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은 왕 마검의 주인-98화 (98/307)

# 98

& 인간의 전투 (3)

점심때부터 기사전을 치르느라 그날 하루가 저물었다.

그렇게 두 진영은 서로 대치한 채 저녁을 맞았다.

해가 저물어 가는 가운데, 남부의 병사들은 상대적으로 쌀쌀한 날씨에 코를 훌쩍였다.

그리고 냄비를 나무 걸이 위에 올려놓았다.

그들이 밥 짓는 연기만 봐도 수가 어마어마했다.

지휘 막사에서는 회의가 한창이었는데, 오늘 낮의 일을 보니 야습을 하자는 소린 도저히 나오지 않았다.

가장 쟁점이 되는 관건은 바로 ‘상대를 괴물로 봐야 하는가? 아니면 인간으로 봐야 하는가?’ 였다.

괴물과 인간의 싸움이라면 생태계 종끼리의 싸움이기 때문에, 인정사정이란 게 통용될 수가 없었다.

상대도 어차피 군에 끌려 나온 농부겠지, 라는 마음은 일절 없는 것이다.

오히려 끝없는 증오만이 남아 시체를 유린하는 경우도 비일비재했다.

괴물과 인간이 만나면 악에 받친 행위만이 있을 뿐이다.

그런데 오늘 그게 틀어져 버렸다.

“내일 전열을 가다듬고 바로 밀어 버린다.”

바이칼은 그래도 어떻게든 전쟁을 진행 시키려고 열심이었다.

그의 입장에서는 당연하다.

왕이라고는 그 하나뿐이었다.

그렇다면 훗날 이 원정에서 누구의 이름이 자주 언급될까?

그리고 분명 나라끼리의 승리 분배에 대해서도 압도적인 소리를 낼 수 있을 것이다.

비록 등 뒤에서 손가락질은 있을지언정.

“….”

바이칼이 그렇게 말하는 데 반해 다른 나라들은 미온적인 반응을 보였다.

일단 성국과 바이테스 제국이 회의적인 모습을 보이자, 다른 나라에서 차출되어 온 장군들도 새삼 회의감을 느끼는 듯한 얼굴이었다.

‘세계수에 괴물들이 있다면 모조리 불태워서라도 죽여 버리는 것이 우리 임무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거기에 괴물만 있을까? 아니 괴물들이 얼마나 있을까.’

‘이미 중앙의 화근은 다 물리친 것 아니야?’

‘우리 병사들이 추운 북의 허리띠를 잘 지나갈 수 있을까? 이미 엄청난 거리를 이동해 왔다. 북의 허리띠 지역은 남부군에겐 지옥이나 마찬가지일 텐데.’

하지만 그들은 바이칼 앞에서 찍소리도 못했다.

신분 차이가 너무 나기 때문이다.

전문적인 영역에선 판단이 필요할 때 군인의 정신으로 움직이긴 하지만, 이런 공식 회의에서 토를 달거나 반대 의견을 제시하긴 어려웠다.

그도 그럴 것이 왕의 면전이다.

바르보사는 회의가 끝난 후 술병을 들고 필립스를 찾아갔다.

필립스는 이동식 간이 소파 위에서 몸에 붕대를 다시 감고 있는 중이었다.

바르보사가 천막 안으로 들어오자 일어나던 필립스를, 바르보사는 손을 저어 말렸다.

“어디 보자. 우리 조카.”

그는 너털웃음을 지으며 술병을 건넸다.

그러자 필립스가 미소를 지으며 술잔을 나무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이런저런 잡담과 함께 술자리가 이어졌다.

다독이기 위해서 온 바르보사는 조카의 얼굴이 고통스럽다고 느꼈다.

꼭 패배 때문만은 아닌 것 같았다.

천막 바닥은 천을 깔지 않아 풀더미였다.

필립스는 그런 풀더미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입을 연다.

“삼촌.”

그러자 바르보사는 컵을 입에 가져다 대며 눈으로 필립스를 바라보았다.

“저는….”

필립스가 괴로운 표정을 짓자, 바르보사는 그 마음을 다 안다는 듯이 어깨를 두들겨 주었다.

그리고 한숨과 함께 입을 열었다.

“우리 황제께서는 항상 그러시지. 적당한 크기의 나라면 몰라도, 큰 나라를 운영하려면 이익만 따져선 안 된다고. 하지만 그렇다고 이익을 아예 좇지 않아야 한다는 소린 아니다. 네 마음을 나도 알 것 같다. 하지만 이건 동맹이고 우리의 이익이 걸렸잖니.”

