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9
& 죄악의 관을 뒤집어써라 (1)
‘얌전한 고양이가 먼저 부뚜막에 올라간다더니….’
바르보사는 바쁘게 천막을 걷고 있는 성기사들을 보다가 피츠에게 물었다.
그의 입에서 나간 말은 ‘이게 다 대체 뭐요?’라는 질문이 아니었다.
“진심이오?”
그러자 피츠는 주어가 빠진 말을 용케 알아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바르보사는 침음성을 내며 요의도 잊어버렸다.
“진짜 이 상황에서 발을 뺀다고? 맞붙기 전도 아니고 적이 지척이요. 뒷감당을 어떻게 하려고 그러시오?”
“재판에 회부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뭐가 걱정입니까? 저는 죄지은 게 없고 떳떳한데. 그리고 제 변호에 나설 증인들도 많을 겁니다.”
피츠는 바쁘게 돌아다니는 성기사들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덧붙였다.
“물론 저도 그들의 증인이 되어주어야 하겠지만.”
“정말 의외군. 당신같이 책임감이 강한 사람이 이럴 줄이야. 뭐 나야… 저어기 어디쯤 있는 어떤 왕이 약 오를 걸 생각하면, 손뼉을 치고 싶지만 말이오. 정말 의외로군.”
바르보사의 신기한 동물 바라보듯 한 시선이 부담스러웠는지, 피츠가 말했다.
“오래전 일입니다만. 제가 아무 죄도 없는 사람을 한번 심하게 때린 적이 있습니다.”
“….”
“신앙 수업을 받던 어떤 마법사였습니다. 세상 물정 모르던 그 학자는 이렇게 말하더군요. 괴물들이 있어서 인간이 그걸 반면교사 삼고, 성숙해질 수 있는 거라고 말입니다. 그들이 있어서 우리가 끈끈해질 수 있고, 다툼도 적은 거라고요.”
“흐음. 나라도 참지 못하고 몇 대 때렸을 거요. 골방에서 벗어나 세상을 돌아다녀 보면 그런 소릴 못하지.”
“저는 괴물 앞에서는 목숨을 풀과 티끌처럼 던지고 싸울 겁니다. 그리고 그걸 떠나 부끄럽지만, 저는 맹렬히 괴물을 증오합니다. 하지만 인간은 아닙니다.”
바르보사는 사실 피츠의 말에 동의하지만, 그의 미래도 걱정되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해보았다.
“상대의 계략일지도 모르오. 우리가 그것에 감쪽같이 넘어간 것일는지도 모르지.”
그러나 피츠는 고개를 저었다.
“우리 중의 추기경 후보가 상대 기사에게 은혜를 입었습니다. 위독할 때 간악한 상단 놈들이 물건을 팔지 않았죠. 터무니없는 액수를 불렀어요. 그런데 그 기사는 선뜻 다이아몬드를 내놓더란 말입니다.”
“….”
“이 모든 게 계략이라면, 그것참 엄청나게 정교하고 공교로운 계략이군요. 이 정도의 속임수라면, 교황님도 감쪽같이 넘어간 저를 크게 탓하진 않으실 겁니다.”
결국, 바르보사는 몸을 돌리던 피츠를 잡지 못했다.
걸어가는 피츠는 마지막으로 말을 덧붙였다.
“저희도 덩치가 크다 보니까 분명 자유로운 집단은 아닙니다. 이익을 추구하며 정치색을 띠고 있죠. 그러나 멀리에서는 신을 섬기며, 가까이는 의인 옆에서 싸웁니다. 그게 퇴색되어 버리면 굳이 이 땅 위에, 저희가 저희로서 설 필요는 없는 거죠.”
마치 원래대로라면 오히려 번우드 편에서 싸우고 싶다는 투였다.
하지만 그건 안 될 말이다.
바르보사는 성기사들이 떠나가는 것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그러다가 한숨을 푹 하고 쉬었다.
“생각해보면, 내가 언제부터 이런 고민을 하고 살았는가. 생각을 안 하는 게, 바로 내 생각의 장점이야.”
그리고 대장군에게 가서 자신의 의사를 밝혔다.
다음은 필립스가 있는 천막이었다.
그는 잠들어 있는 조카를 툭툭 치더니 이렇게 말했다.
“불의에 가담하는 자는 희극에 나오는 주정뱅이만큼, 혹은 훨씬 더 조롱받기 마련이다. 그러니 돌아가자. 차라리 무책임이 불의보다는 낫다.”
