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은 왕 마검의 주인-97화 (97/307)

# 97

& 인간의 전투 (2)

멀리 달려나갔던 세리스는 이그문트와 함께 바이테스의 기사가 쓰러진 자리로 되돌아왔다.

바이테스의 기사는 간신히 치명상을 피한 상태였다.

자신의 몸 위로 드리워지는 그림자를 보며 죽음을 예견했지만, 그런 예감은 빗나가고 말았다.

오히려 세리스는 그에게 손을 내밀어 일으켜 세워준 후 깃발이 있는 자리로 되돌아갔다.

그리고 다시 기다린다.

바이테스의 기사가 진영으로 되돌아갈 때 갈채가 터졌다.

패자라고 깎아내리기에는 너무나도 엄청난 공방을 보여준 탓이다.

그 광경을 보자니 바이칼은 도저히 화살을 쏘라는 명령을 내릴 수가 없었다.

지금 공격을 명령하면, 패배에 승복하지 못한 치졸함으로 보일 것이다.

기사전은 한 명당 최대 세 명까지 결투를 벌일 수 있었다.

남은 기사를 기대할 수밖에 없었다.

두 번째는 성국이 나섰다.

거탑을 연상시키는 사내가 황소를 타고 세리스 앞에 섰는데, 둘은 그야말로 보는 자들이 황홀할 정도의 전투를 보여 주었다.

남자 성기사는 양손의 둔기를 쥐고 빠르면서도 섬세한 공격을 보여주었다.

쉴 새 없이 몰아치는 연환 공격은, 소리가 불꽃을 따라가지 못할 정도였다.

세리스는 그런 맹공 앞에서 창을 좌우로 움직이며 모조리 막아냈다.

그리고 말과 함께 돌며 등을 보이는 장면에서, 모두가 숨을 죽였다.

어깨 위로 내리치는 둔기를 보지도 않고 창끝으로 튕겨낸 것이다.

그리고 도는 원력을 이용해 남자 성기사의 몸을 때려 물러나게 한 것에는 찬탄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황소는 씨근덕거리며 하얀 말을 위협했지만, 이그문트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이 명마는 자기 주인의 움직임에 맞추면서도 황소의 뿔을 피해냈다.

기사와 말 모두 날렵하고 예술적인 움직임을 보여주고 있었다.

무겁고 강한 힘을 머금은 둔기를 상대로 한 치도 물러서지 않고 접전을 벌이는데, 지켜보는 이들은 침을 삼키는 것조차 잊었다.

한차례 공방 후에 뒤로 물러난 남자 성기사와 세리스는 무기로 상대를 겨누었다.

그러나 다시 달려들진 않는다.

먼저 입을 연 것은 남자 성기사였다.

“홀리 레이크 출신이오?”

세리스는 구구절절하게 말하기도 어색해,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러자 남자 성기사가 침음성을 터트렸다.

“당신, 사연이 아주 많겠군. 이런 곳에서 이렇게 마주친 걸 보아….”

“숨은 다 가다듬었습니다. 덤비십시오.”

세리스가 상대의 말을 끊고 결투를 이어 나가려는 듯 말하자, 남자는 의외로 고개를 흔들었다.

“나는 실력도 안 되지만, 설령 된다 해도 당신을 죽일 수는 없을 거요. 동지의식을 떠나, 배은망덕한 자는 될 수 없으니까.”

“….”

세리스가 그의 말을 곱씹고 있는데 남자가 뒤를 향해 턱짓을 했다.

“드레퓨스는 끝까지 달려들 거요. 그래서 당신과 당신 뒤의… 그들 모두의 숨통을 끊어 놓을 것입니다. 이런 운명을 알면서도 끝까지 싸울 참이오?”

세리스는 그의 말에 창을 들어 올리며 대답을 대신했다.

그걸 본 남자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황소를 끌고 다시 돌아가 버렸다.

이번에도 박수가 쏟아져 나왔다.

그리고 돌아간 남자를 동료들이 따뜻하게 맞아 주었다.

어깨를 두드려주는 동료 앞에서 남자는 다가온 피츠에게 말했다.

“저는 제 패배가 부끄럽지 않습니다.”

그러자 피츠가 고개를 무겁게 끄덕여 보였다.

마지막 세 번째는 대체 누가 될까?

