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은 왕 마검의 주인-109화 (109/307)

# 109

& 낯선 시대 (5)

결과적으로 질리언은 가위를 냈고, 잭은 보를 냈다.

그렇게 잭이 졌다.

잭은 질리언 앞에서 자신의 패배를 깨끗하게 인정했다.

그는 두 손을 들어 보인 후 짐을 싸기 시작한다.

물론 자신의 짐이 아니라 질리언이 달아날 때 쓸 짐이었다.

얼음처럼 굳어져 있던 질리언은 손을 내민 상태로 한동안 아무 말도 못 했다.

그 앞에서 천연덕스럽게 짐을 정리하던 잭은, 용감하기보다는 무뎌 보였다.

다가올 자기 죽음 앞에서 저런 반응을 보인다는 게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질 않았다.

“형.”

“준비해라, 질리언. 결론이 난 이상 꾸물댈 시간이 없다. 혹시나 하고 전서구를 기다려 보았지만, 새는 오지 않는다. 시간이 아깝게 흘러 버렸어.”

“형. 우리 둘 다 도망가는 방법도 있어.”

그러자 잭은 드물게도 질리언에게 정색을 했다.

“이 상황은 장난이 아니야. 어떤 경우에도 한 사람은 남아야 하는 거야. 나는 그걸 알고도 지원했어. 너도 마찬가지고. 그렇다면 남자답게 지금 상황을 받아들여야 하는 거야.”

질리언은 개죽음이라고 말하고 싶었다.

책임감. 그리고 군법이고 나발이고를 떠나, 남는다는 건 미친 짓이었다.

그것을 피력하려 할 때 잭이 부드럽게 말했다.

“알아 질리언. 남을 믿는다는 건 힘들어. 때론 남에게 보내는 신용이 너무나 바보같이 느껴져. 어쩌면 힘든 세상이니까, 더욱 남을 믿기 힘든 것일는지도 몰라. 네 과거를 보면 더욱 그렇겠지.”

“….”

“하지만 질리언. 남을 믿어야 한다. 그건 남을 위해서가 아니야. 너 자신을 위해서야. 인간은 남을 믿도록 설계되어 있어. 신이라는 대장장이는 인간을 만들었을 때, 처음부터 마음의 벽을 만들진 않았거든 그게 바로 내가 신을 존경하는 이유야. 인간은 인간 본연대로 살 때 가장 편해.”

“….”

“형으로서 마지막 충고다. 내 충고대로 굴어도, 넌 너를 실망하게 한 사람들 사이에서 수없이 좌절할지도 몰라. 하지만 결국 네 손을 잡아주는 한 사람이 나타난다면, 그때 넌 비로소 모든 걸 보상받은 느낌이 들게 될 거야.”

이 순간 잭은 질리언에게 충고할 자격이 있었다.

정말로 그러했다.

잭은 질리언의 등을 떠밀었다.

한시도 망설이지 않고 떠나라고 말이다.

질리언은 떠나면서도 몇 번이나 뒤를 돌아보았지만, 잭은 손을 흔들어줄 여력이 없었다.

사투가 남았기 때문이다.

그는 감시탑 안에 홀로 남겨졌다.

질리언은 가버렸고 남겨진 잭은 오지 않는 새를 기다렸다.

새가 아무리 기적적으로 빨라도, 그의 죽음보다 앞설 수는 없었다.

설령 새가 온다 해도 뭔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었다.

그냥 습관적으로 새를 기다릴 뿐이다.

그 새가 가져다주는 소식이, 같은 인간끼리 마지막으로 주고받는 감응일 것이었다.

막막한 공간 안에서 그런 것을 기대해 보는 것은, 인간의 비이성적인 본능이었다.

검과 화살.

그리고 창을 손질한 잭은 신에게 마지막 소원을 빌었다.

“잠들었을 때 습격받아 허무하게 죽고 싶지 않아요. 당당히 맞서 싸우게 해주십시오.”

그런 그의 소원은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말았다.

아무리 소원을 빌어봐야, 죽음과 신은 인간의 사정을 헤아려 주지 않는다.

편애하는 법도 없었다.

하지만 같은 인간은 달랐다.

