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은 왕 마검의 주인-96화 (96/307)

# 96

& 인간의 전투 (1)

행군.

행군은 언제나 고되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해내야 하는 무게가 바로 행군이었다.

병사든 기사든 다 그렇다.

기사들은 종자들의 도움을 받지만, 대신 챙겨야 할 장비가 많았다.

그리고 말에게 무리를 줄 수 있는 무게의 물건은 정작 싣지 못한다.

말이 많다면 번갈아 타면 좋지만, 그런 형편의 기사는 드물었다.

‘갈 길이 멀구나.’

그런 생각을 하며 맥은 설원 위를 걷고 있었다.

그는 길을 재촉하는 와중에도, 동료들에게 자신의 상황에 대해 말을 해준 후 무리에서 떨어져 나왔다.

얼마나 그렇게 걸었을까?

다가온 자는 삐쩍 마른 젊은 남자였다.

그는 아주 두꺼운 옷을 걸치고 있었는데 연신 기침을 해댔다.

“오해하지 마시오. 난 사람이요. 대장장이지. 혹시 실례가 안 된다면….”

그러면서 남자는 홀로 걷고 있는 맥을 살폈다.

그런데 정작 맥은 젊은 남자를 본체만체하며 걷고 있을 뿐이었다.

남자는 굶주린 상태라서 도움이 절실했지만, 도저히 지금의 맥을 보니 도움을 기대할 수는 없을 것만 같았다.

결국, 서로 멀어지려는 찰나.

“어디로 가시오?”

맥이 질문을 던져왔다.

그의 목소리는 추위에 잠겨서인지 유난히 무뚝뚝하고 거칠게 느껴진다.

“내 이름은 빌이고 동료들과 헤어졌소. 어디로 가는 게 아니라 근방에 있을 그들을 찾아야지. 그전에 내 물건부터 챙겨야 하겠지만.”

아니 이름은 묻지 않았는데.

“그 물건이 뭐요?”

“동화요. 지금 아흔아홉 개의 동화가 있는데, 한 닢만 더 찾으면 집에 가서 푹 쉴 수 있소. 큰 지네에게 쫓기다가 하나를 흘려버렸지. 그게 있어야 도박 빚을 다 갚는다고.”

그러면서 남자가 맥에게 뭔가를 얻어먹을 수 있을까 싶어 연신 기웃거렸다.

하지만 맥은 궁금한 것만 물어보고 나선 입을 닫아버린 모양이다.

얌체같이.

결국, 남자는 투덜거리며 맥의 옆을 완전히 떠났다.

그 남자가 사라지고 난 후 맥은 계속 걸었다.

그는 언제 번우드의 무리로 돌아가려는 걸까?

“….”

얼마 가지 않아 맥은 옆으로 쓰러져 있는 남자의 시체를 발견할 수 있었다.

아까 만났던 빌이었다.

그의 손에 아까 보여줬던 동화는 없었다.

등의 관통상을 보면 괴물에게라기보다는 같은 인간에게 당한 듯싶었다.

너무 얼어붙어서인지 괴물들도 뜯어 먹지 않은 모양이다.

마치 바위처럼 굳어져 버렸으니까.

죽은 지 아주 오랜 시간이 흘렀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맥은 등에 메고 있던 삽을 꺼내 손에 쥐었다.

그리고 땅을 파기 시작했다.

얼어붙은 땅이라 결코 쉽지만은 않았지만, 결국 충분한 공간을 만들 수 있었다.

얼어붙은 시체를 구덩이 안으로 옮기는 것도 힘든 일이었다.

시간이 지나 손을 탁탁 턴 맥은 문득 술 생각이 간절했다.

하지만 안 될 말이다.

술 대신 그는 누구에게 하는지 모를 말을 중얼거렸다.

“그 애는 이제 혼자야. 너는 내 딸을 외롭게 만들었다. 그 애는 처음에는 자포자기한 상태였지. 하지만 지금은 잘 지내. 그러니 그런 아이의 평온을 깨트리기 싫은 아비의 마음도 이해해 주길 바란다. 난 네 이야기를 하지 않을 거거든. 영지가 위험하다고 해서, 나쁜 사람들과 어울려 도망친 자의 말로라기 하기엔…. 비참하군.”

그는 사위의 무덤을 보며 착잡한 심정이 되었다.

