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1
& 고통의 용광로 (1)
세계수에 머물러 있던 번우드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들은 자신을 사람이라고 부르지만, 세상이 그것을 인정하지 않기에 싸워야만 하는 운명이었다.
아스칼리온 같은 사람은 영주의 친서를 보내고 사정을 설명하는 것이 어떻겠냐며 권유했다.
하지만 그 의견은 거절되었다.
“사신을 보내도 사신 자격이 없다 할 거고, 처형당할 겁니다. 모두의 부질없는 희망 때문에 ‘한 사람’을 희생시키고 싶지 않아요.”
라는 것이 비비안의 대답이었다.
그녀는 분명 소녀였고 가끔 이상적인 것을 추구하는 모습도 보이지만, 비현실적인 상상에 기대는 바보는 아니었다.
머독은 병사들의 훈련상태를 점검하고 매일 코다로에게 보고했다.
“다크 엘프들과 움직여야 한다는 게 마음에 안 들지만 어쩔 수 없지.”
드워프 왕인 울프 크릭은 투덜거리면서도 함께 하길 원했다.
어차피 다크 엘프는 세계수를 공격하러 온 인간들과 싸워야 할 운명이었다.
두 종족의 관계 속에, 이런 크릭의 모습은 의외였다.
거기에 대해서 물어보자 크릭은 이렇게 대답했다.
“드워프 족보도 모를 텐데, 그들이 우리가 괴물이 아니라고 한들, 그쪽에서 동의하겠어? 뒤에서 있다가 각개격파 당하는 것보다, 어차피 붙어야 할 거라면…. 싸울 때 옆에 서서 한 덩어리가 되는 게 좋겠지.”
승패에 대해서는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생각해봐야 마음만 울적해질 뿐이다.
한쪽에선 잘 훈련된 정예병들이 무기를 닦고 수리했다.
그리고 방패에 대장장이가 만든 금속들을 덧댔다.
그러면서 화살을 만들고 마차 안에 쌓아 놓았다.
그동안 침입자들을 죽이고 얻은 가죽들도 옷으로 재생산되었다.
다크 엘프들이 일러준 방법대로 검은 돌을 사용해 착용자들의 능력도 높여 주었다.
테이블 위에서는 여러 논의가 있었다.
세계수 지역에서 흩어져 소규모 전투를 하면 어떨까?
레인저들이 그런 전투에도 특화되어 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화공의 위험은 없을까?
수많은 논의 속에서 비비안이 이렇게 말했다.
“가이더가 일어서려고 하고 있습니다. 홀로서기를 해내려고 필사적으로 노력 중이에요. 아직은 한 줌에 불과한 힘밖에 없지만….”
“한센이라는 상인을 만나본 겁니까?”
세계수 지역으로 찾아온 한센은 비비안의 현재 모습에 안타까워하며, 그가 아는 세인의 소식을 들려주었다.
그리고 가이더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던 것이다.
비비안은 그를 통해 가이더의 현재 상태를 정확하게 파악했다.
한센이 비비안에게 우호적이라는 것은, 조세핀의 행방을 이야기해준 것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비비안은 일어나 지도를 짚었다.
결국, 그녀가 가리킨 곳은 가이더의 한참 아래쪽이었다.
“여기 협곡이 우리의 결전지가 될 겁니다.”
“….”
사흘에 걸친 논의가 있었고, 다시 일주일이 지나자 출정 준비가 끝났다.
무장한 사람들이 오와 열을 맞추며 움직이는데, 출정식 연설은 없었다.
다만 선두에 각 지도자가 섰을 뿐이다.
다크 엘프 쪽에서는 트렌트 왕 대신 엘라이저가 나섰다.
엘라이저를 본 크릭은 입이 간질간질한 얼굴이었지만, 결국 꾹 참고 아무런 말도 꺼내지 않았다.
번우드에 남은 일반 백성들은 떠나가는 병사들을 보며 가슴에 두 손을 모으고 배웅해 주었다. 그들의 심사는 매우 복잡할 것이나, 애써 밝은 미소를 지어본다.
원래 하얀 바탕이던 깃발은, 그대로 나간다면 아무리 봐도 백기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양쪽 날개를 접은 황금색 독수리가 중앙에 그려졌다.
다만 급조한 것이라 노란색의 밝기에 차이가 있었다.
깃발들이 바람에 펄럭이며 앞으로 나아가는 가운데, 멀리에서 한점의 기수가 마주 달려왔다.
그 점은 시간이 지날수록 커지더니 몇백 미터 앞에서 멈춰섰다.
하얀 말.
이그문트를 찾아 여기까지 쉬지 않고 달려온 세리스였다.
비비안과 코다로는 제자리에서 맴도는 말과 금발 여성을 보며 서로 눈을 맞췄다.
세리스는 비비안과 코다로가 가까이 다가오자 말에서 내렸다.
그리고 고개를 숙여 보였다.
그런 모습보다도 세리스가 꺼낸 말이 인상적이었다.
“여러분 편에서 싸우겠습니다.”
“….”
