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8
& 낯선 시대 (4)
글리터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진 곳에 세워진 감시탑이 있었다.
돌로 쌓아 올린 원형 상태의 구조물은 폭이 매우 좁았지만, 두 사람 정도는 넉넉히 들어가 살 정도는 됐다.
그중 한 명이 바로 질리언이었다.
튼튼한 청년으로 자라난 질리언은 탑 위에서 수평선을 바라보고 있었다.
처음에는 탁 트인 배경이 마음에 들었었지만 익숙해진 지금은 별 감흥이 없었다.
그는 감자 칩을 입안에 넣고 오물거리며 앉아 있었다.
두꺼운 외투와 두건이 쌀쌀한 바람을 막아주는 방패막이였다.
입안에 감자 칩을 머금고 있던 그는 갈증을 느꼈다.
그래서 옆을 바라보았는데, 거기에는 밤새 경계를 서다가 잠든 잭이 곯아떨어져 있었다.
이 감시탑은 믿을 수 없게도 이교대로 돌아가고 있었다.
그리고 더욱 믿을 수 없는 일은, 잭과 질리언이 이 임무에 자원했다는 것이다.
“미친 짓이었어.”
그렇게 중얼거린 질리언은, 코 골다가 돌벽에 머리를 박는 잭을 내려다보았다.
잭은 머리를 벽에 부딪히고는 얇은 신음을 내며, 언짢은 표정을 하곤 고개를 옆으로 돌릴 뿐이었다.
그러다가 다시 머리를 돌려 벽에 머리 부딪치기를 반복하는 게 그의 잠버릇이었다.
질리언에게 지금 필요한 수통은 잭의 다리에 걸려 있었다.
수통의 끈이 오른쪽 다리에 칭칭 감겨 있는 것을 본 질리언은, 잠시 망설이다가 결심을 굳힌다.
잭이 잠에서 깨어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손을 뻗은 질리언이 다리를 들고 수통의 감긴 끈을 풀어내었다.
조마조마한 작업은 일견 성공적으로 보였다.
하지만 결국, 잭이 발을 허공에 헛발질하는 거로 막을 내리고야 만다.
“뜨헉!? 헉? 헉헉!”
소스라치듯이 잠에서 깨어난 잭은 식은땀을 홀리며 상체를 일으켰다.
그가 정신을 차리자마자 느낀 것은 이마의 진통이었다.
그래서 머리를 감싸 쥐며 옆을 바라보는데, 수통을 손에 든 질리언이 안쓰럽다는 듯이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왜 그렇게 힘들게 자? 잘 거면 그냥 누워서 자지.”
“야. 나 방금 이상한 꿈을 꾸었어. 귀신들이 내 발을 잡고 밑으로 끌어당기는 거야. 와 진짜 생생한 꿈이었다. 아 놀라라.”
“….”
수통 주둥아리를 입에 문 질리언은 시치미를 떼었고, 잭은 십 년 감수했다고 중얼거렸다.
작은 소동이 있고 난 뒤, 둘은 같이 앉아 지평선을 바라보게 되었다.
“좀 더 자지그래?”
질리언의 말에 잭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발을 잡아당기던 감촉이 너무 생생했다니까? 혹시 예지몽 아닐까? 걱정돼서 잠이 안 온다고.”
“….”
질리언은 자신 때문이었다고 말해주려다가 말았다.
그 대신 전혀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형, 우리가 만난 지 얼마나 되었지?”
“네가 여자도 아니고, 그걸 내가 왜 세고 있겠냐?”
그것도 틀린 말은 아니었기에, 질리언은 머리를 긁적거렸다.
“형 고마워.”
“응? 뭐가?”
“그냥 고맙다고.”
“….”
질리언은 과거 가족들에게 버림받은 적이 있었다.
그것도 생사의 갈림길에서 말이다.
어린아이가 그런 상처를 안고 홀로 세상에서 살아간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가 다른 고아들과 달랐던 점은, 확실하게 버림받았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사람을 믿는다는 게 힘들었고 저절로 벽이 쌓이게 되었다.
