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은 왕 마검의 주인-113화 (113/307)

# 113

& 글리터 (1)

세리스가 쓴 투구 위로 그림자가 드리웠다.

그리고 육중한 망치가 세리스의 머리를 내리치자.

주변에서는 ‘아!’라는 신음성이 터져 나왔다.

그러나 망치는 세리스의 투구를 스쳤을 뿐이다.

그녀는 귓바람처럼 지나가는 망치를 무시하고 방패를 들어 올렸다.

그 방패는 옆에서 찌르고 들어온 칼을 막아내며 쇳소리를 내었다.

세리스가 요란한 소음을 뒤로하며 한 바퀴 돌았다.

이미 그녀의 하얀 검이 전방에 있던 남자의 목을 가른 후였다.

그녀는 기합성 사이에서 고개를 돌리지도 않고, 검을 거꾸로 잡아 찔러 넣었다.

사내의 가슴에 검이 파고들고, 너무나도 경쾌하게 빠져나온다.

순식간에 남자들을 쓰러트린 세리스가 시체를 밟고 서서 다시 명령했다.

“돌격!”

유민들을 습격한 병력을 으깨놓은 세리스의 병사들이 언덕을 거슬러 올라가기 시작했다.

아래에서 위로 치고 들어가는 것은 힘든 법인데, 세리스가 뒤에 버티고 서있으니 사람들은 전혀 망설이지 않았다.

세인이 일시적으로 마검까지 맡기면서 힘을 몰아준 마당이다.

당연히 사람들은 그녀를 세인의 오른팔로 인식하게 되었다.

그녀의 군사는 몬스터들을 소탕하며 나날이 강해졌고 정예화되었다.

세리스는 세리스대로 자신이 원하는 것에 눈을 뜨니, 점점 강해지고 있었다.

언덕 위에서 방패를 든 적을 향해, 세리스의 병사들이 아래에서 위로 들이닥쳤다.

그러자 적들은 거센 비바람 앞의 판자촌 마냥 우수수 쓰러져 갔다.

꼭대기의 지휘자들은 일사불란한 모습을 보이지 못하고 우왕좌왕하며 혼선만 만들어 냈다.

세리스의 병사들이 지휘자들을 사로잡고, 포박하는데 채 두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세리스는 전장을 정리하며 돌아다녔다.

말 위에 다시 올라탄 세리스가 투구를 벗었을 때, 유민들 사이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마치 천사가 그들을 구원하기 위해 하늘에서 내려온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특히나 아버지가 끌어안은 힐다의 작은 눈이 유난히 반짝 반짝거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세리스는 말 위에서 부하들의 보고를 들었다.

세리스는 병사들의 피해가 가볍다는 내용과 적들의 수장들은 다 사로잡힌 상태라는 것을 재차 확인할 수 있었다.

병사가 보고를 마치자, 그녀는 유민들을 푸른 눈으로 훑었다.

“우리 쪽에 식량이 얼마나 남았지?”

그녀의 의중을 눈치챈 남자가 잽싸게 대답 이상의 것을 생각하여 말하였다.

“이들에게 나누어 주려면 한참 모자랍니다.”

“하루 치만 남기고 다 나눠줘라.”

“세리스님!”

그녀를 호위하기 위해 주위를 둘러싸던 남자들은 깜짝 놀라 자신들도 모르게 소리쳤다.

절대 그래선 안 될 말이다.

여기에서 세인이 있는 글리터까지는 한참이나 남아있었다.

그렇게 식량을 다 나눠주고 나면 버틸 재간이 없었다.

하지만 세리스는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주장을 고집했다.

“이렇게 추운데 옷도 하나같이 얇아. 다들 굶주려 있는데 먹지라도 않으면 무슨 힘으로 버틴단 말이야. 뱃심이라도 없으면 대부분이 도중에 죽을 거다. 더구나 세상에서 내몰린 사람들이다. 그들이 향하는 목적지를 생각해봐.”

그리고 나서 말을 몰아 앞으로 나가는데, 남겨진 남자들은 멍해 있다가 황급히 그 뒤를 따라갔다.