비비안은 세리스와 그녀 뒤의 하얀 말을 번갈아 보았다.
그리고 자신의 뒤에 서 있는 군대를 바라보았다.
뒤에 있던 병사들의 사기를 꺾지 않기 위해, 세리스에게 속삭이는 비비안이다.
“승패가 정해져 있는 전투입니다. 중앙에서 얼마나 희생이 일어날지 모르지만, 남부의 군대는 엄청난 숫자로 우리와 대면하게 될 겁니다. 아시잖아요?”
“예를 취했으니, 말에 올라서 대답을 해도 괜찮을까요?”
“얼마든지.”
이그문트 위에 올라간 세리스는 고삐를 당기며 말했다.
“기사는 승패에 연연하지 않습니다. 승리를 점치는 점쟁이가 아니고, 승리에 붙는 도박꾼이 아니니까요. 저는 제 본분에 맞게 제 길을 선택할 뿐입니다. 제 마음이 가는 곳을 따르기로 생각했습니다.”
“오욕을 뒤집어쓸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그건 영영 지워지지 않을 겁니다. 당신은 대륙의 기준으로 인간입니다. 여기까지 와서 그런 소리를 해주었으니, 의리는 이걸로 충분한 겁니다. 과거, 같은 나라를 섬겼던 국민끼리 말이죠. 이제 와서 아비게일을 데리고 떠난다 해도, 아무도 당신을 원망하지 않을 겁니다.”
세리스는 곤궁한 처지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걱정해 주는 비비안의 얼굴을 새삼스럽게 다시 보았다.
‘지금 상황에서 이런 이야기를 하기가 쉽지 않을 텐데, 이분은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넉넉한 인품이 있는 분이구나.’
새삼 가이더에 인재가 많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인재들이 풍요로운 남부에 있었다면 꽃을 피웠을까?
그 의도가 고맙지만, 결국 세리스는 비비안의 호의를 일축했다.
“제 삶을 위해 검을 휘두르겠습니다. 제 삶의 동반자는 이미 정했고요.”
그러면서 세인의 직속 부대는 어디냐고 물어왔다.
비비안이 손을 들어 그곳을 가리키자 세리스는 그쪽으로 달려가 버린다.
그러자 이때까지 말 한마디도 안 꺼내고, 짐짓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던 코다로가 입을 열었다.
나름 심각한 어조였다.
세리스가 결국, 세인을 택했으니….
“그러면 이제 아비게일은 어떻게 되는 걸까요?”
“….”
아, 복잡한 삼각관계의 덫이여.
그렇게 세리스가 합류한 세계수의 운명은, 남하를 계속하는 것이었다.
* * *
세인은 강가를 홀로 걷고 있었다.
그는 현재 괴물들의 본진과 드레퓨스의 사이인 정중앙에 있었다.
그의 옆에서 푸른 원반이 하늘의 구름을 담아 거울처럼 반짝였다.
저 고요한 수면은 하얀 모자를 쓰고 있는 산까지 담아내었다.
그리고 다시, 아주 까마득하게 멀리 강을 가둔 하얀 벽들이 보이긴 했다.
그가 움직일 때마다 정강이까지 차오른 물이 철벅 이는 소리를 냈다.
그의 앞으로 멀리 보이는 산에는, 검은 건물들이 가득 서 있었다.
빠르게 걷던 세인은 좀처럼 가까워지지 않는 목적지를 보며 짜증 내기보다는 주위를 살폈다.
여기는 기습당할 가능성이 농후한 지역이다.
그런 생각을 증명이라도 하듯 하늘에서 검은 물체가 나타났다.
그리고 수직으로 내리꽂혔다.
그 물체의 정체는 와이번이었다.
뾰족한 이빨이 가득 드러난 입을 벌리고 내리꽂힌 녀석을 피해 세인은 옆으로 굴렀다.
물보라가 치솟아 오르고, 거대한 와이번의 목이 땅에 박혔다가 구부러졌다. 그러더니 위로 곡선을 그리며 떠올랐다.
그 번들거리는 목에 붙어있는 비늘들이 햇빛에 조각조각 반사되어 눈을 찌른다.
세인은 오른손을 들어 건틀렛으로 와이번의 날개를 막았다.
귀에 거슬리는 울음과 함께 와이번이 부러진 날개를 반쯤 접었다.
그러면서 눈을 번득이는데, 양쪽으로 멀리 떨어진 두 눈동자에 세인의 상이 정확하게 잡혔다.
눈동자 안의 세인은 건틀렛을 검으로 변형시켰다.
그리고 검을 벼락같이 내리그었다.
전에 한번 피 맛을 거하게 본 마검은, 검은 연기를 줄기줄기 뿜어냈다.
그것은 죽기 직전까지 이 모든 것을 바라보고 있던 와이번의 한쪽 눈과 이마를 박살 냈다.
그리고 양쪽으로 쪼개지는 와이번의 동체를 붙잡고 게걸스럽게 탐했다.
마치 검에서 튀어나온 검은 악마가 와이번을 통째로 집어삼키는 듯하다.