그런 그에게 다가와 준 게 잭이라는 대장장이였다.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여러 경험이 있던 잭은, 질리언이 다시 사람을 믿어볼까 하는 마음을 촉발해 주었다.
그래도 어린 시절 강렬했던 상처가 완전히 아문다는 건 불가능해 보인다.
그는 잭처럼 정체불명의 악몽을 꾸는 게 아니고, 주기적으로 꿈을 꾸었다.
그 꿈 안에서, 그의 어머니인 마지는 질리언을 수백 번 버리고 버렸다.
처음에는 어려서 몰랐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마지가 질리언의 가슴에 남긴 묘비석 같은 그 느낌이, 질리언을 지치게 하고 부당함을 느끼게 했다.
상실보다 더 아픈 것은 세상이 자신을 버렸다는 느낌이다.
그것을 이미 죽은 마지가, 끝까지 집요하게 확인시켜 주었다.
“질리언. 아직도 힘드냐?”
“힘들다기보다는 가치관이 형성된 거 같아. 그 가치관은 확신 같은 것이라서, 이젠 변하지 않을 거 같아. 내 생각이랑은 무관하게, 가슴에 먼저 형성된 가치관 때문이야. 세상은 믿을 수 없다고….”
“너 그러면 이 형은 믿니?”
“….”
질리언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잭도 대답을 촉구하지 않았다.
어찌 보면 질리언은 잭을 따라 이 험한 곳에 지원한 셈이다.
홀로 남겨지는 것이 싫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질리언이 잭에게 경계를 허물었다고 보기도 힘들었다.
고마움은 느끼고 있고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사람이 있다면 잭일 것이나, 그것에도 한계가 있다는 식이다.
잭은 그런 것에 기분 나빠 하지 않았다.
부모에게 버림을 받았다는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질리언을 이해하기 때문이다.
아니, 정확히 말해 버림받은 정도가 아니라.
마지는 질리언을 죽음의 구렁텅이로 내몬 셈이었다.
‘그런 상처를 받은 사람에게 왜 보통 사람처럼 살지 못하냐고 꾸짖는 건 바보나 하는 짓이야.’
둘은 이 고립된 공간에서 변하지 않는 풍경을 보며 여러 가지 잡담을 했다.
추위를 막고 생존에 필요한 약간의 노동 외에는, 남는 것이 시간이었다.
그 시간을 대화로 채웠다.
여자 이야기.
시시콜콜한 이야기.
전투에 대한 이야기 등등을 서로 나누었다.
잭은 세인 밑에서 여러 차례 전투를 참전한 사람이다.
글리터에 남아 있었다고 해도, 아무도 그를 무시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자진해서 이곳에 온 것에는 이유가 있었다.
“나는 영주님을 믿어, 질리언. 대장장이로서 가장 기분 나쁠 때가 뭔지 알아?”
“책임 질 수 없는 무기를 만드는 것.”
“좋은 상인이 그런 것처럼, 제대로 된 대장장이도 상대를 가려가면서 장사할 순 없어. 생업이고 소명 정신이기 때문이지. 사회에서 나의 역할이란 게 있잖아.”
형제 같은 두 사람은 별빛 아래에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쌀쌀한 바람 속에, 서로의 이야기를 나누었다.
“예리하게 날이 선 무기를 손님의 손에 들려줄 때, 죄를 지은 것만 같은 느낌이 들어. 나는 그의 손에 치명적인 도구를 들려줬지만, 그가 그것을 들고 무슨 짓을 할지는 아무도 몰라. 관여할 수 없지. 그런 주제에 뻔뻔스럽게도, 튼튼하고 질 좋은 무기를 만들기 위해 풀무질을 하는 거지.”
그런 말을 할 때 잭은, 볼을 볼록하게 만들고 숨을 참으며 얼굴을 시뻘겋게 만들어 보였다.
풀무질하는 얼굴 흉내를 낸 것이다.
