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은 왕 마검의 주인-105화 (105/307)

# 105

& 낯선 시대 (1)

노동력 해결에 대한 가장 엽기적인 방법은, 바로 유고의 유산인 다크 스타를 이용하는 방법이었다.

인간성에서 완전히 등을 돌리면 가능한 방법으로, 시체를 일으켜 세워 노예처럼 부리는 방법이다.

시체야 멀리에서라도 끌고 오면 그만이었다.

얼어붙은 땅을 걷는 시체들.

그들이 돌을 들고, 그것을 쌓아 나갈 것이다.

물론, 세인이 명령을 내리기만 하면 말이다.

세인은 잠시 그것을 상상하곤, 그 끔찍함으로 인해 미간에 주름을 만든다.

실상 전쟁터에선 이기기 위해서였다지만…. 그가 시체들을 부린 모습만 해도 악마로 낙인찍히기에 모자람이 없었다.

그래서 새삼 그런 말도 안 되는 상상을 하고 나니, 문득 떠오르는 이들이 있었다.

전쟁터에서 사악한 모습을 다 보고도 변함없이 대해준 코다로와 비비안,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 대한 고마움이 일었다.

물론, 그게 이유 없는 믿음과 온정은 아니었다.

같이 사선을 넘나들며 생긴 변치 않는 신뢰와 유대인 것이다.

“노동력.”

다시 한번 중얼거린 그는 펜을 책상에 내려놓았다.

이 난제를 어떻게 풀까?

세인은 앞으로 세워질 성을 생각하며, 새로 생긴 보금자리의 이름을 ‘글리터’로 정했다.

이름은 군중을 하나로 묶는 장치 중 하나였다.

그런 장치의 연장선에는 깃발이란 것도 있었다.

그는 검은 바탕에 금색 새를 글리터의 깃발로 정했다.

세인이 머무르는 천막에 그 깃발이 가장 먼저 높이 매달렸다. 그리고 바람에 펄럭이는 것을 많은 사람이 구경했다.

이름도 정하고 깃발까지 만들었다.

계속해서 앞날을 계획하던 세인은, 잠시 이제 자신은 어떤 지도자가 되어야 할지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가졌다.

전과 같은 모습을 고수해야 할 것인가?

아니면 다른 시대를 맞아 좀 더 포용적인 모습을 보여줘야 할 것인가?

그가 그런 고민을 하는 가운데 글리터는 점점 영역을 넓혀 나갔다.

목책 안을 돌아다니는 사람들은, 돌을 주워들고 바깥에다가 옮겨 놓는 것을 반복했다.

그리고 온천으로 향하는 곳에 줄을 치고, 경사 아래로 굴러떨어지는 것을 경계한다. 외부의 침입이 없자, 목책으로 이루어진 경계가 느슨해지고 바깥으로 드나드는 일이 잦아졌다.

몬스터가 눈에 띄지 않으니 나무를 베는 작업은 내내 순항이었다.

얼어붙은 땅을 온기로 달래며 뒤엎는 남자들의 이마에, 땀방울이 구슬처럼 매달린다.

외부에 괴물들이 없다는 것은 사람들의 심리뿐만 아니라 동물들의 삶에도 큰 변화를 가져왔다.

여자아이와 남자아이들은 동물을 데리고 목책 바깥으로 자주 나갔으며, 따라 나간 어른들은 나뭇가지들로 그 동물을 가두기 위한 울타리를 만든다.

땅에는 고구마와 감자 씨가 뿌려졌다.

근방에는 온천뿐만 아니라, 얼어붙은 강도 있었다.

이 강은 지하 바다와 다른 지류에서 파생된 사생아였다.

거기에서 물을 끌어 오기 위한 분주함이 이어졌다.

그렇게 몇 달이 흘렀을까?

세리스와 더이스가 많은 사람을 이끌고 글리터를 찾아왔다.

그중에는 반강제로 끌려온 아비게일도 있었고 말이다.

“맥은 잠시 거기에 남는다고 했습니다. 마플을 지키기 위해서요. 그게 영주님의 뜻을 따르는 일이라고 생각한 모양입니다.”

