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은 왕 마검의 주인-95화 (95/307)

# 95

& 종말 예언

“자, 다 건너뛰고 한번 생각해보자고. 어떻게 하면 우리의 욕망을 이 세상에 투사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원래 원하는 대로 세상을 개판으로 만들 수 있지? 물론 우리가 번영을 누리면 좋겠지만, 너 때문에 그게 아주 불투명해진 상태야.”

“….”

“이럴 때 속 좁은 바보는 생존에 대한 욕망으로 급급해서 상황판단을 하지 못하지. 하지만 우리는 우두머리라고. 밖에서 시간을 끄는 동안 지금까지 해온 의식을 조금 비틀어 본 거야. 생각해 봐.”

각성자의 피가 필요한 이유는 영적 화폐로 지불하기 위해서이다.

권력자나 지도자의 피를 탐하지 않은 이유는, 그들을 취하기 위한 정성이 너무 크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고위 성직자를 납치한다면 인간들이 가만히 있겠는가?

“모든 게 다 그래. 공짜는 없어. 라이트닝 블러드. 너라는 놈을 어떻게든 해치우고, 세상을 지옥으로 만들려면 대가를 치러야 하는 거야. 이제 와서야 네가 우리 편일 수도 있다는 것에 생각이 닿았지만 말이다. 우리에겐 그저 뜸을 들일 시간이 필요했을지도….”

드래곤이 죽는 순간, 계획 일부가 망가졌다.

라이트닝 블러드를 상대할 수 있는 괴물은 없었고, 그를 맞이할 시간조차 없었던 것이다.

결국, 미래로 도피할 시간도 없는 마당에 무엇이 최선인가?

어떻게 해야 세상을 파탄 낸다는 목적이 이뤄질 수 있지?

그래서 생각하고 생각한 끝에 정답을 찾아냈다.

일단 미래는 포기한다.

가망이 없으니까.

그렇다면 반대로 과거를 끌어다 쓰는 것은 어떨까?

과거에 대전쟁이 일어났을 때의 괴물들은 그야말로 무시무시했다.

신화에서 나오는 괴물들인 것이다.

그들을 소환하면 어떨까?

그 시대에 가득 찬 악을 소환한다면?

“궁극의 악을 여기에 소환하는 거야. 끝도 없이 쏟아져 나오는 마물들, 그 해일 속에서 절망을 부르짖는 게 바로 너희들의 미래다. 우리가 과거에 비하면, 한 줌 전력도 안 되게 약해졌듯이. 인간들도 마찬가지거든.”

“….”

노인은 고개를 돌려 세인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대머리 노인의 눈은 깊이 가라앉아 있었다.

그것은 차가운 광기로 물든 눈이었다.

“그러기 위해서 화폐가 문제라면 어쩔 수 없는 거지.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고가치의 화폐가 뭘까? 뭘 지불해야 그 시대의 악을 살 수가 있지?”

각성자의 피 따위로는 그 무겁고 잔인한 시대를 살 수 있을 리가 만무하다.

어떤 절실한 값을 지불해야, 지옥을 현세에 불러올 수 있을까?

그래서 괴물 왕들은 엄청난 숫자의 괴물들을 제물로 바쳤다.

여태까지 모은 각성자들의 피와, 거의 다 완성되었다가 어그러진 의식을 얹은 것이다.

그것도 모자라….

“다 죽었어. 내 동료들 말이야. 이 구덩이 밑에서 모든 피를 쏟아냈다. 그야말로 모든 것을 바친 계약이다. 결국, 그렇게 계약은 성사됐어. 왜 아니겠나? 모두가 죽었는데, 이 이상 바칠 것도 없다.”

괴물 왕들은 세상을 파탄 내기 위해서 자신들의 목숨을 바쳤다.

가끔 인간들이 모든 것을 걸고 사랑하듯이, 그들은 모든 것을 걸고 세상을 증오한 것이다.

그리고 이제 최악의 시대가 온다.

다시 세상은 멸망 직전이 된다.

전처럼 대단한 영웅들이 없는 일방적인 폭력의 시대가 열린다.

하지만 세인은 대머리 노인을 향해 조소를 날렸다.

“그때의 영웅들은 없지만, 그때 이후로 신이 만든 게 있어. 바로 엘릭서지. 왜 만들었겠어? 이럴 때를 대비하기 위해서지.”