*  *  *

그 시각, 한센은 자신의 상단과 함께 글리터로 향하고 있었다.

고급스러운 마차 안에 앉아 있던 그의 표정이 밝지만은 않았다.

그 까닭은 이 행차의 의미가 정찰을 위해 나온 여행이었기 때문이다.

글리터라는 존재가 주변국들에 인식되면서, 백성들이 그쪽으로 향한다는 현실은 경각심을 북돋워 주기 충분했다.

방관할 수 없었던 나라들은 여러 방법을 썼다.

병사들을 풀어 사람들을 잡아 드리는 것 외에, 한센처럼 염탐을 보내는 경우도 있었다.

한센도 가이더의 귀족 중 한 명의 청을 받고 이렇게 마차에 오르게 되었다.

그가 개인적으로 세인에게 느끼는 고마움과 존경심은 별개의 문제였다.

그의 어깨에는 가이더 재건이라는 묵직한 짐이 지워져 있기 때문이다.

그는 지금 마차 안에서, 세인과 가이더를 사이에 두고 누구의 편을 들어야 할지 고민했다.

그런 상념을 깨는 소리가 있었으니 마차 문을 노크하는 소리였다.

문에 달린 작은 창을 연 한센은 바깥의 남자에게 물었다.

“무슨 일인가?”

“여행자 한 명이 합류를 요청하고 있습니다.”

“음….”

한센은 잠시 고민했다.

그저 그런 여행자라면 상단주에게 직접 알리지 않았을 것이다.

호위병이 다가와 이렇게 말하는 데엔 다 이유가 있었다.

당신이 알아야 할 정도의 사람이니 안에 들이겠냐는 뜻이다.

“이쪽으로 모셔오게.”

“예.”

모자 끝을 잡아 보인 사내가 말과 함께 멀어졌다.

이윽고 검은 옷을 입은 노인이 한센의 마차를 타게 되었다.

그는 백발 머리를 한데 묶은 말총머리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노인의 눈빛은 아주 날카로웠으며 몸이 단단해 보였다.

한센이 보기에 꼭 허리가 차고 있는 검 때문이어서가 아니라, 분위기 자체에서 누가 봐도 검사로 보였다.

“반갑습니다. 슈나이더라고 합니다.”

“한센입니다.”

슈나이더는 하얀 장갑을 벗고 한센과 악수를 했다.

한센은 그와 악수를 하면서 티 안 나게 슈나이더의 전신을 훑었다.

‘귀족인가?’

그건 아닌 거 같은데 범접하기 힘든 분위기가 느껴졌다.

분명 많은 사람을 거느리는 느낌이었다.

“태워주셔서 감사합니다.”

“글리터는 어쩐 일로?”

“요즘 들어 한창 화제가 되는 지역 아닙니까? 신기루인지 아닌지 확인하고, 신기루가 아니라면 한 번 정도 구경해 두고 싶었습니다. 귀하 상단에 몸을 의탁하게 해주셔서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가이더 깃발이 있는 상단이니 습격받지 않을 테니까요.”

“그렇군요….”

반복된 인사치레가 끝나자, 슈나이더는 팔짱을 끼고 입을 다물었다.

한센은 그런 그를 계속 관찰했다.

유민들과 세리스를 만나기 전까지는 말이다.

많은 병사를 이끄는 여기사가 만남을 원한다는 말에, 한센은 마차에서 내려왔다.

말을 타고 다가온 세리스는 한센에게 상단의 물품들을 사고 싶다고 말했다.

어차피 글리터로 향하는 것을 보면, 거기에서 물건을 팔 생각인 것 같았다. 그래서 지금 파는 게 어떻겠냐 묻는 것이다.

그녀의 말에 한센은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때 말에 탄 세리스와 마차 안에 있는 슈나이더의 눈이 마주쳤다.

서로의 눈빛으로 짧지만 깊었던 탐색을 마친 후, 세리스는 눈가에 이채를 띄고 한센에게 물었다.

“실례지만 일행입니까?”