여기에서 적의 사기를 꺾지 못하면 정말 곤란하게 된다.

이를 가는 바이칼은 자국의 기사를 보낼 수도 없어 전전긍긍했다.

보내봐야 패할 것이 뻔하니까.

그래서 바르보사의 제안을 승낙한 것이다.

바르보사가 아는 최고의 기사를 보내겠다는, 그 말을.

“상대는 이미 우리의 기사를 둘이나 살려 주었다. 하지만 너도 그러리란 법은 없어. 필립스. 그러니 목숨을 걸고 최선을 다하거라. 네가 살아날 수만 있다면, 이건 정말 평생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경험이다.”

바르보사의 말에 갈색 머리를 한 잘생긴 남자가 미소를 지었다.

그는 바르보사 앞에서 말의 안장을 조절하고 있었다.

“삼촌. 이 조카를 너무 얕보는 게 아닙니까? 저도 나름대로 실력 있는 기사입니다. 그런 말로 무안 주지 말고, 차라리 승리를 가져오라 명령하십시오.”

그러자 바르보사가 껄껄 웃으며 그의 등을 쳤다.

“좋아! 그 넉살이다. 전혀 긴장하지 않았구나. 최선을 다해 실력을 보여라. 수많은 눈이 너를 지켜보고 있다. 게다가 상대는 말도 안 되게 강하다! 금화를 아무리 줘도 만들 수 없을 순간에, 너는 지금 서있는 거야!”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삼촌.”

“필립스. 최선도 좋지만, 너는 여기에서 꼭 너 자신이 되어야 한다.”

“….”

갈색 머리 남자가 탄 흑마는 땅을 박차며 앞으로 나갔다.

그리고 그의 출현에 연합군에서는 함성이 쏟아졌다.

하늘을 울리는 호응과 함께 병사들은 주먹을 쥐고 위로 흔들었다.

“필립스! 필립스! 우리의 필립스!”

필립스는 가볍게 손을 들어준 후 세리스를 향해 달려갔다.

세리스는 이미 말 위에 올라탄 후였다.

그녀는 상대가 대단한 명성을 가진 기사임을 짐작했다.

세상은 넓으니까, 엄청난 실력자들이 곳곳에 득실거렸다.

필립스는 등 뒤에 달고 있던 장창을 뽑아 들었다.

교차되었던 두 개의 장창이 양쪽으로 뽑히며 한 바퀴 돌아가자, 뒤쪽은 이미 흥분의 도가니였다.

바이칼마저 필립스가 지금 여기서 출전하는 게 너무 의외라는 듯이 눈을 크게 떴다.

필립스는 바이테스 제국에서도 꽤 아끼는 기사에 속한다.

전쟁 경험을 해보라고 원정에 동참시킨 것인데, 이렇게 기사전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갈색 경장을 입은 필립스가 검은 망토를 펄럭이며 세리스의 앞으로 뛰어들었다.

세리스의 창이 사선을 그릴 때, 필립스가 든 두 개의 창이 연속으로 그녀의 갑옷을 때리고 지나갔다.

그때 처음으로 그녀의 망토가 길게 베어졌다.

열렬한 환호 속에서 말과 함께 몸을 돌린 필립스는 두 팔을 아래로 축 늘어뜨렸다.

창끝은 세리스를 향해 겨눠진 상태였다.

마치 전투 의지가 없다는 듯한 모습을 하고, 필립스는 박차를 가했다.

그러자 흑마가 다시 미친 듯이 질주했다.

멀리에 서 있던 세리스의 모습이 시시각각 크게 확대됐다.

그때였다.

필립스는 별안간 오른손을 어깨 위로 번쩍 들더니, 벼락을 던지는 신처럼 창을 집어 던졌다.

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빛이 날아온다.

세리스가 황급히 그것을 창으로 튕겨냈을 때, 질풍처럼 달려온 남자는 이미 그녀의 목전이었다.

두 개의 창이 서로를 격하며, 목숨을 노린 난무를 벌인다.

주인에게 힘을 실어주기 위해 이리저리 돌다가, 급기야 펄쩍펄쩍 뛰는 말 위에서 두 기사는 접전을 벌였다.

창들의 움직임이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햇빛을 머금은 창끝이 선을 그리며 말 주위를 빙글빙글 돌았다.

아름다우면서도 그 흉험함에 넋을 잃던 사람들은 죽음의 무도에 빠져들었다.