그러자 대머리 노인은 그의 조소를 맞받아치며 비아냥거렸다.

“성검이라면 모르겠지만, 너는 우리들과 같은 악이잖아. 네가 이 세상에 한 짓을 봐. 우리도 그럴만한 힘이 있었다면 너처럼 해댔을 거다. 네가 우리의 대척점이라도 된다고 생각해? 천만에, 넌 우리의 든든한 아군이야. 그런데 너는 그걸 자각하지 못해서 우릴 이렇게 곤경에 빠트린 거지. 과연 대단한 악이다. 우군마저 망가뜨리니까.”

검이 노인의 등을 찔렀다.

그러자 움찔하는 대머리 노인은 신음처럼 말을 뱉어냈다.

“기대되는구나. 명멸(明滅)하는 세상이. 그 교차하는 어둠과 빛 속에서, 얼마나 많은 피조물이 혼란스러워하며 상잔할까? 그리고 그 깜박임을 재촉하는 건 바로 너야. 어쩌면 이 시대가 마검을 선택한 것은, 자살을 꿈꾸는 세계의 의지일는지도 모르겠어. 그게 아니라면, 왜 이럴 때 성검이 아니라 하필 너겠어? 너는 마검을 든 괴물이잖아.”

노인의 배를 관통하는 검날이 번뜩였다.

그 빛은 노인의 몸을 뚫고 나와, 핏물로 젖어 들었다.

“결국, 이제는 역전된 거야. 인간이 칠이고 우리가 삼이던 시대에서, 원시적인 괴물로 가득찬 세상이 온다. 기다려라 그 시대를. 목을 늘이고 기다려. 온다, 곧 온다고. 계약은 이미 끝났어.”

검날은 이제 참지 못하고 노인의 배를 빠져나와 목을 날려 버렸다.

주문처럼 미래를 이야기하던 노인의 머리는 힘없이 구덩이 속으로 굴러떨어진다.

그것도 모자라 세인은 노인의 몸을 뒤에서 걷어차며 어둠 속으로 밀어 넣었다.

그리고 흔들리는 눈빛으로 바닥이 보이지 않는 구덩이를 응시했다.

세상을 파괴하겠다는 괴물들의 진심은 자신들마저도 배제한 채, 과거로부터 종말을 끌어왔다.

그 종말은 훗날 이 시대에 강림한 후 자제할 줄 모르고 폭주를 거듭할 것이다.

그리고 아무것도 남지 않은 결과를 잉태하겠지.

마음이 진정되지 않아 주먹을 쥐었다 펴기를 반복한 그는, 노인이 앉았던 자리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그리고 구덩이를 내려다본다.

하지만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가 괴물들을 다 죽여버리겠다는 그 마음이 진심이었듯이, 이들의 욕망과 집념도 진실이었던 것이다.

어떤 대가를 치러서라도 여기에서 모든 괴물을 다 죽여버리겠다는 마음만큼이나, 괴물들의 뜻도 절실했다.

태고에 거대한 악들이 몸부림치던 시대가 여기로 소환되면, 세상 전체가 고통받을 것이었다. 그에 비교하면 현대의 괴물들은 약한 세력이었다.

그런데도 지금까지 날뛴 결과를 보라.

북부와 중앙이 엉망이 되었다.

“몇 년 후냐. 일 년? 십 년? 이십 년?”

그가 대머리 괴물을 죽이기 전에 물어보았다면 과연 그는 대답해 주었을까?

답을 갈구하듯이 마검을 내려다보지만, 마검은 당연히 답이 없었다.

이 시대가 선택한 게 바로 마검이다.

그리고 마검이 아무리 시간을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해도, 시대마저 초월하는지는 모르겠다.

그가 기적적으로 완벽히 마검을 통제할 수 있고, 먼 과거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고 치자.

설사, 그게 가능하다 쳐도 전혀 엉뚱한 시대에 떨어져 버리면?

온갖 상념이 세인의 머릿속을 괴롭혔다.

그는 언제나 그랬지만, 오늘 유독 괴물들이 증오스러웠다.

“죽이기 전에 더 큰 고통을 줬어야만 했어.”

그의 독백이 쓸쓸하게 구덩이 위를 맴돈다.

*  *  *

북진하던 드레퓨스의 군대는 괴물들의 핵심이 소멸한 것에 대해 잠깐 진상조사를 벌였다.

