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0
& 낯선 시대 (4)
시간이 흘러 글리터는 어느 정도 자생력을 갖추었다.
추수가 반복될수록 사람들은 안정감을 느꼈는데, 식량 창고가 가득 차기 때문이다.
눈치를 보며 술을 빚지 못하던 사람들도, 이젠 술을 빚기 시작했다.
여유와 즐거움이 사람들의 주변에 침투했다.
따끈따끈하고 고소한 냄새를 풍겨낸 빵집이 골목 구석구석에 들어섰다.
대장간과 가죽을 다루는 곳도 늘어났다.
이 년 전에 심었던 나무들은 점점 자라나 가로수가 되었다.
세인은 광산 터를 알아보면서, 시험적으로 가져온 돌들을 한구석에 쌓아놓게 했다.
그리고 정해진 터에 가져가도록 했다.
그래서 돌로 만들어진 집들이 조금씩 늘어나는 추세였다.
“나는 언제 집이 생기려나.”
세인은 여전히 천막 안에 앉아 문서를 뒤적이다가 중얼거렸다.
그는 검은 의자에 앉아 있었는데, 전보다 약간 자란 상태였다.
이제는 제법 청년티가 얼굴에서 난다.
옆에 서 있던 더이스는 어깨를 으쓱이곤, 일어나서 걷는 세인의 뒤를 따랐다.
천막의 입구를 젖히며 밖으로 나가자 눈 부신 햇살이 쏟아졌다.
그리고 그것을 맞으며 서 있던 무리가 눈에 들어왔다.
그들은 무장한 병력이었는데, 갑옷이 햇빛에 반사되어 번쩍이고 있었다.
가장 앞에는 하얀 망토를 두른 세리스가 보였다.
그녀도 이제는 처녀티가 역력히 난다.
나무로 만든 단에 올라선 세인은 전방을 가득 채운 병사들을 한차례 훑어본다.
그 눈길은 세리스 앞에서 멎었다.
“야전 사령관 자격으로, 이 병사를 너에게 맡긴다. 앞으로 나와라.”
세리스가 걸어 나오자, 세인은 허리에 있던 오버 더 데스를 꺼내 그녀에게 넘겨주었다.
그것을 받아들면서 세리스는 약간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녀가 마검을 든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마검은 주인에게만 순응하며 힘을 발휘하니까 말이다.
그러므로 지금의 행동은 다분히 의식적인 것이다.
그래도 그 행동에는 큰 의미가 담겨있었다.
이 정도의 권력을 그녀에게 위임하였으니, 밑의 잡음은 절대 용서치 않겠다는 표시였다.
“세계수 지역까지의 정리는, 차후 글리터의 미래가 달린 문제다. 지금 네가 이곳에서 출발해서 하는 모든 행동이, 앞으로 이어질 야전 정규군의 선행이 된다. 잔인하고 모질게 대함에 있어 망설이지 말아라. 인간이 아니라면 거침없이 무기를 휘둘러라. 이게 너에게 전해주는 유일한 충고다.”
“명심하겠습니다.”
세리스는 이제 400명의 전투 인원을 이끌고 위쪽을 정리하게 된다.
이년이라는 시간 동안 무리를 이루고, 북의 허리띠 곳곳에 자리 잡은 몬스터를 소탕하는 작전이었다.
일단 세계수 지역을 훑고 성공적으로 귀환하면, 이 작전은 주기적으로 실행될 것이다.
그리고 주변 치안 확보에 대한 선행 예시가 될 것이다.
기병까지 포함해 무장병력 400명이 주위를 돌아다닌다는 것은, 근방에서 누구도 무시할 수 없는 강력한 힘이었다.
게다가 보급에 관련된 병사까지 합치면 어림잡아 육백 명이었다.
한창 재건 중인 가이더나 다른 나라들은 결코 세리스의 위치와 존재를 무시할 수 없었다.
물론 아래쪽으로 내려가는 것은 아니니 마찰이 일어날 가능성은 적었다.
오늘날을 위해 그동안 대장장이들이 흘린 땀이 적지 않았다.
