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1
& 낯선 시대 (7)
몬스터가 엄청나게 줄어들었다는 소문은, 말 그대로였다.
병이라 치면 불치병에서 벗어나 상황이 호전된 느낌이다.
그렇다고 완쾌는 아니었다.
전처럼 자주 위협에 시달리는 것은 아니지만, 위험이 완전히 근절되었다고 보긴 어려웠다.
백성들은 여전히 몬스터에 노출되어 있었다.
귀족이 의무를 다하려면 몬스터들을 소탕해야 하는데, 문제는 병력이 전과 같지 않다는 사실이다.
국외로 도피할 때 당연히 기사들도 동행했다.
그러나 그 많은 수의 병사들은 함께할 수 없었다.
그들의 입도 입이기에 많은 식량을 필요로 했지만, 위기상황에 병력을 빼돌린다는 것은 역적이나 마찬가지였다.
결국, 지금 가이더의 귀족들은 그 힘이 약했다.
권위나 명분, 존경. 병력 등등이 예전만 못했다.
그들은 백성들을 단결시킬 책임이 있었지만, 난항을 겪는 게 이상한 일은 아니다.
그래도 가이더 같은 북부 나라들은 그나마 상황이 나은 편이었다.
남부에 가까운 중부는, 드레퓨스 라는 광풍에 시달리고 있었으니까.
“한센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나?”
거대한 원탁에서 중구난방으로 떠들고 있는 귀족들을 바라보던 한 남자가 헛웃음을 흘리다가 옆에 앉아 있는 한센에게 물었다. 그러자 한센은 공손하게 대답했다.
“저 같은 장사치가 뭘 알겠습니까? 귀족들의 일에 감히 끼어들 수도 없는 일이지요.”
“장사치? 누가 자네를 일개 장사치로 보겠나? 자네가 가이더의 재건을 위해 얼마나 힘썼는지 다 아는 마당인데? 이렇게 의뭉을 떨어서야 원.”
남자는 혀를 찼고 한센은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그들이 이러는 와중에도, 귀족들은 근래에 해왔던 일을 오늘도 계속하고 있다.
그것은 서로 다투는 일이었다.
다툼을 일소하고 현명하게 일 처리 할 수 있는 자가 필요한 때.
책임감 있는 자들은 대부분 죽은 지 오래였다.
* * *
성이란 무엇인가?
말 그대로 가장 든든한 요새였다.
몬스터도 그렇고 외부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한 최종 완성형이 바로 성이었다.
이 시대에는 이 성이라는 것이 가지는 의미가 결코 가벼울 수가 없었다.
제대로 지어진 성이 있는 영주와 허름한 요새를 가지고 있는 영주, 그들의 발언은 무게감부터가 달랐다.
요새를 빼앗긴다는 것은 가문 대대로 이어지는 수치였고, 수성은 논공행상에서 빠질 수 없는 공이었다.
인간이 만든 최고의 방패는 바로 성이었다.
적의 공격이 이어지면 성은 오랜 시간 생존을 약속해 준다.
공성전이란 게 며칠 만에 뚝딱 진지를 점령하는 경우가 극히 드물었다.
길면 몇 년까지도 내다봐야 하는 공성전이다.
그렇게나마 시간을 끌어 준다는 것만으로도, 아군에게 힘이 된다.
뿐만인가?
전서구가 가장 안전하게 쉬어가는 거점이 되며, 전쟁에 필수로 이어져야만 하는 보급선을 끊는 역할도 했다.
적들이 쉽게 성을 등지고 전진할 수 없는 주된 이유다.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이 누리는 정신적인 안정도 무시할 수가 없고 말이다.
세인은 세계수 지역으로 들어가고픈 생각이 없었다.
그리고 성이 필요했다.
하지만 전에도 말했듯이 성이란 게 원한다고 뚝딱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를 따르는 존재들이 전보다 엄청나게 강해졌다고 하지만, 성을 짓는 것은 정말 다른 문제였다.
더구나 그는 수직적으로 높고 공간적으로 좁은 성을 계획하는 것도 아니었다.
양옆으로 길게 늘어진 성벽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 그의 계획을 위해서는 수많은 인간이 노동에 시달려야만 할 것이었다.
군주는 최고의 자리에 앉은 자이다.
하지만 결코 그게 행복하다는 보장은 아니었다.
공동체의 주인이 되는 만큼 결정이란 선택도 그가 내려야 하는 숙명이었다.
군주로서 선제 되어야 할 건 너무 많지만, 무엇 하나 중요하지 않은 것은 없었다.
그중 꼭 있어야 하는 것은 바로 결단력이다.
필요할 때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지도자만큼 최악은 없었다.
그 결정이 지금까지 지탱해 왔던 그 개인의 이념과 반대된다 해도, 상황이 호락호락하지 않다면 판단하고 움직여야만 한다.
차라리 잘못된 결정이라 해도.
