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은 왕 마검의 주인-101화 (101/307)

# 101

& 고민의 일주일

연합군은 대패하여 뒤로 쫓겨났다.

당면한 문제는 벌어질 추격전이었다.

바이칼은 공포에 질려 정신을 차리지 못했으므로 다른 인물이 나서서 수습해야만 했다.

여기에서 요구되는 최소한의 처리는 매복까진 아니더라도 가까이에 진채를 세우고, 패잔병을 수습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병력은 모래알처럼 흩어져 사방팔방으로 달아났다.

다시 그런 그들을 수습한 것은 일주일이나 지나서였다.

바이칼이 뒤늦게 정신을 차린 것이다.

그동안 추격전이 벌어졌다면 꽤 많은 수의 인간들이 죽었을 것이나, 번우드는 그러지 않았다.

현명한 행동이라고 보기는 어려웠지만, 번우드 쪽에서는 패주한 인간들의 군대를 따라가 등에 칼을 박아 넣는 행동은 생각지 않았다.

다만 격전지의 뒷수습을 할 뿐이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바이칼은 평원에 임시 주둔지를 만들고 잠시 고민에 빠졌다.

전쟁이란 것이야 원래 승패가 반복되기 마련이었다.

한번 심하게 패했다고 해서 모든 게 결정 나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문제는….

‘이길 자신이 없어.’

다시 싸워도 이길 자신이 없다는 것이다.

요점은 저 불가사의한 힘을 규명하는 것도, 하늘을 저주하거나 분노에 몸을 맡기는 것도 아니었다.

다시 붙어도 승리를 장담할 수 있느냐가 그에게 주어진 냉혹한 현실이었다.

그리고 그런 현실에 대한 대답은, 조금 전에 생각으로 흘러나온 마당이다.

게다가 생각해보면 이 정도에서 멈추는 것도 나쁘지 않아 보였다.

어차피 바이테스나 성국 동맹들이 떠나간 마당에, 북의 허리띠 지역을 잘 건너갈 수 있을지가 의문이었다.

저 앞에 버티고 있는 놈들을 어떻게 우회한다고 해도, 세계수 지역으로 들어서면 본격적인 전쟁이다.

어차피 중부 지역을 거쳐오면서 이익은 다 거둔 마당이다.

나중에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 것은 충분히 이뤘다.

바이칼은 그렇게 생각했다.

장군들은 말도 안 되는 장면을 목격한 탓인지, 다시 싸우자고 말하는 기색이 아니었다.

오히려 나아가 싸울 것을 바이칼이 요구할까 봐 전전긍긍하는 눈치다.

이런 놈들을 데리고 전투를 다시 벌여야 한다니 영 탐탁지 않았다.

남은 것은 자존심의 문제다.

바이칼의 개인적인 마음이야 당장 다시 앞으로 나가 패퇴시킨 놈들과 붙고 싶었다.

스멀스멀 몸을 타오르고 기어오르는 공포감을 뿌리째 뽑기 위해서라도 말이다.

이대로 후퇴했다간 평생 두려움에 벌벌 떨면서 살 것 같았다.

왕으로서 비참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는 그런 자신의 마음을 필사적으로 억누르며 회군을 지시했다.

마지막에 큰 낭패를 보긴 했어도, 이 정도에서 그치고 돌아가면 얻은 것이 더 많은 전쟁이었다.

그런데 다시 한번 크게 패하면 정말 문제가 걷잡을 수 없어진다.

권리를 주장하는 것도 힘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었다.

어차피 중앙의 괴물들은 다 없어진 마당이다.

연합 원정군은 중앙을 차지한 괴물들이 소멸했다는 점에서 쾌거를 이룬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 승리를 향유하려면 더는 군사적 손실이 있어서는 안 된다.

“본거지까지 쳤다면, 정말 역사에 길이 남을 것을….”

미련이 담긴 말을 내뱉으면서도 결국, 바이칼은 군대를 돌렸다.

그는 지금 자신의 행동을 미래엔 후회할 것이라는 걸 알았다.

하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안될 걸 알면서도 사사로운 감정 때문에 대병력을 완전히 증발시키기에는, 왕이라는 자리가 절대 가볍지 않았다.

*  *  *

“이러다 버릇되겠군.”

코다로는 다시 개인 천막 안에서 깨어났다.

