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2
& 아버지와 딸
제이는 가이더 서쪽 지역에서 살아가는 소작농이었다.
부지런한 그는 세상이 어떻든 그 안에서 최선을 다하고, 열심히만 살면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기도 했다.
세상이 어지러우면 어지러운 대로 노력하며 살아갔다.
그리고 그것 말고 다른 것을 하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는 사람이었다.
씨를 뿌리고 보살피는 것에서 추수에 이르기까지, 매우 고달픈 과정이다.
매일매일 노력도 해야 하지만, 운도 따라줘야 추수를 할 수 있었다.
땅은 신경 써주면 그나마 솔직하게 보답을 하지만 날씨가 문제였다.
거기에서 제이는 운명이란 존재를 배웠다.
딸과 아들 하나를 둔 그는, 가장으로서 부끄럽지 않게 열심히 일했다.
때는 대중적인 소식통이 발달하지 않은 시대니까 정보를 접하는 게 너무 어려웠다.
그와 같이 평범한 일꾼이라면 더욱 말이다.
하지만 요즘 들어서는, 무딘 그라도 피부로 느껴질 만큼 주변 상황이 악화되었다.
전의 영주대신 새로 온 영주는 세금을 엄청나게 올려버렸다.
그리고 그게 다 영지민의 안전을 위해서라고 말했다.
결과적으로 말하면 영지민의 안전은 전혀 지켜지지 못했다.
마을의 경계를 넘어오는 몬스터 몇 마리 때문에 난리가 났고, 병사들은 늦장을 부리며 출동하지도 않았다.
그래, 거기까지는 그렇다 치자.
근래에 제이는 주인집이 야반도주해 버리자 상황이 엄청 심각하게 흘러가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땅을 가진 사람이 땅을 포기하고 도망을 간다?
미치지 않고서야 주인이 그럴 리가 없었다.
땅은 그 사람의 모든 것이다. 그런데 왜 그 사람은 그런 극단적인 선택을 했을까?
그런 생각이 제이를 전율케 했고 가슴 속 위기감을 불러일으켰다.
제이는 그답지 않게 낮 시간의 주점에 들러, 주정뱅이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 보았다.
“드레퓨스가 다가오고 있다더군.”
“지금 드레퓨스가 문제야? 사방이 난리도 아니라고. 재건을 위해서 돈을 내지 않으면 사람을 납치해 가는 판이야. 게다가 오렌 산적이 여기를 눈독 들였다는 이야기 못 들었어?”
“우리 영주님은 대체 뭘 하고 있는 건데?”
“오 제발. 그가 정말로 영주라는 걸 누가 알지? 그리고 누가 증명하냐고? 전대 영주님의 먼 친척? 그거 증명할 사람은 이제 아무도 없어. 입성 후 공교롭게도 하나하나 죽었거든.”
사람들은 목소리를 작게 하며, 지금의 영주에 대해서도 흉을 봤다.
가이더가 무너질 때 해외로 도피한 후레자식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종일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도 제이는 판단이 서지 않았다.
물론 그의 생활은 궁핍하고 힘들었으며, 요즘 들어 더욱 심각해지고 있었다.
이것 또한 한차례 지나갈 소나기로 생각했건만 그게 아닌가 보다.
그러나 아무리 그래도 고향을 떠나 도망간다는 건, 엄두가 나지 않는 일이다.
그리고 위험성을 짊어져야 하는 일이었다.
“트리엔은 지금 난리도 아니래.”
“피에 젖은 유민들이 마구잡이로 사냥당한다는군.”
“반란군에 치이고, 귀족 가죽을 뒤집어쓴 인간들에게 치이고.”
그들의 이야기를 뒤로하며 동전을 카운터에 던진 제이가 집을 향해 천천히 걸어왔다.
오솔길 위를 덮은 나무 그림자 아래에서, 그는 팔짱을 끼고 터벅터벅 걸었다.