“제가 여기에서 공적을 세우고 고향으로 돌아간들, 목에 걸리는 화환을 보고 웃을 수 있을까요? 그것은 마치 불의의 밧줄처럼 느껴질 것 같습니다. 그리고 언젠가 제가 죽는 날, 그 밧줄은 선과 악의 재판장에서 저를 목매달겠죠.”

“조카야.”

“오늘 삼촌도 그런 저를 지켜보셨겠지만, 한 명의 기사와 싸웠습니다. 그리고 저는 패했습니다. 제가 너무 분하고 억울한 것은, 상대가 말도 안 되게 강해서가 아닙니다. 상대는 그렇게 되기 위해 피나는 노력을 하며 재능을 갈고닦았을 테니까요. 다만 저는 평소 경망스럽게 행동하긴 했어도 인간답게 살아왔습니다. 악을 미워하고 선을 섬기려 했습니다. 어른들이 보시기에 미흡한 구석이 많았겠지만 말입니다.”

바르보사는 이제 소리 나게 필립스의 어깨를 쳤다.

힘내고 그만 헤어나오라는 뜻이었다.

그 과장된 몸짓에도 불구하고, 필립스의 고개는 좀처럼 들릴 줄 몰랐다.

“상대 앞에서 제가 악이 된 것만 같았습니다. 삼촌. 이런 질문을 던지는 저를 용서해 주십시오. 이 전쟁이 정말 가치가 있는 것입니까? 우리가 훗날 사자들 앞에서 고개를 들 수 있을까요?”

이미 죽어간 혼들 앞에서 너희들의 죽음은 가치 있는 것이었다고 말해줄 수 있을까?

바르보사는 적절한 충고를 찾지 못해 침묵을 유지하다가, 고작 이런 말만 내뱉을 뿐이었다.

“우리는 성기사가 아니다. 이상을 좇는 자들이 아니야. 어쩔 수 없는 상황도 있잖니. 그게 바로 운명이란 거다.”

그리고 천막을 나오는데 달빛이 참 맑았다.

북부는 원래 이런가?

아니면 울적한 마음에 그저 고조된 감상의 편린일 뿐인가.

뒷짐을 진 바르보사는 달빛과 함께, 그 상태로 한참 걸었다.

야영지 주변을 말이다.

*  *  *

다음 날 아침이 밝았다.

그리고 새로운 기분으로 싸움을 시작하려 했다.

여기에서 사기가 꺾인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

추운 허리띠 지역을 지나려면 앞으로도 강행군이 예상된다.

물론 기사 한 명이 어제 깊은 감흥을 가져다주었지만….

여기까지 인걸로, 그렇게 수습하고 바이칼이 공격을 명령하려 했을 때였다.

번우드의 진영에서 변화가 일어났다.

정확히 말하자면 번우드 측도 예상하지 못한 변수였다.

협곡의 한쪽에서 누가 봐도 인간들로 이루어진 병력이 우르르 몰려나와, 번우드 쪽으로 향한다.

“뭐야 저건?”

관측병들은 이동식 망루 위에서 눈을 좁히고 새로 합류하는 무리를 보았다.

그리고 얼빠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야만인들?”

연합군의 진영은 다시 혼란에 빠졌다.

야만인들에 대해서 풍문으로 들었든 책으로 읽었든, 그들에 대한 개개인의 감상과 판단은 뒤로 미뤘다. 여기에서 중요한 사실은 그들이 인간이라는 사실이다.

야만인들은 분명 인간이었다.

인간의 무리가 번우드에 합류한 것이다.

긴급회의가 열리고 수뇌부들이 대형 천막 안으로 들어간 가운데, 병사들은 창을 세우고 번우드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귀족들도 귀족들이지만, 사실 그들이야말로 가장 혼란스러울 것이다.

산자락 몇 개의 아래를 가리며 길게 늘어선 병사 중, 한쪽에서 소식을 들은 두 명의 남자는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러다가 한 명이 갑자기 속삭였다.

“괴물이라며? 우리 괴물이랑 싸우는 거 아니었어? 아니면 괴물들과 야만인이 힘을 합친 건가?”

그러자 같은 고향에서 여기까지 걸어온 옆 남자가 얼굴을 찡그렸다.

자기 친구가 평소 좀 모자라긴 해도 이건 정말 아니었다.

