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3
& 꼭 떠나가야만 하는 사람
망자에 대한 애도와 물자 정리 작업을 마친 번우드는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들의 목적지는 세계수 지역이었다.
살아남은 숫자는 꽤 되었지만, 원래의 식량 외에도 연합군이 버리고 간 물자가 넉넉했다.
적어도 이동 간에 굶주릴 일은 없는 것이다.
오히려 식량도 그렇고 넘쳐나서 문제였다.
이동 속도가 늦어지니까.
하지만 둔한 움직임을 감수하고 나서라도, 거의 모든 물자를 끌어모아 품고 이동했다.
가이더의 우측 국경을 따라 거슬러 올라간 까닭은, 가이더 측과 마찰 빚기를 꺼렸기 때문이다.
이번 전투로 인해 얻은 것이 있다면 풍족한 물자 외에 더욱 굳건해진 단합심이었다.
거기에는 다크 엘프와 드워프가 연대한 것도 섞여 있었다.
아무래도 목숨을 걸고 같이 싸운 입장에서, 전보다 사이가 가까워지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순서였다.
멀리까지 운용되는 정찰조엔 다크 엘프들과 레인저들이 투입되었다.
또한, 힘 좋은 드워프들은 물건 나르는 일에 도움을 주었다.
가이더를 거의 다 지나갔을 무렵.
비비안은 멀리에서 말을 타는 세인에게 힐끔 시선을 주었다.
하지만 결국 그가 가이더쪽으로 시선을 두지 않는 것을 보면, 레드와 어느 정도 선을 유지하려는 것으로 보였다.
그의 입장에서는 레드측이 인간연합에게 괴물 취급을 받을까 걱정인 듯했다.
또 지금 레드는 우두머리가 된 상태였다.
그래서 과거에 그의 수하로서 활동했었다는 것을 묻어두려는 듯 보였다.
그래도 이건 아니지.
어차피 엮여도 깊게 엮인 마당이다.
같이 싸우기까지 했잖은가.
한숨을 쉰 비비안은 야만족 전사를 거느린 무에타이를 향해 말했다.
“목숨을 걸고 도와준 당신들을 절대 잊지 않을 것입니다. 제 이름으로 약속합니다. 저희가 어려울 때 도와주셨으니, 곤궁한 처지일 때 반드시 응답하겠습니다.”
난감한 표정의 무에타이가 머리를 긁적이며 대답했다.
“말씀을 편하게 하십시오.”
비비안은 그들에게 물자를 잔뜩 안겨주어 돌려보냈다.
어차피 물건은 남아돌았기 때문이다.
질 좋은 쇠, 천, 밧줄, 난로, 무기, 방어구, 생필품이 사방에 가득하였다.
간혹 이동 중인 마차가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바퀴 축째 부러지면, 길게 이어진 행렬 옆으로 바퀴가 빙글빙글 탈출하듯 굴렀다.
길을 이탈할까 혀를 차는 드워프들이 나와, 그 바퀴를 쫓는다.
드워프들이 짧은 다리로 달리는 걸 감상하는 것도 짓궂은 풍경이었다.
그러나 가끔 보이는 그런 모습 자체가 고된 행군 속의 낙이기도 했다.
세인이 신부를 꼭 잡아야 할 사람으로 생각했다면, 반대로 함께하지 않길 바라는 사람이 있었다.
달빛이 야공을 가득 채운 밤.
바람에 흔들거리는 천막 사이에서 세인과 그 떠나가야만 하는 사람이 만났다.
둘은 잠시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다가, 마플이 먼저 입을 열었다.
“저는 곁에 있을 거예요. 뭐라고 말씀하셔도 상관없어요. 제가 가봐야 어딜 가겠어요?”
그녀는 방금 세계수 쪽으로 가달라는 말을 들었다.
“언제나 그랬듯이 곁에서 제 할 일을 하고 싶다고요. 어떤 하녀들도 저만큼 능숙하게 시중을 들 수는 없을 거예요.”
