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은 왕 마검의 주인-93화 (93/307)

# 93

& 고통의 용광로 (3)

쏟아져 내리는 물을 밀어젖히며 회색의 물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 크기를 보면 성이 통째로 일어나서 움직이는 듯했다.

쿵!

물이 흘러내리는 폭포 뒤는 동굴이었다.

그리고 이 괴물은 그 뒤쪽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나 눈이 중앙에 한 개라서 자신의 몸집과 입구 크기를 비교 못 했는지, 위쪽 입구에 부딪혔다.

그러자 몸살이 난 듯 폭포가 흔들리며 아래로 암석들을 뱉었다.

외눈박이 문어는 이제 몸체를 비스듬히 눕혔다.

그리고 나오며 발들을 계속 뻗었다.

그중 다리라고 볼 수도 없는 작은 촉수, 그러나 당하는 입장에서는 거대한 한 개의 기둥이 세인이 있는 자리를 암흑으로 물들였다.

그게 바닥에 부딪힐 때 철썩하더니, 태산이 무너지는 소리가 났다.

죽인 건가?

문어의 중앙에 달린 동그란 외눈은 마치 그렇게 묻고 있는 것 같았다.

노란색의 눈이 뒤룩거리며 좌우로 움직이는데, 갑자기 땅에 내려놓은 문어의 작은 촉수가 떨림을 일으켰다.

그리고 뭉텅 잘렸다.

세인의 몸은 우윳빛 액체로 범벅이 되었다.

그는 치켜든 마검을 아래로 내리며, 옆으로 구르는 문어 다리를 등졌다.

절단된 다리의 단면에서는 액체들이 뿜어져 나와 그의 몸을 때렸다.

그뿐만 아니라 바닥에서 물결을 일으키며 파란 물속으로 번져간다.

그러면서 잘려나간 촉수가 펄떡펄떡 거리며 움직였다.

거대한 문어는 화가 난 것 같았다.

아주 작지만, 몸 일부가 잘렸으니 말이다.

그래서 눈 밑의 입을 벌렸다.

세인은 턱을 올린 상태로 가소롭다는 듯이, 거대한 문어의 눈 밑으로 선이 그려지는 것을 보았다.

그 선은 아래위로 벌어지면서 거대한 구멍을 만들어 냈다.

그리고 거기에서 초록색의 액체가 쏘아져 나왔다.

그 엄청난 양의 액체는 하얀 연기를 피워 올리며 주변을 녹였다.

물에 닿자 부글거리는 소리와 함께 물거품이 일어난다.

세인만을 겨냥한 공격은 아니었다.

방대한 지역에 뿌려지는 액체니까 당연히 남아있었던 괴물들의 머리 위도 뒤덮는다.

녹아내리는 몸들이 풀썩풀썩 꿇어앉으며 부들거릴 때, 문어는 몸을 완전히 앞으로 빼냈다.

몸체에 달린 다리가 수십 가닥은 족히 되어 보였는데, 그중 몇 개는 게를 휘감고 있었다.

건물들을 위에 얹고 움직이는 게도 매우 큰 크기였는데, 그런 녀석을 휘감은 문어는 비교도 안 될 만큼 거대한 몸집을 자랑하고 있었다.

그 순간 폭포 주변의 시끄러운 소리를 집어삼키는 소음이 난 까닭은, 문어의 발이 게의 몸체를 부숴버렸기 때문이다.

하얀 바닥 주변에서 문어의 다리들이 솟아올랐다.

물을 아래로 흘러내리는 기둥들은 높게 올라가 태양을 가리더니 아래로 천천히 떨어졌다.

하나둘씩 떨어질 때마다 물에 약간 잠겨 있던 바닥이 지진을 만난 듯 흔들린다.

이러다가는 완전히 박살 나서 가라앉을 판이었다.

땅이 부서지면 남는 건 뭘까?

사방이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칠흑 같은 물뿐이다.

그리고 폭포 뒤의 동굴은 문어가 막고 있었다.

문어는 물속을 돌아다니니까 먹잇감이 되는 건 시간문제일 것이다.

게다가 거대한 다리 위에 기생충처럼 살아가는 머맨들이 모습을 하나둘씩 드러내고 있었다.

그중 수십 마리가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미리 들어가서 기다리고 있겠다는 듯이 보였다.

움직이는 거대한 다리 위에서 낄낄대며 이쪽을 손가락질하는 녀석들도 목격되었다.

문어는 느릿느릿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지만, 워낙 거대했기 때문에 당하는 입장에서는 지독하게 빠른 찰나로 느껴졌다.

