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6
& 글리터 (4)
블랙 라이어드 상단은 이제 전 세계에 영향을 뻗치는 상단이었다.
총수에 대해서는 많은 이들이 초상화로 접해보았을 뿐이다.
과거에 블랙 라이어드 상단과 접점이 있었던 한센도 총수의 얼굴은 실제로 접한 바가 없었다.
게다가 초상화 속의 인물은 그래도 온화하게 보였던 반면에, 슈나이더의 모습은 잘 벼린 한 자루의 검 같았다.
실제로도 슈나이더는 엄청난 실력을 갖춘 검사였다.
“세인님. 전에 세인님이 죽였던 여성은 슈나이더의 딸입니다. 그것도 끔찍이 아꼈다던 막내딸요.”
한센은 그 말을 하면서 세인이 당장 경계령을 내릴 줄 알았다.
하지만 세인은, 작은 목소리로 ‘그래 그렇군.’이라고 중얼거릴 뿐이다.
오히려 비장하게 말을 꺼낸 한센이 궁색해졌다.
‘걱정 안 되십니까?’
그런 표정의 한센 앞에서 세인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내겐 막내딸이 없어. 그래서 그가 누굴 노릴지 짐작도 못 하겠군. 그리고 그 하나 때문에 난리를 치기에는, 나는 그와 말 한마디로 섞어보지 못했어. 복수심에 불타고 있든 말든 얼굴을 봐야 뭐라도 확신하지. 그리고 그가 이런 상황에 여기에서 난리를 친들 얻는 게 뭘까?”
오히려 블랙 라이어드 상단은 그 대가로 총수를 잃게 될 것이다.
그것이 바로 세인이 가진 힘이었다.
슈나이더가 상단으로 압박하는 것이 우려스럽다면, 그건 그것대로 새삼스럽다.
이미 대륙 전체가 그의 적이 된 것이나 마찬가지인 게 현실이었다.
“그가 왜 혼자 여기까지 왔는지에 대한 궁금증은 있어. 하지만 그걸 충족시킬 정도로 시간이 남진 않아.”
세인의 여유에 한센은 더 머쓱해졌다.
그런 한센 앞에서 세인은 말을 덧붙였다.
“슈나이더라는 자의 염탐이 걱정될 안보망이라면, 애초에 자네와 대면하지도 않았겠지. 적어도 그는 이렇게 가까이서 나를 충분히 관찰하고 있진 않아.”
얼굴이 붉어진 한센이 헛기침을 하는데, 세인이 일어나 걸었다.
바람이 심하게 부는 지점에 서서 뒷짐을 진 그가 이렇게 말했다.
“정보는 고마워. 그러니 나도 빙빙 돌리지 않고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지. 여기 근처에는 광산들이 많이 있어. 그리고 더 살펴보면 가이더의 사람들이 아주 좋아할 만한 게 있을 거야. 그 물건들을 자네에게 아주 싸게 넘기겠어. 때론 거저 일수도 있을 거야. 그러면 이득이 많이 남겠지? 그런 교류를 자네에게 약속하지.”
“상인에게 이득만큼 중요한 게 어디 있겠습니까? 하지만 세인님은 왜 그런 이득을 저에게 안겨주시려는 건지요? 과거의 인연 때문이라고 하기에는 과한 감이 있는데요.”
가까스로 신색을 회복한 한센이 그렇게 물었다.
“자네는 반만 상인이잖아. 상인이 아닌 나머지 반쪽은, 내가 주는 이득을 가이더에 전하겠지. 그러면 가이더는 더 빠르게 평온을 찾을 테고, 발전하겠지. 그건 내 바람과 정확히 일치한다.”
세인은 찬바람을 맞으며 건설 중인 도시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의 얼굴은 아까부터 그렇듯이 무표정이다.
대체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다.
어찌 보면 이게 상인을 대하는 가장 좋은 모습이기도 했다.
세인은 그렇게 충분히 기다려 주었지만, 한센은 한센대로 고민이 깊은 것 같았다.
한센은 세인을 마음 깊이 존경한다.
하지만 나라를 다시 일으켜 세워야 한다는 대의가, 지금 그를 점령한 또 다른 진심이었다.
세상이 보기에 세인은 몬스터일 텐데, 과연 한센의 두 진심은 공존할 수 있을까?