글리터의 사람들은 모두 몰려나왔다.
그리고 중앙 대로를 관통하는 세리스와 병사들의 모습을 구경했다.
그들의 갑옷은 햇빛 아래 번쩍번쩍 빛났으며, 위로 세워 든 창들은 예리한 날을 자랑했다.
검은 깃발은 가장 위에서 펄럭였고 말이다.
눈부신 금빛 머리를 한 세리스가 선두에서 말을 몰고 나가자, 관중들은 손으로 입을 가리며 숨을 들이켰다.
그동안 흐른 시간은 길면 길다고도 할 수 있고, 짧다면 찰나라고 느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 기간 세리스는 비정상적으로 강해져 있었다.
자기의 길을 정한 그녀의 마음에 내재한 힘이 반응한 것이지만, 적어도 남이 보기엔 그랬다.
게다가 그녀의 미모는 물이 올라, 마치 여신과도 같은 착각을 가져다주었다.
그런 그녀가 선두에서 움직이니 사기가 오를 수밖에 없다.
게다가 세인이 마검을 임시로 맡기며 권력까지 밀어주니, 등에 날개를 단 셈이었다.
“상대가 충분히 믿을 만한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믿어야 하므로 믿는다. 거기에 대해서 망설이지 않는다. 망설일 것이었으면 애초에 믿음을 주지도 않았다.”
세인은 그런 말로, 아비게일이나 세리스에 대한 행동을 자신에게 설명하곤 했다.
그 혼잣말은, 타인이 있는 곳에서는 나오지 않을 말이었다.
전쟁터에서 전쟁을 지연시킨 그녀는, 적과 아군을 떠나 강렬한 인상을 주었다.
게다가 그녀는 아름다웠고 모두가 느끼는 것보다 훨씬 강했다.
세상에서 최고의 바보는, 이런 패를 쥐고도 의심 때문에 제대로 쓰지 않는 자일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그로부터 한 달 후 세인은 세리스의 전과를 받아볼 수 있었다.
고개를 끄덕인 그는 그녀가 순조롭게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글리터의 발전에 더욱 집중할 수 있었다.
수레들은 글리터 근처를 오가며 화룡석을 안으로 옮겼다.
그것은 균일하게 가공되어 길바닥에 깔렸다.
종종 잘게 빻아져 모래와 함께 섞이고 공터에 뿌려지기도 했다.
한꺼번에 모든 작업을 하기엔 너무 힘든 일이지만, 시간을 나누어서 천천히 하니 무리가 될 건 없었다.
아비게일은 이 화룡석을 최우선으로 연구했고, 종류를 세밀하게 가려내는 것에 성공했다.
그리고 그중 대다수가 인체에 무해하다는 실험도 반복했다.
그렇게 안정성이 입증된 후에, 드디어 화룡석은 사람들이 사는 집 내부에도 들어가기 시작했다.
보온재와 발열재의 차이는 어마어마했다.
튼튼하게 잘만 깔아주고, 벽으로 세우면 바깥 날씨를 완전히 잊을 만큼 훈훈한 공간을 만들 수 있었다.
화룡석을 각 가정에서 사용할 수 있던 것이, 바로 글리터의 큰 전환점이었다.
집에서나마 따뜻한 온기를 지킬 수 있다는 건 사람들에게 엄청난 힘을 주었다. 세인은 화룡석을 돈 받고 파는 게 아니라 복지 수준으로 풀었다.
“그들이 화룡석을 캐고 운반한 것으로 획득에 대한 정당한 권리를 얻은 거야.”
밤에 감기에 걸리거나, 동상에 걸릴까 두려워 불씨를 관리하다 보면 보통은 푹 잘 수가 없었다. 그런 사람들이, 이제는 깊게 잠들지 못하던 고통에서 해방이 되었다.
집뿐만 아니라 도로 및 담벼락에도 돌이 깔리기 시작하자, 글리터 주변의 온도가 놀랄 정도로 올라갔다.
다음으로 세인이 눈을 돌린 곳은, 바로 ‘레드 블레이크’였다.