결정을 하고 실행에 옮길 수 있는 게,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는 훨씬 나았다.
그래서 세인도 그렇게 움직였다.
자신의 자리에 앉아 판단을 하고 실행하게 했던 것이다.
글리터의 생활 수준은 날이 갈수록 좋아졌다.
사람들이 느끼기에 큰 전환점은 화룡석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두 번째로 큰 변환점을 코앞에 남겨두고 있었다.
오늘 그것을 모두 깨달았다.
글리터 한쪽에는 크게 지어진 건물이 있었다.
많은 사람을 수용할 수 있는 크기였지만, 화려하지는 않은 신전이었다.
평소 그곳에 사람들이 많이 몰렸고 기도를 드렸다.
그리고 그들은 믿음을 재확인하고 돌아갔다.
신부는 일꾼을 두지 않고 이 넓은 곳을 혼자서 청소했다.
봉사자들이 와서 도와주는 날이 아니면 바닥만 닦기 일쑤였다.
그래도 괜찮았던 이유는, 설교 시간이 길지 않기 때문이다.
하루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글을 가르칠까 고민했는데, 아스칼리온과 의논해본 결과 그들이 택한 방법은 바로 필사였다.
신전에는 종교와 관련된 책이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베끼는데 전제돼야 할 것은, 펜과 잉크 그리고 종이였다.
뭐 하나 만만한 게 없다.
세인은 물론 그것을 허락했다.
이런 물질적인 지원을 허락하기도 쉽지 않은 일이었지만, 종교 서적을 필사하게 해준다는 것은 보통의 영주가 쉽게 허가하기 힘든 일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종교 서적에는 수많은 철학가의 이론과 사상이 묻어나 있기 때문이다.
왕정 정치 아래에서 내기 힘든 이론과 생각도 종교의 우산을 빌리면 발행할 수 있었다.
그중에서는 독특하다 못해, 작금의 세상을 지배하는 논리가 위협받을 사상도 있었다.
철학가들 자신은 탐구적 진리라고 표현했지만, 기존의 지배층이 보면 괘씸하기 이를 데 없는 짓이었다.
하지만 세인은 허무할 정도로, 너무나도 쉽게 허락해 주었다.
신부와 아스칼리온은 노동으로 지친 사람들에게 귀 아픈 설교를 하지 않았다.
설교가 꼭 들어가야 한다면 우화 정도로 마무리했다.
그리고 원하는 시간만큼 신전에 앉아 필사하도록 도와주었다.
기본적인 글자에 대한 설명은 아침마다 되풀이된다.
그다음은 정갈한 분위기 속에서, 이따금 잡담도 해가면서 글을 옮겨 적었다.
당장은 꼬물꼬물하게 적히는 글이라도… 수천 번, 수만 번이 계속되면 익숙해지기 마련이었다.
필사는 사람의 마음을 정리하는 데 탁월한 효과를 보이기도 했다.
계속 글을 옮겨 적다 보면, 집중이 일어나고 어느덧 마음이 안정된다.
바닥을 닦아낸 신부는 대걸레를 양동이에 넣었다.
그리고 책을 한 권 두 권씩 정리하기 시작하는데 아스칼리온이 다가왔다.
평소라면 책 정리하는 것을 도와줬을 노인이 그저 한숨만 쉬며 의자에 앉았다.
나무 의자가 그런 아스칼리온의 체중을 받아 삐걱거리는 소리를 냈다.
“무슨 걱정이 있으십니까?”
신부의 말에 아스칼리온은 쓰디쓴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밖에 안 나가봤는가?”
신부는 그 말에 조용히 귀를 기울였다.
그러고 보니 바깥이 시끄러워진 것도 같았다.
아스칼리온은 거친 손바닥으로 얼굴을 쓰다듬었다.
주름이 가득한 그의 얼굴은 언뜻 원숭이를 연상케도 했다.
“나무 지역에 갔던 사람들이 대다수 돌아왔다네.”
“그거…. 이쪽에서는 좋은 일이로군요. 영주님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말입니다. 반가운 얼굴들과 함께하게 되었으니까요.”
아스칼리온은 다시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밖으로 나가려는 신부의 옷자락을 잡아끌었다.
“일단 기도나 하세. 그게 가장 필요할 것 같아. 전이라면 난 모욕을 받은 듯이 부들부들 떨었겠지만, 이젠 아니군. 그러니 기도하세. 영주님과 우리 모두를 위해. 그게 가장 필요한 것 같아.”
신부는 영문을 몰라 아스칼리온을 내려다보았다.
하지만 나무 의자 위에 앉은 노인은 두 손을 붙이고 눈을 꼭 감은 채였다.
그리고 기도를 시작했다.
그 경건한 분위기에 이끌려 결국 신부도 기도를 하고야 만다.
대체 밖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걸까?
* * *
“이런 바보 같은….”