그러나 그것은 그야말로 잠깐이었다.

드레퓨스의 대군은 승전보를 고국으로 보내며 계속 위쪽으로 이동했다.

동맹군들은 눈치를 보다가 결국 드레퓨스와 발을 맞추었다.

여기에서 돌아가도 그들은 영웅 대접을 받을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야말로 괴물들의 뿌리를 뽑아야 한다는 의견도 많았다.

게다가 지금 그들이 지나간 영토는 무주공산이나 마찬가지였다.

“지금의 모험은 성스러운 선을 이룩하기 위한 숭고한 여정이며, 국가도 존재하지 않는 땅에 발을 들인 행위가 침략이라고 규정하기 어렵다.”

그렇게 멋대로의 정의를 붙여가며 군대는 계속 북진했다.

그러면서 민가를 약탈하고, 저항세력이 반항하면 폭력으로 굴복시켰다.

중앙만 해도 안면이 있는 사이니까 자제하는 모습을 보였는데, 북부 쪽으로 갈수록 연합군의 패악은 심해졌다.

거기에 회의를 느끼는 것은 첫 번째로 성국이었고, 두 번째로는 바이테스 제국이었다.

현재 바이테스 군을 통제하는 이가 대장군 한 명과 황제의 먼 친척이었다.

하얀 수염을 길게 기르고 반쯤 감긴 눈에 뚱뚱한 체구를 한 바르보사는 제국의 백성들에게 인기가 많은 귀족이었다.

같은 귀족 사이에서도 그의 덕에 대해서 평소 흠모하는 이들이 많았다.

이번 원정으로 황제가 골치를 썩은 건, 이런 군의 행적이 훗날 매우 불명예적인 기록으로 남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사실 악의 뿌리를 뽑겠다는 말은 핑계고, 머리가 돌아가는 귀족들이라면 이게 땅따먹기 행위인 줄 다 알았다.

그들이 가장 혐오하는 침략행위인 것이다.

전쟁은 괴물들의 본진을 물리친 시점에서 끝났어야만 했다.

그런데 이번 2차 움직임에 관련된 사람들은, 두고두고 역사에 오점으로 남겨질 가능성도 존재했다.

부당한 침략자들을 무찌르는 것은 영광스러운 일이다.

칭찬받아 마땅하고, 오벨리스크에 새겨져야 할 일이다.

그러나 반대로 악의 뿌리를 뽑겠다는 주장이, 불행한 나라들에 무단으로 군대를 밀어 넣는 행위의 근거가 될 수 있을 것인가?

과연 대의명분이 될 수 있을 것인가?

그렇다고 돌아갈 수도 없는 게, 일단 드레퓨스와의 협약이 존재했고 이익이 걸린 원정이었다.

바르보사는 총사령관인 황제의 친족에게 자신이 직접 바이테스의 군을 이끌겠다고 말했다.

물론 군 통솔은 원래대로라면 혈족인 대장군의 몫이다. 하지만 바르보사가 역사의 오점으로 남을 수 있는 자리를 대신하겠다며 나선 것이다.

황제의 혈족은 바르보사에게 고마움을 표했다.

더는 전쟁을 수행하지 않고 귀환한다 하더라도, 그에겐 승리의 영광을 챙길 수 있는 상황이었으니 말이다.

그리고 그를 맞이한 황제 입장에서는, 바르보사가 가려운 곳을 긁어준 것이나 다름없었다.

자신의 직계 혈족이 자칫 더러운 역사에 이름을 올리는 것은 그에게도 굉장히 불유쾌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의 치적이 영향받을 수도 있는 문제였다.

“과연 가문의 어른이다. 언제나 그랬지만 이번에도 바르보사에게 신세를 지는구나.”

황제는 비공식적인 파티에서 그렇게 말했다고 한다.

연회장에 모인 다른 귀족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황제 근처에 앉아 있던 황태자가 바르보사를 위해 건배를 제안하자 다들 잔을 들어 올렸다.

“주인 없는 집의 담장을 연거푸 넘는구나. 멀리 있는 강도를 치러 간다고 말하면서 정작 강도짓을 하는 꼴이다.”

호화스러운 마차 안에 앉아 있던 바르보사는 그렇게 중얼거렸다.

푹신한 방석에 몸을 파묻은 그가 한 말은, 일단 혼잣말의 형식을 띠고 있었다.