물론 뒤늦게 사정을 파악한 바이칼은 펄펄 뛰었다.
성국과 바이테스 뿐만 아니라, 그동안 눈치 보던 다른 나라들도 이김에 뒤로 빠져 버렸다.
드레퓨스의 이웃인 고이트가 바로 그 좋은 예였다.
두 나라는 앙숙이었으니까 그럴 만도 하다.
돌아가는 길에 바르보사는 마차 속에서 피식피식 웃었다.
새삼 생각해 보니, 이렇게 무책임한 일을 저지른 자신이 어이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그는 밤중에 술잔을 기울이며 조카 앞에서 중얼거리곤 했다.
“하지만 나는 희극 속 주인공이 될 생각이 없다.”
그러면 그의 조카인 필립이 위로랍시고 농담을 던졌다.
“하긴 삼촌은 현역 배우로 뛰기에는 연로하시죠.”
훗날 제국은 두 사람과 병사들의 귀환을 두 팔 벌려 환영했다.
장군의 노고를 위로하고, 필립스와 바르보사를 가까이 부른 황제는 그제야 일의 진상에 관해 물었다.
남김없이 다 이야기하자 황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벌을 내리지 않고, 오히려 여독에 지친 몸을 푹 쉬라 일렀다.
끝으로 이런 대화를 남긴 채.
“잘했소. 언제나 나라를 위해 수고가 많군.”
“죄송합니다. 일을 그르쳐서”
“아니오. 오히려 나라 전체가 자칫 희극 속에 끌려갈 수 있는 상황을 막아줘서 고맙소. 자존심이라는 가치는 소중하지. 더구나 나는 우리 모두의 황제고, 그 가치에 대해 최고로 민감한 자요.”
* * *
한편 남겨진 바이칼은 그야말로 한 대 맞은 기분이었다.
차라리 배후 기습을 당했어도 지금보다 더 기분 나쁘진 않았을 것이다.
그의 체면을 엉망으로 구겨버린 자들은 완전히 떠나 버렸다.
이런 상황에서 그는 오히려 이렇게 중얼거렸다.
“홀가분하게 생각하자. 이제 내 행동을 막을 이는 아무도 없겠군.”
평소 막았던 사람들도 없었지만, 그는 총공격을 명령했다.
그래서 드레퓨스와 작은 몇몇 나라들은 그대로 공세를 펼쳤다.
동맹국이 속속 이탈했어도 여전히 압도적인 수였다.
그들을 맞이해 비비안과 코다로 등은 협곡에 숨지 않고 맞서서 싸웠다.
지금 등을 돌려 도망간다면, 오히려 사냥당할 것이기 때문이다.
하늘을 가린 화살을 방패로 몇 번 막아내자, 드레퓨스의 진군이 시작되었다.
북소리와 함께 병사들이 걸어 나왔다.
그때마다 지축이 흔들리는 소리가 났고 좌우에서 말들이 쏟아져 나왔다.
큰 방패를 든 인간들이 몰려오는 기마대와 부딪히려는 찰나, 협곡 위쪽에서 레인저들이 쏜 화살이 이번에는 드레퓨스의 앞을 가렸다.
그 화살의 비가 말과 인간들을 꼬치로 만들었다.
그러나 뒤쪽에서 그것을 보고 있던 바이칼은 진군을 독려하도록 명령했다.
일단 수에서 너무 차이가 났다.
객관적으로 놓고 보면 레인저들의 수도 결코 적지 않았지만, 남부 강대국이 동원한 군대에 맞선다는 건 어불성설이었다.
일단 급조한 목책이 열리자 드레퓨스의 군대가 끝도 없이 흘러나왔다.
그리고 땅을 계속 메우며 전진했다.
앞장서는 이들이 멈추려고 해도, 제자리에 섰다간 등을 떠밀려 넘어지고 밟혀 죽을 판이었다.
레인저들의 시위가 끝나고 본격적인 전투가 시작되었다.
좌익을 맡은 코다로와 용병들이 미친 듯 무기를 휘두르며 돌아다녔지만, 워낙 적병이 많아서 얼마나 해치우고 있는지 티도 안 났다.
비비안은 중앙의 높은 곳에 서서 전황을 살피며 깃발로 지휘를 했다.
우측이 약하다는 판단이 서자, 드레퓨스의 장군들은 우측을 공략하란 지시를 내렸다.
그러자 형형색색의 천을 매단 거대 맹수들이 번우드의 오른쪽을 파고들었다.
거대한 사자가 몰려들며 병사를 입에 물고 이리저리 흔들었다.