눈을 몇 번 깜박이던 그는 마지막으로 자신이 낙마했던 기억을 떠올린다.

손을 이마에 가져다 대며 끙 소리를 내던 그는 상반신을 일으켜 세웠다.

그러자 전과 달리 곁에서 자리를 지키고 앉아 있던 비비안이 눈에 들어왔다.

“정신을 차리셨습니까?”

“보시는 대로….”

코다로는 그렇게 대답하며 비비안의 머리 위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코다로의 눈빛이 자신의 왕관에 머무는 것을 알아차리곤 쓴웃음을 지어 보였다.

“뒤처리를 진두지휘할 자리가 필요해서요.”

“예상했던 것보다 잘 어울립니다.”

어깨를 으쓱이며 말한 코다로는 외투를 집어 입으며 비비안의 설명을 들었다.

그녀의 단조로운 목소리 속에서 코다로는 자신이 일주일 동안이나 기절해 있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이 정도면 목뼈가 부러지지 않은 게 다행이지. 정말로 정신을 잃는 게 버릇이 되겠어.’

비비안과 함께 천막의 입구를 걷고 밖으로 나오니, 매캐한 연기가 가장 먼저 그들을 맞아 주었다.

시체들을 태우는 냄새는 그 안에 없었다.

전염병이 창궐할까 봐 주변을 불태우는 냄새였다.

타닥타닥 타들어 가는 잡목들 밑으로 쌓인 검은 재가, 땅 위에 가죽처럼 덧씌워졌다.

코다로가 있던 천막 주위로 수많은 천막이 모여 있었다.

그사이를 사람들이 분주히 돌아다니고 있었다.

그들은 전쟁터에서 가지고 나온 물건들을 짊어진 채 어딘가로 옮기고 있다.

수많은 시체를 묻어줄 엄두는 내지 못하고, 대신 주인을 잃은 물건들을 챙기는 이 모습은 일주일간 꾸준히 이어졌다.

“그가 일으켜 세웠던 시체들은요?”

세인이 일으켜 세운 시체들에 정신을 빼앗긴 것이 낙마의 화근이었다.

걸어가며 코다로가 묻자, 비비안이 대답했다.

“다시 땅에 몸을 뉘였어요.”

“….”

그 후로는 침묵이 이어졌다.

그들은 물론이고 많은 사람이 세인이 일으킨 힘을 보았다.

그 힘은 가공스러웠고, 마치 악의 대변인 같았다.

그런 광경을 보고도 아무런 생각이 없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시체를 일으킨 그 보석은 다크 스타라고 불리는 것이더라고요. 오랜 옛날에 마왕 유고가 썼던 물건이죠.”

침묵을 깨고 입을 여는 비비안 옆에서, 생각이 복잡한 코다로는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둘은 지금 세인이 있는 곳으로 가고 있다.

세인은 번우드 연합군이 만든 진지에서 떨어진 곳에 자리를 잡았다.

그곳은 결과적으로 세리스 외에 아무도 다가오지 못하는 장소가 되었다.

군수 물자들을 수거하기 위해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

그리고 그 속에 뒤섞인 드워프들의 노래를 멀리에서나마 들으며, 세인은 커다란 바위에 등을 기댄 채 펄펄 끓는 냄비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냄비 안에 당근과 고기들을 넣고 있는 것은 바로 세리스이다.

세리스는 바람에 날려온 재가 볼에 덕지덕지 붙었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무심히 냄비 안의 재료들을 나무 막대기로 저어댈 뿐이었다.

그러면서 투덜거렸다.

“이래서야 제가 요리사인지, 기사인지 모르겠어요.”

일주일 만에 처음으로 입을 연 그녀도 그녀지만, 세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일주일 동안 누구와도 이야기하지 않고 생각에 빠져 있었으며….

세리스는 일언반구도 없이 그런 그의 곁을 지켰었다.

하지만 그런 시간도 이제 끝인가 보다.

발소리를 들은 세리스가 고개를 돌리자, 세인도 따라 한다.

비비안과 코다로가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식전인데 같이 식사해도 괜찮겠습니까?”

코다로의 말에 세리스는 세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세인은 일주일 만에 입을 열었다.

“아시겠지만, 이들은 저의 친구입니다. 경계할 필요는 없어요. 하지만 제 곁에 있어 주세요.”