더이스의 보고에, 세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수고했다는 말을 했다.

많은 사람이 세계수에서 충분히 휴식을 취하고 온 것은 그에게도 의외였다.

상당수가 거기에서 정착할 줄 알았으니까 말이다.

*  *  *

아비게일.

그는 마법사로서 능력 있는 남자였다.

각성자로서 요리에 엄청난 재능도 있었지만, 그것이 언제 꽃필지는 요원하다.

그러나 그런 각성자의 재능은 별도의 문제였다.

그의 연약하다 못해 눈꽃 같은 심성과 상관없이, 마법사로서의 그의 능력은 여기에서 큰 힘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아비게일을 멀리에서 본 행크는 얼굴을 굳혔다.

그리고 보고를 마치고 나온 더이스를 끌어다 조용한 구석으로 갔다.

“이게 어찌 된 일이야 더이스? 아비게일이 여기에 왜?”

피로를 풀러 온천으로 직행할 생각이었던 더이스는, 행크의 따지는 듯한 물음에 의아한 얼굴로 되물었다.

“당연히 아비게일이 필요하다고 해서 데리고 왔죠. 세인님이 원하셨으니까요.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행크는 안타까운 얼굴을 했다.

세인의 연적이 바로 아비게일 아니던가.

그런데 더이스 이놈은, 그냥 여기 여건상 한번 해본 말에 흔들린 거야?

그리고 아비게일을 여기로 데리고 왔다고?

이렇게 눈치 없는 놈이 같은 하늘 아래 있을 수 있다니.

속이 답답한 행크였다.

물론 실상 아비게일이 세리스와 깊은 관계는 아니지만, 다들 그렇게 오해하고 있다.

더이스는 정말 한심하다는 눈길로 자신을 쳐다본 행크의 면상을 봤다. 그리고 뭔가 깊은 곳에서 욱하는 심정이 치고 올라왔지만, 가까스로 참아냈다.

저 둔한 인물이 자신을 딱하다는 듯이 바라보고 있었다.

다른 이는 몰라도 행크의 이런 시선은 정말 견디기 힘들었다.

“뭡니까? 그 시선은? 전 정말 피곤하다고요.”

“어휴 됐다. 이 멍청아. 그만두자.”

고개를 흔들며 지나가는 행크.

그리고 뒤에 남겨진 더이스는 ‘묻지마 폭행’을 당한 얼굴이었다.

“머… 멍청이에게 멍청이란 소린 듣고 싶지 않아.”

그는 머리를 감싸 쥔 채, 100배는 더 피곤해졌다.

한편 세인은 자신의 천막 안에서 마검을 휘둘렀다.

다크 스타는 가죽 주머니에 넣어 잘 보관해둔 상태였다.

벌거벗은 상체로 땀방울이 비 오듯이 흘러내렸는데, 그도 그럴 것이 몇 시간째 검은 마검을 휘두르고 있는 탓이다.

휙휙 바람 소리를 내며 풍차처럼 돌아가던 검빛은 세인의 손안에서 지칠 줄 몰랐다.

요즘 들어 세인은 마검을 다루는 일에 집중했다.

체계적으로 검술을 연마하겠다는 의미가 아니라, 검과의 연결을 깊게 하고 싶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이렇게 오래 다루다 보면 마검의 힘을 더욱 능숙히 다룰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가끔 그를 사로잡았다.

힘에 홀린다기보다는 그만의 목적을 염두에 둔 행동이었다.

헉헉거리며 검날을 아래로 내린 그가 옆에 있던 나무통을 들어 올렸다.

더운 김을 모락모락 피워 내는 상체로 나무통 안의 차가운 물이 쏟아진다.

촤아악!

시원한 소리와 함께 세인의 몸은 비 맞은 생쥐 꼴이 되었다.

그는 마검을 쥔 상태로 잠시 서 있었다.

“….”

그렇게 5분이 지났을까.

그는 다시 장검을 들고 미친 듯이 휘두르기 시작했다.

그렇게 종일을 보내도, 감히 그를 방해하는 사람은 없었다.

