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은 왕 마검의 주인-94화 (94/307)

# 94

& 고통의 용광로 (4)

생각해보면 기묘한 풍경이었다.

시체들이 가득한 곳에서 괴물과 남자 한 명이 지금 서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세인은 당연히 지금 이곳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가를 물어보려고 했다.

그리고 상대를 죽일 것이다.

그런데 현자가 먼저 선수를 치며, 몸을 돌려 뒤쪽을 가리켰다.

“생존자는 저뿐만이 아닙니다. 뒤에 다른 자가 있어요. 그에게 가면 아마 높은 확률로 진실을 들을 수 있을 겁니다. 그러니 그걸 제게 물으세요. 그리고 대답을 떠나서 저를 죽인다는 생각은 접어주세요.”

“….”

“자 그럼 말해보세요. 진짜로 도움받고 싶은 것을.”

타락한 현자는 손을 싹싹 비비면서 답변을 기다렸다.

그의 드러난 붉은 잇몸과 이를 바라보며, 세인은 이상한 기분에 빠져들었다.

밑져야 본전?

아니, 그게 아니라 정말로 답을 갈구하면 해갈을 할 수 있을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잠시 망설이던 그는 상대의 이상하리만치 자신만만한 분위기에 이끌려 흉중의 문제를 꺼내 놓았다.

“타락한 부활자들을 정화하는 방법에 대해 알고 있나?”

“네크로맨서이신가요?”

“사정이 있어서 말이야. 만약에 되살아난 자들. 타락한 자들을 정화하는 방법이 있다면 듣고 싶다.”

그 말을 들은 현자는 세인의 의도를 알아내기 위해 머리를 굴렸다.

그리고 이것저것 질문을 한 후 고개를 끄덕였다.

“엘릭서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중에서 성검은 빛으로 이루어진 천사의 가호를 받죠. 그녀라면 방법이 있을 겁니다. 그런데 말이죠. 그런 성검의 도움을 받는 것은 기적에 가깝죠. 그러니 생각해 봅시다.”

뻔한 이야기였다. 세인이 검에 쥔 손에 힘을 주려는 찰나, 현자는 상체를 앞으로 내밀었다.

그리고 바닥에 깔릴 듯한 음성으로 요점을 집었다.

“들어보니까 타락한 것이 마음에 걸리는 거죠? 그렇다면 타락이 아닌 상태로 만들면 되는 거겠죠?”

“뭐?”

“더 나은 상태로 만들어 버리면 되는 것 아닙니까?”

그러면서 그는 고통의 용광로에 대해 설명을 했다.

고통의 용광로.

이것은 마왕 유고의 유물 중 하나로, 하나의 존재를 개조시키는 물건이었다.

괴물의 왕들은 이 유산을 이용해 여러 가지 괴물을 만드는데 쓴 적이 있었다.

“하지만 고통의 용광로는, 조건만 충족된다면 정반대의 결과를 위해 쓰일 수도 있습니다. 개량을 거듭해 더 나은 존재로 만드는 거죠. 제물을 바쳐 개조하려는 존재가 더 강해지고, 더 빨라지다 보면 결국 급이 올라갑니다. 그게 바로 궁극적인 목표죠.”

“….”

현자는 한때 자신의 비참한 모습을 되돌리기 위해 고통의 용광로를 연구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밑바닥까지 떨어진 괴물을 다시 인간으로 되돌리는 방법은 알아내지 못했다.

유고의 유물은 한 개가 아니었고 그중 하나가 바로 고통의 용광로였다.

고통의 용광로는 지금 설명하고 있는 것 외에도 여러 기능을 가지고 있는데, 그중 하나가 아군의 절대적인 충성을 받아내는 일이다.

“그 타락한 분들을 강화하세요. 그러다 보면 자연스레 수준이 올라가죠. 그리고 궁극적으로 승급하여 격이 올라가게 됩니다. 그러면 당신은 더 강한 전사를 손에 넣고, 그들의 타락도 풀어줄 수 있게 됩니다.”

“….”

“일거양득 아니겠습니까? 살점도 남지 않은 해골 병사나 아주 끔찍한 타락만 아니라면 가능한 일입니다. 본질을 바꿀 수 없다면 격을 끌어 올려서 탈바꿈시키는 것이죠.”

팔짱을 낀 세인은 생각에 잠겼다.

여기에서 이런 사실을 알게 될 줄 몰랐는데, 정말 의외였다.

그는 눈앞의 괴물에 말을 의심하기보다는, 차라리 믿고 싶었다.

왜 아니겠는가?

“그것의 위치를 말해 줄 수 있나?”

“당연하죠. 제 목숨은 그것보다 가치 있으니까요.”

현자는 단숨에 고통의 용광로가 있는 위치를 말했다.

그러면서 현자는 바닥에 몸을 대고 비굴한 자세를 취했다.

양 손바닥을 위로 내보이며 웅크린 그는 동정을 유발하기 위해 호소했다.