잭은 감시탑 위에서 손을 이마 위에 올리고, 전방에 나타난 것을 바라보았다.

얼어붙은 허허벌판 위에서 움직이던 점은 걸어오는 인간이 되었다.

그 인간의 형체를 보며 잭은 눈을 깜박였다.

다시 나타난 것은 질리언이었다.

그는 두건을 뒤로 넘기며 위를 향해 자신의 얼굴을 보여 주었다.

그가 떠난 뒤로 단단히 봉쇄된 문을 열어줄 잭의 도움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질리언?”

“나야, 형. 다시 돌아왔어.”

“미쳤어? 여길 왜?”

그러자 밑에서 다시 나타난 질리언이 하얗게 웃었다.

“함께 끝까지 싸우자. 아무리 생각해도 형을 버릴 수는 없었어.”

“이 바보 같은 녀석.”

잭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외쳤다.

“이 멍청아! 가위바위보에서 네가 이겼잖아! 그러면 달아났어야지! 되돌아오면 어떻게 해? 이래 봤자 같이 개죽음이야!”

그러자 질리언이 웃는 얼굴로 대답했다.

“승패는 중요하지 않아. 형이 이겼어도, 형도 똑같이 했을 거야.”

그러자 잭이 같이 웃으며 대답했다.

“그건 아니야, 이 괴물아.”

그리고 민첩하게 움직여 아래쪽으로 활을 쏘았다.

하지만 질리언은 그보다 훨씬 빨랐다.

놀라운 속도로 화살을 피해낸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위를 올려다보았다.

그 순간 그의 목소리에는 의문만이 가득했다.

“어떻게 알았지?”

잭은 다시 피식 웃었다.

그리고 화살을 쟀다.

“그건 중요한 게 아니야. 한 가지만 물어보자. 질리언은 어떻게 되었지?”

그러자 질리언 행색을 하고 있던 괴물은 거짓말을 했다.

“내가 먹어 치웠다.”

잭은 동요 없이 화살을 날렸다.

비록 질문을 던졌지만, 괴물의 말을 액면 그대로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화살을 연속으로 피해내는 괴물은 밑에서 소리쳤다.

“이봐. 이래 봐야 소용없어. 넌 어차피 내게 먹힐 거야. 난 벽을 타고 오를 수도 있어.”

잭은 한 치의 흔들림 없이 대꾸했다.

“하지만 내가 직접 문을 열어주는 것보단 느리겠지?”

괴물은 이를 갈았다.

그의 계획은 아주 간단했다.

탑에 상처를 내지 않고 위로 올라가 잭을 먹어치우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의 행세를 하며, 탑으로 오는 인간들을 하나하나 먹어치우는 것이다.

그런데 잭이 눈치를 채는 바람에 계획이 틀어져 버렸다.

‘대체 어떻게 눈치챘지?’

하지만 지금 그건 중요한 게 아니었다.

괴물은 잠시 고민에 빠졌다.

본체를 드러내서 탑에 올라가 잭을 먹어치우는 것은 힘들지 않았다.

다만, 변신하고 있는 그의 정체를 들켰으니.

저놈이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르는 게 변수였다.

자신이 탑에 생채기를 내려 하지 않아도, 저쪽에서 불태우는 방법도 있을지 몰랐다.

그 와중에도 잭은 계속 화살을 날렸고, 괴물은 결심했다.

‘당장 저놈을 먹어치우자.’

질리언의 몸이 기괴하게 비틀리고, 얼굴이 오른쪽 어깨로 이동했다.

흉측하게 부푼 육체는 뿔들이 돋아나 있었는데, 커다란 손바닥에도 가시 같은 뿔이 여러 개 보였다.

그 손바닥으로 탑을 찍은 괴물이 천천히 위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때 날아온 화살이 괴물의 머리를 맞혔지만, 녀석은 끄떡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얼굴을 위로 향하고는 입을 벌리며 웃어 보였다.

“내가 올라가면 너는 천천히 내 입안에서 씹히는 거야. 그때 뽑아내는 너의 고통. 공포 어린 절규가 저들을 기쁘게 할 거다.”

괴물의 흉측한 얼굴을 잭이 내려다보곤, 다시 괴물이 말한 대상을 향해 시선을 두었다.