한센은 누구를 말하는가 싶어 뒤로 고개를 돌렸다가 끄덕였다.

“최근에 합류한 길손입니다.”

슈나이더는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고도로 단련된 검사였다.

전이라면 몰라도 능력이 개화하기 시작한 세리스는 그것을 단박에 알아챌 수 있었다.

한 시대에 하나의 엘릭서는 라이트닝 블러드를 만나 능력을 발현한다.

그런데 세인이 본 미래처럼, 라이트닝 블러드가 스스로에 대한 의지를 잃으면 엘릭서 또한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그러나 세리스가 자신만의 중심을 잡자, 엘릭서 중 하나는 자신의 시대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힘이 되어줬다.

그녀는 슈나이더를 계속 바라보았지만, 정작 그녀의 눈빛을 받은 당사자가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을 뿐이었다.

오히려 중간에 낀 한센만 난처해서 눈을 이리저리 굴렸다.

“어쨌든 계산은 돌아가서 제대로 하겠습니다. 그럼 이만.”

“예. 바쁘실 텐데 어서 가보시지요.”

한센의 상단과 세리스 그리고 유민들은 한 덩어리가 되어 글리터로 향하게 되었다.

한센이 작은 창문 밖으로 글리터의 깃발을 힐끔힐끔 바라보고 있을 때, 슈나이더가 한센을 향해 말을 던졌다.

“주로 가이더에서만 활동하는 상단입니까?”

“그렇습니다.”

“이 정도 대규모로 이동하려면, 가이더의 허락도 받으셨어야 할 텐데 대단하군요.”

슈나이더와 대화를 나누며, 한센은 상대가 누구일까를 생각해 보았다.

그러다가 글리터에 도착하기 직전, 슈나이더는 이렇게 말했다.

“몬스터들 때문에 가족을 잃으셨다고요?”

“예 그렇습니다.”

“저도 가족을 잃었죠. 정말 사랑하던 존재였습니다.”

그 말에 한센은 멈칫했다.

그때 마차 근처로 다가온 한 남자가 글리터가 보인다고 말해주었다.

한센은 먼지 때문에 닫았던 창문을 다시 열어보았다.

그리고 보이는 모습에 감탄사를 흘렸다.

하얀 설원 위에서 검은 장벽을 세우고 있는 글리터의 모습은 압도적인 것이었다.

서쪽은 이미 공사가 끝나가는 데, 높이를 끝까지 보자니 고개가 아파졌다.

아직 건설 중인 도시는 바쁘게 사람들을 토해내고 받아들였다.

이 도시가 탄생을 마치고 제대로 작동하게 된다면, 과연 어떻게 될까?

유민들도 그렇고 한센 상단의 사람들도 깊은 인상을 받았다.

소문보다 더한 광경에, 자연스럽게 입이 벌어지는 것을 다물 수가 없었다.

그런데 이렇게 단기간 내에 급진적으로 변할 수 있었던 것에는 커다란 이유가 있었으니….

그건 드워프라는 존재도, 언데드가 되어버린 영지민도 아니었다.

“으음….”

글리터에 가까이 다가갈수록 바쁘게 움직이는 검은 점들이 확대됐다.

그리고 한센은 신음을 흘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거대한 오크들이, 침을 질질 흘리는 오크들이 검은 암석을 들고 이동하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목에 쇠사슬을 건 오크들은 줄을 이루고 한 방향으로 움직였다.

밥도 잘 먹이는지 그들의 근육은 터질 듯이 부풀었고, 눈에는 빛이 일렁이고 있었다.

오크들은 바람에 흔들리는 갈기를 가지고 천천히 걷고 있었다.

그 모습에, 한센은 속이 답답해짐을 느꼈다.

다른 이들도 그렇겠지만, 가이더와 세인의 입장을 동시에 고려하고 있는 한센으로선 절로 가슴에 돌이 얹히는 느낌이었다.

오크는 몬스터였다.

그건 세 살짜리 아이라도 아는 사실이다.

몬스터.

이게 대륙의 인간들에게 어떤 의미인가?