세인은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런 그의 앞쪽 아래에는 마차의 문이 열려 있었고, 맥의 손을 잡은 마플이 내리고 있었다.
세인의 얼굴이 굳자 주위 사람들은 말을 아낀 채 몸가짐을 조심스럽게 했다.
땅에 발을 디딘 마플은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위쪽의 세인을 발견했는지 웃어 보였다.
그리고 맥과 함께 다가왔다.
“내가 왜 세계수 쪽으로 보냈는지 몰라?”
할 말을 고르던 세인은 결국 앓는 소리를 내며 그렇게 말했다.
그 말에 먼저 대답을 한 것은 마플이 아니라 옆의 맥이었다.
“그곳은 점점 풍요롭게 변하고 있습니다. 눈부신 발전을 하고 있더군요. 모든 게 만족스러웠습니다. 하지만 저희가 있을 곳은 아닌 것 같았습니다.”
세인은 애꿎은 맥을 노려보았다.
그러나 맥은 꿋꿋이 자기 할 말만을 했다.
“저는 한때 땅에 매여있던 기사였습니다. 하지만 현재는 세인님에게 충성을 맹세한 지 오래입니다. 충성의 대상과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은 기사의 본분이 아닙니다.”
“나는 당신에게 암묵적인 임무를 준 것이나 마찬가지야. 마플의 곁을 지키라고 말이야. 게다가 당신들은 편안해질 권리가 있어. 그래서 여기의 사람들도 점진적으론 그쪽 지역으로 보내려 했단 말이다.”
빈자리는 앞으로 유민들이 채우면 된다.
하지만 마플은 고개를 흔들었다.
맥은 말을 계속했고 말이다.
“코다로님도, 비비안님도 좋은 분들이고 이웃들도 좋은 사람들이었어요. 그래도 저에게는 세인님과 그 밑의 사람들이 가족이라는 느낌이 듭니다. 왜냐면 죽음과 고난을 같이 했으니까요. 그리고 저희에게 누가 모든 걸 바쳐 희생할 수 있는지를 보았습니다. 또한, 아무리 불안한 환경이라 해도, 가족 곁에서 있고 싶은 게 인간의 마음입니다. 영주님. 영주님도 그렇지만, 겉모습은 바뀌었을망정 저 또한 인간입니다.”
그리고 맥은 세인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마지막 말을 덧붙이며 말이다.
“인간으로 남을 수 있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
세인은 처음으로 말문이 막히는 것을 느꼈다.
그러다가 눈을 돌려 마플을 보았는데, 그녀는 웃어 보이며 이렇게 말한다.
“영주님이 있는 집이 곧 제 집이잖아요. 그래서 집에 돌아왔어요. 저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도 그럴 거예요. 그뿐이에요.”
세인은 졌다는 듯이 두 손을 들어 올려 보였다.
그렇게 일단락되는 듯했다.
세인 앞에는, 그의 품으로 되돌아온 아레이즈 출신 영지민이 가득 모여 있었다.
그런데 그뿐만이 아니다.
거기에서 그쳤다면 아스칼리온과 신부가 하늘을 향해 기도드릴 일도 없었을 것이었다.
모여 있는 군중들 뒤로, 커다란 몸집을 가진 집단이 보였다.
그들은 세계수 지역에서부터 여기까지 걸어왔다.
튼튼하고 강한 생물로, 인간 대신 성을 짓기에 모자람이 없는 생물이었다.
한때 죽임을 당할뻔한 이 포로들은, 과거 비비안의 선택으로 인해 살아남았다.
그리고 드워프들에게 갖은 모욕과 고통을 당하다가 글리터로 오게 된 것이다.
비비안과 코다로는 물론 세인이 편지로 보낸 요청에 수락했다.
세인은 인간들의 뒤로 구름처럼 모여 있는 오크들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오랜 여행으로 인해 좀 지친 기색이 있었지만, 그래도 야성적인 힘은 잃지 않은 듯 눈이 번들거렸다.
목과 손에는 쇠사슬이 감겨 있었는데,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숫자가 많았다.
‘성을 짓는 대공사에는 오크들이 투입된다.’
결코 쉽지 않은 결정이었지만 세인이 최근에 내린 결론이었다.
그때 밑에서 누군가가 달려 나온다.
작은 몸집의 드워프로 울프크릭이란 이름을 가진 사나이였다.
“이봐. 오래간만이야. 광산 문제로 우리를 불렀다고?”
인간과 오크들 중앙에 서 있던 드워프들은 옆으로 빠져나오며 짐들을 내려놓았다.
곡괭이와 온갖 도구들이 땅바닥에 부딪혀 시끄러운 소리를 냈다.
그게 거슬리는지 검지로 귀를 막은 크릭은 다시 말했다.
“그래서, 우리가 챙길 지분은 얼마나 되는데?”
“….”
그러니까 지금 울프크릭은 세인을 향해 귀를 막고 물어보고 있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