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8
& 전쟁 (3)
괴물들의 진군에 따라 전선이 길게 늘어졌다.
처음에 지형을 타고 흐르던 그 선은 자연에 순응하는 듯하다가, 강세를 가지고 인간 영역에 침투하기 시작했다.
일반 병사들이 뒤로 밀리기를 며칠, 기사들이 대거 나서며 여러 국가의 지원이 있었다.
그러자 속수무책 뒤로 밀리던 국면은 언제 그랬냐는 듯, 팽팽하게 흘러가기 시작했다.
그 힘겨루기는 며칠을 갔다.
고이트의 주변도 그렇고, 드레퓨스의 근처도 괴물들의 행군에 불타고 휩쓸렸다.
그러나 중요한 성들은 함락된 곳이 하나도 없었다.
비록 마을들과 명소는 불탔지만, 중요거점들은 거센 파도에도 끄떡없는 성처럼 버티고 있었다.
고이트의 브라운 성도 그중 하나였다.
팔짱을 끼고 꾸벅꾸벅 졸던 노인은 악몽이라도 꾸었는지 식탁 다리를 걷어차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이 덜 깬 듯 주위를 둘러보며 눈을 끔벅이는 그를 누구도 비웃지 않았다.
이곳 성에서 가장 높은 자리에 있었기 때문이다.
기사가 차가운 냉수를 가져다주자 그것을 마시는 노인이다.
그리고 소매로 스윽 하고 입가를 닦은 후 밖의 상황을 물었다.
“놈들은?”
“여전합니다. 다시 숲을 채우고 있습니다.”
턱짓으로 앞장서라는 명령을 내린 브라운의 성주는 활을 들고 기사의 뒤에 섰다.
기사들의 보호를 받으며 성벽 위에 올라가니, 산 아래로 숲을 가득 채우고 있는 횃불들을 볼 수 있었다.
성주의 입장에서는 징그럽게 많은 숫자였다.
아무리 끓는 기름을 부어도 몰려오는 탓에, 제대로 잘 수도 없을 지경이다.
하지만 그는 고민하지 않았다.
어차피 브라운 성은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이기 때문에 버려질 수가 없었다.
구원군은 곧 올 것이다.
그리고 반전이 일어나겠지.
손짓으로 옆의 기사에게 활통을 받아든 그는 화살을 꺼내 활대에 걸었다.
그리고 눈을 감고 잠시 바람을 느끼더니 수직으로 활을 들었다.
쏘아진 화살은 가파른 포물선을 그리며 별빛 틈으로 사라져 갔다.
아주 멀리 어딘가에서 오크의 투구를 뚫고 화살이 명중했다.
그 오크는 잠시 비틀비틀하다가 쓰러져 버렸다.
허무한 죽음이었다.
모리스는 그렇게 계속 화살을 하늘로 쏘아 보냈다.
그의 화살은 백발백중이었고, 원하기만 하면 아무리 작은 사물이라도 관통시킬 수 있었다.
그가 괜히 명궁이라고 불리는 게 아니다.
몇백 발을 쏴도 지치지 않는 그의 불가사의한 능력에, 주변인들은 혀를 내둘렀다.
그는 가끔 아주 큰 궁을 들고 철시도 쏘았는데, 그때의 위력은 상상을 초월했다.
실컷 화살을 날려 보낸 모리스가 손을 쥐었다 폈다 하며 성벽 아래로 내려올 자세를 잡을 때였다.
그는 멈칫하더니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런 그의 행동에 기사들은 설마… 하는 심정이 되었다.
야습인가?
그러나 모리스는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왔구나.”
숲에 가득 찬 횃불들이 무색하게, 멀리에서 엄청난 빛의 파도가 일어났다.
그 파도는 가장자리에서부터 횃불들을 잡아먹기 시작했다.
죽음의 메아리와 함께 오크들의 목숨이 끊어진다.
제국의 지원군이 온 것이다.
그 압도적인 숫자 앞에서는 아무리 강력한 오크라고 해도 태풍에 휩쓸린 가랑잎일 뿐이다.
질 좋은 장비를 휴대한 그들은 아끼지 않고 화살과 단검을 사용했다.
게다가 엄청난 경지에 이른 기사들이 선두에 서고, 적들을 바람 앞의 낙엽처럼 쓰러뜨렸다.
서서히 한쪽으로 밀려나는 횃불과 뒤죽박죽이 된 빛의 장관 속, 모리스는 허리에 두 주먹을 대고 서 있었다.
그리고 산 아래에서 올라오는 뜨거운 공기를 피부로 음미했다.
지금의 그는 훗날 기록될 역사의 목격자였다.
* * *
세리스와 세인은 동굴 안에 있었다.
그들이 있는 동굴은 작은 산 중턱에 파인 동굴이다.