어느샌가 탑 주변은 괴물로 변한 레인저들이 포위하고 있는 상태였다.

하지만 잭은 당황하지 않았다.

어차피 각오한 마당이었다.

마지막으로 준비한 자살용 비수를 남겨둔 그는, 괴물을 향해 모든 방법을 다 썼다.

하지만 괴물에게는 화살도, 창도 통하지 않았다.

던져진 창을 한 손으로 잡아채 부러뜨리는 위력도 보였다.

그러면서 착실하게 슬금슬금 위로 이동하는 중이었다.

점점 괴물이 가까워져 왔다.

그리고 주변을 포위한 괴물들은 흥분에 가득 찬 표정으로, 그들의 주인이 먹잇감에 도달하기 직전인 순간을 감상했다.

그때 한 괴물의 얼굴에서 균열이 일어났다.

“….”

그 균열은 세로로 발생되었다. 그러더니 괴물의 얼굴을 반으로 갈라놓았다.

그리고 양쪽이 위아래로 엇갈리는 가운데, 뒤에서 누군가가 걷어차자 피를 뿌리며 앞으로 나뒹군다.

땅 위에 쏟아지는 뜨거운 피 냄새가 코를 찔러오자.

일제히 다른 괴물들은 물론이고, 탑을 오르고 있던 우두머리마저 흠칫하며 뒤를 봤다.

무슨 종잇장처럼 괴물 한 마리를 베어버린 남자가 나타난 것을 보며, 괴물이 얼빠진 소리를 내뱉었다.

“뭐냐. 넌?”

홀로 서 있는 세인이 대답 대신 단검을 손에 들었다.

그리고 무서운 속도로 전장을 향해 던졌다.

그게 괴물의 등을 뚫고 들어가자, 괴물은 비명을 질렀다.

초록색의 피가 괴물의 몸 아래로 뚝뚝 떨어져 내렸다.

그 비명에 자극을 받았던 것일까?

레인저가 변한 괴물들이 세인 쪽으로 달려오기 시작했다.

잭은 어안이 벙벙한 가운데 세인을 보조하려 활을 다시 들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는 그럴 필요가 전혀 없었다.

세인은 달려오는 괴물들에게 시선을 주지 않고 다시 단검을 던졌다.

이번에는 아까보다 더 길고 묵직한 것으로, 사슴고기를 발라낼 때 쓰는 칼이었다.

그게 다시 탑 쪽의 괴물에게 일직선으로 날아가자 등이 움푹 꺼졌다.

척추를 부러뜨리고, 가슴을 뚫고 나온 단검의 위력에 괴물은 몸부림쳤다.

결국, 아래로 떨어져 버리고야 말았다.

그제야 고개를 끄덕인 세인은 검집에서 마검을 뽑아 들었다.

다른 괴물들은 지척이었고 말이다.

하지만 세인은 전혀 긴장한 낯빛이 아니었다.

약간 귀찮다는 표정으로 장검을 바람처럼 휘둘렀다.

보통 그렇게 빠르게 움직이려면 강한 힘을 실기 힘들 텐데, 마검은 상식 이상의 힘을 보여주었다.

세인이 검을 들고 고개를 기울이자, 달려드는 괴물들의 모습이 그런 행동을 따라서 살짝 기울어졌다. 그리고 그보다 더한 사선으로 검이 움직였다.

그 선을 따라 괴물들의 몸이 이등분 되었다.

대각선 속에서 잘린 몸체들이 빗금을 따라 움직인다.

전혀 저항을 느끼지 않는 듯이, 검날이 스치고 지나가면 괴물들의 팔과 몸이 반 토막 났다.

이어지는 비명도 없었다.

다시 되돌아온 마검이 비명을 지를 그들의 목과 가슴을 베어냈기 때문이다.

괴물들은 어떤 거슬림도 없이, 애들 장난처럼 휘두른 검 짓에 맥없이 쓰러졌다.

무자비하고 거침없는 살육이었다.

뜨거운 피가 그의 목덜미와 등으로 튀자, 세인은 후드를 뒤집어쓰며 그 피 세례를 피하고자 했다.