“왜죠?”

“같이 목숨을 걸고 싸워준 당신은, 이제 이 이야기를 들을 자격이 있으니까”

“….”

비비안은 바닥에 아무렇게나 굴러다니는 보석과 마검을 일별한 후 코다로와 함께 바닥에 앉았다.

누군가에게는 미치도록 갈구하는 힘이 될 수도 있겠지만, 정상적인 삶을 원하는 생물에게는 저주스러운 물건이나 마찬가지였다.

세인은 자리에 앉은 셋을 바라보며 그동안 있었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하나도 빼놓지 않고 말이다.

대머리 괴물을 만난 후 그가 들려준 이야기 같은 것을 남김없이 이야기했다.

그리고 세리스를 고려해, 비비안과 코다로가 알고 있었던 사실마저도 자세히 이야기했다.

그가 이야기를 끝내자 손도 대지 않은 음식이 싸늘하게 식어 있었다.

대신 뜨거운 차만이 몇 번 그들 사이를 맴돌았다.

팔짱을 낀 코다로는 바닥에 쓰레기처럼 굴러다니는 마검을 보았다.

저게 엄청난 힘을 준다는 사실은 잘 알겠다.

하지만 전혀 탐나지 않았다.

저것을 든 대가는 끔찍한 운명의 굴레 안으로 끌려 들어가는 식이었다.

전무후무한 강력한 힘일지라도, 그 힘은 결국 노력해서 쌓아 올린 힘도 아니다.

그가 생각에 잠겨 있는데, 비비안이 세인에게 물었다.

“그래서. 앞으로 어쩌실 생각인가요?”

세인은 비비안을 보며 대답했다.

“중앙으로 가서 자리를 틀까 생각 중입니다.”

“그 의미는 중부 사람들에게 당신의 발언권이 없으니. 중앙으로 내려가 존재감을 알리고, 미래의 위협에 대해 경고하시려는 뜻도 있겠죠. 하지만 그러시면 안 됩니다.”

비비안이 그렇게 말하자 코다로와 세인은 그녀를 바라보았다.

세리스는 어느새 그런 셋과 거리를 둔 채 떨어져 있는 상태였고 말이다.

비비안은 두 남자의 눈빛을 정면으로 받으며 자기 생각을 이야기했다.

“저는 가능한 한 오래 안정적으로 살고 싶어요.”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이미 많은 희생을 치렀어요. 그 종말이 언제 올지 모르더라도, 그동안 우리 밑의 사람들을 쉬게 해주어야만 해요. 세인님이 중앙으로 가면 침략자가 돼요. 그것도 몬스터 처지의 침략자죠. 당연히 그들은 결집하겠죠. 그걸 노리신 거겠지만, 그렇다면 저희는요?”

“….”

“당신이 간다면 우리도 같이 갑니다. 앞서 말했듯이 우리는 이제 좀 쉬어야 해요. 세상의 운명이 걸린 일이라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큰 전투를 치룬지 이제 한 달도 되지 않았습니다. 세인님.”

세인을 부르며 비비안은 마검을 눈짓했다.

“당신이 생각하는 책임은 어디에서부터 어디까지입니까? 저 마검이 당신에게 강요할지라도, 우린 도망칠 수 있어요. 적어도 그런 시도 정도는 할 수 있어요. 그게 비겁한 걸까요? 그 정도 행복 추구권은 우리에게도, 우리 밑의 사람들에게도 있습니다.”

“나는….”

세인의 말을 예상했던 것인지 묵묵히 있던 코다로가 손을 들어 그의 이야기를 저지했다.

그리고 자기 뜻도 밝혔다.

“우리는 동맹이고, 운명 공동체에요. 그런 사실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견고해집니다. 왜냐하면, 방금 전도 그러하듯 목숨이 달린 전투를 같이 이겨냈으니까요. 당신 입장이, 곧 내 입장입니다.”

“….”

“그리고 밝히건대, 저도 아무리 대륙을 위해서라지만, 대륙의 중앙까지 가서 화살받이를 자처할 생각은 없습니다. 인간 모두의 오해와 비난을 감수하면서까지 말이죠. 그런 경험은 트리엔 같은 곳에서 겪은 거로 충분합니다.”

세인은 코다로의 얼굴을 보았다.

