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0
& 전쟁 (5)
세상은 참 오묘한 것이었다.
비판할 구석이 많은 집단도, 가끔은 도움이 될 때가 있다.
세인과 세리스는 출항을 준비하는 배에 올라탔다.
선원들은 세리스의 외모와 옷차림 그리고 무장 상태를 보더니 애써 고개를 돌렸다.
일등항해사는 선실에서 직접 나와보기까지 했다.
돈을 지급한 둘은 배의 작은 방을 썼는데, 해먹이 걸려있는 창고용 방이었다.
이 배가 전쟁통에도 바다에 나간 이유는 블랙 라이어드 상단 때문이었다.
배가 나포되지 않는 이유도 블랙라이어드 때문이다.
전에 비해 엄청나게 성장한 이 상단은, 전쟁에 돈을 대주고 있었다.
그러면서 검은 커넥션을 통해 이익을 톡톡히 챙긴다.
이 배에 실린 물품들도 서류상으로는 군수물자다.
그러므로 출항에 아무런 제재도 없었다.
원시적인 해양 생물이 자리를 잡고 있는 해역만 조심한다면 뱃길은 꽤 안전한 편이었다.
그리고 육지보다 이동 시간도 적게 들었다.
지형의 고저 차에 구애받지 않고 밤낮을 가리지 않으니까.
그런데 배를 이용하는 사람들의 특징은 바로 갑갑함을 느낀다는 것이다.
탁 트인 수평선을 보면 물론 기분이 좋지만, 그것도 하루 이틀이었다.
바다를 생각해보면, 배의 공간은 매우 협소하게 느껴졌다.
게다가 거기에서 또 사람의 신분에 따라 움직일 수 있는 반경을 나누어야 한다.
선원들과 상인들의 입방아 대상이 세리스로 옮겨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또 그러다 보니 음담패설이 돌아다니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다만 지금처럼 누군가가 문밖에서 노크한 다는 건, 너무 나간 감이 없잖아 있다.
세리스와 세인은 자신의 방에서 나가지 않았다.
식사도 식당이 아니라 받아먹는 처지였기 때문에, 이번에도 세리스는 어린 선원이 음식을 가져다주러 온줄 알았다.
그래서 문을 열었던 것인데, 밖에는 의외의 인물들이 서 있었다.
“오. 듣던 것보다 훨씬 대단한데?”
위아래로 훑어보는 남자는 상단의 부책임자 정도는 되는 것 같았다.
최고 책임자라고 하기에는 젊었기 때문이다.
그는 무사들을 대동하고 소문의 세리스를 찾아왔다.
“생활에 불편함이 없으신가 궁금해서 찾아왔는데.”
세리스는 ‘당신이 뭔데 그걸 궁금해하는데?’라고 물으려다가 참았다.
건들거리는 몸으로 문을 닫지 못하게 잡고 있는 그에게서, 술 냄새가 진하게 풍겼기 때문이다.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그러면서 남자는 억지로 문을 잡아 열고 안으로 들어왔다.
그녀는 술 냄새나는 그를 피해 안쪽으로 걷다가, 호위무사들이 허락도 없이 들어와 문을 닫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문 앞에 버티고 선다.
젊은 남자는 다시 허락도 없이 나무통 위에 앉더니 평을 했다.
“여기에 해먹이라뇨. 침대 정도는 있을 줄 알았는데, 게다가 이 방 형편없군요.”
세리스는 한마디 말도 꺼내보지 않았다.
남자는 술에 취해 이것저것 떠들어 댔다.
그리고 앉아 있는 나무통을 탁탁 두드리며 이런 말을 했다.
“제 방에 침대가 있는데, 원한다면 써도 좋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세리스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문가 쪽으로 향하는데 호위들이 인상을 쓰면서 비켜주지 않았다.
“상인분. 제 허리춤의 이것이 보이시나요?”
“제 검은 더 큽니다.”
세리스는 고개를 저으며, 어쩌면 이건 성기사들과 상단 사람들 간의 알력 다툼에 끼인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봤다.
그래서 평온한 항해를 위해 좋게 끝내려고 했다.
