가곤 했다.
어쨌든 나른한 오후다.
신전의 기준으로 오늘은 주말이었는데, 모두가 쉬는 날이었다.
이렇게 구분을 만들어 놓으니, 오히려 하루하루가 더 알차고 빨리 가는 느낌이랄까.
아비게일은 사과를 베어 물며 ‘칼엘의 기록’이라는 제목의 책을 보았다.
얼핏 보면 백과사전 같기도 한 이 책은 종잡을 수 없는 소설책 느낌으로 그에게 다가왔다.
그렇다고 완전한 소설책도 아닌 게, 과거 시대의 오만가지 대상들을 쭉 나열한 글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이야기 흐름도 중구난방이었다.
기행문 같기도 했고, 때론 일기 같기도 했다.
그래도 연구 가치는 충분한 고서였다.
고대 식물에 대해 고증도 되어 있는 편이었고, 지형 관련해서도 흥미로운 주제가 많았다.
저자가 딱히 주제 의식을 가지고 쓴 것 같진 않지만, 읽다 보면 옛날 대륙이 떠오르면서 생각할 점도 많았다.
어떤 마법사는 이 책을 보고 대륙 이동설을 조심스럽게 내놓기도 했다.
물론 바로 매장되었지만 말이다.
땅이 움직인다는 것은 매우 황당한 생각이었다.
아무리 마법사들이 괴짜 집단 성격을 띤다고 한들, 받아들여지기가 어려웠다.
‘칼엘의 기록’ 권수는 무려 30권에 달한다. 게다가 두께와 크기도 장난 아니었다.
아비게일은 그중 한 권을 펼쳐놓고, 글을 읽어 내려갔다.
“밤은 어두웠고 모닥불 앞에서 우리는 만났다. 그들은 두 명으로 한 명은 남자였다. 여자의 호위 기사인 듯싶었는데, 옷차림은 온통 검은색이었다. 그런 그가, 나는 흉조처럼 느껴졌다. 게다가 동료인 여자도 만만치 않았는데, 길고 검은 머리에 역시나 검은 망토를 걸치고 있었다.”
아비게일은 손가락을 글자에 가져다 대며 계속 읽었다.
마법사들 사이에서 ‘칼엘의 기록’은 태초의 시대에 쓰인 책으로 취급되었다.
그런 것 치곤 마법에 걸린 것처럼 책의 상태가 아주 좋았다.
낡았지만 먼지로 화해 부서질 정도는 아니었다는 뜻이다.
“다른 나라에서 검은색은 중립의 색이자, 곧 심판의 색이다. 내가 흉조라고 말한 것은, 꺼림칙한 검은색 때문만은 아니었다. 나는 여성의 눈동자에서 언뜻 초록색의 빛을 보았다. 찰나처럼 스쳐 지나갔지만, 분명히 보았다. 그 빛이 품은, 원죄 같은 것을 느꼈다. 그래도 나는 두 길손에게 내 이름을 말해줄 수밖에 없었다. 안녕하세요. 나의 이름은 칼엘입니다. 그리고 나는 여자가 걸어온 발자국을 보았다. 어딘가에 있을 괴물들도 저 자국이 낸 소리를 들었을까?”
거기까지 읽었을 때, 아비게일은 문밖에서 계단이 낸 삐걱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그 소리는 그로 하여금 책장을 덮게 했다.
노크 소리가 들리고, 아비게일은 들어오라고 말한다.
그리고 문이 열리며 고개를 빠끔히 내민 것은 바로 마플이었다.
그녀는 하녀 장 차림 그대로였고, 한 손에는 접시를 받쳐 들고 있었다.
접시 위의 물건이 무엇인지는 알 수가 없다.
천으로 덮여 있었으니까.
“어서 오세요. 반갑습니다.”
아비게일은 소파를 손으로 탁탁 털며 자리를 권했다.
그러고 보니 마플은 혼자가 아니었다.
옆에 검은 개와 함께였다.
그 검은 개는 방에 들어오기가 무섭게 이리저리 걸어 다녔다.
간만의 외출에 신나는 모양이다.
“주말에 실례할게요. 뭐하나 싶어서 들렀어요. 요즘 너무 바쁘셨죠?”
“하하 저야 언제나 그렇죠.”
아비게일은 마플에게 굽신거리듯 굴었다.
남이 보기에도 지나친 저자세였다.
하지만 이게 이상한 일은 아니다.
아비게일조차도 병사 몇 명의 호위를 받는 데 비해, 마플은 기사 한 명이 거의 꼭 붙어 다닐 정도였다.
기사만 한 명이란 소리고, 병사들도 상시 그녀의 뒤를 따라 다녔다.
얼마나 보호받고 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게다가 전에는, 슈나이더가 도시에 들어왔다는 것을 알았을 때.
그녀의 호위 병력은 두 배로 늘어났다.
그녀 본인은 아는지 모르지만, 세인은 언제나 마플을 철저히 챙겨 주었다.
아비게일은 물론이고, 다른 사람들도 마플에겐 함부로 굴어선 안 되다는 인식이 박혀 있었다.