그래서 그는 작게 화를 냈다.

“멍청아! 그걸 말이라고 해? 괴물과 손잡는 인간은 이 세상에 없어!”

“그럼 뭔데? 이게 대체 뭐냔 말이야?”

“….”

그거야 나도 모르지.

쌀쌀한 날씨 속에서 창을 쥐고 서 있던 남자는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몸을 움츠리며 자리를 지켰다.

여기는 그래도 약간 쌀쌀한 정도지만, 북부 설원을 지날 생각을 하니 진짜 고민되었다.

그런 그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옆의 친구는 참새처럼 쫑알댔다.

“나는 괴물을 죽이러 온 거야. 그래서 고향 땅을 떠나온 거라고. 죽음을 각오하고 온 거야. 끌려온 사람 모두가 마찬가지잖아. 내가 죽어도 내 집에서는 나를 자랑스럽게 여길 거야. 사람이 사람을 위해 목숨을 바친 거니까. 슬퍼도 감수해야 할 가치가 있는 거라고. 그런데 앞의 상황은 대체 뭔데?”

“….”

친구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도 집에 자식들이 있었다.

나라는 그런 자식들의 미래를 위해 남자들이 필요하다고 했다.

물론 강제력이 동원되긴 했지만, 충분히 납득해서 이 고생을 하고 있는 거다.

그리고 자식들의 미래를 위협하는 것은 바로 괴물들이었다.

여기 있는 사람들 모두가 그렇겠지만, 그들은 인간의 편에서 괴물과 싸우기 위해 온 것이다.

그렇게 연합군 쪽에서 당황해하고 있을 때 똑같이 당황하고 있는 쪽이 있었다.

맞은편의 번우드다.

“우리 왕의 명령으로, 돕기 위해 달려왔습니다.”

우락부락한 남자가 코다로와 비비안 앞에서 가슴을 펴며 말했다.

그는 털가죽으로 된 옷을 입고 있었는데, 무기는 천막 바깥에 두고 들어왔다.

비비안은 우선 고맙다는 말을 한 후 그 왕이 대체 누구냐고 물었다.

자신을 무에타이라고 밝힌 이 남자는 레드의 이름을 대었다.

레드는 조세핀의 아들을 지키고 있었고, 가이더의 재건을 꿈꾸는 듯싶었다.

“여기에 와서, 번우드가 원한다면 목숨을 빌려주라고 말씀하셨어요. 그리고 원하지 않아도 목숨을 빌려주라고도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무에타이는 투덜거렸다.

인생 최대의 실수가 레드와의 첫 만남에서 더럽게 박힌 인상이라는 둥, 레드도 쫀쫀한 남자라서 자신을 사지로 몬 것이라는 둥….

영 알 수 없는 소리를 지껄인다.

레드에게 미운털이 박혀서 여기로 올 수밖에 없었다고 말하는 그에게서, 예의라고는 눈에 씻고 봐도 찾아볼 수 없었다.

하지만 코다로와 비비안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어쨌든 그들은 레드의 명령을 받고 여기에 죽으러 온 전사들이었다.

예의를 따지려야 따질 수 없는 상황인 것이다.

“아 참. 그리고 여기. 그분에게 전하라는 서신도 있습니다.”

무에타이 옆에 서 있던 냉막한 얼굴의 남자가 조심스럽게 가죽 뭉치를 전했다.

그러자 비비안의 옆에 서 있던 기사가 그것 받아 들었는데, 윌이었다.

윌은 그것을 가져다 비비안에게 바쳤다.

그 가죽을 펼쳐본 비비안은 글자를 소리 내 읽었다.

“그 조끼는 지금도 잘 입고 있습니다.”

*  *  *

바이칼은 짜증을 내며, 일단 상대를 흔들라고 시켰다.

작게라도 한번 전투를 벌여서 피를 보고 나면, 싸울 분위기가 만들어진다는 판단이었다.

그래서 수백 기의 기마가 번우드에게로 출발했다.

그 소식을 들은 비비안은 재빨리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알맹이는 간곡한 부탁이었다.

“지금 나가서 싸워주십시오. 이제 막 여기에 도착한 입장에서 이런 명령이 어떻게 들릴지는 알지만, 우리가 인간과 함께한다는 것을 보여줄 필요가 있습니다.”

무에타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말씀을 편하게 하십시오.”

그리고 특유의 소리를 내지른 야만인들이 몰려나가 기마와 맞붙었다.