“이렇게 다짜고짜 들어와 문을 막는 행동은 일반 여성이라면 공포에 질릴만한 행동입니다. 하지만 저는, 여기까진 그래도 괜찮다고 말하고 싶군요. 저는 어차피 기사니까요. 그리고 어떤 의도로 이렇게 떠보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여기까지 하고 돌아가십시오.”
“레이디, 무슨 그런 섭섭한 말씀을? 제가 무슨 실례라도 저질렀습니까? 그냥 상단의 책임자 중 하나로서 여성이 묵고 있다길래 와 봤습니다. 그것도 험악한 선원들 사이에서….”
그렇게 20분 정도를 남자는 떠들었다.
그리고 20분 후에 말이 끊어진 것도 목이 말라서였다.
그가 손짓하자 바위처럼 서 있던 호위가 잽싸게 다가와 술을 건네준다.
그것을 마실 때 세리스는 그제야 입을 열었다.
“저는 매우 곤혹스럽군요. 그리고 쉬어야 하고요. 그러니 나가주세요. 부탁드립니다.”
고개를 숙여 보인 그녀에게 남자는 다가가 얼싸안으려 했다.
그게 어떤 흥에서 갑자기 나온 행동인지는 모르겠다.
다만 세리스도 어쩔 수가 없었다.
그녀는 팔꿈치로 상대의 숙인 얼굴을 쳤다.
퍽 소리가 나며 남자가 뒤로 나자빠지려고 할 때, 멱살을 잡고 앞으로 다시 끌어당긴다.
그리고 무릎으로 상대의 사타구니 사이를 쳐올렸다.
상대가 앓는 소리를 내며 등을 새우처럼 구부릴 때, 그녀는 발을 걸어 남자를 옆으로 넘어뜨렸다.
남자가 우당탕 소리를 내며 옆으로 나자빠졌다.
가뜩이나 좁은 방에서 나무통에 얼굴을 맞았는데, 목이 꺾이는 듯했다.
“아이고, 나 죽네.”
술이 확 깨는 기분에 옆으로 웅크릴 때, 그제야 호위들이 세리스에게 달려들었다.
세리스는 아직 검을 뽑지 않았다.
굳이 검의 힘까지 빌려야 된다는 생각이 안 들었기 때문이다.
민첩하게 상체를 젖히며 남자들의 손을 피한 그녀가 아래 차기를 날렸다.
상대의 튼튼한 하체는 그녀의 발짓에 너무 허무하게도 흔들리며 가라앉았다.
“으윽!”
비틀거리며 주저앉는 남자들을 발로 걷어찬 그녀가 술병을 들었다.
그리고 한 남자의 머리를 내리쳤다.
쨍그랑!
럼주 병이 깨지며 튄 파편이 술과 함께 바닥을 물들였다.
그녀는 방을 걸어 나오며, 마저 일어나려던 다른 남자의 허리에 옆차기를 먹였다.
그 남자는 벽에 처박혔다가 튕겨 나오며 바닥에 쓰러진다.
세리스는 방을 떠나 미약하게 흔들리는 복도를 걸었다.
그러다가 평소 음식을 가져다주는 소년과 마주쳤는데, 미소를 지으며 그에게 물었다.
라이어드 상단의 책임자가 있는 위치를 말이다.
소년은 그 미소에 홀린 듯 위치를 말했다.
세리스는 어차피 일이 이렇게 되었으면, 확실하게 매듭을 짓겠다는 생각뿐이었다.
책임자의 방에 들어가려고 하자 당연히 호위들이 그녀를 막아섰다.
가뿐하게 그들을 제압하니 정말 실력자가 나선다.
로브를 입고 터번으로 머리를 가린 검은 피부의 사내였다.
그는 세리스가 만만치 않다고 여겼는지 쌍검을 뽑아 들었다.
“잠깐!”
그때 문이 열리며 안쪽에서 책임자가 모습을 드러냈는데, 콧수염을 기른 중년인이었다.
“왜 와서 행패를 부리는 겁니까?”
세리스의 자초지종을 듣고 나자, 이번 상행의 책임자는 말이 통하는 사람이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일을 수습하려 한다.