세인은 마플의 얼굴을 계속 응시했다.
그러면서 다시 무거운 어조로 말을 꺼냈다.
“알아, 나도 알고 있어. 하지만 떠나가야 해. 난 여기에 남을 거야.”
“그러니까 왜 여기에 남으시려고 하는 거예요? 그냥 다 같이 세계수 쪽으로 가면 되잖아요?”
한 번도 세인의 결정에 토를 단 적이 없던 마플이 처음으로 성을 내며 이야기했다.
그녀가 성을 내는 이유는, 세인과 떨어져서 자신만 아늑하고 안전한 곳으로 가야 하기 때문이었다.
물론 이것에 그녀는 아직 동의하지 않은 상태다.
“본의 아니게 이상한 것에 손을 대 버렸어. 운명을 믿진 않지만, 거기에 휘둘릴 수밖에 없어. 거기에서 달아날 수는 없을 거야. 그게 힘에 대한 책임이든, 세계에 대한 양심이든, 몬스터들에 대한 나의 증오든 뭐든…. 결국 속박되어 버렸다는 것만은 확실히 알아.”
“하나도 알아듣지 못하겠어요.”
마플은 발치에 다가오는 검은 개를 안아 올리며 투덜거렸다.
세인은 검은 개의 까만 눈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안전할 것이다.
풍요로운 세계수 지역에 들어갈 것이고, 저 개가 끝까지 지켜 줄 테니까.
정말로 안심이었다.
이제야 그는 마플을 언데드로 만들었단 죄책감에서, 아주 조금이나마 벗어나는 기분이 들었다.
“여기에서 댐을 만들어야 해. 그래야 홍수에 대비할 수 있는 거야. 그리고 그들에게 경고를 해주려면, 그들의 테이블 한쪽에 앉을 만큼 영향력 있는 자가 되어야 하겠지.”
마플은 계속 알아듣지 못하겠다며 투덜거렸고, 세인도 꼭 알아들으라고 하는 말은 아니었다. 그냥 솔직히 말한다는 것 자체에 의의를 두었다.
그는 마플에게 다가가 찬바람 속에 서 있는 그녀의 옷깃을 세워주며 다시 말했다.
“그동안 수고했어, 마플. 정말 고마워. 당신이 내게 어떤 존재인지는 알지? 나는 내 가족이 세계수 지역에 가서 편하게 지냈으면 좋겠어. 거기에는 현명한 지도자가 두 명이나 있고, 그들은 서로를 보완해 줄 거야. 거기는 춥지 않고 식물도 잘 자라. 괴물들이 남아 있겠지만, 깊숙이 들어가지 않으면 괜찮고. 거기는 아주 넓지. 이건 기회야. 열심히 싸웠고 조금 전까지 힘들었던 사람들이 쉴 기회 말이야. 난 당신이 꼭 그 기회를 받아들였으면 좋겠어.”
세인은 마플의 입이 벌어지려 하는 것을 막고, 무거운 음성으로 속삭였다.
“나는 당신에게 명령할 자격이 없어. 아랫사람 이전에 내 가족이니까. 하지만 반대로 가족이니까 이렇게 명령 같은 부탁을 요구할 수 있는 거야. 내겐 그럴 권리가 있어. 나는 진심으로 당신을 가족이라고 생각하니까. 그러니까 가줘. 세계수 지역으로 가서 행복하게 살아줘.”
그러면서 세인이 마플을 끌어안는데, 중간에 개가 숨 막히는지 컹컹하는 소리를 냈다.
하지만 세인은 개의치 않았다.
마플은 눈물이 그렁그렁한 얼굴로 속삭였다.
“하지만 영주님, 제가 없으면 이제 당신을 누가 보살피나요?”
그러니 세인은 말없이, 그녀를 더욱 꽉 껴안을 뿐이었다.
* * *
눈의 허리띠 지역에 들어서자 이동속도는 현저히 느려졌다.