한센의 고민은 누구 앞이라는 것도 잊을 만큼, 깊고 헤어나오기 힘들었다.
시간은 계속 흘렀다.
그리고 세인이 갑자기 한센의 상념을 깨트렸다.
가벼운 턱짓과 입에서 흘러나오는 말로 말이다.
“한센. 여기 와서 보라고, 뭐가 보이나?”
그의 질문에 대답해야 했던 한센은 걸어서 세인의 옆에 섰다.
그리고 글리터의 모습을 내려다보았다.
“건설 중인 도시입니다.”
“내 눈에는 힘은 있을지 모르나, 우둔하고 능력 없는 지배자 밑에서 고생하는 사람들이 보인다. 건물보다도 그게 더 눈에 보여.”
“….”
“저들은 분명 사람이야. 나도 알고 저들도 알아. 너의 속까지 정확히 들여다볼 수 없지만, 그래도 저들을 사람이라고 생각하니 이곳에 온 거겠지. 물건을 사고판다는 핑계를 대며 말이야.”
한센은 무거운 무게를 느꼈다.
그리고 가슴에, 세인의 단어 하나하나가 돌처럼 얹힌다는 느낌이 들었다.
“거기에 대해서는 고마움을 느낀다. 그렇게 봐줘서 고맙다. 염탐할 것이라면 직접 오지 않았어도 되었잖아.”
“천만의 말씀이십니다. 제가 작고 어리석었을 때, 제게 베풀어준 은혜를 모른다면, 지금의 제가 죽일 놈입니다….”
세인은 그 말을 귓전으로 들으며 밑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봐라, 안타까운 모습이다. 어리석은 지도자 때문에, 저들은 인간이 아닌 존재로 격이 낮춰졌다. 내가 뭐라 변명한들 소용없을 것이다. 나는 저들을 지옥에 밀어 넣은 것이나 마찬가지다. 인간들이 가장 경멸하는 모습으로 저들을 남게 했어. 나는 가끔 스스로 위로하곤 한다. 어쩔 수 없었노라고 말이야. 그렇게 내게 면죄부를 줘. 하지만 부질없는 일이야. 매일 밤 죄책감이라는 올가미가 내 목을 조르는 것 같아.”
그리고 고개를 돌려 한센을 바라보는데, 그의 눈길에 한센은 숨이 멎는 기분이었다.
그의 시선에 담겨 있는 참담함과 자괴감 그리고 고통.
어디에 풀어야 할지 모르는 분노가 뒤범벅되어 한센을 응시하고 있었다.
“네 말에는 틀린 게 있어. 과거의 자네는 주어진 한계 내에서 외딴 영지에 정을 베풀고, 최선을 다하는 상인이었지. 나는 그런 그를 한 번도 작다거나 어리석다고 여긴 적이 없었어. 하지만 지금의 너는 확실히 작고 멍청한 것 같군.”
“….”
“여기 주민들을 봐라. 주인을 잘못 만나 이렇게까지 비극적인 모습이 되었다. 귀족 같지 않은 귀족을 만나, 저렇게 참담한 모습으로 거듭났다. 나는 이제 오크의 손까지 빌려야 할 정도로 밑바닥에 추락한 모습이다.”
“….”
“그런데 넌 이런 꼴을 보고도 왜 여유를 부리고 있나? 나라를 다시 일으켜 세운다는 게 만만한 일인가? 적어도 이 성을 세우는 것보다는 어려운 일일 것이다. 우리는 이제 가이더에 관여하고 싶어도 그렇게 하질 못해. 고국을 향하고 싶어도, 그럴 수 없는 심정이란 말이다. 그런데 너는 대륙 모두가 인정하는 인간으로서, 가이더를 재건해야 하는 자리에 앉아 이것저것 따지고 있지? 네 앞에 있는 실패한 나를 봐라. 이보다 더한 참담함을 맛볼 셈이냐.”
한센의 손이 덜덜 떨렸다.
그는 떨리는 손을 맞잡으며 어떻게든 진정시키려고 애를 썼다.
“네가 돌아가면, 막상 가이더의 책임자들이 어떤 결정을 내릴지는 예상해볼 수 있다. 그래도 여기에서는 무조건 내 제안을 받는다고 해야 하는 거야.”