“안 웃겨, 형. 형은 유머로서는 글렀어.”
“나는 살인 도구를 만들었지만, 쓰임새에 대해서는 책임질 수가 없어. 그 물건을 손에 든 사람이, 누군가를 지키기 위해 그 도구를 쓰기를 바라지만 그건 기도일 뿐이야.”
“….”
“쇠붙이가 인간의 치아보다 튼튼한 이유는 땅을 갈고 곡식을 수확하기 위해서야. 내가 영주님의 아래에 있다면 언젠가 질 좋은 무기를 만들어도, 그게 피를 머금지 않는다는 확신 아래에서 거래가 성사되겠지. 그게 일상이 될 거라고.”
질리언은 그러나 그런 말을 한 잭의 옆얼굴을 보며, 그가 말하는 것이 세인을 추종하는 이유 전부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그러기에 잭은 너무나도 멀리 와 있었다.
“형, 형은 아비게일님처럼 보통 인간이잖아. 형이 가이더로 돌아가지 않는 이유도. 인간들 사이에 섞여 살지 않는 이유도, 세인님 때문이야? 그분이 형이 원하는 시대를 열어줄 거 같아서?”
그러자 잠시 멈칫한 잭은 곧 웃음을 내보인다.
“그래.”
“인간으로서 인간들 속에 섞여 살지 않는 건…. 미안한 말이지만, 어리석은 일이야. 글리터 사람들이 영주님을 믿는 것과 별개로,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정의하진 못한다고. 앞으로 어떤 일이라도 벌어질 수 있잖아. 그 사이에서 형은 인간이고.”
“난 이미 인간들 속에서 살고 있어.”
잭은 웃으면서 질리언의 머리를 헝클어 주었다.
그렇게 오늘 밤도 지나가고 있었다.
그 후로 한동안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
그리고 정확히 한 달 후에 예기치 않은 방문자들이 있었다.
잭을 흔들어 깨운 질리언은 손가락으로 밑을 가리켰다.
감시탑 밑으로 다가오는 일단의 무리가 있었다.
그들은 탑 위의 잭과 질리언을 발견하고는 손을 흔들어 보였다.
“여어, 놀라지 마시오. 우리는 레인저들인데 순찰 도중 들리게 되었소.”
“….”
화답할 만도 한데 잭과 질리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무거운 눈빛으로 밑에 몰려든 사람들을 내려다볼 뿐이다.
레인저들은 정체를 알려준 것으로 상대의 경계심을 풀었다고 생각했는지, 밑에 모닥불을 피우곤 휴식을 취했다.
모여 앉아 있던 그들이 서로 어깨를 치며 껄껄 웃는 소리와 노랫소리가 감시탑 위쪽까지 들려왔다.
잭과 질리언의 시선은 태평하게 시간을 보내는 남자들을 바라보았는데, 그런 그들의 눈은 상당히 가라앉아 있었다.
술병을 들고 건배사를 하는 레인저를 바라보며 질리언이 잭에게 속삭였다.
“전서구는? 힘들까?”
“틀렸어, 정기 보고를 위해 날려 보낸 게 삼 일 전이야. 거기 도착하고 다시 되돌아오려면 한참 걸려.”
질리언도 익히 아는 대답을 내놓는 잭이었다.
상대가 레인저라고 정체를 밝혔고, 인간 모습인데도 불구하고 탑의 문을 열어주지 않는 까닭이 있었다.
더 이상, 평원에 저런 레인저들은 존재하지 않는다.
저런 부대가 이런 외곽까지 돌아다닌다는 소리를 들어보지 못했다.
물론 보고도 받지 못했다.
“저들은 다 유령이야. 과거 괴물에게 살해당한 사람들인 셈이지. 본인들은 그걸 잊고 저렇게 떠돌아다니는 거야. 괴물의 더듬이. 끄나풀이 된 상태로 말이야. 아무것도 모르는 인간들이 저들과 접촉한다면 목숨을 잃게 되는 거지.”