“그건 제가 정중하게 사과하겠습니다. 그러니 돌아가세요. 이쯤에서 그만합시다.”
그러나 세리스는 아까 방에서 보였던 반응과 다른 태도를 보였다.
그녀는 손가락을 까닥이며 입을 연다.
“그게 그렇지 않아요. 저는 이미 무시당한 상태입니다. 이대로 물러나면 당신들의 부하들은 그렇다 치고, 저 억센 선원들에게까지 경시당하게 됩니다. 당신들 상단과 성기사들끼리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저도 모르겠습니다만, 그걸 떠나서 저도 쉽게 물러설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에요. 왜냐면 남은 길을 편안하게 가고 싶거든요.”
“이봐요. 그럼 어쩌겠다는 겁니까?”
콧수염을 기른 남자가 묻자 세리스는 이렇게 말했다.
“귀찮은 일의 실마리를 그쪽에서 제공했으니까요. 그냥 받아들이세요. 그리고 당신은 지금 뻣뻣한 태도를 보일 때가 아닙니다.”
그녀는 장검도 아니고, 벨트에 달려있던 단검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책임자의 앞을 막아선 호위에게 달려들었다.
방 안을 쌍검의 광채가 채웠을 때.
그녀는 너무나도 허무하게 그걸 단검으로 쳐내곤, 호위의 가슴을 손바닥으로 쳤다.
명치를 정통으로 가격하는 손짓이다.
호위는 그림 마냥 뒤로 붕 하곤 떠서 나동그라졌다.
그러자 그녀는 호위에게 발길질을 하여 추가타를 먹이고, 콧수염의 남자에게 말했다.
“그냥 조용히 따라오실래요? 아니면?”
그때 세리스의 눈은 정말로 무서웠다.
콧수염의 남자는 그제야 미모에 가려져 있던 그녀의 참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상대는 그저 그런 기사가 아니라, 피비린내 나는 전장에서 선두에 설 수 있는 정도의 기사인 것이다.
그걸 뒤늦게 알아차리자 등골이 서늘해지는데, 세리스가 덧붙였다.
“당신은 지금 제 자비로 숨 쉬고 있는 거예요. 제가 마음만 먹으면 당신들은 시체로 바다에 던져집니다. 배를 움직이게 하는 것은, 선원들로 충분하니 거리낄 것도 없어요. 그런데 왜 그렇게 하지 않냐고요? 저는 기사니까요. 그러니 기사로서 점잖게 말할 때 갑시다. 제가 내킨다고 해서 기사라는 이름을 던져 버리면, 여기 선원들만 부자가 됩니다.”
결국, 당신들은 다 죽고 물건들을 선원들이 차지할 테니까.
덜덜 떨리는 손으로 외투를 받아든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상대는 정말 아무렇지도 않게 자신을 칼로 찔러 죽일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은 배에서 생활하는데 그냥 귀찮음을 감수하기 싫어서이다.
고작 그런 이유였다.
세리스는 쓰러진 호위의 발을 잡고 질질 끌며 갑판으로 나왔다.
콧수염의 남자를 뒤에 세워두고 말이다.
갑판에 나와보니 무슨 일인가 하고 달려 나온 선원들은 물론, 일등항해사도 보였다.
선장실에선 창가에 그림자가 아른거리는 게 이쪽을 보고 있는 것 같다.
그녀는 장난처럼 단검을 던졌다.
그러자 무서운 소리를 내며 날아간 단검은, 손잡이만 보이며 돛 기둥에 틀어박혔다.
단검 손잡이가 힘을 이기지 못하고 부르르 떠는데, 세리스가 남자의 발에서 손을 놓으며 말한다.
“잠시 상단과 불미스러운 일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여기 책임자분은, 제게 사과를 공개적으로 하기 위해서 여기에 왔고요.”
그러면서 팔짱을 끼며 콧수염을 바라보자.
남자는 고개를 미친 듯이 끄덕거렸다.
그런 남자에게 다가간 그녀는 콧수염의 어깨를 소리 나게 몇 번 두들겼다.
누가 봐도 순수한 사과를 주고받는 상황이 아니었다.
차라리 협박이란 단어가 어울릴 법했다.