그때 쏟아지는 비명은 사자의 주황색 갈기를 더욱 짙게 물들이는 듯했고, 곧이어 사자의 갈기가 피로 물들었다.
그 자신의 피로 말이다.
어디에서 매복하고 있었는지 다크 엘프들이 몰려나와 맹수들을 두 동강 냈다.
엘라이저가 이끈 부대가 우측으로 파고들던 드레퓨스 군을 관통하며 절단해 나간다.
민첩한 다크 엘프들은 놀라운 속도를 자랑하며 한차례 휘젓고는, 재빨리 우회하여 되돌아 왔다.
맹수들이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며 달려들었지만, 그런 본능적인 움직임보다 더 빠르고 강한 게 바로 다크 엘프들이었다.
엘라이저가 쌍검을 들고 맹수들의 곁을 달리자, 이어지는 긴 선을 따라 몸통에서 내부 기관들이 쏟아져 나왔다.
더운 김을 펄펄 흘린 내장이 땅에 닿기도 전에, 다른 다크 엘프들이 짐승의 머리를 밟고 지나쳐갔다.
마치 징검다리를 밟듯이 지나간 엘프들은 조련사들에게 달려들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비명과 피가 허공을 수놓는다.
그에 비해 드워프들은 공격에 두서가 없었다.
분명 집단행동을 하고 있긴 한데, 막무가내로 몰려들어 도끼를 휘둘렀다.
어떻게 보면 야만인들과 장단이 가장 잘 맞는다고 할까?
두꺼운 몸을 웅크린 상태로 부딪혀 육탄 공격을 날리니, 드레퓨스의 병사가 비명을 지르며 뒤로 나자빠졌다.
그러면 말았던 몸을 편 드워프가 큰 방패를 높이 치켜들고, 쓰러진 병사의 목을 겨냥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어지는 파육음.
“대체 여기에서 뭘 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그렇게 투덜거리면서도, 네모난 금속 투구를 눌러쓴 크릭은 짧은 손가락으로 여기저기를 가리키며 명령하고 다녔다.
그러다가도 다가오는 인간이 있으면 뛰쳐나가 도끼를 날렸다.
일단 한 바퀴 돌며 전방을 휘저은 드워프들은 뒤로 후퇴해 비비안을 보호했다.
큰 철제 방패를 든 드워프들은 그 자체로 단단한 암석처럼 보였다.
방패에 반사된 햇살은 비늘의 반짝임처럼 빛났다.
그래서 비비안이 있는 지역은 용의 몸통을 통째로 옮겨 놓은 것만 같았다.
협곡 위에서 밧줄을 타고 내려온 레인저들이 끼어들자, 번우드가 일시적인 우세를 점했다.
그러나 뒤이어 파도처럼 몰려온 드레퓨스의 지원군에 의해 레인저들의 분전도 큰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
비명이 메아리치는 전장에서 코다로의 두 볼은 피로 물들었다.
그는 변화무쌍하게 곡도를 휘두르며 사방을 누볐지만, 적들이 많아도 너무 많았다.
죽이고 죽여도 끊임없이 몰려온다.
그나마 강해진 체력이니까 아직 숨이 붙어 있는 것이었다.
방금도 전면에 뛰어든 기사 한 명을 간신히 해치웠다.
그는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었고, 주위에 맴도는 용병들도 크고 작은 상처를 입고 있었다.
“빌어먹을! 일단 야만족과 붙어서 후퇴한다!”
팽팽하게 맞서던 번우드는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상승하는 기세를 몰아, 드레퓨스와 다른 나라들은 앞으로 나갔다.
그들의 발에 수많은 시체가 채였다.
그렇다 해도 전체에 비해 아주 적은 숫자였다.
몇 개 마을을 채울 수 있는 사람 수였지만, 하도 군대가 크니까 이 정도 희생은 작은 출혈이나 마찬가지였다.
장군들은 추적하는 선두를 늦추게 한 후 화살 공격을 명령했다.
그러자 거리를 벌렸던 번우드 군대는, 방패를 높게 들고 화살들을 막아냈다.
가혹하게도 화살 공격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방패를 든 팔이 저릿저릿해질 때까지 계속되었다.
마비되어 부들부들 떨릴 지경이 되자 멈춘 화살 뒤로 이제 군대가 다시 다가왔다.
“협곡에 매복은 없다.”
군대의 뒤쪽에서 지도를 보고 있던 바이칼은 그렇게 중얼거렸다.
혹시 몰라 날쌘 정찰병들을 보내 몇 번이고 확인했다.