그러다가 집 앞에 세워둔 수레에 누군가가 앉아 있는 것을 보았다.
흠칫 놀랐다가 자세히 보니 그의 딸인 힐다였다.
힐다는 주먹코에 못생긴 얼굴을 가진 소녀였다.
몸집도 아주 크고 체구답게 밥을 많이 먹었다.
그래서 제이의 아내에게 구박도 많이 받곤 했다.
모질다 싶을 정도로 혼내기도 해서 겉돌까 걱정도 했지만, 어린 나이에 일도 도와주는 씩씩한 아이였다.
그런데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가 잔뜩 죽어 수레 위에서 웅크리고 있었다.
그렇게 힐다는 제이가 평소 오던 방향을 바라보곤 했는데, 결국 제이는 다른 길에서 오고 말았다.
“야단맞았니?”
“아빠.”
갑자기 들려온 음성에 살짝 놀란 힐다는 곧 아버지임을 깨닫고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수레가 들썩인다.
제이는 뛰어오는 힐다를 안았다.
그리고 빛바랜 금색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달빛 아래 비친 그녀의 머리카락은, 물이 빠질 대로 빠진 잿빛 짚더미 같기도 했다.
제이는 힐다의 얼굴을 보며 의아해했다.
눈물범벅인 거로 보아 운 것 같은데 말이다.
힐다는 씩씩한 아이라서 좀처럼 울지 않는데, 무엇이 그녀를 울린 걸까?
그러나 제이는 추궁 대신 그녀의 손을 잡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그곳에는 어린 막내아들과 아내가 기다리고 있었다.
밤새 제이는 앞날에 대해 고민했다.
떠날 것인가 말 것인가?
그의 인생 최대의 난제이며 화두였다.
그러다가 마음을 정하지 못해 뒤척이고 있는데, 근처의 힐다가 잠꼬대하는 소리를 들었다.
“버리지 마세요. 아버지. 저를 버리지 마세요.”
그는 한숨을 내쉬며 일어나, 힐다의 가슴 위로 흘러내린 이불을 덮어 주었다.
그리고 다음 날 일어나 가족에게 깜짝 발표를 해버렸다.
아내는 극구 말렸지만, 이대로는 미래가 없어 보였다.
그래서 제이의 가족은 야밤에 집을 떠나 위쪽으로 움직였다.
짐을 바리바리 싸 들고 움직인 곳은 난민들의 1차 집결지였다.
거기에서 제이와 제이의 가족은 놀랐다.
공터를 엄청나게 많은 사람이 채우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리둥절해 있는 그의 앞에 한 남자가 나타났다.
“오늘 온 거요?”
“예? 예.”
“친구나 뭐 친척에게서 이야기는 들었겠지?”
“예?”
“앵무새야? 왜 예라는 말밖에 못 해? 이거 말이야 이거.”
남자는 손가락으로 동그라미를 만들어 보였다.
돈을 내라는 표시였다.
거기에서 제이는 전 재산의 반을 내놓아야만 했다.
그리고 남자와 헤어지자, 그제야 뒤늦게 덜컥 겁이 났다.
생각해보면 초면인데 뭘 믿고 돈을 줬단 말인가?
만약에 사기라면?
그는 이제 고향으로 돌아갈 수도 없는 몸이다.
눈앞이 깜깜해진 상태로 반나절이 지나갔는데, 다행히 그 남자 쪽에서 먼저 나타나 다가왔다.
그는 천들을 나눠주며 당부했다.
“이건 정말 춥고 힘든 여행이오. 그러니 마음 단단히 붙들어 매시오. 내가 말이야. 그동안 여럿을 북쪽으로 보내봤지만, 필사적인 각오가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은 확실히 다르거든. 긴장을 바짝 하고 걸으면 확실히 감기도 잘 안 걸려. 당신네는 이제 고향에 잡혀가면, 괘씸죄로 반죽음당하는 거야. 노예와 비슷한 삶을 살게 될지도 몰라. 그러니 죽을 둥 살 둥 달라붙으라고. 알겠어?”