세 번째 다리가 땅을 두들기자 비명과 함께 괴물들이 옆으로 튕겨 나갔다.

인간들은 도저히 상대할 수 없는 크기의 재앙을 만났을 때, 자포자기하는 심정이 된다.

그때 그들은 상대를 자연이라고 느끼며, 경외하고 도피하려는 경향도 보였다.

태풍에 가족을 잃고 적의를 불태우는 상대는 드물었다.

운명처럼 받아들일 뿐이다.

지금 세인의 눈앞에서 거대한 네 번째 다리를 들어 올리고 있는 녀석은 그런 운명처럼 보였다.

그러나 세인의 얼굴은 무표정을 유지했다.

분명 엄청난 녀석이지만, 이게 괴물들이 준비한 회심의 한 수라면 정말 실망이다.

상대가 신화 급의 괴수라면, 이쪽에는 신화 급 중에서도 절대의 상징이라고 불리는 힘이 있었다.

“고작 이건가….”

그의 중얼거림과 함께, 오버 더 데스가 하늘 아래에서 수직이 되었다.

그리고 검은 힘을 줄기줄기 뽑아내며 아래로 휘둘러졌다.

그 동작은 간단했지만, 억제하지 않은 힘이 마구잡이로 풀려나고 있었다.

검은 소용돌이는 몸을 점점 크게 부풀리고 일으키며 문어의 위로 치솟았다.

그러면서 문어를 비웃는 듯했다.

상대가 자연의 경이 중 일부라고 치면, 여기에는 초자연 급이 있었다.

정작 이 땅 위의 생명체들이 경배하고 눈물을 흘려야 하는 대상은 이쪽인 것이다.

위로, 옆으로 퍼져 나가는 검은 물결은 한계를 모르고 점점 주변을 가둬나갔다.

느릿하게 움직이던 문어의 다리가 더욱 느려졌고, 머맨들은 호흡 곤란을 느끼며 입을 통해 검은 고통을 받아들였다.

비명이 어두운 공간에 가득 찼다.

그 비명을 잡고 쥐어짜는 검은 힘은 이것에 만족할 수 없었다.

물 위를 달려 폭포에 부딪힌 검은 연기가 위로 거슬러 오른다.

그러면서 공중으로 치솟으니 하늘이 어두워졌다.

죽음을 흠뻑 머금은 하늘에서 이제 검은 비가 내렸다.

그 비는 지상 위의 생물체를 우박처럼 때리며, 그 충격 그대로 혼을 짓이겼다.

세인은 눈앞에서 문어의 형체가 일그러지는 것을 보았다.

압도적인 힘이 괴수를 찢어발기는 중이었다.

남아있던 괴물들 그리고 머맨들은 이미 뼈를 드러내 보이며 녹아내리고 있었다.

죽음은 그렇게 워터 헤븐 지역을 불모지로 만들어 버렸다.

물은 이제 선명한 검은 색이었고 질퍽해진 채 요동치며, 수면 아래 생물들의 씨를 말린다.

말 그대로 무차별적인 학살이 다시 강림했다.

나무들과 작은 미생물마저 강탈해 버리는 잔인한 운명 말이다.

검은 비명은 다시 그렇게 대지 위를 뒤덮었다.

워터 헤븐의 지리적인 특성상 검은 안개를 가두려는 움직임을 보였지만, 그게 오히려 집중적으로 그곳을 초토화하는 현상을 낳았다.

물속은 죽음의 영역이었다.

세인은 이런 비극을 되풀이하면서도 이게 마지막이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이번은 괴물들과의 결전이기 때문이다.

그들을 세상에서 절멸시킬 수 있다면, 충분히 감수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동안 인간들이 괴물들에게 시달리고 비참한 짓을 당한 것을 생각하면, 충분히 감행할 수 있는 악랄한 앙갚음이었다.

문어가 아래로 가라앉다가 형체도 없이 찢겨 버렸고, 이제 폭포를 투사해 앞으로 나가려는 안개가 물줄기를 거슬러 올라 솟구쳤다.

폭포 너머에 종결이 있었다.

‘드디어 악의 근원이 뿌리째 뽑히는 날이다. 어떤 대가와 벌을 짊어져도 좋으니 확실하게 처리해야 한다. 후환을 남겨 둬서도 안 돼. 검은 기운을 끝까지 밀어 넣고, 나 몰라라 할 일이 아니야. 직접 하나하나 끝까지 찾아 죽인다.’

그런 생각으로 이를 악물 때.

조금 전까지 생명체였던 존재들은, 잿빛을 띤 형체가 되어 사자로서 일렁이고 있었다.