천천히 후드를 들어 올릴 정도로 그의 다른 한 손에는 여유가 넘쳐흘렀다.

잭은 그것을 탑 위에서 바라보면서도, 참 비현실적이라고 느꼈다.

조금 전까지 죽음의 공포를 가져다주던 적들이 벌레처럼 짓이겨지고 있었다.

언제 봐도 세인의 힘은 불가사의 그 자체였다.

마지막으로 세인이 검을 털어내듯 휘둘렀다.

그러자 검압이 일며, 그나마 남아있던 괴물들의 몸이 터져 나갔다.

그에 따라 초록색 피가 사방으로 비산한다.

그렇게 잔챙이들을 해치운 세인은 바닥에 떨어진 괴물을 향해 다가갔다.

숨통을 끊어 놓기 위해서였다.

이대로라면 괴물은 순식간에 목이 달아날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세상사에는 이변이란 게 존재하기 마련이다.

갑자기 푸른 불빛이 세인의 옆얼굴을 비췄다.

흠칫하며 고개를 돌린 세인은 그 자리를 피했다.

푸른 불길이 확산하더니 육중한 형체가 그가 서 있던 자리를 덮쳤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건 고의라기보다는 우연에 가까운 산물이었다.

불길을 뚫고 나타난 것은, 인간의 얼굴을 한 커다란 괴물이었다.

그 괴물은 피를 잔뜩 흘리고 있었는데, 무척 괴로워 보였다.

몸이 성치 않다는 것을 증명하듯 땅바닥에 부딪히며 한 바퀴 구른 괴물이, 다른 쓰러져 있던 괴물을 깔아뭉개 버렸다.

“아악!”

단검에 두 번이나 뚫리는 수모를 당한 괴물이 깔아뭉개져 마지막으로 지른 단말마다.

붕괴한 그의 육체가 사방으로 피를 흘려낼 때, 그 위에서 갑작스럽게 나타난 괴물이 고개를 들었다.

한쪽 팔이 날아간 괴물은 붉은색 얼룩무늬가 도드라지는 긴 목을 뽑아내며, 주변을 확인하려는 듯 이리저리 얼굴을 움직였다.

살이 결정화되어 굳어진 흉측한 얼굴은 한쪽이 함몰되어 있었고, 한쪽 눈만이 성한 듯싶다.

그 한쪽 눈은 세인을 담았다.

그리고 입을 벌려 뭔가 말하려고 했을 때 세인이 움직였다.

빠르게 다가오는 세인에게 사자의 앞발을 닮은 팔이 움직임을 저지하려 했다. 하지만 고통이 수반된 반격을 맛봤을 뿐이다.

괴물의 육중한 팔이 하늘로 솟구쳐 오를 때, 세인의 얼굴이 괴물의 품 안으로 다가섰다.

그는 갑자기 나타난 괴물에 큰 의문을 가지지 않았다.

‘몬스터는 무조건 죽인다.’

그런 확신을 담은 검이 괴물의 가슴에 박혔다.

그리고 거북한 소리를 내며 위로 움직였다.

아주 잠시 저항감이 있었을까?

일초 정도 느리게 움직이던 검이 빠르게 위로 솟구치며, 괴물의 육신을 빠져나왔다.

비명과 함께 놈이 이빨로 세인을 물어뜯으려 발광했지만, 세인은 정수리로 녀석의 턱을 받아 버렸다.

뒤로 젖혀지는 괴물의 턱 밑에서, 옆으로 돌아간 세인은 검과 함께였다.

마검이 괴물의 허리를 갈랐다.

안의 내용물이 더운 김을 내뿜으며 흘러나올 때, 마지막으로 마검은 괴물의 경추를 찔렀다.

뒤도 돌아보지 않은 자세 그대로 검만 위로 들어 올린 것이다.

싸늘한 검날은 세인이 들어 올린 손의 끝에서, 괴물의 목을 뚫고 바깥쪽으로 빠져나왔다.

그렇게 드러난 검날의 끝 부분은, 분수처럼 솟구쳐 오르는 피의 향연 속 중심이 되었다.

그러기를 잠시.

피로 이루어진 꽃의 암술 역할을 하던 쇳조각이 다시 천천히 안쪽으로 들어갔다.