“차를 끓여 왔어요. 이걸 마시면 피도 맑아지고 기운도 난데요. 요즘 피곤하셨죠?”
“아.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이렇게 신경 써주셔서.”
아비게일은 머리를 긁적이며, 그녀가 내미는 찻잔을 받아 들었다.
검은 개는 차향에 옆으로 다가오더니 킁킁거리다가 마플의 꾸지람을 듣고 물러났다.
“그런데 말이에요. 계속 혼자 지내실 작정이세요?”
뭐?
이렇게 갑자기?
예고도 없이 본론이야?
아비게일은 약간 당황하며 더듬거렸다.
“예? 아니 뭐….”
그다음은 마플의 수다가 끊이지 않았다.
그녀는 무뚝뚝한 세인에게 진저리가 난 듯, 묵힌 속을 아비게일에게 풀어댔다.
책을 읽다가 날벼락을 맞은 아비게일은, 아줌마의 폭풍과도 같이 몰아치는 수다를 맨몸으로 감당해야만 했고 말이다.
“요즘 독신 남자들이 참 뭘 몰라요. 참한 규수만 찾는다 이거지. 그것도 멀리에서 찾느라 바쁘다 이 말이에요. 하지만 램프 밑이 어둡기 마련이에요. 제가 이 말을 오늘, 지금 왜 여기서 하겠어요? 왜일까요? 왜일까.”
“그, 그걸 저야 당연히 모르죠….”
그때 아비게일은 다시 계단이 삐걱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하지만 자신의 말에 열중한 마플은 그걸 못 들은 것 같다.
그리고 문이 열렸고, 아비게일은 문틈으로 울프크릭의 얼굴이 쑥하고 나오는 것을 보았다.
어째 저 드워프는 점점 자신의 자리를 잊고, 주접을 떠는 거 같았다.
아니면 평상시에 드워프 왕이란 건, 인간들과는 다른 위치인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아비게일이 화색을 하면서 손을 들어 올리려고 했다.
매도 같이 맞는다면 좀 살만하지 않을까 싶어서였다.
하지만 크릭은 마플의 뒤통수를 확인하고는 기겁을 하더니, 필사적으로 검지를 자신의 입에 가져다 댔다.
그리고 잽싸게 문을 다시 닫았다.
‘배신자….’
왠지 모르게 치가 떨리는 아비게일이었지만, 그 와중에도 마플의 수다는 계속되었다.
그 수다를 관통하는 내용은, 바로 하녀들이 최고의 신붓감이라는 것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가족을 위해서 손에 찬물 묻히는 애들이에요. 얼마나 효녀입니까? 그것뿐만이 아니에요. 손버릇 나쁜 애들은 하녀로 오래 일하지도 못해요. 효녀에다가 착실하지. 부지런하지. 착하지. 이쁜 애들도 많지. 검소하고 꼼꼼하지. 진짜 어디를 가도 하녀보다 좋은 신붓감은 없을 거예요. 안 그래요?”
“예, 예. 그…그렇습니다.”
아비게일의 주말이 그렇게 연소되고 있었다.
하지만 이 자리를 모면하기에는, 그의 테크닉이 압도적으로 부족했다.
게다가 마플은 눈까지 반짝이면서, 이상한 충고까지 하고 있었다.
“알아요! 물론 압니다. 과거의 인연을 잊기 어렵다는 거 말이에요. 하지만 놔줘야죠. 지금까지 이루어지지 않은 걸 보면, 옛사랑은 그냥 옛사랑일 뿐! 놓아주지 않으면 새로 시작할 수 없습니다! 알겠어요? 아비게일 씨? 이건 인생 선배로서 충고해주는 겁니다!”
그녀가 호소하는 표정으로, 두 손을 앞으로 내밀며 흔들어 보였다.
그리고 그 옆에서 검은 개는 참 유난을 떤다는 듯이 하품을 했고 말이다.
“아, 예! 그렇습니다! 맞는 말씀이십니다! 지극히 맞는 말씀이에요”
열심히 호응을 해주면서도 아비게일은 아리송했다.
내가 옛사랑이 있었던가?
언제 그런 게 있었지?
여러 생각으로 머리가 어지러웠다.
어쨌든 마플은 슬슬 다음 단계로 넘어가, 하녀 출신인 일등 신붓감 소개로 진입하고 있었다.
아비게일은 이대로 있다가는, 정말 본의 아닌 결혼을 하게 될지도 몰랐다.
그런데 이변이 일어났다.
“엇?”
아비게일의 얼굴이 굳어지며 몸이 경직되었다.
그런 아비게일을 본 마플은 그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뒤로 돌렸다.
유리창 밖, 멀리에서 세로 선이 보였다.
검고 가느다란 세로 선은, 파란 하늘 속에서 좌우로 약간 흔들렸을 것이다.
그러나 멀리인 여기에서 보면 직선으로만 보일 따름이다.
“설마 저거 봉화인 건가요?”
“문제가 생겼나 봅니다.”
마플과 아비게일은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