그걸 모를 선원은 여기 아무도 없었다.
세리스가 이렇게 일을 벌인 이유는 괜한 신경전과 몇 번의 오가는 찝쩍거림 후에, 뜨거운 맛이 없길 바라는 마음 때문이다.
그러려면 한번 확실히 뜨거운 맛을 보이는 게, 결과적으론 시간도 아끼고 좋았다.
“그럼 여기까지 합시다.”
그녀는 몸을 돌리고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짧은 해프닝 정도로 하고 접겠다는 행동이다.
그러면서 기절해 있는 남자의 몸을 보란 듯이 밟고 지나갔다.
쌓인 앙금을 넘기지 않고 말이다.
그 후 갑판 위에 정적이 흐른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 * *
가끔 날씨가 궂을 때도 있었지만, 배는 파도를 넘어가며 항해를 계속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날아온 갈매기들로, 뭍이 머지않았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그동안 세리스는, 가끔 세인을 찾아가서 이야기를 나눈 것을 제외하면 방에서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그편이 오히려, 눈치를 보는 다른 남자들에게도 편했고 말이다.
“기사가 괜히 기사가 아니구나.”
“그 당연한 걸, 꼭 직접 건드려 봐야 아는 사람들이 있어서 세상은 참….”
“참… 뭐?”
“재미있지.”
선원들은 그렇게 잡담을 나누며 배를 항구에 댔다.
항구라고 말하기도 참 소박한 곳이긴 하지만, 어쨌든 오랜만에 밟아보는 땅이었다.
선원들이 육지 멀미를 느끼는 그때, 세리스와 세인은 이별을 준비했다.
“선실 안에서 충분히 논의했듯이. 저는 이제 세계수 쪽으로 갈 겁니다.”
그렇게 말하는 세리스의 얼굴엔 흔들림이 없었다.
세인은 세리스를 바라보며 더 이상 그녀의 미래에 대해 조언하는 것을 아꼈다.
그녀는 자기 가치관을 가지고 자신의 삶을 결정한 것이다.
소금기 섞인 바람을 맞으며 금발을 옆으로 흩날리는 그녀가, 허리춤에 손을 가져갔다.
황금색 머리카락 몇 가닥이 그녀의 희고 작은 얼굴에 가로 선을 만들었다.
“그동안 충분히 지켜보았어요. 그리고 대화도 나누었죠.”
“….”
그녀의 손에서 검집을 빠져나온 하얀 검이 수직으로 몸을 일으켰다.
바다 위의 태양 빛을 받은 검날이 번쩍거리며 둘의 얼굴을 오간다.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유대를 설명하기 위한 몸짓처럼….
상상해 보자면, 나는 당신과 어떤 유대를 고대하고 있고 언젠가 그 기대를 당신이 채워줬으면 좋겠다는 식이 아니었을까?
“다시 만나게 된다면, 제 앞에 있는 사람을 위해 이 검을 들겠습니다. 그리고 원한다면 제 앞의 사람을 위해, 그의 권력을 상징하는 깃발도 들겠습니다. 그게 바로 제가 원하는, 우리 관계의 재정립이에요.”
세인은 다시 검을 집어넣고 등을 돌리는 그녀를 향해 중얼거렸다.
“사람이라고 말해줘서 감사합니다.”
배가 정박한 항구에서 그녀가 떠나고, 선원들도 마을로 자취를 감추었다.
그리고 상인들조차 떠나자 그 풍경은 정물화가 되었다.
세인은 바다를 바라보며 서 있었다.
아주 느리게 움직이는 구름과 이따금 빛에 반짝이는 해변. 그리고 날아오르는 새들이 펼쳐진 정물화에 드문 동선을 그려 넣었다.
굳이 마검의 힘을 빌리지 않아도, 세상은 이따금 얼마든지 이렇게 시간을 멈추어 보이곤 하는 마법을 가지고 있었다.
차이라면 그런 마법을 평소에 발견할 수 있느냐 없느냐 뿐이다.
바다를 바라보고 있던 세인은 마음을 정리함과 동시에 걸음을 떼놓았다.
이제부터 해결해야 일들이 산더미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