그들은 마지막으로 타들어 가 없어지기 전에, 걷는 세인의 곁에서 속삭이는 것만 같았다.

‘이 사악한 죄인아. 네가 한 짓을 보라. 어떤 죄를 저질렀는지 보라.’

평생 용서받을 수 없다고 저주하는 것만 같았지만, 세인은 냉정히 무시해 버렸다.

‘너희들은 이런 내가 잔인하고 물불을 가리지 않는다 말할지 모르지만, 인간들이 얼마나 고통받았는지 모르니까 할 수 있는 소리다. 더러운 찌꺼기들아, 지옥에서조차 너희들이 거부당하기를 소원하겠다.’

또다시 지옥 같은 시간이 지나갔다.

헐떡거리며 주저앉은 그는 황폐해진 공간 속에서 몸을 숨기고 있었다.

눈은 보이지 않았고 근육에서는 간헐적인 경련이 일어났다.

하지만 이미 감수하기로 마음먹은 마당이다.

그 고통스러운 과정이 더디게 지나가자 세인은 제자리에서 몸을 일으킨다.

마치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이 말이다.

걸어간 그는 폭포 앞에 멈춰 섰다.

검날로 주변에 일렁이는 검은 아지랑이들을 베어 버리자, 가냘픈 비명이 그의 고막을 뒤흔들었다.

그렇게 검을 휘두른 세인은 흩어지는 형체들을 뒤로 한 채, 검은 물들이 흘러내리는 폭포를 통과했다.

그 바람에 온몸은 검은 물로 범벅이 되었다.

그 와중에 붉은 두 눈만이 빛나며 섬뜩한 느낌을 주었다.

폭포 뒤의 공간은 어마어마게 넓었다.

위쪽에는 노란색의 종유석들이 거꾸로 매달려 있었다.

그 뾰족한 기둥들은 노란빛을 내며 아득한 높이의 천장을 밝혔다.

반면 바닥에는 녹색 야광 버섯들이 잔뜩 깔려 주변을 비추었다.

아래쪽의 녹색 빛과 천장의 노란빛은 서로 닿지 못했다.

그 사이가 너무 멀었으니까.

폭포 밖에서 아직도 몰아치고 있는 죽음에 등을 보인 세인은 계속 걸어갔다.

그러면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누가 자신의 앞을 가로막든 요절을 낼 생각으로 말이다.

그러나 주위는 지나치게 조용하다.

너무 넓어서 발소리조차 포용하지 못하고, 흩어지는 공간도 결국 끝이 났다.

이제 세인의 앞에는 훨씬 좁은 공간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 안의 공기는 후덥지근했다.

그리고 불쾌한 악취가 끊임없이 맴돌고 있었다.

악취의 근원은 바로 바닥에 쌓여 있는 사체들이다.

걸음을 멈춘 세인은 손바닥으로 얼굴을 훑어내렸다.

그렇게 검은 액체를 닦아낸 그는 발 앞을 내려다본다.

거기에는 온갖 괴물들이 다 죽어 나자빠져 있다.

원래 그가 있는 곳은 거대한 공동의 중간쯤 정도 되는 지점이었다.

발아래로 까마득한 낭떠러지가 펼쳐져 있어야 하는데, 그 빈 곳은 이제 괴물들의 시체로 가득 차 있는 것이다.

발로 앞에 쓰러져 있는 오크의 등을 밟아보니 출렁거렸다.

엄청난 숫자의 괴물들에게서 흘러나온 피가 마치 늪처럼 그들 사이를 메운 것이었다.

남아있을 괴물들에게 직접 죽음을 선사하러 온 세인은 목덜미를 긁었다.

앞은 이미 평원을 이루고 있는 괴물로 가득했으니까.

대체 누가 이들을 몰살시킨 걸까?

이 엄청난 숫자를 말이다.

설마 제어에 완전히 실패해서, 안쪽으로 마검의 힘이 몰아쳤나?

노력한다고 했는데 실패한 건가?

그가 아직 마검을 완전히 통제하지 못하는 것은 사실이니까 말이다.

하지만 여기에서는 마검의 기운이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 엄청난 시체들은 다 뭐지?

의아해 하는 그가 괴물들의 사체를 밟고 움직였다.

그렇게 얼마나 시취가 가득한 공간을 거닐었을까?

갑자기 몸을 멈추는 세인이었다.

그리고 마검을 거꾸로 들어 바닥을 살짝 찍었다.

“으악!”

그러자 격렬한 반응이 아래쪽에서 흘러나왔다.

죽은 척하고 있던 괴물 한 마리가 몸을 뒤틀며 발작한 것이다.