마을에서 지낼 수 없었던 그들은 결국 동굴 안에 천막을 쳤다.
이 동굴은 오래전에 수도사들이 썼던 곳으로 다른 여행자를 위한 여러 물건이 놓여있었다.
높은 지대에서 마을을 내려다보니 병사들이 자주 왕래하는 것이 보였다.
그래도 마을 사람들을 데리고 떠나가지 않는 것을 보면, 괴물들의 접근은 없나 보다.
세리스는 동굴 바깥으로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 잠시 기다리니.
하늘에서 떨어진 빗방울이 툭툭 그녀의 손등을 적셨다.
그녀가 손을 거둬들이고 얼마 되지 않아, 하늘에서 천둥이 몸을 비트는 소리가 들렸다.
“비가 올 모양입니다.”
그녀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세인은 천막 옆에 주저앉았다.
그리고 뭔가를 품속에서 꺼냈다.
손에 쥔 것을 흔드니, 양철로 만든 둥그런 통 안에 든 것이 찰랑거린다.
세리스는 그가 술통의 마개를 따는 것을 보며 걱정스레 물었다.
“어디 다치셨어요?”
“소독용이 아닙니다.”
세인이 마개에 술을 따르는 것을 보며, 세리스는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급히 중앙으로 가려고 했던 세인은 서두를 필요가 없다는 판단이 들자, 긴장을 풀어 버렸다. 그러자 애써 억눌렀던 죄의식들이 뒤늦게 고개를 들었다.
그는 골디온과 관계된 놈들을 죽이면서 결국 성 주위를 몰살시켰다.
그 죽음은 무너진 성을 중심으로 광범위하게 일어났다.
악마라도 그렇게 넓은 지역을 샅샅이 뒤져가면서 도륙하진 못할 것이다.
그때는 그래도 최대한 억제를 한 게 그 정도였으니까….
아마 오버 더 데스가 제대로 마음만 먹으면, 나라 하나도 순식간에 절단 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만약 그게 기쁘다면 그건 그것대로 이상한 것이었다.
괴로워해야 정상이다.
그래서 세인은 점점 거세어지는 빗소리를 안주 삼아 술을 홀짝였다.
“크으….”
식도를 타고 쓴맛이 내려가지만 괜찮다.
곧 이 맛이 달게 느껴질 정도로 취하면 되니까.
세리스는 그가 술을 마시는 것을 보더니, 식량이 든 가방을 뒤적거렸다.
술을 좋아하지 않는 그녀였다.
하지만 저렇게 술만 마시다가는, 속 버릴 수 있다는 것 정도는 알았다.
가방에서 무와 육포 부스러기를 꺼낸 그녀는 그것을 들고 동굴 중앙으로 향한다.
동굴은 그리 넓지 않다.
그래서 아늑한 기운이 있는 것이지만, 불을 피운다면 연기 때문에 고생할 가능성이 컸다.
그래서 세리스는 미리 경고했다.
“눈이 매워도 참으세요.”
하고 말이다.
나뭇가지를 모아 불을 피우고 냄비에 무와 육포를 넣었다.
그리고 소금 주머니를 열어 소금을 좀 넣었다.
그렇게 하다 보니 세리스는 이것저것 더 첨가하고 싶어졌다.
그래서 식량이 담긴 주머니를 다시 뒤지며 곧 상할지도 모르는 음식물들을 꺼내 놓았다.
냄비 위에서 단도를 움직여 홍당무를 써는데, 어느새 얼굴이 빨개진 세인이 입을 열었다.
“제가 취한 김에 뭐 좀 이야기해도 될까요?”
세리스가 술을 좋아하진 않지만, 술꾼의 말을 귀담아듣는 것만큼 영양가 없는 일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홍당무를 썰어 넣으면서 건성으로 대답한다.
“사랑 고백이라면 하지 마세요.”
“그 창작 활동 말입니다.”
“예. 저의 요리요.”
“그러니까 그 창작열은 알겠는데 말이죠. 좀 자제하는 게 어떻습니까?”
세리스는 고개를 천천히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세인은 이제 마개를 내려놓고, 술병 주둥이를 입에 가져다 대고 있었다.
움직이는 목젖을 보며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요즘 세인이 얼마나 괴로워하는지 옆에 있는 그녀마저 우울해질 정도였다.
가끔 그가 걷다가 멈추는 것도, 육신이 피곤해서가 아니라 정신적으로 지쳐서인 것도 같다.
차라리 저렇게 마신다면 좀 나아질 수 있는 걸까?
“요리는 끊임없는 도전이에요. 그런 과정 속에서 새로운 요리가 재탄생하는 거예요.”
그러면서 그녀는 꺾어온 나뭇가지로 냄비 안을 휙휙 저었다.
동굴 밖 풍경은 이제 비로 흠뻑 젖어 들었다.