제이는 가족들의 손을 꼭 잡으며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세인은 언젠가 유민들을 끌어 모겠다고 했다.
유민은 나라가 망하여 곤궁에 빠진 백성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가이더는 재건 중이었고, 다시 나라를 자처하고 있었다.
결국, 지금 이들에게는 난민이라는 표현이 맞았다.
어찌 되었든 제이를 포함한 많은 사람이 세인의 예상대로 북쪽으로 몰려들고 있었다.
제대로 된 장비도 없이 이어지는 행렬은 그 자체로 매우 위험했다.
그리고 무모해 보이기도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제이는 가이더에서 나온 사람들이 적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를 둘러싼 많은 사람은 다른 나라에서 북쪽으로 향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나마 가이더 같은 북부는 지금 형편이 좋은 거요. 반란군이라고 말하는 놈들이 무슨 짓을 하는지 아쇼? 그리고 귀족들은? 아니, 사실 그들이 진짜 귀족인지 귀족 행세를 하는 산적인지 아무도 모르지.”
다른 나라에서 북쪽으로 올라온 사람들은 넝마나 다름없는 것을 걸치고 있었다.
그리고 옷에는 피가 묻어 있었다.
삐쩍 마른 사람들이 대부분이었고 몬스터가 아닌 인간에게 시달린지라, 배신당한 눈빛을 품고 있었다.
“우린 그들에게서 돈을 안 받아.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 이전의 이야기거든. 그들은 이제 밑바닥까지 떨어져 내려서 자존심이고 뭐고, 인간성이고 아무것도 없는 것 같아.”
그런 남자의 말을 들으며 제이는 옆에서 걷고 있는 힐다의 손을 꽉 쥐었다.
힐다는 어린 나이라 힘에 무척 부칠 테지만 열심히 걷고 있었다.
이런 추위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얼굴에 고작 한 겹의 천이 둘려 있었다.
그게 제이의 마음을 더 안타깝게 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힐다야.”
“아빠.”
“나는 너를 버리지 않는다. 자식인 너를 왜 버리겠니? 난 너를 버리지 않는다.”
제이는 힐다를 자기 쪽으로 끌어당기며 걷고 걸었다.
고개를 푹 숙인 힐다는 그런 아버지의 몸에 자신의 손을 둘렀다.
그리고 뒤처져서 아들과 함께 걷던 제이의 아내는, 부녀간의 그런 모습을 말없이 지켜만 보고 있었다.
몬스터가 사람들을 힘겹게 할 때도, 인간들은 감히 국경을 넘어 얼어붙은 땅에 접근할 생각도 하지 못했다.
그런데 지금 그들은 마치 악마에게 쫓기는 듯 길을 재촉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악마는 불행히도 감춰두었던 모습을 드러내고야 말았다.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나자, 제이의 옆에서 걷던 남자는 황급히 제이를 끌어당겼다.
그리고 주위를 향해 외쳤다.
“엎드려!”
멀리에서 쏘아진 화살이 사람들을 향해 쏟아졌다.
죽이겠다는 뜻은 아닌지 위협에 불과했지만, 화살에 맞는 사람이 아예 없다는 뜻은 아니었다.
몇 명이 소리를 지르며 옆으로 뒹굴었고, 등에는 화살이 꽂혀 있었다.
그걸 당장 빼내는 게 오히려 더 치명상이 될 테지만, 주위의 무지한 가족들은 그걸 빼내겠다고 몰려들었다.
그때 주위를 둘러싼 하얀 언덕 위에서 함성이 일어나며 기마가 달려 나왔다.
그런 병사들의 모습을 본 사람들의 안색은 노랗게 변했다.
나라 중 재산이나 마찬가지인 백성들이다.
그런데 그들이 다른 곳으로 도피하는 것을 잠자코 눈감아줄 곳은 없었다.