검을 수직으로 그은 후 앞으로 걸어가던 세인과 그 검은 형상이 부딪혔다.
그러자 검은 연기는 훅하고 뒤로 흩어졌다.
연기를 통과하는 세인의 뒤에서 망토가 만들어졌다.
그렇게 다가온 세인은 와이번 머리에 붙어 있는 마지막 눈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검은 장검을 거꾸로 들어 내리박는다.
으드득!
“으음….”
같은 시각, 괴물 왕들은 와이번의 눈을 통해 세인을 보고 있었다.
세인의 내려다보는 눈빛.
그리고 그의 손에 들린 마검.
그 마검에 서린 공포와 파괴의 기운.
이렇게 직접 보니 너무나도 충격적이다.
저 얼마나 말도 안 되는 물건인가.
너무 말도 안 되는 물건이라서, 저게 실존한다는 것조차 의견을 좁히지 못했던 물건이었다.
결국, 세인은 뒤로 돌아가는 대신 깊이를 알 수 없는 물속으로 몸을 던졌다.
그의 얼굴 옆으로 일어나는 초록색의 물결이 검은 머리를 흠뻑 적신다.
그리고 그가 헤엄칠 때마다 뒤로 밀려나 하얀 꼬리를 만들었다.
그는 손을 좌우로 움직여 가며 앞으로 나갔다.
그의 가슴과 배 밑으로 물의 색깔이 옅어지다가, 갑자기 층을 이루며 어두워졌다.
착각인가?
너무 집중해서 일어난 일일까?
세인이 헤엄치는 공간은 빛과 소리마저도 빨아들이는 것만 같았다.
웅장한 폭포 소리가 멀어지더니 주위가 고요해진 가운데, 그가 손발을 움직일 때마다 찰박이는 소리만이 귀를 채웠다.
수온은 매우 차가웠고, 그래서 가뜩이나 창백한 그의 안색이 더욱 하얗게 탈색되었다.
그리고 아래에서 뭔가가 천천히 떠올랐다.
하얀색의 부유하는 그 물체는 매우 거대했다.
세인의 밑에서 마치 한 척의 배처럼 움직인다.
세인의 입장에서는 아래쪽에서 하얀 것이 움직인다고 느꼈을 뿐이다.
뭔가가 다가오는데, 너무 커서 형체를 제대로 알 수가 없었다.
하늘에서 바라보면 검은 물 위를 헤엄쳐 가는 그의 밑으로, 하얀 물고기 같은 것이 심해에서 떠올라 있었다.
지느러미를 천천히 움직인 그것은, 세인의 움직임에 호흡을 맞추더니 적의를 드러냈다.
하얀 부분이 반원으로 갈라지며 뾰족한 이빨들이 보인다.
그 이빨도 이빨이지만, 아래에서 그렇게 물고기가 입을 벌리니 위쪽의 물이 아래로 빨려들었다.
세인과 같이 말이다.
잠시 허우적거리던 것도 잠시, 세인은 결국 아래로 끌어당기는 그 힘에 순응했다.
거대한 물고기는 결국 세인을 삼키고 말았다.
그리고 몇 분이 지났을까?
푸확!
세인이 삼켜졌던 자리, 폭발하는 검은 기둥이 수직으로 선을 그었다.
그와 함께 일어난 물보라가 힘껏 하늘로 솟아오르더니 중력에 의해 아래로 떨어지며 철썩 소리를 낸다.
하얀 물고기는 몸을 뚫고 나온 검은 폭발에 거칠게 몸을 퍼덕이더니, 결국 맥없이 흐느적거렸다.
그러더니 붉은 피를 수중에서 쏟아낸다.
부글거리며 위쪽으로 올라오는 피거품 속에서 마검을 든 세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런 그의 모습에는 아무런 이상도 없었다.
다만, 수중에서 번져나가는 피거품의 냄새를 맡고 다른 물고기들이 벌떼처럼 달려들었다.
그러나 이미 세인은 서둘러 그곳을 빠져나온 뒤였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건너편의 하얀 바닥에 도착한 그는, 손을 내밀어 판을 잡았다.
그리고 상체를 물속에서 일으켜 신발을 바닥에 올려놓는다.
다리에 힘을 쓰며 완전히 일어나 보이자, 몸에서 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손으로 달라붙은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뒤를 돌아보는데.
하얀 괴어가 있었던 자리에는 수면 위로 팔딱팔딱 뛰어다니는 작은 포식자로 가득했다.
작은 이빨이 달린 물고기들은 피에 젖은 채 허공에서 물방울을 뿌렸다.
그것이 햇볕에 반사되자 보석들처럼 반짝인다.
다시 등을 보인 세인은 앞으로 걸어 나갔다.
그와 함께 움직이는 마검의 끝이, 물속의 하얀 바닥에 닿아 질질 끌렸다.
이제 목적지는 얼마 남지 않았다.
움직이던 목표가 정지한 지 오래니까 말이다.
다만, 그전에 괴물 부대와 마주쳐야 하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