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7
& 낯선 시대 (3)
아비게일은 하룻밤을 꼬박 새웠다.
짚으로 채운 침대 위에서 아침을 맞이한 그는 비틀거리며 아래로 내려갔다.
그가 묵고 있는 곳은 여관이었다.
아침 일찍 일어나 음식 재료를 다듬고 있던 주인은, 딱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역시나 한숨도 못 잔 건가?”
아비게일은 현기증을 느끼는지 비틀거렸다.
그리고 나무 기둥을 잡고 고개를 끄덕여 보인다.
주인이 혀를 차더니, 불 가에 앉으라고 자리를 권했다.
“나도 긴장이 안 된다면 거짓말일 테지만, 그렇게 새가슴이어서야. 너무 유난한 거 같아. 그래서야 장가가긴 다 틀렸네! 틀렸어.”
“제가 왜 이곳에 온 걸까요?”
“더이스님의 말을 듣고 온 거 아냐?”
“지금 긴장돼서 숨도 쉬기 어려울 지경이에요.”
주인은 아비게일의 등을 쳐주고는 나무 컵에 담긴 차를 권했다.
아비게일은 그것을 받아들고 입가에 가져다 대었다.
무엇 때문에 그가 이렇게 긴장하게 된 것일까?
그 답은 바로 문밖에 있었다.
마차 소리가 들리고 여관의 앞에서 멈추자, 아비게일과 여관 주인은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아비게일은 자기도 모르게 이런 말을 했다.
“같이 가주실래요?”
여관 주인은 같잖은 소리 하지 말고 어서 일어나라는 듯 손짓을 했다.
아비게일은 결국 심호흡을 하고 일어나 밖으로 걸었다.
그 걸음 하나하나가 그에게는 너무 부담스러웠다.
밖에 누가 기다리고 있는지 알기 때문이다.
당장이라도 등을 돌려 도망가고 싶었지만, 그건 말도 안 되는 일이다.
결국, 문이 열리고 마차가 아비게일 앞에 드러났다.
마부는 말에서 내려 아비게일을 향해 손짓하며 말했다.
“어서 올라타시오.”
고개를 끄덕인 아비게일은 문이 열리는 마차 안으로 올라섰다.
그 안에는 세인이 기다리고 있었다.
세인이 하루 전에, 아비게일을 만나고 싶다며 이야기했던 것이다.
세인의 자리는 ‘만나고 싶다.’라고 이야기하는 자리가 아니었다.
그저, ‘불러들여라.’라고 명령하면 되는 자리였지만, 어쨌든 이렇게 되었다.
튼튼하게 만든 마차는 전쟁에서 얻은 전리품 중 하나였다.
드레퓨스의 고위귀족이 썼던 것이라 고급스러움도 곳곳에 보였다.
내부는 아늑했는데, 화려하고 섬세한 자수가 들어간 하얀 커튼이 창 쪽에 드리워져 햇빛을 막아 주었다.
아비게일은 긴장감으로 얼굴이 창백해진 채 숨도 못 쉬고 있었다.
그걸 본 세인은 이렇게 말했다.
“낚시 좋아하나?”
“예?”
너무나도 의외의 말에, 아비게일은 그만 얼빠진 얼굴로 반문하고 말았다.
아비게일과 세인을 태운 마차는 주둔지를 벗어나 밖으로 나갔다.
호위병력은 대동하지 않은 채였다.
마차를 모는 마부와 병사 한 명이 전부로, 전 같으면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지금은 주위 몬스터들의 서식지를 파악할 수 있을 정도로 개체 수가 줄어든 상태였다.
무엇보다도 세인에겐 마검이 있었고 말이다.
마차 안의 아비게일은 무릎을 모은 채, 두 손을 가지런히 그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세인의 눈치만 보았다.
그는 세인이 왜 자신을 이렇게 만나자고 했는지 궁금해하지도 못했다.
‘못했다’는 표현이 어울리는 까닭은, 몸 전체를 점령한 긴장감 때문이었다.
세리스의 경우 높은 귀족이었지만, 직책이란 것이 없었다.
물론, 그녀의 배경을 무시해서 그런 건 아니지만 아비게일도 명색이 마법사였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마법사라고 해서 모든 걸 초월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사람들을 다스리는 귀족에 대한 본능적인 두려움.
경배감과 어려움은 그에게도 있었다.
아비게일이 안절부절 하는 순간에도 마차는 계속 달렸고, 창밖의 사물은 휙휙 스쳐 지나갔다. 마차가 멈춘 것은 몇 시간이 지나서였다.
회색 구름이 융단처럼 하늘의 반을 덮어버린 곳.
하얀색과 회색이 어우러진 땅 위에서 마차가 섰다.
마부와 병사가 내려 공손하게 도착했다는 소식을, 세인에게 알려왔다.
세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등받이에서 몸을 떼어냈다.