“살려주십시오. 당신은 여기까지 혼자 온 몸이니 굉장한 강자겠지요. 제가 여기저기 숨어봐야 소용도 없을 겁니다. 정말 저는 피해자입니다. 유괴당해서 온갖 고문과 개조를 당했단 말입니다. 그리고 당신에게 도움까지 주었습니다. 제발 이런 제 형편을 보살펴 주십시오. 그러기 위해서는 그저 변덕스러운 동정심. 바람에 스쳐 지나가듯 잠깐 일어난 동정심 하나면 됩니다.”

이렇게까지 빌자 세인도 곤란해졌다.

괴물에 대한 증오심과 양심이 그의 가슴속에서 대립했다.

괴물을 모조리 죽여야 한다는 마음이 불처럼 일어날 때 상대는 자비를 호소했다.

그리고 그가 했던 말이 모두 사실이라면, 세인은 그의 영지민을 구제할 수 있게 된다.

그는 결국 타락한 현자 앞에서 검을 거꾸로 세웠다.

검 끝을 바닥에 댄 채 말이다.

그리고 말했다.

“그럼 이렇게 하자. 이 검이 쓰러진 쪽에 결정을 맡기기로. 정해라. 어느 쪽이냐?”

그러자 현자가 숨도 쉬지 않고 대답했다.

“왼쪽입니다!”

세인은 손을 놓았다.

그리고 검은 오른쪽으로 쓰러졌다.

“….”

쓰러진 소리를 들은 현자가 외쳤다.

“어느 쪽으로 쓰러졌나요?”

목숨이 걸린 일이라서 목소리가 떨리는 것일까.

그 앞에서 세인은 검을 집어 들며 대답했다.

아무렇지도 않은 음성으로 말이다.

“왼쪽이다. 그러니 널 살려주겠다. 내 의지와 상관없이 운이 결정한 일이니까.”

그리고 현자를 지나쳐 걸어가는데, 얼마나 멀어졌을까?

타락한 괴물이 세인을 불렀다.

“빈센트.”

그가 뒤돌아보자 현자가 말했다.

“쓰러지는 방향은 저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저도 귀가 있으니까요. 그래서 말하는 겁니다. 저는 용광로에 대해 거짓말을 했습니다. 이제 진짜 위치를 알려드립니다.”

그리고서 현자는 고통의 용광로가 숨겨진 진짜 위치를 알려주었다.

그리고 말하지 않은 부분도 말해 주었다.

“고통의 용광로는 사실 많은 부작용이 있는 물건입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괴물들이 그걸 포기했을 리가 만무하죠. 하지만 그걸 잘 연구하다 보면 당신의 뜻을 이룰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 물건은 버거움을 느낀 괴물들이 가장 깊은 안식처에 숨겨 놓았습니다. 세계수가 있는 곳이 바로 그곳이죠. 그녀가 그걸 품고 있습니다. 괴물들에게 있어서, 거기야말로 가장 안전한 금고죠. 타인들이 발을 들이기 꺼리니까요. 제어할 수 없다면 누구의 것도 될 수 없게 숨긴 것입니다.”

세인은 그것을 귀담아들었다.

“빈센트. 나의 고백은 정말이었습니다. 나는 납치 당해서 이런 끔찍한 모습이 되어 버렸어요. 당신은 살기등등한 상태로 저와 마주했지만, 결국 죽이지 않고 풀어주는군요. 분노 속에서도 그럴 수 있다니. 저는 그렇게 하지 못했을 겁니다.”

그러면서 허리를 숙여 보인 현자는 바닥을 미끄러지며 멀어져 갔다.

그리고 모습을 감추고 말았다.

세인은 그들 등지고 앞으로 나갔다.

모르겠다.

그는 자신이 위험한 상태라는 것을 인식했다.

마검을 휘두르며 엄청난 일을 아무렇지도 않게 벌이는 포악한 마음이 말이다.

그런데 방금 전은 그렇게 증오하던 괴물 중 하나를 그냥 보내줬다.

“정말로 알 수가 없군.”

이제는 자신이 뭔지.

어떤 상태인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자신을 안다는 확신도 사라져 버렸다.

마검을 든 그는 거대한 공동묘지를 지나 동굴의 끝에 도달했다.

거기에는 깊은 구덩이가 파여 있었고, 피부 색깔이나 머리에 난 뿔을 봐도 인간이 아닌 것을 금방 알 수 있는 노인이 앉아 있었다.

그는 등 뒤로 세인이 다가오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저 구덩이 쪽에 목을 쭉 빼내어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의 등 뒤에 선 세인도 대머리 노인의 어깨너머로 구덩이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너무 깊어서 바닥이 보이지 않는다.

“나는 고민했어. 방금 네가 오기 전까지도 말이야. 너에게 전부를 말할까, 말까.”

노인은 고개를 돌리지 않은 상태로 입을 열었다.

