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은 왕 마검의 주인-92화 (92/307)

# 92

& 고통의 용광로 (2)

새삼 생각해보면 마검은 과연 신이 직접 벼렸다고 믿을 만큼, 엄청난 힘을 지닌 물건이었다.

이 절대성을 지키기 위한 조건인, 하나의 시대상에 하나의 엘릭서라는 존재.

힘에 최적화된 존재인 라이트닝 블러드가 엘릭서를 들면, 그야말로 세상을 움켜쥐고 뒤흔들 수 있다.

지금만 봐도 그렇다.

그가 마음만 먹으면 죽이지 못하는 게 어디에 있을까?

마음껏 검을 휘두르면 하나의 나라에 재앙을 드리울 수 있었다.

얼마든지 적의 심장을 움켜쥐고 뽑아낼 수 있는 절대의 힘이 그의 것이었다.

이 검만 있다면 세상을 피로 씻고 그 위에 군림하는 것도 가능하며, 닥치는 대로 모조리 죽여없애고 싶다면 안 될 것도 없었다.

마음 가는 대로 타인을 죽여 없애는 힘.

무제한의 파괴자.

그게 바로 오버 더 데스다.

이제 세인의 앞에 놓인 길은 직선이다.

그리고 멀리에서 군대가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그들은 폭포가 내뱉은 그림자의 자식들처럼 보였다.

물안개로 적신 갑옷을 번들거리며, 이형의 짐승들을 타고 앞으로 달려오고 있는 중이다.

저놈들을 보니 꼭 죽여야만 하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들은 인간들의 적이었다.

이 살해에 있어서는 망설일 필요도 없고, 최소한의 죄책감조차 가질 필요가 없는 일이다.

그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폭포에 갇힌 이 지역이 마음에 들었다.

어쩌면 여기는 함정일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렇다 해도 그에게는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여기서 그가 검을 휘두른다고 해서, 인간들이 다칠 일이 있을까.

운이 나빠 봐야….

드레퓨스의 군대가 생각보다 가까이 붙어 있다면 피를 보겠지.

“저놈들에게 죽는 것과 마검에 휩쓸리는 죽음에 차이가 있을까?”

세인이 자각하는지 모르지만, 지금 그의 음성은 살기에 물들어 있었다.

오버 더 데스가 세인의 가슴에 비스듬히 날을 눕혔다.

그렇게 검은 후드를 뒤집어쓴 세인은 조용히 서 있었다.

하늘을 뒤흔드는 듯한 폭포 소리에 먹혀, 다가오는 대군의 함성은 흐릿하게만 들려왔다.

그들의 역동하는 검은 근육과 형형색색의 갈기, 흉터가 가득한 일그러진 얼굴.

햇빛을 반사하는 병장기까지, 모두 다 그에게는 신기루처럼만 느껴졌다.

검을 품고 여유 있게 서 있던 세인은, 그들이 가까이 몰려올 때까지 일단 기다린다.

그러다가 발작처럼 마검을 휘둘렀다.

그러자 검은 연기가 일어나며 주변 물안개와 난마처럼 얽혀 들어갔다.

움찔한 안개는 뒤로 물러나며 맥없이 괴물들을 내주고야 만다.

검은 광기가 사선으로 휩쓸자, 기세 좋게 달려오던 이형의 탈것들과 괴물들의 몸이 절단되었다.

선두에 그런 파괴력을 보인 검은 선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뒤로 계속 달려갔다.

그에 따라 간헐천처럼 쏟아지는 검은 피.

핏물들이 수증기처럼 시야를 가리며 쏟아질 때, 검은 연기가 그것을 먹고 밀도를 높이며 사방으로 기어 다녔다.

확장된 그 기운이, 피바다 속에서 나자빠지는 괴물들을 못 일어나게 목줄을 밟아 눌렀다.

그리고 허우적거리게 했다.

세인의 몸이 움직이며 펼쳐진 지옥도로 접근했다.

그가 마검을 들고 기운을 마구 드러내자, 그 서슬에 놀라 물들도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래서 그의 신발은 물속이 아니라 하얀 바닥을 밟고 움직였다.

무너진 선두에 좌절하지 않고, 괴물들 사이에서 오우거들이 몰려나왔다.

두 개의 머리를 가진 흉측한 녀석들은, 양손에 쇠도리깨를 들고 마구 휘저으며 달려온다.