쿵!

탑 아래로 내려온 잭은 바닥이 흔들리는 것을 느끼며 잠겨진 문을 열었다.

열어 젖혀진 문밖에는 세인의 뒷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온몸으로 피를 뿜으며 옆으로 쓰러진 괴물이 보였다.

반쯤 박살 난 괴물의 얼굴에 박힌 눈동자가 잭의 얼굴을 훑었다.

그 마지막 순간 녀석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

세인이 검을 휘두르자 괴물의 머리가 토막났다.

언제 봐도 무지막지한 힘이다.

단두대를 끌고 와서 저 큰 머리를 자르려 해도 쉽지 않을 것 같은데 말이다.

그걸 간단한 손짓으로 해내 버렸다.

“다친 곳은?”

짧게 물어오는 세인의 말과, 막 입을 연 잭의 말이 동시에 뒤섞였다.

“여길 어떻게 알고 오셨습니까?”

세인은 어깨를 으쓱하더니 이렇게 대답했다.

“산책 중이었어.”

“….”

총 책임자로서 경계초소들을 돌아보는 것은 기본이었다.

외곽지역일수록 더욱 그렇다.

현지에 대한 파악이 안 된다면, 가상으로만 이미지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때론 문서로는 전달받을 수 없는 현장감도 있기 마련이다.

그런 판단의 연장선이 결국 지금의 잭을 살렸다.

“여기로 오는 도중에 질리언을 보았어. 눈물범벅인 얼굴로 여길 향해 오고 있었지. 그래서 그를 붙잡고 물어봤고, 여기 사정을 전해 들었다.”

질리언은 도중에 마음을 바꿔서 다시 탑으로 향한 것이다.

그런 그를 제지한 것은 바로 세인이었다.

“질리언은 살아 있습니까?”

잭은 세인의 앞에서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손을 보니 반지를 끼고 있지는 않은데, 이게 잠행 중이란 뜻인지 뭔지 알 수가 없었다.

피범벅인 바닥에 엎드려야 할까? 아니면 일단 생명을 구해줘서 고맙다고 하는 것일까?

그런데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이, 긴장감 제로인 세인의 말을 듣자 자신도 모르게 질리언에 대해서 질문해 버렸다.

실은 가장 궁금한 게 그것이었던 것이다.

“그럼 내가 질리언을 죽였겠어?”

오히려 이상한 눈빛으로 세인이 바라보자, 잭은 조개처럼 입을 다물고 말았다.

그때 둘은 뒤로 물러서야만 했다.

커다란 괴물의 사체가 아래로 내려앉으며 연기를 뿜어댔기 때문이다.

마치 불을 가져다 댄 듯이 연소한 사체는, 순식간에 무서운 기세를 일으키며 피어올랐다.

그 부패한 악취의 줄기는, 탑 옆에 긴 선을 만들었다.

세인과 잭은 무서운 속도로 사라지는 괴물의 사체를 구경했다.

괴물의 근육이 더 이상 잡아줄 수가 없자, 눈알이 떨어져 데굴데굴 굴렀다.

그리고 그것을 세인의 발이 밟았다.

콰직 소리가 나며 신발 바닥이 질척해졌다.

마검을 검집에 넣고 팔짱을 낀 세인은, 신발을 옆으로 이동했다.

그러자 끈적한 것이 옆으로 쭉 선을 그렸다.

그러나 그것도 점점 옅어졌다.

마치 세상이 괴물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것만 같았다.

“왜 져줬나?”

“예?”

“질리언이 이야기하더라고. 마지막에 눈을 가늘게 떴다고 말이야. 그때 네가 주먹을 보로 바꿨다 하더군. 그때 짧게나마 눈을 마주쳤다면서?”

“….”

질리언으로 변장한 괴물의 말은 틀렸다.

승부에서 이긴 것은 바로 잭이었다.

그는 주먹을 내서 질리언을 이겼지만, 승부를 조작했다.

자신을 위해서가 아닌 남을 위해서 말이다.

질리언은 그런 잭에게 충격을 받았으면서도, 살고 싶다는 욕망에 순응했다.

그래서 탑을 떠나게 된다.

그 후 잭과 마지의 차이점은, 질리언의 가슴에 깊은 파문을 만들어냈다.