하지만 끝까지 손을 씻지 못한 도박꾼의 말로란, 다 그런 것 아니겠는가?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더 큰 곤경을 되풀이하는 삶.

그는 주머니를 뒤지며 중얼거렸다.

“너를 죽였던 네 동료들은 내가 처리했다. 그러니 이제 편히 쉬어라.”

맥의 주머니에서 빠져나온 동화가 햇빛에 반짝거리며 허공을 날았다.

그리고 맥의 사위인 남자의 무덤 위에 떨어졌다.

땅속에서 안식을 취한 고인에게 남겨진 것은 동화 한닢 뿐이었다.

맥은 등을 돌렸다.

그리고 천천히 사라져 갔다.

이제 바람이 부는 설원엔 작은 무덤만이 남았다.

*  *  *

연합군과 번우드의 병력이 조우하던 날.

연합군은 정찰병에게 미리 상황을 들었다.

하지만 막상 이렇게 번우드의 병력을 보니, 정말 의외라는 반응이 터져 나왔다.

“이것 참.”

땅 위를 가득 메운 연합군 앞에, 번우드의 병력이 고스란히 보였다.

그런데 숫자가 만만치 않다.

“이목을 흐리는 미끼로 쓴다고 하기에는 너무 많은 병력이야. 그런 의도로 길게 늘어선 것 같지는 않은데…. 저렇게 많은 수를 말에 다 태우려고 운용했다면, 적 우두머리는 최악의 바보일 거야.”

번우드의 병사들은 협곡 뒤에 숨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협곡 앞으로 나와 진을 치고 있었다.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풍경이다.

물론 진이라고 해봐야 천으로 이루어진 임시 막사였다.

뒤로 빠지면서 추격하는 군에게 기습을 가하려는 것인가?

그렇다면 거의 전부가 나와 있는 듯한 머릿수에 기묘함이 일었다.

깃발들이 정렬하고 군대의 북과 피리 소리가 사방을 메우는 가운데.

누가 봐도 연합군에서는 번우드 따윈 상대도 안 될법한 숫자를 포진시켰다.

완전히 자리를 잡은 그들이 지휘관의 명령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상대는 괴물이니까 바로 강공에 들어갈 가능성이 컸다.

아니나 다를까, 궁수부대가 좌에서 우로 움직였다.

그들이 중앙의 앞쪽으로 이동하는 데엔 시간이 오래 걸렸는데, 이해해 줘야만 한다.

그 궁수부대의 숫자가 번우드의 절반이나 되었으니까.

결국, 거인과 갓난아기의 싸움이었다.

전투가 벌어진다 한들 번우드는 필패였다.

누구나 그걸 예상할 수 있었다.

궁수들에게 활을 쏠 준비를 시키려는 찰나.

지휘관은 잠시 머뭇거렸다.

그리고 연합군 곳곳에서 작은 동요가 일었다.

그 작은 파문은 전염병과 같이 주변으로 넓게 퍼져나갔다.

협곡을 등진 번우드 진영에서 말 한 필이 앞으로 달려 나왔다.

눈부신 한 필의 말 위에는 하얀 옷을 갑옷을 입은 기사가, 역시나 하얀 깃발을 높이 들고 있었다.

하얀 말 위에서 높이 떠오른 깃발이 펄럭였다.

그 펄럭임을 쫓는 것은 비단 병사들뿐만이 아니었다.

기사들은 물론이고, 뒤쪽의 안전한 곳에서 관람하고 있던 귀족들도 이동하는 깃발을 보았다.

아주 빠른 속도로 달려 나오던 말은, 정확히 중앙 지점에서 멈춰섰다.

그리고 그 말에서 내린 기사는 깃발을 땅에 꽂았다.

깃발을 등지고 앞으로 천천히 걸어 나와 선다.

그리고 기다렸다.

응답을.

이제 연합군은 웅성거림으로 가득 찼다.

이건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그들은 세계수의 악마들을 물리치러 가는 것이었다.

그 악마들은 괴물답게 예법이 없었다.

야만과 광기의 상징인 그들에게, 인간들의 전투 예우를 바라는 것은 무리였다.

그런데 지금 그런 생각이 깨졌다.

“수작을 부리는 건가?”

“상대는 혼자잖아. 그리고 아무리 봐도 괴물로는 안 보여. 갑옷 속에 흉측한 모습을 숨기고 있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병사들의 웅성거림이 퍼져나갔고, 궁수들도 화살 재는 것을 멈추며 일단 대기했다.

