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4
& 낯선 시대 속 인간들
탐사를 나갔던 행크와 더이스가 무리로 돌아오자, 세인은 사람들을 이끌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간단한 설명도 곁들였다.
“우리가 이제 가는 곳은, 전이라면 엄두도 낼 수 없었던 지역이다. 레인저들이 눈독을 들였지만, 점령하진 못한 곳이야. 그곳을 점령한 몬스터도 문제였고 주변에 또 다른 위험 요소가 있었거든.”
“지금은 텅 비어 있겠군요.”
“아직도 점거하고 있는 몬스터가 있다 해도 극소수일 거야. 전과 같을 리가 없지.”
눈 덮인 지역 위로 부는 칼바람이 여전했지만, 땅 위의 얼음은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눈 덮인 지역이 끝나갈 때쯤 선두에 선 세인은 말에서 내렸다.
그러면서 장갑을 벗었다.
꽁꽁 얼어버릴 것 같은 손을 바닥에 대어보니, 희미하게 지열이 느껴졌다.
그는 다시 장갑을 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제대로 가고 있는 게 맞는군.”
그가 다시 말에 올라타자, 장정들과 그에 딸린 일가족이 뒤를 따랐다.
말들과 소가 움직인 뒤로 발자국들이 꼬리처럼 남았다.
그 선은 넓게 드리운 세계수 지역 아래에서, 평행을 이루며 이어졌다.
그리고 병풍처럼 늘어선 산들이 나타났다.
그 밑에는 커다란 거울이 있어 그 산들을 거꾸로 비추고 있었다.
더이스가 추위에도 얼어붙지 않은 강을 보며 신기해할 때 세인이 말했다.
“바다와 연결된 강이야.”
“이 근방에 바다가 있습니까?”
그렇게 물으면서도 더이스는 약간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바다에서 불어오는 해풍은 반가운 존재가 아니었다.
아마 지금 느끼는 이 차가운 바람보다 수십 배는 더 아플 것이다.
굳이 그런 곳을 찾아가려는 이유가 뭘까?
이 강의 이전 지역까지 정찰 나왔던 그로서는, 아직 풀 수 없는 의문이었다.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여 보인 세인은 길을 재촉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지하에 바다로 이어지는 물길이 있었다.
물의 사막이라 불릴 정도로 광활한 공간이었는데, 바다까진 한참 걸린다.
하지만 당장 그런 곳에는 볼일이 없었다.
하얀 산들을 지나니, 살갗에 와닿는 기후가 몰라보게 따뜻해졌다.
물론 전과 비교해 그렇다는 말이다.
세인이 이끈 무리가 최종적으로 도착한 곳은, 강을 산이 둘러싸고 있는 장소였다.
그 호수는 다른 호수와 다르게 얼음이 끼어 있었는데, 앞은 탁 트인 평야였다.
설원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강 표면과 맞닿아, 그 위로 잔물결을 일으켰다.
산에서 내려온 새들이 끼룩끼룩하며 무리를 지어 날아가는 게 보이고, 그 밑나무들 사이로 언뜻언뜻 동물의 그림자도 있는 듯했다.
사람들이 머물기 나쁜 장소는 아니었다.
그렇다고 굳이 멀리에서 여기로 찾아와야만 하나 싶은 의문이 들었다.
말에서 내린 세인은 주변 탐색 명령을 내렸다.
병사들을 이끌고 나선 행크는 강 뒤쪽으로 사라졌다.
그가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지는데 시간이 꽤 걸린 탓은, 호수 면적이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지친 사람들을 쉬게 하고 있노라니, 행크가 되돌아오는 게 보였다.
그는 세인에게 다가오자마자 이런 말을 했다.
“다 비어 있습니다.”
“동물도 근처에 없나?”
“아뇨. 깊은 곳까지는 못 가보았지만, 최소한 몬스터는 없었습니다.”
행크의 보고를 들은 세인이 사람들을 이끌고 강 뒤쪽으로 움직였다.
강의 건너편.
산으로 이어질 듯, 경사와 나무들이 나타나는 곳은 눈에 띄게 따듯해 보였다.
드문드문 초록색을 뽐내는 수풀들도 보일 정도다.