마법과도 같은 혹한이 몰아치는 공간, 그 어디쯤에서 세인이 탄 말이 멈춰섰다.
그리고 일단의 무리가 그의 뒤로 몰려섰고, 곁의 코다로가 입맛을 다셨다.
“정말로 남을 건가요? 이 삭막한 곳에?”
“가서 비비안님을 도와주십시오. 코다로님이 도와주시면, 모두가 그녀 품에서 번영할 수 있을 겁니다.”
그동안 코다로는 몇 번이나 세인을 말리려고 했지만, 세인은 요지부동이었다.
그리고 눈의 허리띠 지역에 남겠다는 결심을 계속 유지했다.
코다로 입장에서는 마검을 버리라고 무작정 말할 수도 없는 게, 세인에게 자초지종을 들어 미래에 일어날 일을 알고 있으니까 말이다.
세인이 검을 버리고 책임감에서 자유롭게 되는 것도 좋지만, 그건 다가올 암흑의 시간 속에서 절대 현명하지 않은 행동이었다.
아니 애초에 마검의 짝으로 태어난 세인이, 과연 마검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을지나 의문이었다.
비비안과 코다로는 마지못해 세인과 이별했다.
그러면서도 ‘그가 어느 정도 분투하다가 돌아오겠지’라는 생각을 했다.
세계수 지역에 비교하면, 이곳은 몬스터가 줄어들었다곤 하나 여전히 위험하고 추운 곳이니까.
“지치면 돌아오세요. 여기에 거점 정도를 만들면 좋을 거예요. 파수꾼들이 상주하면 좋을 곳이니까요. 저는 거기에서 그쳤으면 좋겠습니다. 서로 추운 곳은 지긋지긋하잖아요.”
비비안은 그렇게 말하며 세인의 손을 꽉 잡았다가 놓았다.
코다로도 여기에 오래 머무는 것은 현명한 행동이 아니라고 말해 주었다.
머지않아 세계수 지역에 합류하길 바란다고도 말하며 말이다.
세인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런 그들을 배웅했다.
곧 세인과 재회할 것으로 생각하며 멀어져 가는 사람들도 많았다.
비비안과 코다로는 일단 지친 사람들을 고향으로 인도하고, 쉬게 해줘야 한다는 책임감을 느끼고 있었다.
세인은 가능한 많은 사람을 세계수 지역으로 보냈다.
나중에 다시 오게 되는 상황이 일어나건 말건.
그가 현재 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의 영지민이던 사람들조차도 올려보내는 것이었다.
일단 지친 사람들에게는 휴식이 필요했고, 눈의 허리띠같이 추운 곳에서는 그게 힘들었다.
맥 같은 경우는 번우드로 올려보냈다.
세인 소속 영지민을 인솔할 사람으로 제격이었고 말이다.
영지민들은 꽤 많은 수가 남기를 희망했다.
세인으로서는 그들이 이해가 되질 않았다.
그는 억지로나마 영지민을 세계수 지역으로 이동하게끔 했다.
그리고 그런 인솔 책임자로 맥이 있는 것이었다.
그는 맥과 헤어진 후 세리스를 불러서 많은 걸 생략한 채로 말했다.
“당신에게 부탁할 것이 있습니다.”
“말씀하십시오.”
“마플을 세계수 지역까지 부탁합니다.”
세리스는 세인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게 첫 번째로 제게 내리는 명령입니까?”
“부탁입니다. 제게 있어 정말 중요한 사람이거든요.”
고개를 끄덕인 세리스는 세인을 떠나갔다.
물론 다시 돌아올 것이다.
떠나는 자와 남는 자들 속에서, 난처한 것은 머독과 레인저들이었다.
그들은 그동안 정말 열심히 싸웠다.
그리고 세인이 있는 곳을 보면, 그들의 경험과 지혜가 필요한 부분이 분명 있었다.