행크와 더이스를 대동한 세인은, 레드 블레이크를 향해 움직였다.
아비게일과 낚시를 했던 곳에서 삼 일정도 떨어진 곳이, 바로 레드 블레이크였다.
그곳의 땅바닥은 마치 붉은 얼음이 얼어붙은 것처럼 반들반들했다.
어찌나 매끄러운지 사람의 모습이 비칠 정도였다.
“이게 뭡니까?”
“숯이야.”
세인의 대답에 더이스와 행크는 물론, 뒤의 병사들까지 주위를 둘러보았다.
붉은 지대가 지평선까지 펼쳐져 있었다.
이게 다 숯이라고?
“붉은색만이 전부는 아니야. 지표면에 가까운 색이 붉은색이고, 깊게 파보면 여러 색깔이 있어. 그 색에 따라 단계를 나누는데, 어떤 건 석 달 내내 뜨겁게 타오르고도 꺼지지 않지. 일단 불만 붙이면 말이야. 이 모든 게 다 고대에 벌어진 대전쟁의 흔적이야.”
“세계수가 나오는 그 전쟁요? 여왕이 나오는 고대 전쟁.”
세인은 발로 바닥을 두들겨 보았다.
“대체 과거에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일까요? 그러고 보니 화룡석이 매장되어 있는 지역과 이곳은 너무 가깝네요. 대화재라도 있었던 걸까요?”
더이스의 말에 세인이 대답했다.
“나야 그 시대를 안 살아 봐서 모르지.”
“….”
행크는 더이스와 세인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그런데 이 딱딱한 것들을 어떻게 나눠서 글리터까지 운반하죠? 이건 일반인들이 채집할만한 경도가 아닌 거 같은데요.”
창대 끝으로 바닥을 두들겨 보니 여간 단단한 게 아니었다.
일단 글리터로 운반하면, 장작과 비교도 안 되는 화력과 지구력을 보여줄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서 조각내는 것도 문제고, 운반하기도 쉽지 않을 듯했다.
이건 몬스터들의 위협이 없어도 어려워 보인다.
그러자 세인은 고개를 들고 하늘 저편을 바라보았다.
그가 응시하는 방향은 세계수 쪽이다.
“우리에겐 절친한 드워프들이 있잖아. 친분은 이럴 때 쓰라고 만들어 놓는 것이지.”
“….”
드워프들과 평소 그렇게나 친했던가?
* * *
세인은 세계수 쪽으로 전서를 보내도록 조치했다.
그 편지는 코다로와 비비안을 통하게끔 되어 있었고, 여러 내용이 쓰여 있는 편지였다.
마플의 근황에 대해서 묻는 말도 들어가 있다.
비비안은 마침 출타 중이었으므로, 먼저 코다로가 반가운 마음으로 세인의 편지를 받아 보았다.
여러 장으로 되어있던 편지를 그는 흥미로운 얼굴로 읽어 내려갔다.
그것을 통해 지금의 세인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기꺼운 마음으로 글을 읽어 내려가던 그는 잠시 멈칫했다.
그리고 평소의 코다로 답지 않게, 난처한 미소를 지었다.
“이것 참, 이분은 여전하군…. 하지만 이번에는 너무 어려운 결정을 내린 거 같네.”
혼잣말 다음은 자신의 흔들의자에 앉아, 사색에 잠기는 코다로였다.
그만큼이나 편지에 쓰여 있는 세인의 글은, 그에게 생각할 것을 많이 남겨주었다.
“하긴 지도자는 끊임없이 결정해야만 하는 자리지. 장소가 장소다 보니까, 그런 게 더 부각될 뿐. 그로서는 선택해야만 했을 거야.”
그렇게 중얼거리면서도 코다로는 피식피식 웃음 지었다.
비비안이 이 편지를 보고 나서 어떤 표정을 지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코다로가 있는 방의 창밖 풍경은, 바로 발전에 발전을 거듭하는 번우드였다.
단기간 내에 사람들은 평화를 되찾고 웃음 짓고 있는 중이다.