잭이 그렇게 말할 때, 질리언은 밑에서 술자리를 벌이고 있는 사람들을 보았다.
한결같이 안색이 창백했다.
그들은 부대로 돌아가면 연인에게 편지를 쓰겠다고 말하고 있었으며, 부모님 이야기를 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그런 그들의 가족들은 이미 오래전에 그들의 부고를 받아보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뿐만이 라면, 이들이 긴장할 이유가 없었다.
유령들의 해코지 따위는 각오하면 그만이니까.
‘문제는 저 유령들이 미끼라는 것이다.’
잭은 어두운 얼굴로 흐린 하늘 아래의 지평선을 바라보았다.
아직은 이변이 없었다.
하지만 곧 저것들을 선두로 내몬 괴물이 나타나리란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나타날 괴물에 우리가 살해된다면, 내가 누군지 잊은 채 저 집단에 동참하게 되겠지. 감쪽같이 말이야.”
레인저 부대는 푹 쉬고 다시 길을 떠났다. 아니, 탑의 사정을 확인했으므로 다시 길을 떠난 척 한 것이었다.
레인저들은 가도 괴물은 나타날 것이다.
수고하라고 손을 흔들어 보이며 떠난 레인저들에게, 마주 손을 들어 보이지 못한 이유였다.
그리고 그날 밤부터 질리언은 아주 생생한 악몽을 꾸었다.
평소 때의 악몽과 달리, 마지가 그의 곁에 앉아 있는 느낌이 생생하기 그지없었다.
그녀의 숨결과 가슴의 기복이, 손에 잡힐 듯이 가까운 가운데 마지가 그에게 속삭였다.
- 질리언, 버림받기 전에 그를 버려. 그게 바로 네게 남은 길이야.
꿈속에서 그렇게 중얼거린 마지는 음습한 거미를 연상케 했다.
그녀를 괴물에 비유하자면, 파충류의 눈이 박힌 거미 한 마리였다.
식은땀을 흘리며 잠에서 깨어난 질리언 앞에는, 앉아 있는 잭이 보였다.
잭은 쓴웃음을 지으며 이렇게 말했다.
“결국, 내 예지몽이 맞았어. 그때 발을 끌어당기던 느낌이 아직도 생생하다고.”
“….”
무거운 침묵 속에서 이틀이 지나갔다.
혹시나 하고 기다려 봤지만, 역시나 전서구는 감감무소식이었다.
더 결단을 미루어 둘 수 없다는 것을 잭도, 질리언도 알고 있었다.
질리언은 옛날의 악몽이 되풀이되는 것을 느꼈다.
얼마나 얄궂은 운명이란 말인가.
굳어 있는 질리언 앞에서 잭은 손을 내밀고 제안했다.
“가위바위보로 하자.”
“….”
질리언은 창백한 얼굴로 손을 내밀었다.
죽기보다 내밀기 싫었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누군가 한 명은 남아야 하고, 다른 한 명은 글리터 쪽으로 달려가야만 했다.
그리고 남겨진 자가 살아남을 확률은 없었다.
레인저들을 저렇게나 많이 먹어치운 놈이다.
분명히 엄청나게 강할 것이고, 남겨진 자는 죽는다.
이때 질리언은 자신이 혐오스러워졌다.
그는 다시 태어났으므로 육체가 강해진 상태였다.
오랜 전투로 다져진 잭이라지만, 그가 완력으로 잭을 제압하고 도망친다면…?
잭은 그를 말릴 수 없을 것이다.
생사의 기로에 서니 그런 끔찍한 생각마저 들었다.
그는 마지의 아들이었다.
결국, 악인인 마지의 피가 흐르고 있었다.
운명은 그런 그를 가지고 희롱하는 듯이 보였다.
그렇지 않고서야, 두 번이나 공교로운 운명 속으로 자빠트릴 리가 없었다.
여기서 질리언은 어떤 선택을 했어야만 했을까?
그가 택한 방법은 두 눈을 질끈 감고, 가위바위보를 하는 것이었다.
“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