상대 진영에서 기사가 나오면, 거기다 대고 활을 쏘는 것은 굉장히 비상식적인 행위였다.

그러나 상대는 괴물이다.

괴물 집단이다.

하지만 저렇게 보시다시피, 일반적인 전쟁에서 이루어지는 순서를 밟고 있다.

그런 상념들로 머리가 복잡한 사람들은, 당연히 지휘부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말도 안 되는 수작을 부리는구나. 당장 공격해라.”

바이칼이 그렇게 명령했지만, 귀족들은 드레퓨스의 대장군을 보았다.

드레퓨스의 대장군은 난처한 얼굴로 선봉장을 보았다.

원래대로라면 선봉장이 나서야 할 일이다.

원래대로라면 말이다.

보다 못한 다른 장군이 조심스레 바이칼에게 다가가 속삭였다.

“전하. 오늘 일은 자칫하면 굉장한 험담 거리가 될 수 있습니다. 호사가들 입에서 두고두고 말입니다.”

그 완곡한 표현에도 불구하고 바이칼은 화를 버럭 냈다.

“대체 뭐가 문제냐? 이건 인간들끼리의 전쟁이 아니야! 저놈들은 괴물이란 말이다! 저런 짓도 시간을 벌려는 수작임이 분명하다! 기사전이라니! 그건 이런 상황에서는 통용되지 않는 법칙이야!”

그러면서 지휘봉을 드는데, 그걸 들고 명령하면 드레퓨스의 대장군이라도 복종해야만 했다.

그가 아무리 군인정신이 투철해도, 하늘에서 뚝 떨어진 장군은 아니니까 말이다.

그런데 바이칼의 지휘봉이 제대로 들리기도 전에, 바르보사가 나섰다.

“일단, 저희 기사를 내보내 보겠습니다.”

흠칫 몸을 떠는 바이칼이 노한 눈으로 바라보자, 바르보사가 의뭉을 떨었다.

“이 군대는 연합군입니다. 승전을 나누어 가지듯이, 수치스러운 일도 사이좋게 나누어 가집니다. 물론, 남자라면 가끔 수치도 무릅써야 할 때가 있긴 하죠.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때가 지금은 아닌 것 같습니다.”

상대가 기사전을 걸어왔으니 응답하겠다는 뜻이었다.

게다가 상대는 홀몸이었다.

여기에서 하늘을 메우는 화살로 저 기사에게 대꾸했다가는, 회군 후에도 두고두고 웃음거리가 된다.

물론, 이게 인간들끼리의 전쟁이라면 말이다.

인간들끼리의 전투 양상은, 괴물과의 전투랑은 완전히 달랐다.

무서운 것들이 득실거리고….

하나를 처치하고 산 하나를 넘으면, 다른 한 마리와 마주칠 수도 있는 세상이다.

이런 세상에서 인간들이 서로 싸운답시고 기습이나 온갖 수작을 다 부리면, 자멸하는 꼴이나 마찬가지다.

그래서 포로라는 게 있었고, 아무리 치열한 전쟁이라도 격식이라는 게 있었다.

그게 바로 인간의 생존법이자 품위다.

그 품위는 긍지로서 아군의 사기가 되며, 때로는 그 수단이 정의처럼 받아들여지게 된다.

왜냐면 그 정의는 결국 대의를 향해 있기 때문이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금방 끝날 겁니다. 이쪽은 실력으로 명성을 획득한 기사고, 상대는 고작 한 명입니다.”

그래서 연합군의 진영에서 노란색 갑옷을 입은 기사가 앞으로 뛰쳐나가게 되었던 것이다.

갈색 말을 타고 큰 도끼를 붕붕 휘두르는 기사가 기세 좋게 돌진하자, 연합군에서는 함성이 터져 나왔다.

말꼬리가 좀처럼 위에서 아래로 내려가지 않을 정도의 속도로 달려간 기사는, 말 위에 올라타는 번우드의 기사에게 공격을 가했다.

하얀 기사의 창과 연합군 기사의 도끼가 맞부딪혔을 때, 분명 거센소리가 났으리라.

연합군의 선두 열은 그 소리를 들을 수 있었을까?

후미 쪽의 병사들도 번쩍거리는 무기들을 보며 손에 땀을 쥐었다.

바르보사가 턱짓을 하자 연합군에서 북이 둥둥 울린다.