머독 자신도 과거 세인과 함께하겠다고 말했고 말이다.
그런데 다 떠나, 따뜻한 지방의 초원과 이제 보기만 해도 지긋지긋한 곳 중 한 곳을 택하라면 뭘 선택하겠는가?
세인은 그들 앞에서 충성을 이야기해가며 굳이 잡지 않았다.
그 마음을 충분히 이해했기 때문이다.
이 추운 곳에 남겠다는 쪽이 이상한 것이었다.
마지막까지 주저하는 머독 앞에서 그가 짐을 덜어주었다.
후방 쪽에서 버티고 있다면, 결국 든든한 응원군이 될 거라고 말해준 것이다.
“면목이 없습니다.”
고개를 숙이는 머독 앞에서 세인은, 고생은 이미 충분히 했다고 말했다.
그리고 누구나 행복을 추구할 권리도 있다며, 그를 다독였다.
이미 피 흘리는 전쟁도 치른 마당에 그들의 선택을 존중하지 않을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다.
대규모 행렬에서 빠져나와 남겨진 세인의 무리는 잠시 쉬었다.
겹겹이 천막을 치고 바닥에 천을 깔아놓았다.
그리고 사 일간 정비하며 머물렀다.
그 안에서 사람들은 따뜻한 음식을 해 먹고, 몸의 열기를 보충했다.
다시 힘차게 움직이기 위한 웅크림이었다.
물론 그 와중에도 쉬지 못하는 부류가 있었으니.
타인에게 모범이 되고, 귀감이 돼야 하는 더이스와 행크였다.
“으으 얼어 죽겠다. 이게 무슨 고생이람.”
두꺼운 천을 얼굴에 둘둘 말은 행크가 투덜거리면서 말의 갈기를 쓰다듬었다.
옆의 더이스는 식량이 담긴 가방을 뒤적이고 있다.
둘은 지금 세인이 말한 지역을 탐방하러 나왔다.
“이봐 더이스. 왜 나무가 있는 지역으로 떠나지 않은 거야? 가만 보면 자네는 고생길을 찾아가는 것 같아.”
더이스는 물건이 잘 안 찾아지는지, 가방을 뒤적이며 퉁명스레 대꾸했다.
“이런 말 전에도 한 번 들어본 적이 있는 거 같은데요?”
행크는 옆에서 분주한 더이스에게 시선을 돌리고, 주머니에서 지도를 꺼내 펼쳤다.
그 지도는, 레인저 시절 기억을 더듬은 세인이 작성한 것이었다.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머독의 보완을 거쳤다.
“맥을 따라, 따뜻한 지역으로 가면 좋잖아.”
“안 그래도 대단한 여기사 한 명이 들어와서 기분이 싱숭생숭한데, 거들지 마세요. 지금은 아니지만, 거기에 갔다가 영지들끼리 알력이라도 있으면요?”
“두 분이 알력이 일어나도록 놔둘 분들처럼 보이나?”
“그리고 믿을 수 있는 지도자 밑에 있는 게 가장 안전하잖아요. 전 세인님에게 믿음과 충성을 바쳤습니다.”
한때 땅에 충성을 바치던 그들은 이제 전에 비해 많이 달라져 있었다.
그것만은 의심할 수 없는 사실이다.
드디어 더이스가 술병을 찾아 행크에게 건네자, 행크는 머리를 긁적거렸다.
그걸 보고 뭔가 오해했는지 더이스가 말했다.
“괜찮아요. 술기운 아니면 이렇게 돌아다니는 게 더 힘들다고요. 몇 모금 마신다고, 말에서 떨어지겠어요? 전처럼 몬스터가 많이 돌아다니는 것도 아닌데.”
“으음….”
그게 아니고….
사실 지도를 보면서도 여기가 어딘 줄 모르겠다고 말하려던 행크였다.
하지만 그는 말을 아끼기로 마음먹었다.
잠시나마 더이스의 정신건강을 위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