생존 본능 때문에 탑에서 도망쳤지만, 도망가는 내내 질리언은 괴로웠다.

그리고 그 고통의 답에 직면했을 때.

질리언은 발걸음을 다시 탑 쪽으로 돌리고야 말았다.

그후 빠른 말에 탄 세인과 만나게 된 것이었다.

질리언을 변화시킨 것은 잭의 마음이었다.

질리언은 마지의 아들로 태어나 죽음으로 내몰린 적이 있었다.

그리고 그 과거는 흘러간 후에도 두고두고 그를 괴롭혔다.

마지가 준 상처를 이어받은 상태에서, 마지보다 더 나은 인간이 되기란 요원해 보였다.

하지만 남의 진심은 타인을 변화시키기도 하는가 보다.

질리언은 결국 탑으로 돌아오는 중이었다.

사라져가는 괴물 앞에서 잭은 속을 털어놓았다.

“영주님. 기억하실지는 모르나, 저는 영주님 밑에서 열심히 싸워왔습니다.”

“나는 너를 기억한다. 질리언처럼 말이야.”

“목숨을 걸고 나가서 싸웠고 진심으로 영주님을 따랐습니다. 불경하게 들리시겠지만, 이제는 지친 마음도 있었습니다. 때론 세계수 지역으로 올라가거나, 가이더로 내려가서 살고 싶은 마음도 있었습니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말입니다.”

세인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잭의 말이 전혀 불경하게 들리지 않았다.

잭은 그동안 세인을 위해, 아레이즈를 위해 열심히 싸워줬다.

그런 자들은 쉴 권리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동생이 생겨버렸습니다.”

“….”

“그게 현실의 저를 정의했고…. 모든 것을 떠나, 그때 제게는 질 권리가 있었습니다. 그걸 행사했을 뿐입니다.”

‘왜 떠나지 않냐’는 질리언의 말에, 잭이 웃은 이유는…. 바로, 질리언 때문이었다.

승부를 조작한 이유도 동생이라는 단어 하나면 충분했다.

그리고 그게 바로 잭이 마지와 다른 점이었다.

“많은 고민이 있었지만…. 영주님 밑에서 동생과 함께, 저답게 살고 싶었습니다. 잭답게요.”

질리언과 함께라면 가이더로 내려가 살 수가 없었다.

번우드에 가서 살아간다는 것도 애매했다.

잭은 자신답게, 동생과 함께 살고 싶었다.

당당하게 말이다.

그래서 이 힘든 임무에 지원했다.

그들은 아직 젊었고, 서로를 아낄 수 있었으며 우애를 더 쌓아나갈 수 있었다.

그리고 가치관을 향해 말처럼 달릴 수 있었다.

혼자라면 몰라도 둘인 이상 그게 가능했다.

목숨이 달려 있기도 한 길이었기에, 남들이 이해하기 어려울 수도 있었다.

하지만 잭은 솔직하게 자신의 심정을 다 털어놓았다.

잭의 말을 다 들은 세인은 납득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복잡해 보이지만, 잭이 뭘 말하는지 이해한 것이다.

그 후 잭이 무릎을 꿇으며 ‘질리언과 자신을 도와주셔서 감사하다’고 말할 때도, 세인은 괴물이 사라진 자리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몸을 돌린 그는 짧은 말을 내뱉었다.

잭에게 하는 말이라기보다는, 자신에게 하는 말이었다.

그래서 잭은 당연히 세인의 뜻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나도 전에는 그랬어. 그렇게 생각했던 적이 있었지.”

“….”

그래.

그도 한때는, 레드와 함께 그런 생각을 했던 적이 있었다.

그래서 공감하는 것이 어렵진 않았다.

세인은 질리언이 뒤늦게 도착할 때까지 그곳에 있어 주었다.

그리고 말없이 질리언과 잭이 얼싸안는 것을 지켜보았다.

훗날 잭이 그때 왜 다시 돌아왔냐는 질문을 던졌을 때, 질리언은 이렇게 대답했다.

“그때 내 손을 잡아준 건 형이잖아. 형을 잃는다면, 내 손은 영원히 비어있을 것만 같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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