거대한 달팽이를 연상시킨 상대는 몸을 뒤틀며 달아나려고 했다.

그러나 그건 안 될 말이다.

일부러 거죽만 따끔하게 찌른 탓은, 이 광경에 대한 이유를 듣기 위해서다.

“오! 제발 살려주십시오! 저는 보시다시피 눈이 안 보이는 몸입니다.”

“닥치고 내가 묻는 말에나 대답해.”

하지만 상대는 세인의 차가운 음성에도 불구하고 입을 다물지 않았다.

괴물들에게 시달리느라 공포에 이골이 난 그는 입을 다물면 죽는 것처럼 떠들어 댔다.

코를 벌렁거리면서 말이다.

“살려주세요! 살려달라고요! 당신은 괴물 냄새가 나지 않는군요. 그렇다면 더더욱 저를 살려주셔야 합니다. 왜냐면 저도 괴물이 아니거든요! 저는 원래 인간들 사이에서 유명한 현자였습니다. 아무렴 그렇고, 말고요! 그러니 저를 살려주셔야 합니다. 저는 유용한 정보도 많이 알고 있죠!”

촉새처럼 떠드는 그의 말을 세인은 곧이곧대로 믿지 않았다.

귓등으로 흘려내며 알고 싶은 것만 물어보았다.

거짓말을 할지도 모르지만, 시도 정도는 해볼 만했다.

어차피 죽일 생각이긴 하지만.

“여기서 무슨 일이 벌어진 거지? 왜 다 죽어있는 거야?”

그러자 입을 꾹 다문 현자는 뒤로 약간 물러나며 세인의 기척을 살폈다.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휩싸여서 정신이 나가 있었지만, 그는 바보가 아니었다.

상대가 누구이고 어떻게 여기까지 들어와 있을까를 생각해 볼 수 있는 머리가 있었다.

그리고 과연 상대가 자신을 살려줄까?

사실 이게 가장 중요한 문제다.

‘내가 살아서 이곳을 빠져나갈 수 있을까?’

눈만 보인다면 상대에게서 더 많은 정보를 얻어내고 약삭빠르게 굴 수 있을 텐데, 타락한 현자는 침을 꿀꺽이며 천천히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세인은 그런 그에게 다가갔고 말이다.

“당신의 이름을 제가 알 수 있을까요?”

“여기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만, 내게 이야기해주면 돼.”

“그럼 저를 살려주실 건가요?”

“….”

세인은 거짓말을 하려 했으나 한 박자 늦어 버렸다.

그 짧은 침묵을 어떻게 해석했는지, 현자가 몸을 멈추며 은근한 어조로 말을 던져왔다.

“괴물이라면 절대 타협할 수 없는 적개심을 불태우실 분처럼 보이는군요.”

“인간 중에 그렇지 않은 자가 있나?”

“당신은 좀처럼 믿지 못하겠지만, 아까 제가 한 말은 진짜입니다. 저는 괴물들에게 납치되었어요. 그리고 고문을 당하며 이런 모습으로 변한 겁니다. 그러므로 저는 동정을 받아야 해요. 이 기구한 운명에 대한 동정 말입니다.”

그런 말을 하면서 현자는 상대가 자신을 단칼에 죽이려고 하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재빨리 선수를 친다.

“좋습니다! 좋아! 제가 쓸만한 존재라는 것을 증명해 보이죠! 밑져야 본전 아닙니까? 이렇게 합시다. 거래를 하는 거죠! 당신이 절실한 문제 하나를 내면 제 지식으로 그것을 해결해 주겠습니다. 제가 명쾌하게 답을 준다면, 그 답례로 저를 살려주십시오!”

세인은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좋아.”

그러자 현자는 상대에게 하나를 더 요구했다.

“이름을 걸고 맹세해 주십시오. 귀족이시겠죠? 말투에서 위엄이 느껴집니다. 그러니 이름을 걸어 주십시오. 귀족이 자신의 이름을 걸고 하는 맹세는 무겁고 소중한 것이니까요. 그렇다면 제가 도움을 드리겠습니다. 진짜 이건 그쪽에서도 드문 기회입니다.”

세인은 고개를 끄덕이고 대답했다.

“나, 빈센트의 이름을 걸고 맹세한다. 네가 말한 대로 거래를 하겠다.”

그는 괴물을 뼛속 깊이 증오하는 사람이다.

그게 얼마나 지나치냐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게 벌써 두 번째였다.

같은 인간이라면 재고의 가치라도 있을지 모르겠지만, 괴물처럼 보이는 상대를 살려줄 리가 만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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