말 위에 탄 사람들은 가까이에서 상대가 누군지 똑똑히 볼 수 있었다.

먼 거리니까 착각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은 저만치로 날아가 버렸다.

상대는 인간이었다.

분명히 인간이었다.

그러니 머릿속이 너무 복잡해진다.

그럼 우리가 무도한 침략자가 되는 건가?

괴물들이 이들을 세뇌해서 부리고 있나?

대체 이게 무슨 일이지?

기세 좋게 몰려나간 야만인들은 예상외로 잘 싸웠다.

그리고 시간이 지날수록 예상을 가뿐히 넘어서 무시무시한 실력을 보여주었다.

나라를 키우고 있는 와중에 이런 정예들을 지원군으로 빼줬다는 점에서, 도움을 주겠다는 레드의 의지를 읽을 수 있었다.

게다가 이들은 영원히 돌려받지 못할 가능성이 큰 전사들이다.

양손에 도끼를 들고 사방을 누비는 무에타이를 보며, 한 남자가 당황한 음성으로 외쳤다.

어제도 그렇지만 이번에는 기사 한 명이 아니라 수많은 인간이 앞에 있었다.

“넌 대체 누구냐? 인간이냐? 인간이 맞아? 이게 대체 어떻게 된 거야?”

그러자 무에타이는 레드를 처음 만났을 때, 레드가 그에게 한 말을 상대에게 들려주었다.

“내가 누구냐가 중요한 게 아니야. 네가 누군가가 중요한 거지.”

‘그래 이거야. 그때 이런 말을 듣고 나서 내 인생이 꼬인 거지. 내가 그때 상대가 왕이 될 줄 알았다면 때려눕혔겠냐고. 그때만 해도 뭔 개소린가 하고 웃었는데.’

솔직히 되지도 않는 개소리이지 않은가?

왠지 억울한 기분이 차오르는 무에타이였다.

그래서 도끼질에 저절로 힘이 실렸다.

“으아아아! 개 같은 인생! 왜 나만 갖고 그래!”

“….”

연합군은 패주하는 기마대를 보았다.

말 위에서 차마 같은 인간에게 무기를 휘두를 수 없는 그들의 심정도 이해가 갔다.

인간들끼리의 싸움에 한해서라면 적어도 대의가 필요했다.

침략을 당하면 일어설 수 있었고, 부당한 짓이나 사악한 짓을 저질렀다는 사전이해가 필요했다.

적어도 이런 식은 아니었다.

돌아간 기사 중 선임기사들은 투구를 벗고 귀족들에게 가서 공손히 말했다.

“그들은 인간이었습니다. 그들의 죄를 말해 주십시오. 그렇다면 전혀 다른 모습으로 나아가 싸우겠습니다.”

“….”

귀족들에게 있어서 기사들은 단지 준 귀족이라는 지위, 하나뿐만이 아니었다.

정성 들여 키운 방패이자 칼이었고, 때로는 등을 맡기는 전우이기도 했다.

그들의 수호자였고, 일반인들과 귀족인 자신을 잇는 충실한 교량이었다.

오늘 거짓말을 말한다면 훗날 진실이 밝혀졌을 때, 이 충성스러운 인간들의 실망한 표정을 어떻게 감당할까?

이 사람들은 따지고 보면 자신들을 위해 맹목적인 충성과 목숨을 바치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니 죽음을 각오한 사람 앞에서, 적어도 사정설명은 해줘야 하는 게 기본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것조차도 곤란했다.

“수고했다. 가서 쉬어라.”

기사들을 돌려보낸 일부 귀족들은 회의감에 빠졌다.

결국, 그날도 흐지부지 전투가 중단되고 말았다.

어차피 전쟁이란 게 빠르면 빠르게 끝낼수록 좋지만, 그게 마음대로 되는가.

고향을 떠날 때 다 예상하고 넉넉하게 준비해왔다.

몇 달, 몇 년을 버틸 정도를 말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런 보급의 문제가 아니라 사기의 문제였다.

바이칼 입장에서는 어쨌든 밀어붙여야만 했다.

내건 기치가 있었고, 여기까지 온 마당이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도 그와 마음이 같을까?

바르보사는 다음날 성기사인 피츠를 볼 수 있었다.

꼭두새벽에 말이다.

요의를 느껴 천막 밖으로 나가니, 피츠가 서 있었고 그의 주변에 수레들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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