드워프와 다크 엘프 그리고 인간들이 어울린 이곳은, 은혜로운 환경과 시너지를 일으켜 눈부시게 발전 중이다.
그 뜨거운 바람이 창가를 통해 날아와 중얼거리는 코다로의 머리카락을 매만져 준다.
“그분도 이곳을 누릴 자격이 있는데.”
그런 그의 음성에는 안타까움이 묻어나 있었다.
시간이 지나 코다로가 있는 곳으로 돌아온 비비안은 세인의 편지를 천천히 읽었다.
그리고 잠시 생각하는 시간을 가졌다.
그 생각이 끝났을 때 코다로는 물었다.
“어떻게 할 겁니까?”
“코다로 님은요?”
“아시지 않습니까?”
비비안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말을 이어나갔다.
“그렇다면 제 생각도 아시잖아요. 적어도 세인님이 뭔가 필요할 때, 저는 그걸 도와주는 데 있어서 주저하고 싶진 않거든요.”
“고민하다 보면 한없이 늘어질 수 있는 문제입니다. 오늘 밤 생각이 많겠지만, 되도록 잊는 게 좋을 거예요. 이건 저에게도 해당하는 이야기입니다.”
비비안은 코다로의 충고에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 * *
대륙 남부는 엉덩이를 무겁게 하고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그리고 작은 나라들만이 드레퓨스에 호응했다.
야금야금 아래쪽에서 위쪽을 먹어치우기 시작했다.
전처럼 빠른 이동으로 훑고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본격적인 정복 전쟁이었다.
아니 이것을 전쟁이라고 불러야 할지조차 의문이다.
힘에서 너무 차이가 크게 나니까.
이런 행동에 불만을 가진 사람들은 당연히 많았다.
고생하는 것은 드레퓨스의 외교관들이었다.
그들은 언제나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고 있다며 상부에 호소했다.
하지만 오래 앓다가 병석에서 일어난 바이칼은, 땅따먹기에 완전히 정신이 팔렸었다.
드레퓨스가 일으킨 바람은 중앙을 통과하려면 아직도 멀었다.
북부 쪽에서 바라보면 한참이나 먼 이야기였다.
그렇다고 위기감을 느끼지 않는다는 이야긴 아니었다.
“밑에서 드레퓨스가 올라오고 있어요. 그가 훗날 여기에 도달해 가이더의 주인을 만나겠다고 하면, 우린 뭐라고 대답해야 합니까? 테이블에 앉아야 할 사람은 야만족들의 품에 있다고 말해야 할까요?”
“말이 지나치오!”
가이더 재건을 위해 뿔뿔이 흩어졌던 백성들과 귀족들이 모였다.
귀족들은 반쯤 잿더미가 된 수도에 모여 연일 회의를 열었다.
그들이 싸워 이겨내야 하는 것은 아주 많았다.
그중 하나는 바로 미래에 대한 불안이었다.
“그분 나이를 생각해 보시오. 그분을 데려오면 누가 섭정 자리에 앉지?”
“그분을 모셔 오는 게 불가능하다면, 어차피 누군가는 대리해서 가이더를 수습해야 해요.”
“오. 그게 아무쪼록 국가 재난 시에 해외로 도피했던 당신 가문이 아니었으면 좋겠군.”
비방이 이어지고 얼굴을 붉힌 귀족들은 씩씩거렸다.
사실 그들이 거느린 사병이 무서워서 백성들도 마지못해 따르는 척하는 것이다.
자신들을 버리고 도피한 귀족들을 반길 가이더의 백성들은 아니었다.
하나로 뭉치지 못하는 그런 단합력은 결국, 가이더를 사방에서 삐걱 거리게 만들었다.
어떤 방안을 밑으로 하달해도, 제대로 시행되지 못했다.
생각해 보면 정말로 충성스러운 귀족들은 진작에 죽었다.
그건 귀족의 의무를 훌륭하게 다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외국으로 도피한 파렴치한 귀족들이 다시 돌아와 이래라저래라 하니, 반란군이 생기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