그리고 시선을 돌렸다.

비비안의 작고 아름다운 얼굴과 머리 위의 왕관에 세인의 눈빛이 머물렀을 때, 다시 소녀의 작은 입술이 열렸다.

“위쪽으로 되돌아가야 해요. 굳이 당신이 희생할 필요는 없어요. 왜 침략자, 몬스터의 대표란 오명까지 뒤집어쓰면서 예고를 하려고 생각하세요? 그런 오해를 스스로 자초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

“세인님이 끝내 그걸 하고 싶다면, 최소한 지금보다는 인내심을 가지고 천천히 하도록 해요. 세인님이 여기에서 중앙으로 간다면, 주위 사람들을 더 큰 고통의 지대에 몰아넣은 결과가 될 거예요.”

세인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중앙에는 저와 소수만 갑니다.”

“저 마검을 가진 당신은 분명 엄청난 힘을 가진 존재입니다. 하지만 그거로도 강제할 수 없는 것들이 세상에 몇 개 있어요. 그중 하나는 당신에 대한 저의 우정입니다. 그리고 다른 것 중에서는, 당신을 따르고자 하는 사람들의 신의와 마음도 있겠죠.”

비비안은 세리스를 향해 턱짓하며 말했다.

가지런히 두 손을 모은 비비안은 지금 어느 때보다도 엄숙하고 무거워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이 순간은 그들 전체의 미래를 결정하는 상황이나 다름없었으니까.

“저이도 당신을 따르고 있어요. 그녀는 그래서 목숨을 걸고 앞으로 나아가 전투를 벌였습니다. 당신이 중앙으로 간다면, 저희처럼 그녀도 같이하겠죠. 그렇게 생각하지 않나요? 세인님?”

“….”

세리스가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을 바라본 세인이다.

그걸 보며 세인은 일주일간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던 자신이 너무나도 조야하게 느껴졌다.

모든 희생을 감내하고 홀로 서려 했던 비장한 결심이… 지금 비비안의 말을 들으니, 결국 서투르게 자신만 생각했던 꼴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저 기사는 대륙의 사람들이 봐도 그들과 다르지 않은 인간입니다. 그러나 향후 그녀는 어떤 오욕을 감당해야 할까요? 그 부당함을 우리 말고 누가 알아줄까요? 그건 피할 수 없는 미래일지도 모르겠어요. 하지만 당신이 그녀의 주인이라면, 적어도 그걸 부추길 필요는 없다고 저는 생각해요.”

그때 코다로가 끼어들었다.

“세인님. 당신은 비비안님에게 같은 지도자로서 저런 기본적인 것을 지적받을 정도로, 지금 마음이 흐트러진 것입니다. 당신이 보인 힘은 강력하지만 공포스러운 것입니다. 그걸 저도 이해해요. 분명 죄책감도 수반하겠죠. 하지만 제 생각은 이렇습니다.”

그의 손가락이 마검을 가리켰다.

그리고 유고의 왕관이자 보석인 다크 스타도.

“저것들이 어떤 두렵고 사악한 힘을 가지고 있든, 당신은 그걸 휘둘러 저희의 목숨을 살려냈어요. 나는 지금 내가 살아있다는 것에 굉장히 만족하고 있고, 그것에 고마움을 느낍니다. 시체를 일으키지 않았더라면, 나와 주위 사람들은 다시 죽어야만 했겠죠. 그렇다면 대체 뭐가.”

코다로는 보란 듯이 가볍게 두 손을 들어 올렸다.

“대수인가요?”

비비안도 그런 그를 거들었다.

쐐기를 박듯이 말한 것이다.

“돌아가요. 우리의 보금자리로, 다크 엘프들이 빌려준 땅으로 돌아가요. 당신이 어떤 생각을 하든 저희 곁에 있어 주세요. 그건 저희의 정당한 바람입니다. 왜냐면 당신이 원하지 않을지라도, 우린 당신 곁을 지킬 테니까요.”

세인은 창백하게 질려있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회색빛의 하늘은 이제 비를 뿌리려는 것일까?

내려간 기온을 생각해 보면 눈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가 입을 열자 희미한 입김이 새어 나와 허공에 흩어졌다.

몇 번 그렇게 입김을 토해내던 그는, 결국 이렇게 말했다.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중앙은 포기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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