무력을 극한까지 갈고 닦은 기사들이, 이야기에서나 나올법한 경지를 보여주고 있었던 것이다.

말들이 땀방울을 튕기며 움직이다가 옆으로 길게 선을 그린다.

흑백의 선이 넋을 잃은 연합군의 앞을 지나갔다.

그래서 기사들이 정신없이 벌인 혈투는, 손을 뻗으면 잡힐듯한 거리에서 생생히 느낄 수 있었다.

거친 숨소리, 출렁이는 말꼬리와 간간이 터져 나오는 기합이 뒤섞여 춤을 춘다.

그리고 지켜보는 사람들의 장탄식 속에서 한 개의 창이 날아올랐다.

“….”

그것은 바로 세리스의 창이었다.

분명 적인데, 그러니까 좋아해야 하는데….

어느덧 사람들은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지나친 감정 이입이 있었던 탓이다.

그리고 그 표정은 이내 놀라움으로 바뀌었다.

세리스가 뭔가를 집어 던지며 무리하게 거리를 벌렸기 때문이다.

필립스는 창대로 급하게 그것을 막아냈다.

세리스의 투구였다.

투구를 쳐낸 필립스는 상대의 모습에 입을 벌렸다.

여자인 줄은 싸우며 알았지만, 눈앞의 모습은 정말 의외였다.

땀에 젖은 금발 머리가 폭포수처럼 갑옷 아래로 흘러내렸다.

햇빛을 받아 태양의 왕관을 쓴 듯한 그녀의 모습은….

그녀의 미모는….

불경한 표현이지만, 마치 성화에 나오는 성녀의 모습 같아 보였다.

“인간… 당신은 인간이 틀림없군요.”

미미하게 진동하는 창을 겨눈 필립스의 음성은, 그 창대를 타고 같이 흔들렸다.

그가 그러든 말든, 장갑으로 땀에 젖은 얼굴을 한차례 훔친 그녀가 그 작은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호수같이 크고 파란 눈동자가 경악에 빠진 적의 군영을 담는다.

그리고 시선을 흘려낸 세리스는 앵두같이 작고 분홍빛이 나는 입술을 움직여 말했다.

그 내용은 정말 뜬금없었다.

“그 말은 당신이 아끼는 말이겠죠?”

“네?”

“내리세요. 적당히 하기 힘들기 때문에, 이대로 싸우다간 말을 죽이고 말 겁니다. 전 그 말을 죽이기 싫습니다. 제 친구가 소중하듯이 당신도 그렇겠죠.”

이그문트의 갈기를 쓰다듬은 그녀는 말 위에서 뛰어내렸다.

그리고 허리의 검을 천천히 뽑는데, 아까와 비교도 할 수 없는 무게감이 그녀에게서 흘러나왔다.

필립스는 상대를 경시하지 못하며 방패와 창을 들고 말에서 내렸다.

그리고 둘은 말이 뒤로 멀찌감치 물러날 때까지 서로를 바라보며 기다렸다.

먼저 움직인 것은 세리스였다.

그녀의 가벼워 보이는 선공을 방패로 튕겨내려 했던 필립스가 낭패를 보았다.

하얀 검은 그의 방패를 갈랐다.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 없는 광경이었다.

완전히 두 조각나기 전에 황급히 떨어졌지만, 방패 한쪽이 너덜거린다.

그리고 세리스는 이제 광풍처럼 필립을 몰아쳤다.

그녀의 검에 서린 빛은 타인이 인지하기도 전에 수십 갈래로 나누어져 춤을 췄다.

그 하나하나가 필사의 일격을 담은 듯이 위력적이었다.

정말 아까의 그 여자가 맞는가?

완전히 돌변해 버린 실력이었다.

이를 악문 필립스는 미친 듯이 창을 움직였지만, 순식간에 팔을 베였다.

그리고 연타로 때리는 그녀의 발에 나동그라졌다.

옆으로 한 바퀴 구른 그가 방패를 전면에 내세우자, 이제 정말로 방패가 두 조각이 나버렸다.

부서져 나간 방패가 전해준 충격에 손이 저릿했다.

다른 손에 들고 있던 창이 세리스의 목을 찔렀다.

그것을 장난처럼 가볍게 옆으로 얼굴을 돌려 피한 그녀는, 차가운 검날을 상대의 볼에 가져다 댔다.