그러니까 저건 아무런 의미가 없는 물건들이었다.

이 절대적인 힘 앞에서 오우거가 대체 무엇인가?

머리가 두 개 달린 오우거를 보며 두려움에 벌벌 떠는 것은 일반인의 몫이었다.

이를 악물고 검을 고쳐 쥐는 것은 기사들의 몫이었다.

하지만….

마검을 든 세인에게는 아무것도 해당 안 된다.

오히려 그는 오우거들이 농담처럼 느껴졌다.

장난해?

이미 드래곤도 해치운 판이다.

앞으로 걷던 그는 오우거들이 달려와 쇠도리깨로 몸을 내려치는 것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들의 흉기가 세인의 머리에 닿을 무렵, 검은 기운이 일어나며 오우거들을 찢어발긴다.

흉포하게 할퀴는 그 기운들이 오우거들을 완벽히 난자하는 데 3초도 걸리지 않았다.

날아간 팔이 척추의 관제에서 벗어났다.

그리고 오히려 손에 잡힌 묵직한 무기의 움직임에 휘둘린다.

빙글빙글 우스꽝스럽게, 그렇게 쇠도리깨를 든 우람한 팔들이 옆으로 날아가는 가운데.

“죽어라.”

세인이 검 끝으로 앞을 가리키며 차게 명령하자.

전방에 몰려있던 괴물들이 무릎을 꿇으며 하나둘씩.

털썩.

털썩 쓰러진다.

수백, 수천의 괴물들은 세인의 낮은 음성을 똑똑히 들었다.

파도 소리가 내는 장벽은 검은 기운에 놀라 저만치 사라져버린 후였기 때문이다.

죽음의 권유에 혼을 송두리째 빼앗겨 버린 육신들은, 무릎을 꿇고 옆으로 앞으로 쓰러져 버렸다.

기세 좋게 달려들다가 넘어지는 놈들이 속출하고, 그 떨림에 물결이 주위로 번져 나갔다.

실 끊어진 인형처럼 비틀거리다가, 옆에 입을 벌린 물속으로 떨어지는 녀석들도 발견되었다.

그저 검을 가리켜 내린 명령만으로, 대학살을 자행한 지금 세인의 모습은 마치 악마 같았다.

그의 두 눈은 핏빛으로 일렁이고 있었으며, 온몸은 검은 기운으로 불타올랐다.

등 뒤의 망토가 죽음의 혓바닥처럼 날름거리며 지면과 수평으로 일어선다.

그것을 끌며 앞으로 걷던 세인은, 죽어 나자빠진 괴물들의 뒤를 향해 이를 드러냈다.

그는 그러면서 마검의 속삭임을 들었다.

‘너는 모두를 죽일 운명으로 이 땅에 태어났다.’

‘운명을 따라가는 것이 곧 선이다.’

‘이 살육은 곧 정의다.’

어쩌면 그런 음성은 초자아가 아니라, 전에 죽임을 당했던 군단장을 닮아 있었는지도 모른다.

한편 뒤쪽에서 이 말도 안 되는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군단장들은 처음으로 공포에 떨리는 자신의 몸을 경험했다.

그러나 왕들에게 받은 명령이 있었다.

여기에서 물러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촤악.

촤악.

하늘 높이 검은 빗살들이 떠올랐다.

그것들은 일순간 점이 되어 하늘 위를 메우더니, 곧 선이 되어 비처럼 세인에게 쏟아졌다.

그러나 세인은 그 빗발치는 화살 속에서 유유자적하게 움직였다.

쏘아 올리는 화살들의 양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자.

움직이는 그의 주위가 첨벙거리다 못해, 소나기를 받는 쟁반 소리를 내며 몸살을 앓는다.

화살 비도 소용이 없자, 던져진 암석이 그의 몸을 때렸다.

그러나 오버 더 데스가 휘둘러지자 조각난 돌덩어리들이 허무하게 뒤만 때린다.

도저히 안 되겠다 싶었는지, 검은 갑옷을 걸친 군단장들이 몸소 나와 앞으로 진격했다.

그러면서 여러 개의 눈이 달린 괴수들도 뛰쳐나왔다.

전차들이 물에 젖은 바퀴를 덜컹대며 달려오다가 폭발하는 검은 연기에 밀려 위로 떠 올랐다. 공중에 정지했다가 다시 떨어지는 전차를, 몸을 가시처럼 곤두세운 검은 침이 관통했다.