말발굽이 닿는 땅은 딱딱하게 얼어있지 않았는데, 진흙처럼 질척였다.
온도가 따뜻하다는 증거다.
사람들을 이끌고 안쪽으로 더 들어가니 하얀 바위로 된 지역이 드러났다.
동굴이 뚫린 곳 밑에는 졸졸 흐르는 물들이 보인다.
그 물은 따듯한 김을 피워내고 있었는데, 주변에 온천이 있다는 증거였다.
그렇지 않다면 진작에 얼어붙었을 것이다.
병사들이 몇 개 조를 이루어 동굴 속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세인은 이제야 사람들로 하여금 여장을 완전히 풀도록 한다.
“여기가 바로 이제부터 우리가 머물 곳이다.”
그는 말에서 내리며 그렇게 선언했다.
* * *
아무래도 대륙의 정세는 전과 같을 수가 없었다.
드레퓨스가 서둘러 회군한 것에는, 실속을 챙기겠단 계산도 당연히 깔렸다.
대륙 전체에 퍼져있던 몬스터는, 어느 날 갑자기 중앙으로 모여들었다.
그런데 그마저도 한순간에 사라진 것이 아닌가?
몬스터가 중앙으로 밀고 내려오며 많은 인간이 죽임을 당했다.
그것이 중앙과 북쪽을 비워버리며 진공상태로 만들었다.
그렇다면 이제 그 무주공산들은 누구 차지가 되어야 하는가?
이 땅의 인간들은 지금까진 침략자들을 혐오하고 살아왔다.
몬스터로 인해 당한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인간애가 아주 두터웠다.
몬스터에게 맞서기 위해서는 그래야만 했기 때문이다.
이전의 반의반만이라도 몬스터가 남아 있었다면, 중앙의 몬스터가 사라진 원인에 대해서 조사를 했을 것이다.
지금 남은 것은 빈 땅이란 이름의 파이뿐이었다.
그것들이 모든 나라를 유혹하는 상황이었다.
성국과 바이테스의 군대가 회군한 것에 대한 진상 규명도, 중앙의 몬스터들을 누가 격멸했는지에 대한 것도 그 먹음직스러운 파이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 것만 같았다.
가장 격렬하고 빠르게 움직인 것은 역시나 드레퓨스였다.
각국에 사신을 보내 드레퓨스가 이번 원정에서 얼마나 많은 희생을 치렀는지, 그리고 최후까지 어떤 나라가 남아 원정의 책임을 다했는지를 떠들고 다니게 했다.
그 선전은 대중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고, 하나의 큰 인식이 되었다.
드레퓨스야 말로 대의를 위해 가장 많은 것을 희생한 나라니, 그 보상도 가장 커야만 한다는 것이었다.
권리에 대한 많은 줄다리기가 이어졌고, 바이칼은 발 빠르게 강대국들의 테이블에 앉았다.
부상당한 몸을 이끌고 그곳으로 행차한 그는, 자신의 정당한 지분을 주장했다.
또한, 도중에 몸을 빼낸 나라들에 대해 성토하길 주저치 않았다.
바이테스나 성국 같은 나라들은 그 진창에서 발을 빼내는 편이었다.
그들은 이미 풍요로운 남부에서, 깊고 넓게 뿌리를 내린 상태였다.
자급자족하는 상태에서, 바이칼처럼 뭔가 증명하고픈 생각도 없었고 욕심도 부리지 않았다.
그리고 인간끼리 피를 흘려가면서, 중앙과 북부 대륙에 발을 들이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바르보사,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오?”
“대륙일통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같은 씨를 뿌려도 땅이 다르면, 땅에 맞게 다른 작물이 자라는 판입니다. 어찌 수많은 인간을 하나로 통일할 수 있겠습니까? 같은 예절, 같은 생각. 그건 신도 하지 않은 짓입니다.”
바르보사가 잠시 목을 가다듬으며 뜸을 들이자, 황제는 턱을 까딱이며 계속 말할 것을 명했다.