결코, 공존할 수 없는 증오의 근원.

무한한 적개심의 대상.

존재 자체가 구역질 나고 끔찍한 생물.

악의 피조물.

결코, 가볍게 넘길 수 있는 의미가 아니었다.

세인이 그들을 노예로 부리는 것은 엄청난 결정이었다.

제대로 문제 삼고 토론하자면 몇 달을 꼬박 새워도 모자란 일이다.

그런데 그것을 단번에 해치워 버린 것이었다.

그 나름대로 어떤 결과를 위해서 결정한 일인지는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이것이 과연 타인에게 있어, 순수하게 받아들여질 수 있을까?

“이 성이 오크들의 노동력으로 지어졌다는 것을 다른 나라들이 알면….”

한센은 심각한 표정을 이었는데, 곁에 슈나이더가 있는 것도 잊은 상태였다.

그러면서 한센이 턱을 쓰다듬었다.

‘위험하다. 이건 정말 위험하다.’

그의 머리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동시에 너무 의아하기도 했다.

그가 아는 세인이라면 누구보다 몬스터에 대해 이를 갈 사람인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오크들과 같은 공간을 사용하다니.

두 눈으로 직접 보고도 좀처럼 믿어지지 않는 사실인 것이다.

“듣자 하니 이상한 소문도 있더군요.”

“이상한 소문요?”

슈나이더가 입을 열자, 한센은 그에게 고개를 돌리지도 않고 대꾸했다.

그는 주변을 바쁘게 돌아다니는 오크들에 시선이 빼앗겨 있었다.

이렇게 보니 오크들의 몸에 채찍 자국이 가득하다.

하긴 다루기 쉬운 놈들은 아니겠지.

“저 괴물들을 보니 생각납니다. 과거 연합군의 전쟁 때. 악의 힘을 휘두르는 존재가 나타나, 그들의 움직임에 제동을 걸었다죠. 사악한 검을 든 존재요.”

한센은 헛웃음을 흘렸다.

“중앙의 몬스터들을 괴멸시킨 것에 만족하고 대군을 돌린 것입니다. 중간에 전투가 있었고 견해차가 있었으며, 결국 성국이나 바이테스가 떨어져 나갔죠. 그러니 드레퓨스도 고집을 꺾고 회군한 것이고요. 그것 때문에 드레퓨스가 두고두고 말이 많지만, 성국과 바이테스도 할 말이 있는 게…. 그 당시 북쪽의 무리한 원정은 부담이 크다고 판단했으니까요. 대륙 사람들 모두가 그렇게 알고 있지 않습니까?”

“그게 정론이지요. 저도 그렇게 생각했었습니다. 눈앞의 광경을 보기 전까지는 말이죠.”

슈나이더의 말에 한센은 침묵했다.

검은 성벽을 건설하고 있는 지대를 지나자 넓은 경작지가 보였다.

그리고 곳곳에 세워지고 있는 건물들이 보였다. 주변에는 유민들의 유입을 환영하듯, 공터에 세워져 있는 천막들도 보였다.

무엇보다 성벽이 세워지는 중앙을 기점으로, 아주 멀리 검은 산이 보였다.

이미 시간은 저녁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한센을 비롯한 사람들이 그 중앙에 도달할 때쯤에는, 땅거미가 지는 시각이 되었다.

해가 진 산 능선과 지평선에서 달려온 어둠이 모두의 머리 위에 장막을 쳤을 때.

마차에서 내린 슈나이더는 한센에게 작별을 고했다.

한센은 그의 인사를 받으면서도 그가 사라질 때까지 눈을 떼지 않았다.

결국, 슈나이더가 어둠 속으로 완전히 사라지고 나자 한숨을 내쉰다.

상단의 사람들은 물건을 내리느라 바빴고, 세리스는 상단에 돈을 지급하기 위해 사라졌다.

유민들은 글리터 사람들의 안내를 받아 여장을 풀 곳을 향해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들이 늦은 저녁을 먹으려면 아직 몇 시간이 더 걸릴 듯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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