이런 소란은 연쇄적으로 일어나 전차들의 돌격을 무력화시켰다.

세인은 한 손으로 잡은 검을 들어 올려, 코 밑에 검날을 가져다 대었다.

그리고 눈을 감았다가 뜨는데, 붉은빛이 폭사 되며 가장 선두에서 달려오던 괴수의 몸을 두 조각낸다.

그 괴수는 머리에 난 뿔로 세인을 들이받으려던 속도를 이기지 못하고, 그대로 앞으로 굴렀다.

두 개의 살덩이가 우당탕 소리를 내며 양쪽으로 떨어져 나가는 가운데, 세인은 검날을 이마에 대었다가 천천히 떨어뜨렸다.

그리고 시간이 그의 통제하에 들어온다.

검은 반구가 확장되면서 달려들던 군단장은 물론, 괴수들까지 가둬 버렸다.

자세히 보면 아주 느리게 움직이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걸어가던 세인은 그 속에서 천천히 검을 휘둘렀다.

검은 선들이 쏟아져 내리는 햇발마저 흡수하며 군단장의 몸을 베었다.

목을 스치고 지나간 검이 다른 군단장의 복부를 벤다.

그리고 괴수들과 나머지 군단장의 몸을 누비는데, 분통 터지는 사실은 이 모든 것을 두 눈 뻔히 뜨고 지켜봐야만 한다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팽창했던 반구가 다시 수축하며 오버 더 데스에게로 되돌아가자.

때늦은 비명이 세인의 뒤를 가득 채웠다.

뒤늦게 잘린 팔다리들이 차가운 물 위로 떨어져 내렸고 말이다.

망토가 뒤로 솟구치며 조각난 사체들을 집어삼켰다.

그리고 환희에 떠는 듯, 뒤쪽 바닥에 깊은 고랑을 흉터처럼 남겨 놓았다.

조금 전까지 대륙을 위협하던 괴물이라는 것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세인의 손에 놀아나고 있었다.

주인이 통제를 놓아 버리자, 마검은 마음대로 힘을 뿜어냈다.

그 위력에 주변을 가득 채운 물들이 파르르 떨었고, 괴물의 군대는 유린당했다.

달려 나온 네 발 달린 트롤이 강철의 해머로 세인의 몸을 후려쳤다.

고막을 긁는 소리가 나며, 부서진 쇳덩어리 파편이 몰아쳤다.

그러나 세인은 약간 휘청였을 뿐이다.

그게 다다.

그는 보란 듯이, 트롤의 머리를 검면으로 힘껏 후려쳐 앙갚음해주었다.

박살이 난 트롤의 잔해가 우박처럼 옆으로 쏟아졌다.

그 세례를 받은 검은 연기가, 몸짓으로나마 키득거리는 흉내를 냈다.

파도처럼 몰려가던 연기는 끊임없이 아우성치며, 주인의 의지에 반하는 적들을 살해할 때마다 밀도를 높여간다.

그러다 나중에는 마치 검은 모래가 몰아치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그 검은 모래는 반구 형태의 시간 제어와는 급이 다른 능력을 발휘했다.

일순간이지만 시간을 완전히 멈추어버린 것이다.

그 멈춰진 시간을 통과하며, 세인은 검으로 무자비하게 몸을 찔러댔다.

가둔 시간이 풀려나고 남은 것은 또다시 시체들이다.

검을 휘두르며 닥치는 대로 죽이고, 죽음의 선고를 내리는 그의 모습은 마왕과도 같다.

“대단하구나, 라이트닝 블러드.”

그때 주춤주춤 뒤로 물러나는 괴물들 사이로, 보라색의 기운을 뿜어내는 해골이 나섰다.

번쩍이는 황금 갑옷을 걸친 그는 보라색 두개골에 하얀 뿔이 네 개나 돋아나 있었다.

“지금 네 모습을 봐라. 우리와 다를 바 없구나.”

그의 말에 세인은 물끄러미 그 해골을 바라보았다.

당당히 서서 저렇게 지껄이는 것을 보니, 군단장 중에서도 한자리하는 녀석인 것 같았다.

세인은 차갑게 응수했다.

“너희들은 세상에서 지워져야 해.”