그리고 이곳 나라의 지리를 잘 아는 자들을 위협해서 모든 정보를 끌어모은 상태였다.
저 협곡은 매복용으로 쓰기에 너무 길이 비좁고 거리가 턱없이 짧았다.
일반 군대의 몇 부대를 녹이는 데엔 물론 쓸만하다 싶었겠지만, 이 군대는 세계수 지역 전체를 노리는 집단이었다.
군사 전문가들도 그렇고, 바이칼이 보기에 협곡에서는 절대 반전이 일어날 리가 없었다.
“스스로 고립된 궁지에 몰려, 필사적인 전투를 꾀한 모양인데. 그것도 이렇게나 몸집이 차이가 나면 덧없다.”
그렇게 말한 바이칼은 비틀린 웃음을 지었다.
저 사이로 빠져나가 봐야 얼마나 빠져나갈 것인가?
“근성은 칭찬해 주마. 밀어 버려라.”
두 번 정도 투창이 시작되고, 그 공격을 번우드의 사람들은 가까스로 막아냈다.
그들의 등이 암벽에 닿았을 때, 드레퓨스의 군대는 창끝을 내밀고 서서히 다가왔다.
살기 띤 눈을 투구 밑에서 빛내며 말이다.
번우드를 끝장내려는 움직임이 목전까지 쳐들어 왔을 때였다.
그동안 모습을 보이지 않던 세인이 협곡 위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검은 망토를 옆으로 휘날리는 그는, 협곡 아래 펼쳐진 처참한 풍경을 위에서 내려다보았다.
“….”
피와 주검으로 가득 찼구나.
이것을 불러일으킨 것은 왕의 욕망인가?
아니면 불필요한 오해인가?
그것도 아니면 운명인가?
생각해 보면 그의 운명은 선택의 연속이었다.
언제나 최악을 피하려고 덜 아픈 것을 선택하지만, 그런 선택의 과정 자체가 고통이었다.
그리고 선택의 결과 또한 고스란히 뒷감당해야만 한다.
아무리 군주가 원래 그런 자리라고 마음먹어도, 고통스러운 것은 고통스러운 것이었다.
생각이 고통을 덜어주진 못했다.
그는 마검을 땅에 꽂아 넣으며 입을 열었다.
“드레퓨스.”
그의 음성은 바람을 타고 모두의 귀로 흘러 들어갔다.
그 을씨년스러운 음성을 모두가 들었는지, 일순간 모두의 시선이 위로 쏠렸다.
세인은 자신이 이렇게 말하면서도 상대가 정말로 공세를 멈출 것이라고 기대하진 않았다.
정말 그런다면, 그건 그거대로 이상한 놈들이었다.
하지만 그래도 말해 본다.
가속도가 붙은 운명의 수레바퀴를 한낱 개미가 막아보려는 몸짓처럼, 그렇게 말이다.
“물러나라 드레퓨스. 그렇다면 너희를 추적하진 않겠다. 여기서 무력행위를 멈춘다면 우리도 너희를 용서하마.”
그렇게 부질없는 제안을 해본다.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하는 제안.
마치 악마가 사람을 절망의 구렁텅이로 밀어 넣기 전에, 상대를 위해 주는 척하기 위해 내놓는 말들처럼…. 물거품과 같은 무게를 가진 제안.
협곡에서 멀리 떨어진 자리에 앉아 있던 바이칼은, 상대의 음성이 저렇게 먼 곳에서 또렷이 들리는 가에 대한 의문보다 비웃음을 먼저 띄었다.
그리고 군대를 살짝 뒤로 물렸다.
이 순간 그는 전쟁의 신이었다.
전쟁에서 이기고 있었고, 그의 군대는 수많은 사상자를 내고도 건재함을 과시했다.
그가 마음만 먹으면 이렇게 살인자들의 진퇴를 조종할 수 있었다.
이때야말로 왕은 자신의 전지전능함을 만끽할 수 있었다.
모든 긴장을 풀고 여유롭게 말이다.
그렇게 후퇴를 명령해 자비를 보인 바이칼은 다시 손짓했다.
그러자 궁수들이 활을 위로 들어 올렸다.
그리고 하늘을 새까맣게 뒤덮는 비.
그것을 바라보며 세인은 중얼거렸다.
“그래.”
‘어쩔 수 없군.’ 이라든가.
‘나를 원망하지 말라.’는 식의 말은 하지 않았다.
당연히 원망할 것이다.
이제부터 일어나는 일을 몸소 겪고 나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