“세인님….”
“최선을 다해라. 한센. 과거 너에게는 그런 게 있었잖아. 그 최선 속에서 생각해 보면, 금방 답이 나올 것이다. 그것을 위해 망설이지 말아라. 너와 네 집단이 내건 기치를 위해서 주저해서는 안 돼.”
이건 과거에 울프크릭에게도 해주었던 말과 비슷했다.
살아간다는 게 절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뼈아픈 오욕과 고통.
슬픔과 가시밭길이 동반되는 게 바로 인생이란 것이다.
그 인생이란 줄기들이 모여 커다란 나무가 된다.
그 나무는 나라라는 토양 위에 국민이라는 뜻으로써 산다.
그 나무를 생각하고 다스리려 하는 자는, 어떤 감정이 가슴 밑바닥을 치더라도 견뎌내며 선택해야만 한다.
하루가 멀다고 화두처럼 다가오는 난제 앞에서, 항상 생각하고 고뇌해야만 했다.
책임자 자리에 앉은 자가 전체 집단 중 가장 현명해서 매일 고뇌하는 것이 아니다.
언제나 최상의 선택을 할 수 있어서가 아니었다.
세상이란 게 언제나 최상을 발굴해 내도록 여유를 주는 것도 아니니까.
어찌 되었건 책임지고 선택을 하는 자리이기 때문에, 갈림길 위에서 결정하는 것이다.
아무리 힘든 결정이라도, 고뇌하고 물러나기만 하면 그건 그 자체로 무책임한 행동이다.
책임자의 진정한 최선은, 어떤 상황이 와도 이를 악물고 선택을 하는 것이다.
일단 선택을 하면 그 끝이 실패라도 필사적으로 매달린다.
세인처럼 두고두고 후회하며, 자책하는 미래가 기다리고 있더라도 말이다.
그것조차 하지 않고, 그렇게 밀어붙이지 않으면….
지금의 세인보다 더한 자책과 실패가 기다리고 있을 것이었다.
“저 깃발들은 가이더 초대 왕을 기리기 위해서 단 거야. 오늘이 바로 그의 탄생일이잖아. 대체 노란색 깃발이 가이더인에게 그 외엔 무슨 의미가 있지? 그동안 어딜 보고 있었던 거냐. 한센.”
“….”
차라리 ‘나라를 재건하려는 놈이 기본도 안 되어 있다’고 욕을 퍼붓는 게, 이보다는 덜 따끔할 것만 같았다.
대의라는 것에 정신이 팔려 어떤 날인지도 잊고 있었나.
무안함에 손으로 얼굴을 가린 한센이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세인에게 말했다.
“돌아가면 최선을 다해 이번 일을 성사시키겠습니다. 필사적으로 노력하겠습니다.”
“그래 그거면 되었어.”
“하지만 세인님.”
한센의 말을 막으며 세인이 손을 저었다.
그리고 물러가라는 뜻으로 몸을 돌렸다.
“나도 알아 한센. 불가능에 가까울 거야. 나는 글리터 안을 채운 게 사람이라 생각하지만, 가이더는 분명 나와 생각이 다를 테니까. 하지만 우리가 교류해야 한다는 선택이 최선이라고, 너도 생각하고 있지 않나?”
“….”
“네가 이곳을 살펴보면서 판단을 하는 것. 그리고 그걸 가이더에 전달하는 게, 네 반쪽의 책임이야. 적어도 나에게 우호적인 네 반쪽은, 내 조언을 무시하지는 않겠지? 그 남아있는 반 쪽에게 말해주고 싶었다. 내 제안에 최선을 다하라고, 네가 해야 하는 일을 생각하면 그게 당연하다고 말이야.”
한센은 침묵했다.
모든 게 엉킨 실타래 같았다.
세상에 단순한 게 하나도 없었다.
* * *
아침이 되자 정말로 미스틸 테인을 비롯한 포로들은 자유의 몸이 되었다.
같이 잡아 온 친위대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들은 본의 아니게 며칠 더 머물러 있어야만 했다.
그들만으로 얼어붙은 지대를 건너기엔, 턱없이 힘든 여행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며칠이 지났다.
글리터를 돌아본 한센은 물건들을 다 바닥에 내려놨다.
그리고 떠날 채비를 했다.