“그러고 나서? 네 편인 인간들도 죽일 테냐? 너의 지금 모습을 보면 꼭 그럴 것만 같은데? 그들에게 네 모습이 어떻게 보일까?”

해골은 세인의 광기에 찬 붉은 눈빛 앞에서도 주눅 들지 않고 있었다.

아니 일부러 당당한 척하는 건가?

그래서 세인은 생각했다.

‘시간을 벌고 있군.’

아무래도 좋았다.

어차피 다 죽여버리면 될 일이다.

무슨 수작을 하고 있던지 말이다.

어떤 음모라도 이 힘 앞에서는 분쇄 당할 뿐이다.

그는 마검으로 그를 겨누며 말을 이었다.

“인간들의 일은 인간들끼리 잘 해결할 거야. 지금 내 머릿속을 점령하고 있는 것은 단 하나. 너희들을 모조리 죽이는 것이다. 이 더러운 괴물들아.”

세인은 거침없이 앞으로 나가 해골의 목을 움켜쥐었다.

해골 근처의 호위들이 그런 세인을 말리려고 했지만, 검광이 번뜩이자 목만 허공에서 춤을 추었다.

이를 드러낸 오버 더 데스의 힘은 신속하고 무시무시했다.

그런 힘으로 해골의 거대한 몸을 종잇장처럼 가볍게 들어 올린 세인은, 그의 목에 검날을 쑤셔 넣었다.

“뿔이 달린 장난감아. 너도 마찬가지다.”

비스듬히 목을 관통당하자, 해골은 고통에 경련하면서도 손을 내밀어 세인의 얼굴에 가져다 대었다.

그리고 할퀴려고 하는데 세인이 그를 든 손을 한번 흔들며 검을 비틀었다.

“아악! 으허억!”

당당하게 말을 걸어올 땐 언제고, 이제 그가 몸서리치며 뱉어낸 입김이 세인의 얼굴을 덥힌다.

“죽어라.”

세인의 손안에서 해골의 목이 부서졌다.

떨어져 내리는 해골을 손으로 잡고 들어 올리니, 상대의 안광과 그의 시선이 부딪힌다.

검의 손자루로 두개골를 때리니, 움푹 함몰되는 두개골이 이를 우수수 쏟아냈다.

그중 몇 개가 무표정한 세인의 볼에 맞고 튕겨난다.

다시 앞으로 나서는 세인의 눈이 혈광을 뒤로 흘렸다.

그 붉은 눈빛은 아직도 많이 남아있는 괴물들을 훑었다.

몸을 약간 웅크렸다가 허리를 펴니 붉은빛을 머금은 검광이 사방으로 쏟아져 나갔다.

그것들은 점점 크기를 키우며 모든 것을 갈라버린다.

물과 도끼·갑옷과 근육들을 절삭 하고도 모자라 계속 달려나가더니, 그중 하나가 멀리 있는 거대한 게의 발을 자르고 옆으로 기울어지게 했다.

이제 마검은 그 날 전체로 검은 기운을 뽑아내고 있었다.

휘두를 때마다 눈이 아플 정도로 따가운 붉은 기운을 머금은 궤적이 그려졌다.

그 궤적들은 살해를 계속하며 주인을 목적지로 이끈다.

“대체 누가 저걸 막을 수 있지?”

그렇게 중얼거리던 군단장 하나의 목소리가 아래로 떨어졌다.

상반신이 나뒹굴 때 아직도 서 있는 하반신을 가르고 지나간 검은 광기가, 뒤의 병사들을 휩쓸었다.

이제는 장난처럼 검을 휘두르자, 어마어마한 크기의 게의 다리들이 박살 나며 뒤로 기울어졌다.

뒤늦게 소리를 지르며 달려든 물체를 손으로 후려쳐 찢어버린 세인은, 검으로 내려앉은 게를 겨누었다.

그때였다.

게 옆의 쏟아져 내리는 폭포 속에서 뭔가가 튀어나왔다.

수직으로 움직이던 물의 흐름이 방해를 받자, 앞쪽으로 물세례가 쏟아졌다.

그것들이 한차례 세인이 있는 지역을 소나기처럼 때린 후, 거대한 습격자의 손이 물보라를 일으키며 다가왔다.

“이거냐? 너희들이 준비했던 게?”

세인은 바위처럼 딱딱한 음성으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