하지만 혼잣말이라기에는 목소리가 너무 컸고, 창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좀 과장하자면, 마차를 모는 마부들에게도 다 들릴 정도였다.

바르보사는 그런 말을 하는 것도 모자라 짓궂게 행동했다.

바로 옆에서 말을 모는 기사에게 곁눈질하며 동의까지 구한 것이다.

“안 그렇소? 피츠?”

말 위에 타고 있던 중년의 성기사는 그저 쓴웃음만 지었다.

중년인으로 사람 좋게 생긴 이 사람은, 성국의 중요인물 중 하나였다.

“짓궂으십니다.”

이름까지 불렀으니 대답을 안 할 수도 없던 피츠는 말을 얼버무렸다.

하지만 바르보사는 그 대답이 마음에 안 들었는지 무릎까지 쳐가며 열을 올렸다.

“생각해 보시오. 굳이 산까지 다 뒤질 필요가 있나? 오죽하면 유민들이 그런 험한 곳까지 올라가 살겠소. 사방에 흩어진 소규모 전투 집단들도, 결국 나라를 세우기 위해 모인 집단일 거란 말이오. 최소한 치안대 역할이라도 하는 거 같던데, 대체 무슨 의도로 쥐 잡듯이 잡는 건데?”

“….”

“나라의 기틀을 다시 세우려는 사람들을 불순한 무리로 몰아가며 사냥을 하는데, 아무리 드레퓨스라고 해도 정도껏 굴어야지. 상식적으로 말이오. 넘어진 사람이 안간힘을 쓰며 일어나려고 하는데, 옆에서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지팡이를 걷어차는 게 말이나 되는가?”

피츠는 말을 몰아 마차 옆으로 바싹 붙이더니 속삭였다.

“제 사정도 좀 헤아려 주십시오. 이런 이야기 속에 제가 끼어 있었다는 것을 알면, 위에서 저만 난처해집니다. 당신이야 태생이 고귀한 분이니 상관없겠지만.”

“에잉.”

바이칼은 일국의 통치자가 맞기나 한 것인지, 최근 들어 무도한 산적처럼 굴었다.

이건 모른 체를 해주려고 해도 너무 노골적이었다.

보이는 나라마다 들쑤시니 근처에 있기가 민망할 정도였다.

‘덕도 없는 이가 땅을 넓혀서 뭘 한단 말인가. 책임지지도 못할 그 땅 위의 사람들도 고생이고, 그 욕심에 희생당하는 자국의 국민들도 고생이지.’

“피츠. 당신이나 나나 더러운 진창에 발목을 담근 거요. 굳이 후세사람들까지 안 가더라도, 나라의 지식인들이 우릴 뭐라고 부르겠소. 길게 보면 이건 우리 자식들까지 욕 먹이는 행위지.”

투덜거리는 바르보사 옆에서 견디다 못한 피츠는, 말을 빠르게 몰며 선두 쪽으로 달려가 버렸다.

그걸 보며 혀를 끌끌 차는 바르보사였다.

지금 그의 주위를 가득 채우고 있는 군대는 이 어른을 매우 존중하고 있었다.

꼭 황제가 아끼는 인물이라서가 아니라, 지나칠 정도로 솔직하고 대차면서도 밑의 사람들을 헤아려 주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강자에게는 그 뚱뚱한 배를 들이밀며 배짱을 부렸고, 약자의 허물은 눈감아 주는 인물이 바로 그였다.

대장군이 와서 보고하면 우리끼리 그런 거 하지 말자고, 전문가인 당신이 알아서 하면 될 일이라며 손을 휘젓는 위인을 누가 미워할 수 있을까?

그래서 그의 주위에 있는 군인들은 그냥 피식 웃으며 모른척했다.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고 해도, 어차피 외교 문제로 불거질 일은 아니었다.

이미 주변은 다 그의 편이니까.

누가 쪼르르 달려가 드레퓨스에게 일러바치겠는가?

상당수가 고국으로 귀환했음에도 불구하고, 연합군의 수는 어마어마했다.

그 많은 인원이 이동하는데도 한세월이었다.

강과 들판을 지나 가이더에서 남쪽으로 약간 떨어진 지역에 도착했을 때는, 어느덧 점심시간이었다.

잔뜩 몰려온 그들은 세계수에서 출발했던 번우드의 사람들과 마주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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