그는 그동안 아비게일에게 한마디도 건네지 않았다.
세리스에게 아비게일의 성격에 대해 전해 들은 뒤였기 때문이다.
세인이 말을 꺼내 봤자, 아비게일을 극도로 긴장하게 할 뿐이었다.
세인을 따라 탁 트인 공간에 선 아비게일은, 그제야 신경이 가라앉은 것을 느꼈다.
멀리 작은 산과 날아가는 새들이 보이고, 풀냄새가 그의 코를 찌른다.
“그럼 가지.”
십여 미터 정도 걸어가자 졸졸거리는 물소리가 들려온다.
작은 물줄기들이 분홍색으로 변한 땅 위를 지나다니는 소리였다.
그 작디작은 물줄기가 가파른 경사를 따라 내려가며, 이내 커다란 물줄기와 만났다.
그 물은 온천처럼 김을 모락모락 피워내진 않았지만, 충분히 따뜻한 물이었다.
아비게일은 세인을 따라 내려가며, 회색빛의 물을 볼 수 있었다.
간혹 물거품이 떠올라 수면 위에서 터지는 것을 보면 아래에 생명체가 있다고 생각되었다.
하긴 밑에 뭔가 있으니 낚시를 하는 거겠지.
세인은 마부와 병사가 가져다준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 낚싯대를 받아들었다.
아비게일의 것까지 마련해준 병사와 마부는 마차를 끌고 주둔지로 돌아가 버렸다.
이제 썰렁한 벌판에 그와 세인뿐이다.
아비게일은 이 순간이 정말 부담되었다.
그래서 어정쩡한 자세로 서 있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세인은 봉투에서 밑밥을 한 줌 꺼내 수면에 뿌렸다.
비가 떨어지듯이 수면이 잘게 떨릴 때 그의 입도 같이 열렸다.
“같이 앉아서 낚시나 하지. 낚시 좋아하냐는 질문의 대답은 못 들었지만, 낚시 정도는 할 줄 알지?”
“예. 예, 그렇습니다.”
그렇게 아비게일과 세인은 나란히 앉아 낚시를 하게 되었다.
아비게일 입장에서는 정작 밑에 뭐가 있는지도 모르고 하는 낚시였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세인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
“이 밑에 뭐가 있는지 아나?”
“….”
“아니. 좀 더 자세히 말하면 왜 이 물이 따듯한지 아나?”
당연히 알고 있었으므로, 아비게일의 입에서 반사적으로 답이 튀어나왔다.
“화룡석입니다.”
그의 대답에 세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화룡석이란 온기를 내뿜는 돌을 말한다.
돌의 나이마다 그 열기가 다른데, 어떤 것은 불덩어리처럼 뜨거운 열기를 내뿜는 돌도 있었다.
낚싯대를 잡고 있던 그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 얼어붙은 땅 거죽 밑은, 온통 화룡석으로 뒤덮여 있었다.
그런 화룡석은 이 지대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그의 세력이 머무는 지역 주변도 온통 화룡석이었다.
온천은 더욱 깊은 곳에 형성된 화룡석의 영향을 받아, 더 뜨거운 수온을 유지했다.
북의 허리띠 지역은 온통 이런 것들이 숨겨져 있었다.
그동안 발굴을 하지 못했던 까닭은 바로 몬스터들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시대가 변했다.
‘이제 우리가 원하기만 한다면, 따뜻하게 사는 것도 가능한 일이다.’
그들의 대화는 계속되었다.
세인은 아비게일에게, 그에 대한 어린 시절을 물었다.
그래서 아비게일은 더듬더듬하면서 자기에 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누구 앞이라고 감추겠는가?
별거 아닌 내용이었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과 비교하면 평범하게 살았다고 생각될 내용이다.
하지만 그런 말을 하면서 아비게일은 긴장이 풀리는 것을 느꼈다.
그에 대해서 들은 세인은 이렇게 말했다.
“화룡석들을 캐낼 거야. 그리고 땅 위에 덮어버릴 생각이지. 이게 끝은 아니야. 그동안 몬스터들 때문에 진입하지 못했던 지역을 방문하고, 광산을 개발할 거야.”
아비게일은 이제 묵묵히 세인의 말을 들었다.
“다시 되돌아와 준 사람들은 고맙지만, 나는 그들을 세계수 지역으로 돌려보낼 생각이야. 왜 아니겠어? 그들은 이미 할 만큼 했어. 자신들의 미래를 위해 피까지 흘렸어. 그리고 필설로 형용하기 어려운 경험까지 했지. 여기가 안정되면 그들을 돌려보내고, 유민을 받을 생각이야. 나는 그래서 곁에 둘 새 사람이 필요해. 똑똑하고 되도록 배신하지 않을 사람이 좋겠지. 그래서 지금 내 여가에 당신을 초대한 거야.”
둘은 그때 수면 아래에서 느리게 움직이는 검은 형체를 보았다.