아마 여기에 마플이 있었다면 벌써 한소리 들었겠지만, 그녀는 여기에 없었다.

“내겐 아쉬운 일이지만, 그녀에겐 다행이야.”

새벽에 지쳐 쓰러진 그는 다시 일어나 검을 휘두르고 나무통을 찾았다.

그러나 나무통은 비워진 지 오래다.

결국, 천막을 걷고 밖으로 나오는 그였다.

밖에서 물건을 옮기느라 분주한 사람들도 세인을 발견하자 급하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세인은 나무통을 들고 하녀를 부를까 하다가, 아예 목욕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발걸음을 온천 쪽으로 옮긴다.

아침의 여명은 시각적으론 따듯했지만, 살갗에 와닿는 기온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온천을 향해 걷는 도중에, 세인의 몸은 급격히 식어갔다.

그런 세인의 머리 위와 옆으로, 장막처럼 천들이 드리워져 바깥 공기의 유입을 막고 있었다. 그래서 그나마 이렇게 홑옷 상태로 돌아다녀도 되는 것이다.

겹겹이 처진 천들은 바깥쪽으로 나올수록 높고 넓게 확장되었다.

그건 마치 자신들만의 세계를 구현해 놓은 착각을 일으켰다.

덕분에 안쪽은, 아늑함과 그들만의 사람 냄새로 가득했다.

온천으로 향하려던 세인은 멀리에서 분주히 움직이는 사람들을 눈에 담았다.

그들의 주변에는 목조 건물들이 쑥쑥 올라와 있었다.

목조 건물까진 어찌어찌 올리기 쉬웠다.

목조건물도 제대로 지으려면 손이 많이 간다.

그럼에도 장정 몇이 힘을 합치면, 시일이 걸려도 완공은 할 수 있었다.

문제는 더 큰 건물을 원할 때다.

궁극적으로 성벽과 내성을 원하게 되면, 일은 걷잡을 수 없이 커진다.

세인은 가던 걸음을 멈추고 허름한 나무통 위에 앉아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그의 생각을 방해하지 않으려는 듯.

어느새 병사 몇 명이 다가와 거리를 두고 경계를 섰다.

그가 지금 하는 생각은 별것 아녔다.

지배자로서 흔하게 서기 마련인 선택의 기로였다.

지배자는 언제나 큰 틀을 봐야 한다.

지금의 시대를 이해하고, 자신의 큰 틀을 거기에 대입한다.

그리고 그 큰 틀을 부서뜨리지 않는 선에서 여러 가지 선택을 해야만 한다.

세인은 지금의 시대를 파악하고 이해했다.

몬스터가 사라지다시피 한 세계는, 이제 인간들의 장으로 돌변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문제는 신화 속의 괴물들이 나타나리라는 것이었지만.

지금 당장은 인간의 시대인데, 자신은 그 안에서 무엇을 할 것인가?

그리고 글리터를 대표하는 성을 세우기 위해 무엇을 선택해야 할 것인가?

거기에 대해서 생각해보는 아침이다.

그런 세인의 곁에 와서 선 세리스는 그가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조금은 짐작을 했다.

그리고 그녀는 생각한다. 세인의 마음이 아프겠지만, 결국 영지민을 혹사해야 할 것이라고….

성벽과 성을 짓는 작업은 엄청나게 고단하고 힘들다.

그러나 그런 희생이 있지 않으면, 여긴 정말로 거점 하나로 끝날 뿐이다.

그런 작은 거점으로 만족할 세인이었으면 애당초 여기에 오지 않았겠지.

그녀는 그렇게 결론지었다.

“언제 왔습니까?”

정신을 차린 세인의 말에 세리스는 서운한 표정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는 세인의 명령을 이행한 마당이었다.

물론, 세인은 그것을 부탁이라고 표현했지만 말이다.

그뿐인가? 그간 그녀의 행동을 보면, 어떤 마음을 굳혔는지 바보라도 알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런데 지금 세인의 말에서는 거리감이 느껴졌다.

아쉬운 마음은 컸지만, 그녀는 그런 표정을 얼른 수습하고 입을 열었다.