그들은 당연히 추격대를 만들어서 운영했고, 용병이나 현상수배 사냥꾼들이 합세했다.
심지어 정규군 중 떨어져 나온 기사들과 귀족들도 있을 정도였다.
이미 사람들의 이탈이 범국가적 규모가 되었기 때문이다.
창피하게도 나라에 등 돌린 난민들을 잡고자 국가의 군사력이 동원된 상태이다.
곳곳에서 울리는 나팔 소리가 혼을 빼놓고, 일단의 기마들이 우르르 내려왔다.
그러자 사람들은 당연히 우왕좌왕할 수밖에 없었다.
뛰어오는 말과 그 위에 탄 사람들은, 난민들에게 있어 무섭고 충격적이었다.
게다가 그런 말들의 뒤로 수많은 병사가 언덕 위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뛰어 내려왔다.
제이는 가족들을 한데 모으며 눈을 질끈 감았다.
결국, 틀렸다.
그의 선택은 무모했으며, 그의 도피는 실패하고 말았다.
지금 습격자들에게 끌려가면 어떤 모진 꼴을 당하게 될까?
민물고기는 민물고기처럼 살아야 했는데, 고향을 떠난다는 선택이 후회막심이었다.
그 후회를 자신 혼자 감당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자신의 가족들은 어떻게 되는가?
절망의 그늘이 제이의 얼굴 위로 드리워졌다.
그때였다.
기세 좋게 난민들을 에워싸는 무리 뒤에서 다시 이변이 일어났다.
뛰어드는 말의 옆구리를 뭔가가 날아와 치받은 것이다.
전열이 무너져 내리고 말들의 발이 허공을 향할 때, 습격자들을 습격했던 자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맹수가 가장 약해질 때는 바로 먹잇감을 습격하는 그 순간이었다.
모든 집중력이 사냥감에만 향해 있고, 공격하려는 찰나가 가장 연약해진 순간이다.
그래서 세리스가 이끄는 병사들은 이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난민을 향해 기세 좋게 달려가던 각국의 병력은 옆에서 습격이 들어오자 우왕좌왕하며 지휘부를 살핀다.
그러나 난민들을 습격한 상부는 여러 나라의 집합체였고, 과거의 연합군처럼 체계가 잘 잡힌 집단이 아니었다.
이리저리 흔들리는 깃발들 사이에서 자국의 깃발을 찾기조차 쉽지 않아 보였다.
“짓밟아라. 돌격!”
세리스는 일반인들을 향해 화살을 쏘았다는 것만으로도 약간 흥분한 상태였다.
그런 그녀의 명령에 병사들은 무기를 맹렬히 휘두르며 습격자의 옆구리를 뚫었다.
삽시간에 사상자가 발생하고 흙바닥이 피에 젖었다.
언덕 위에서 깃발로 명령을 전달하고 있던 귀족들은 황당하다는 얼굴이 됐다.
그리고 아래쪽의 세리스를 보았다.
그녀는 수백 명을 이끌며, 검은 깃발을 흔드는 기수를 대동하고 있었다.
검은 깃발 속의 금색 새가 바람에 움직이는 듯한 착각이 일어날 때, 하얀 갑옷의 그녀는 그 새를 추월해 앞으로 달려나갔다.
많은 사람 중에서 유독 하얀 갑옷을 입는다는 것은, 여간해서는 하기 힘든 일이었다.
후미에서 금빛 갑옷을 입고 위엄을 뽐내는 왕은 철저한 보호를 받는다.
그런데 기사로서 하얀 갑옷을 입고 독자적인 행동을 한다는 것은, 적들에게 습격해 달라고 신호를 보내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세리스만 해결하면 그녀가 이끄는 병력의 사기가 확 죽어 버릴 테니까 말이다.
아니나 다를까.
기습에 당황하던 것도 잠시, 그녀를 잡아 상황을 역전시켜야겠다고 생각한 사내들이 달려들었다.
기합성을 내지르며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