성인 남성의 반만 한 크기인 검은 그림자는 둘의 발아래에서 아른거렸다.
물에 떠 있는 식물 방패 잎 아래에서 지느러미 같은 게 움직인다.
아비게일은 재깍 세인의 말을 이해했다.
세인의 위치 정도 되면, 명령 하나로 모든 것이 해결되었다.
아비게일을 불러서 일을 맡겨버리면 되는 것이다.
그가 그렇게 행동한다 해서, 아비게일의 처지를 먼저 생각해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런데 시간까지 내면서 말하는 이유엔, 그의 적극적인 협력을 원했기 때문이었다.
“지금이라도 진지하게 생각해 봐. 여기 머물면서, 정말 여기를 자신의 집으로 삼는 건 어떤지.”
그리고 세인은 아비게일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비게일은 세인의 말을 들으며 그가 글리터를 어떻게 만들 것인지, 어렴풋이 깨달을 수 있었다.
그때 낚싯대가 내려가고 묵직한 손맛을 선사했다.
아비게일은 반사적으로 낚싯대를 낚아챘고 말이다.
밑의 거대한 괴어는 몸부림치며 줄을 벗어나려고 애쓴다.
그 바람에 물방울들이 아비게일의 얼굴에 튀었다.
그 괴어는 바로 메기였다.
수염을 여러 개 가진 메기는 퍼덕이며 도망가려고 애를 썼다.
세인이 잠자코 지켜보는 가운데 아비게일은 진땀을 흘렸다.
방금 물속의 메기와 눈을 마주쳤기 때문이다.
그는 순간 기절하고픈 마음을 가까스로 내리누를 수 있었다.
여기서 기절한다면 그게 무슨 망신인가?
결국, 그는 커다란 메기를 낚는 데 성공했다.
세인이 그걸 끌어내고, 몸부림치는 메기를 토막 내는 동안 아비게일은 기절해 있었다.
뭐 그게 큰 문제는 아니었다.
아비게일을 전투 때문에 쓸건 아니니까 말이다.
기절한 아비게일 옆에서 세인은 메기를 탕으로 끓였다.
그리고 물가 근처를 돌아다니며 솟아나 있는 풀들을 꺾어와 냄비 안에 던져 넣었다.
수온이 높은 곳에 서식 중인 메기는 살이 더 쫀득하고 민물 냄새를 풍겼다.
진짜 민물고기를 즐겨 먹는 사람들은, 그 흙냄새를 오히려 좋아한다.
세인도 마찬가지였으므로 펄펄 끓는 냄비 앞에 앉아 건더기들을 휘저었다.
바람이 불어와서 그의 머리카락을 흩날리게 한다.
그는 그 매만짐이 좋았다.
전에는 한 발 한 발 내디딜 때마다 신경을 곤두세워야 했지만, 지금은 그런 위험요소가 많이 희석된 지 오래였다.
아비게일은 깨어났다가 땅으로 올라온 거대한 도롱뇽을 보고는 재차 기절했다.
도롱뇽 머리가 너무 크고 흉악스럽게 생긴 탓이었다.
그 도롱뇽은 아비게일이 부르르 떨며 잠잠해지는 것을 보더니, 꼬리를 휘휘 저으며 사라졌다.
그걸 보자 세인은 도저히 몇 마디 안 할 수가 없었다.
“유약하군.”
결국, 그는 혼자 앉아 메기탕을 먹었다.
아비게일과 더 많은 이야기를 한다는 계획은 무산되었다.
그리고 그는 아비게일을 애써 깨우려 하지 않았다.
혼절한 사람을 깨우려 하는 것은 되도록 지양하는 게 좋았다.
왜냐면 정신이 충격에 대한 방어작용을 일으켜 혼절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쓰러질 때 발생할 수 있는 뇌진탕과 기절해 있을 때의 체온저하만 막아주는 게 최선이었다.
세인은 자신의 망토를 벗어 그의 몸 위에 올려주는 것을 빼곤, 아무런 조치도 하지 않았다.
후루룩후루룩 소리를 내며 작은 그릇 안의 메기 살을 먹는데, 뜨거운 생선살이 포크에 부서졌다.
그렇게 아비게일과 함께한 여가가 끝나고, 세인은 글리터로 돌아와 시간을 보냈다.
그동안 아비게일이 한 일은 세인의 계획에 맞추어 건물별로 구획을 나누는 것이었는데, 여기에서 대다수 사람은 세인의 계획을 눈치챘다.
건물들을 밖으로 밀어내고, 안쪽에 빈터를 잡는 것을 보면 성을 세울 생각이다.
많은 사람이 걱정으로 수군댔지만, 그들은 일반적인 영지민이 아니었다.
세계수에서 다시 여기로 온 이들이다.
그들은 세인을 깊이 믿고 있었고, 오래전처럼 자신들의 생각만으로 불안을 더 키우진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