그리고 말했다.

“계속하시겠습니까?”

“….”

이 모든 게 전광석화처럼 이루어졌다.

거침없는 그녀의 공격 앞에 무너져 내린 필립스는, 억울하다기보다는 허탈한 심정이었다.

그래서 그녀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정말로 궁금했기 때문이다.

“왜 당신 같은 강자가, 당신 같은 인간이, 같은 인간의 군대와 대립하고 있습니까?”

“당신과 저는 초면이고 그래서 전부를 말해줄 수는 없습니다. 이것 하나만 빼고 말이죠. 제가 물러선다면, 제 고국은 분명 다시 짓밟힙니다. 하지만 여기에 서 있음으로써 그걸 늦출 수 있는 거죠.”

얼굴이 붉어진 필립스는 상대의 말에 차마 반박할 수가 없었다.

그도 평소 왕답지 않은 바이칼의 모습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그를 경멸한다고 말하기엔 너무나 설득력이 없었다.

그는 바이칼의 동맹자 역할을 하고 있으니까.

지금도 바로 그 자격으로 여기에 나온 것이 아니던가?

세리스가 공격하지 않겠다는 표시로, 검을 거꾸로 잡아 뒤로 물러나자.

필립스는 엉덩이를 털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계면쩍은 듯이 다시 말을 걸었다.

“하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제가 말해 주십시오. 기사를 세 명이나 물리친 당신의 말을 우리 쪽에 전하겠습니다. 당신은 그럴 자격이 있습니다. 몸소 증명했죠.”

세리스는 여유롭게도 적을 앞에 두고 잠시, 파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다시 턱을 내린 그녀는 담담하게 말했다.

“우리를 인간답게 싸우게 해주세요.”

그리고 옆으로 살짝 비켜서며, 뒤쪽 번우드의 사람들을 보이게 했다.

필립스의 눈동자는 그녀의 의도대로 뒤쪽의 사람들을 볼 수 있었다.

연합군의 사람 중 가장 가까이에서.

“그들은 저마다 사연이 있어요. 비록 겉모습은 저렇지만, 충분히 인간 대접을 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적으로 대립하고 있습니다. 이 끝이 죽음이라도 목숨을 구걸하진 않겠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인간들답게 당신들과 싸우고, 패배할 수 있게 허락해 주십시오.”

필립스의 얼굴이 홍시처럼 붉어졌다.

이런 결연한 내용을 듣고 있자니, 한 조각 공명심을 품고 여기에 뛰어든 자신이 너무나 창피스러웠다.

평소 그의 삼촌이 철 좀 들어야 한다고 말했던 게 결코 농담이 아니었다.

그동안 능력만 믿고 얼마나 가볍게 굴었던가?

고개를 숙인 그의 앞에서 세리스는 말을 계속했다.

“인간의 전쟁 속에서, 서로 인간답게 싸웁시다. 그리고 우리가 모두 땅에 몸을 뉘는 날, 쓰러진 괴물에게 인간들이 흔히 하듯 증오스러운 앙갚음을 하지 마십시오. 칼자국으로 시체에 수치를 안겨주지 마세요. 새의 밥이 되게 해준다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당신의 말을… 꼭 전달하겠습니다.”

그리고 필립스는 말을 끌고 터벅터벅 걸어서 자신의 진영으로 돌아갔다.

그가 보여준 무위는 엄청난 것이었다.

그래서 앞의 둘보다 더 큰 박수가 쏟아져 나왔지만, 그는 차마 고개를 들 수 없었다.

“필립스! 필립스!”

“….”

수고했다는, 대단한 위용을 보여줬다는 주변의 외침에 손조차 들어 올리지 못했다.

그 까닭은, 평소 천부적인 재능만 믿고 우쭐댔던 자신이 부끄러웠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조카의 우울한 얼굴을 본 바르보사는 기꺼운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드디어 네가 부족한 부분을 깨달았구나. 그걸로 되었다. 이번 원정은 성공적이다. 바이테스의 재목이 성장할 수 있는 발판을 만들었으니까.”

필립스의 어깨를 친 바르보사는 정말 기쁜 듯이 껄껄 웃었다.

그는 정말 이상한 위인이었다.

이 상황에서 이렇게 웃을 수 있는 것을 보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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