“그게 설령 가능하다 해도 몇 대를 희생해야 할까요? 그 영광을 누리는 자손은 어리둥절해 할 것입니다. 맹목적인 선대의 의지를 좇아야 하는 상황 속에서요. 그리고 인간이 서로 몬스터처럼 굴며 피를 흘리는 게, 결과적으론 나라 전체에 큰 불명예를 가져다줄 것입니다.”
바르보사는 말은 이렇게 했지만, 바이테스의 땅이 좀 더 넓어졌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다.
하지만 황제가 많은 신하 앞에서 자신에게 질문한 뜻을 짐작하여, 실제 의중과는 반대로 대답한 것이다.
과연, 황제는 기꺼운 듯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의견을 수렴하는 모습을 내보였다.
약소국은 몰라도 이렇듯 주변 강대국들이 보기엔, 이리저리 날뛰는 바이칼은 모사꾼이나 광대처럼 보였다.
이런 질 낮은 침탈 행위에 동참하느니, 얼굴을 찌푸리고 돌아앉아 모른 척하는 것이 현 상황이다.
대놓고 드레퓨스를 성토하기엔 동맹국이라는 입장이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바이칼 자신은 지금처럼 실존적인 이익을 좇는 것에 한점의 회의감이나 의심을 두지 않고 있었다.
모양새가 몹시 나쁘지만, 엄청난 땅이 손에 들어올 수도 있는 일이다.
작은 나라들을 부추기고, 위쪽의 땅에 발 들여놓기를 주저하지 않은 드레퓨스.
그런 공작의 뒤에는, 수많은 백성의 피와 눈물이 전제되는 것이 당연했다.
안 그래도 전쟁에 지친 백성들은 다시 창을 쥐고 국외로 나가야만 했다.
바이칼이 내세운 명분과 보다 나은 미래로의 도약이라는 기치에 이끌려, 다시 본 지 얼마 안 된 가정을 등졌다.
그런 침략을 받은 위쪽 나라들로서는 참 분통이 터질 노릇이었다.
안 그래도 무너진 나라를 다시 일으켜 세우려 노력했고, 많은 의용군과 열사들이 고군분투했다.
중앙으로 모인 강한 몬스터들이 일시에 사라졌다지만, 각지의 몬스터들이 비에 씻겨 내려간 듯 마법처럼 사라진 건 아니었다.
전처럼은 아니지만, 몬스터들은 분명히 존재한다.
게다가 나라를 재건한다는 게 쉬운 일일 리가 없었다.
그런데 같은 인간으로서 도와줘도 모자랄 판에, 드레퓨스가 나라 안에 멋대로 들어와 휘젓고 다니는 것이었다.
그 속셈이야 뻔하고 말이다.
어쨌든 인간들 입장에서는, 이제 새로운 전기에 들어선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 전환점을 피부로 느끼는 사람들이 어떤 행동을 하게 될지는 아직 아무도 모른다.
사람들은 대륙에서 몬스터가 거의 사라졌다고 생각했다.
앞으로도 말이다.
이제 최소한, 예전처럼 몬스터 때문에 극심한 두려움을 느낄 필요는 없다고 여겼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앞으로 이제까지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끔찍한 괴물들이 나타난다는 것을 모르니까 말이다.
그들이 판단하기에 향후 몬스터들의 숫자는 점점 줄어 들을 것으로 보았다.
그러다가 아예 멸종해 버릴 수도 있었고….
“이제 인간들끼리의 시대가 도래했다. 여기에서 우리들은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서로에게 보여줄 수 있을 것인가? 그 안에서 이제까지와 다른 무엇을 증명할 수 있을까? 혹은 자칫 타락으로 이어질까 하는 우려도 든다.”
한 철학자는 이렇게 말하며 토론을 주도하기도 했다.
드레퓨스처럼 인간의 더러운 집단적 본성을 보여주는 것 외에, 다른 모습을 보여줄 수 있을까?
과연 인간은 이 낯설지만, 풍요가 약속된 시대를 맞아 어떤 변화를 꾀할 수 있을까?
이렇듯 기회의 시간 속에서 저마다의 생각이 깊어져 간다.
그 속에서 능동적인 행동을 꾀하는 인간들도 있었고, 수동적 모습을 보인 인간도 있었다.
나라마다 각기 다른 큰 틀을 고집했고, 그에 따라 개개인의 생활도 이제 변화를 맞이하고 있었다.