“고민은 사람들의 이목이 없는 곳에서 하셔야죠. 강한 모습을 보여줘야 하니까요. 포장의 필요성에 대해서 아시잖아요.”

“이제 몬스터는 없는 거나 다름없어요. 아직도 거리감이 필요할까요?”

“당연하죠. 정착기입니다. 빈틈없는 모습을 보여주셔야죠. 사람들은 강한 리더를 가질 권리가 있습니다. 몇 안 되는 권리 중 하나잖아요. 그걸 챙겨주셔야죠.”

세인은 일어나 다시 걷기 시작했고, 세리스는 그런 그의 곁을 따라왔다.

그런데 온천으로 향하는 방향이 아니었다.

세인의 마음이 바뀐 듯싶다.

“마플은 잘 지낼 거예요. 맥이라는 기사가 옆에서 안전을 책임져 줄 테니,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세인님 걱정을 많이 하시더군요.”

고개를 끄덕인 세인은 마구간으로 향했다.

세인은 말 한 필을 끌고 나와 그 위에 올라탔다.

그리고 따라나서려는 세리스를 말렸다.

“답답한 기분도 풀 겸 혼자서 달리고 싶어요.”

“그럼 제 친구를 타고 가세요. 이그문트는 아주 좋은 말이에요.”

세인은 말 위에서 아름다운 금발 머리의 여성을 내려다보았다.

미모는 둘째치고, 엄청난 실력을 갖춘 이 기사를 놓친다는 것은 바보임을 선언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야말로 호박이 넝쿨째로 굴러들어온 셈이다.

그러나 한편으론 부담스럽기도 했다.

그 이유는 뭘까?

인간이라서 질투를 느끼는 걸까?

성검의 주인이라서?

라이트닝 블러드라 느껴지는 끌림에 대한, 막연한 반발심?

아니면 미래를 엿봐서?

“그럴 것까지는 없습니다. 그렇게 빨리 달리는 말은 필요 없어요. 주변 경관이 정신없이 스쳐 지나가는 것을 원치 않거든요. 그보다 세리스.”

“예.”

“평민들이 자유롭게 말을 타고 다니는 것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갑작스러운 질문에 그녀는 눈썹 사이를 좁혔다.

“지금까지도 그래왔잖아요?”

“상단이나 특별한 목적 때문에 이용하는 정도가 아니라. 크고 작은 집안의 아이들조차 모두 타고 다니는 것을 말하는 겁니다. 그들이 타고 다닐 것은 이제 당나귀나 혼혈마도 아니라는 것이죠.”

“질문의 의도를 모르겠어요. 그렇게 허락한다 해도 제대로 된 말은 비싸잖아요. 누가 타고 돌아다니겠어요?”

“이제 시대가 바뀌었습니다. 소수가 말을 타고 이동하기 좋은 편입니다. 그리고 곳곳에 숨어있는 몬스터마저 소탕하면 더욱 안전해질 거예요. 그런 돌변한 시대에 맞춰 땅 위의 인간들은 이제와는 사뭇 다른, 모습을 보이지 않으면 안 됩니다.”

“….”

“나는 미래에 절망이 다가올 것을 믿지만, 그거야 전에도 그랬죠. 지금의 자유 속에서 더 나은 지표를 만들어 내면, 인간은 더 큰 자유를 즐길 수 있습니다. 불안에 떨며 공포에 질리는 것도 자유. 이합집산을 반복하는 것도 자유. 행복을 추구하는 것도 자유. 당신 정도면, 당신 정도라면…. 내가 생각하는 틀을 깊게 이해했으면 좋겠습니다. 그 연장선에서 던져본 질문입니다.”

이그문트의 갈기를 쓰다듬으며 세인의 말을 듣던 세리스가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생각을 묻기 전에 측근으로서의 취급을 해주셔야죠.”

세인은 말을 몰고 나갔다.

경계병들은 점점 빠르게 달려드는 말을 보았지만, 그 위에 누가 탔는지 알고는 눕혔던 창을 다시 위로 세웠다.

말은 답답한 마구간을 벗어나, 아무런 제지 없이 주둔지 밖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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