그리고 세인은 일단 묵묵히 그의 이야기를 듣기로 결정했다.

“알리지 않는다면 계획은 더 완벽해지지. 그러나 너에게 모든 사실을 알린다면 난 더 즐겁게 죽을 수 있어. 왜냐면 종말을 기다리며 마음이 초조해질 너를 상상할 수 있거든. 아무것도 모르다가 뒤통수 맞는 것보단 언제 맞을까 싶어 가슴 졸이는 게 더 고통스러운 거거든.”

입을 다물고 있던 세인에게 노인은 계속 말한다.

“신의 조각이여. 네 약점이 뭔지 알아?”

“….”

노인은 수정구를 들어 올렸다.

워터 헤븐을 비추고 있던 수정구 안은 온통 잿빛이다.

“너는 인간이 근처에 있으면 마검의 힘을 전부 발휘하지 못해. 그건 계속 지켜보면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는 일이야. 마검을 제대로 쓰려면, 다른 인간들이 근처에 없어야 하지. 하지만 그 마검은 너무 광대한 지역을 한 번에 박살 내놓지. 넌 인간을 지키려 하지만, 마검은 말을 듣지 않아. 절충안을 찾기란 참 어려운 일이야.”

“….”

“두 번째로 네가 괴물이라는 것이 진실이다. 그게 인간의 편이라고 생각하는 너의 약점이야. 본인을 모른다는 것, 말하자면 넌 이미 우리 편인 거지.”

“개소리.”

세인은 처음으로 노인의 말에 반박했다.

“이런 짓을 저지르는 것이 괴물이야. 그게 아니더라도 네 몸을 봐라. 네가 인간으로 보여?”

노인은 다시 수정구를 들어 올렸다가 내렸다.

“넌 드래곤을 죽이고 워터 헤븐을 박살 내면서 두 번이나 선을 넘겼어. 그러라고 신이 준 선물이든 아니든, 네가 고집하는 정체성을 정면으로 반박한 거야. 너는 빛의 편이 아니야. 오히려 우리 쪽에 가깝지.”

“….”

“부정한다면 너는 위악인 거야. 가증스러운 악은 가장 순도가 높지. 인간의 편이라는 네 고집조차 위선적인 악이다.”

“여기에서 무슨 짓을 저지른 거냐?”

“말을 돌리는군. 좋아. 너도 마음 한쪽에서는 인정한다는 소리잖아?”

세인은 검을 노인의 한쪽 어깨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다그쳤다.

불길한 예감을 쫓아버리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는 괴물들이 절명한 사실과 일부가 사라진 것이, 충동 때문이었다는 대답을 듣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노인의 설명은 정반대였다.

“우리의 계획은 각성자들의 피를 이용해 대가를 지급하고 미래로 가는 것이었다. 각성자들의 피를 노린 이유는 간단해. 들이는 노력에 비교해서 효율이 높기 때문이지. 그래서 시간을 들여 의식을 진행하고, 부가적인 준비도 한 거야. 때로는 어떤 장소가 필요하기도 했고 다른 인간의 피가 필요하기도 했지. 아무래도 시간을 대가로 바라는 것이니까. 시간을 많이 잡아먹는 작업이기도 했어.”

“….”

“대륙의 배꼽까지 내려왔을 때 모든 일은 순조로웠어. 조금만 더 기다리면 끝이 보였거든, 그런데 막판에 와서 일이 어긋난 거야.”

노인은 몸을 웅크린 채 이를 갈았다.

많은 상념이 그의 머릿속을 교차하는 것 같았다.

“너의 존재를 인식하고 나서 우리는 선택해야만 했어. 생존이냐 욕망의 달성이냐였지. 참 어려워 보이지만 꼭 그런 것만도 아냐. 왜냐면 네가 어차피 우릴 죽인다는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거든? 대체 누가 너를 막을 수 있겠나? 마검을 휘두르는 자를 말이야. 너 같은 진짜 괴물은 나중에 불리하면 인간들이 있는 데서 그 힘을 휘두를지도 몰라. 얼마든지 자기 합리화를 하면서 말이야. 너는 그런 놈이야.”

“….”

“인질극 같은 것도 결국 장담할 수 없어. 인질극이란 건 정말 사기야. 알면서도 당하는 거거든, 그런 속성을 가지고 있지. 그리고 또 하나의 속성이 있는데, 인질극은 선한 상대에게만 통한다는 사실이지. 그 두 번째 속성이 바로 문제인 거지. 왜냐면 너야말로 악이니까. 결국, 인질극이라는 좋은 방법도 안 통한다는 소리지.”

차가운 검날이 위협하듯 볼에 찰싹 달라붙는 것을 느끼며 노인이 웃었다.

동요하고 있군.

그는 가급적이면, 세인이 고통스러웠으면 하고 바랐다.

그래서 이렇게 열심히 떠들고 있는 거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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