그리고 보조기들이 위아래로 오르락내리락하기 시작했다.

응원하는 것이다.

“이겨라! 이겨라!”

연합군 진영에서 소리가 터져 나오는 가운데, 번우드 쪽은 조용했다.

그들은 조용히 두 기사가 말을 몰고 달리며 숨 가쁘게 펼치는 공방을 지켜보았다.

과연 바이테스의 기사는 무시무시했다.

그 무거운 도끼를 몇 번이나 가볍게 휘두르고 있었다.

말 위에서 지치지도 않는지 연참을 날리고 있다.

그러나 하얀 말 위의 기사도 만만치 않았다.

얼마나 단단한 창인지, 도끼를 다 막아내며 반격까지 펼쳤다.

튕겨나는 무기들이 반원을 그리며 다시 매섭게 몰아쳤다.

때로는 늑대의 이빨처럼, 때로는 독사의 날름거리는 혓바닥처럼.

나란히 달린 두 마리 말의 뒤로, 먼지구름이 일어났다.

두 기사는 화려한 공방을 펼치며 연합군의 코앞을 스쳐 지나갔다.

그들이 교환하는 가쁜 호흡, 그리고 바람과 함께 날아오르는 불꽃과 기세.

커다란 기합이 오가는 가운데 질주하는 말들.

사람들은 흥분한 듯 소리를 질렀다.

이기라고 연합군의 기사를 응원했다.

그러나 숨 가쁘게 달리는 말 위에서, 바이테스의 기사는 그 출중한 실력에도 불구하고 고배를 마시는 중이었다.

일단 하얀 갑옷의 기사는 심혈을 기울인 일격마저도 거뜬히 받아 쳐냈다.

그러면서 현란하게 창대를 쥐고 사방을 가리는데, 그 잔상이 지켜보는 사람들의 눈가에 맺힐 정도였다.

“대단하다. 비록 적이지만 대단하다.”

바르보사마저 감탄을 금치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날 정도였다.

그는 선봉으로 나선 바이테스의 기사를 물론 잘 알았다.

그는 엄청난 실력을 갖춘 강자이다.

그런데 상대는 지금 그런 기사를 봐주고 있었다.

‘괴물들이 흔히 하는 식인, 압도적 힘으로 몰아붙이는 움직임이 아니다. 기마술도 그렇고 체계적으로 배운 자다. 게다가 기술을 능수능란하게 구사하며 힘의 배분도 완벽하다. 누구지? 대체 저자는?’

무기들이 서로 거칠게 얽혔다가 떨어지며 말들이 교차해 멀어졌다.

그리고 고삐에 당겨진 말 머리들은 다시 적들을 향해 돌려졌다.

그리고 그들이 다시 달린다.

백마 위에 탄 기사는 이제 끝을 내겠다는 듯이, 창을 한 손으로 들고 상대 기사를 겨누었다. 그 자세에는, 그대로 적을 관통하려는 기백이 담겨 있었다.

바이테스의 기사는 거친 숨을 헐떡이면서도 마주 달려갔다.

여기서 죽어야 한다면 그뿐이다.

실력이 모자라 죽임을 당하는 것이니 억울하지도 않았다.

말들이 옆에서 보면 그대로 충돌하는 듯 가까워질 때, 엉덩이를 말 등에서 뗀 바이테스의 기사가 도끼를 힘껏 휘둘렀다.

거목도 일순간에 박살 내는 빠르기와 힘이었다.

그때 이그문트가 궤적을 피해 머리를 숙였고, 세리스는 상체를 뒤로 힘껏 젖혔다.

아슬아슬하게 투구 위를 스쳐 지나가는 도끼날이 햇빛을 가린다.

그러면서 그녀의 머리 위로 지나가는 검은 새처럼, 그림자를 만들었다.

그 새가 완전히 그녀의 머리 위를 지나갔을 때, 세리스는 몸을 뒤로 젖힌 상태에서 창을 쭉 뻗었다.

“아!”

그때 연합군에서 탄성이 터져 나온 것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적아를 떠나 둘의 승부는 모두를 감탄시키기에 충분했다.

따각따각 소리를 내며 두 기사가 다시 멀어진다.

그리고 술에 취한 듯 비틀거리던 바이테스의 기사는 쿵! 하고 낙마하고 말았다.

이제 사위는 정적에 휩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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