세인은 주변에 몬스터들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천막을 펼치게 했다.
사람들은 여러 패로 나뉘어, 한쪽은 앞에 보이는 동굴 안으로 들어가 청소를 했다.
그리고 뜨거운 물이 흐르는 쪽 위로 천을 펼쳐 연결했다.
온기가 흐르는 지면의 열을 그렇게 가두고 불을 피우니, 사방이 따뜻해지는데 그리 오래 걸리지 않는다.
“여기에서 더 이동할 일은 없을 거야. 그러니 군용 천막이든 뭐든 다 꺼내. 그런 뒤 땅에 덮고 위로 펼쳐. 그리고 아낌없이 불을 피워라.”
다른 사람들은 동굴 뒤쪽의 잡목들을 베어왔다.
그리고 그 무리에서 떨어져 나온 몇 명의 사람들은 주변을 살펴보러 걸어 다녔다.
몬스터들이 빠져나가고 한동안 새하얗게 쌓인 하얀 눈의 여백에, 이제 인간들의 분주한 발걸음이 찍혔다.
새 손님들의 발자국은 주둔지 주변을 빙빙 돌더니 중구난방으로 흩어졌다.
그 발자국들은 되돌아 왔다 싶으면, 다시 나가기를 반복했다.
그리고 동굴 주변으로 목책들이 세워졌다.
천들은 목책 위에서 여러 겹으로 쌓였고 바람에 펄럭이는 소리를 냈다.
세인은 자리를 잡자 주변을 더욱 정밀하게 정찰하도록 명령했다.
동시에 더이스를 불러 세계수 지역으로 떠나도록 했다.
더이스는 번우드에 도착하면 이곳의 위치를 알릴 것이었다.
그리고 세리스를 데리고 오겠지.
“거기에 있는 마법사가 여기로 올 수 있을까?”
“아비게일 말입니까?”
“그래 본인이 싫다면 어쩔 수 없겠지만, 의사 정도는 물어볼 수 있겠지.”
“적극적으로 추진해 보겠습니다.”
“강제적일 필요는 없어. 이제 와 여기에 앉아 있으니 생각난 거니까. 안 와도 그만이야.”
아비게일을 끌고서라도 데리고 와야겠다고 생각한 더이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떠나갔다.
세인은 커다란 천막 속에 앉아 편지를 작성했다.
그 안에 마플에 대한 것은 없었다.
그녀가 서운해할지도 모르지만, 처리해야 할 일이 산더미였고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그래서 그런 것까지 신경 쓸 여유가 나지 않은 탓이 컸다.
더이스를 내보낸 그는 나무 의자에 앉아 토양에 대한 보고를 뒤적여 보았다.
세계수 지역처럼 극상은 아니지만, 그래도 중간 정도는 턱걸이하는 상태였다.
하지만 거친 땅에 크게 구애받지 않고 자라나는 작물이라면 몰라도….
당장 밀 같은 것을 심기는 어려워 보였다.
그래도 잘 보살핀다면 점차 나아지겠지.
청동으로 만든 화로가 세인의 볼을 발갛게 물들이고, 그는 나무 책상 앞에서 미래에 대한 계획을 짰다.
정찰자들이 가지고 온 정밀한 지형을 바탕으로 목책 선을 만들었다.
날짜가 지남에 따라 그 위에 덧씌울 건축물들을 그려 보았다.
당장은 그 건축물들이 이차적인 방어선이 되어야만 했다.
그리고 나중에 지어진 튼튼한 돌 건축물에 거치적거리지 않도록 자리를 잡아야 한다.
상호 보완이 되게 말이다.
펜촉이 종이 위를 쓱쓱 긋고 지나갔다.
그는 그 위에 필요한 목재들과 석재를 어림잡아 끄적였다.
그러면서 드워프라는 글자를 쓰기도 하는 등 생각에 잠긴다.
주변에 돌산도 있을 테고, 여기 석굴 재질을 보면 쓸만한 돌을 구하는 게 어렵진 않아 보였다.
문제는 들어가는 힘과 시간이었다.
“노동력.”
세인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뭔가를 골똘히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