그러나 전에 수도사들이 만든 배수로가 아주 깊었기 때문에 문제는 없다.
동굴 안이 좀 습기 찬 것은 어쩔 수 없지만.
그녀는 세인이 술 한 병을 비우고 이제 그만 하겠지 했는데, 다른 술병을 꺼내는 것을 보며 미간을 좁혔다.
저건 또 언제 산 거야?
“요리 못하는 분이 창작열까지 있으면 곤란하지 않을까요.”
세리스는 세인의 생각을 정정해 주려 했다.
“저는 요리를 못하는 게 아니에요. 이런 재료와 극악한 여건 속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는 겁니다. 그런 세인님이야말로 당번일 때 진짜 못하시잖아요. 레인저로 생활하셨다고 말하지 않았어요? 야지에서 대체 뭘 해 드신 거예요?”
“레드가 요리는 잘했는데….”
그렇게 중얼거린 세인은 비틀거리며 불가로 다가왔다.
너무 냄비에 바싹 당겨 앉자.
그녀가 좀 물러나라는 뜻으로 손을 저어 보였다.
그러자 세인은 뒤로 조금 물러나 끓는 냄비를 보았다.
그렇게 멍하니 보고 있는데 세리스가 말한다.
“너무 괴로워하지 마세요.”
“….”
“아직 우린 뭔가를 할 수 있잖아요. 후회의 늪엔 나중에 빠져도 늦지 않아요.”
세인은 비 내리는 동굴 밖을 보았다.
비바람에 흔들리는 풍성한 나뭇잎들이 보였다.
문득 바깥의 그런 초록색 우거진 숲이 아름답다는 생각이 든다.
그 생각은 언어로 묘사하기 힘든 감정이다.
그냥 느껴지는 것이니까.
그런데 자신은 이렇게 느낄 수 있는 생명체들을 몰살시켜 버렸다.
“게다가 신부님을 찾아갈 여유도 없습니다. 물론 그 신부님은 세인님의 고백을 끝까지 들어주기도 힘드실 거예요. 보자마자 놀라서 쓰러지실 테니까.”
“당신은 정말 다른 곳에 투신할 생각이 없는 겁니까?”
세리스는 그의 물음에 침묵을 지키더니, 바지 주머니 밖으로 빠져나와 있던 장갑을 꺼내 손에 끼었다.
그리고 냄비를 들어서 축축한 땅바닥 위에 옮겼다.
그러면서 약간 주저하더니 이렇게 말했다.
“저는 신부님은 아니지만, 당신 곁에 있어 줄 수 있어요.”
세인이 그녀를 올려다보는데 그녀가 팔짱을 끼었다.
“그러니까 기사의 봉사를 받으려면 정신 차리세요. 지금 시대에 망설이는 철학자는 필요 없어요. 당신은 더더욱 그러면 안 됩니다. 본인도 아실 겁니다.”
“….”
“당신은 거느리고 명령을 내리는 사람이에요. 필요하다면 불구덩이를 넘게 해야 하는데, 저게 얼마나 뜨거울까를 생각하면 어떡합니까? 차라리 빨리 뛰어넘게 해서 뜨거운 걸 못 느끼게 해야죠. 그러다 거기에 떨어져 죽으면 할 수 없고요. 그게 당신 자리에 앉은 분들이 해줄 수 있는 유일한 배려입니다.”
세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도 그녀가 설교에는 소질이 없단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결국, 세리스도 술을 약간 마시게 되었다.
그들은 냄비를 사이에 두고 앉아서 술병 마개를 주거니 받거니 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냄비 안의 죽 같은 것을 떠먹었다.
그 맛은 썩 유쾌하진 않았다.
그러나 알코올에 젖은 혀는 그것들을 잘도 받아들였다.
세리스는 세인의 고민을 분산시키고자 여러 가지 이야기를 떠들어 댔다.
세인은 그녀의 위로에 고개를 끄덕이며 잠자코 들었다.
어느덧 냄비가 바닥을 드러내고 술자리도 끝났을 때, 둘은 불을 피운 자리에 흙을 덮고 천막 안으로 들어갔다.
서로 떨어진 채 가장자리에 누운 그들은 잠을 청했다.
“내일은 뭐 하실 겁니까? 비가 그치면.”
“일어나 걸어야죠. 비가 그치면.”
“비가 그치면.”
비가 내리는 소리를 자장가 삼아 그들은 무거운 눈꺼풀을 아래로 내렸다.
천막 안은 따뜻했다.
그보다 더 따뜻한 것은 모포 안의 육신이었다.
몸 전체에 퍼진 열기가 자연스럽게 수면을 유도했다.
그리고 완전히 수마 속으로 끌려들어 가기 전에, 누군가가 잠꼬대처럼 말했다.
웅얼거리는 듯이.
“비가 그치면”
그리고 밖에는 계속 비가 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