그 물건들을 보고 놀란 것은 바로 아비게일이었다.
“아니. 어째서 물건들을 다 놓고 가십니까?”
“몇 달 지나지 않아 저는 이곳으로 돌아올 것입니다. 그때 쓰기 위해 물건들을 놓고 갑니다. 더구나 저 귀족 나리들을 챙기려면 이것들은 다 짐이에요.”
이상하다 못해 괴상한 핑계에, 당황해하는 아비게일 앞에서 한센은 힘없이 웃어 보였다.
“몇 달 내에 꼭 돌아올 겁니다. 하지만 혹시라도 돌아오지 못한다면 묵혀두지 말고 쓰십시오. 오래 지나면 상하는 물건도 있으니까.”
“….”
물론 몇 달이 지나도 한센은 글리터에 돌아오지 못했다.
글리터와 교류를 하자는 설득에 실패했기 때문이었다.
어찌 보면 누구라도 예상할 수 있는 실패였고, 그래서 세인은 실망하지 않았다.
그런 미래를 아는 걸까? 모르는 걸까?
마차 문을 닫던 한센은 눈에 이채를 띄었다.
어느새 모습을 드러낸 슈나이더 때문이었다.
슈나이더는 헤어질 때와 변함없는 모습으로 한센에게 말을 걸어왔다.
“돌아갈 수단이 막막한데, 다시 한번 부탁해도 되겠소?”
“물론이죠. 자리는 남으니까요.”
아비게일의 배웅을 받으며 한센을 태운 마차는 천천히 출발했다.
그리고 뒤따른 마차에는 테인을 비롯한 많은 귀족이 타고 있었다.
“어떠셨습니까? 글리터 관람은?”
“관심이 가는 곳은 철통같이 방비하고 있더군요. 그래서 다 돌아볼 수는 없었지만, 인상 깊은 도시였습니다.”
한센이 은근한 어조로 물어오자, 슈나이더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대답했다.
그리고 끝이었다.
이 노회한 사내의 가슴에는 무엇이 들어 있을까?
전에는 ‘블랙 라이어드 상단을 초거대 상단으로 키워낸 야망’이라 답했겠지만, 지금은 분명 복수심일 것이다.
그렇게 한센은 생각했다.
하지만 그가 봐도, 슈나이더가 세인을 어쩔 수 있을 것 같진 않았다.
결국, 어쩔 수 있는 대상이었으면 이렇게 한센과 함께 돌아가지 않았을 것이다.
이 자도 당장은 가망이 없다 여기니까 후퇴하는 것이겠지.
“적어도 몬스터들의 도시는 아니었죠? 그렇지 않습니까?”
“….”
슈나이더에게서 고개를 돌린 한센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자 보온에 특별히 신경 쓴 마차임에도 불구하고 입김이 약간 새어 나왔다.
아직 이 시대는 인간들끼리의 경계심이 약했다.
그리고 힘보다는 명예 같은, 정신적인 가치를 우선시하는 경향이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언제까지 계속될지는 아무도 몰랐다.
당장 드레퓨스의 행동도 그러했다.
그리고 가이더나 트리엔의 새로운 권력자들도, ‘순수’와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었다.
그런 균열이 수많은 피난민을 만들었다.
견디다 못해, 목숨 걸고 고향을 탈출하는 이들을 만들어냈다.
한센과 그 일행들은 그 후로도 글리터를 향하는 행렬과 마주쳤다.
마차에 탄 귀족 중에서는, 그런 사람들이 괘씸한지 이를 부드득 가는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적어도 테인은 아니었다.
‘몬스터가 사라지니, 인간이 다른 인간을 내몰고 있구나. 불행에 쫓기는 인간들은 저렇게 필사적으로 목숨을 거는데…. 생각해보면 얼마나 불행한가? 몬스터의 위협에서 벗어난 세상이 도래하고 있음인데, 그걸 누리기보다 서로 물어뜯을 기색만 보이니.’
테인은 흔들리는 마차 안에서 머리를 벽에 기대고 눈을 감았다.
눈을 감았음에도 불구하고, 권력자들의 아귀다툼을 피해 얼어붙은 땅을 걷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은 쉽사리 사라지지 않았다.
테인은 글리터에 오기 전과 비해 많은 것이 달라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