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7
& 전쟁 (2)
「도끼들이 춤을 춘다!
나가라!
용맹의 용사들이여!
적의 머리를 잘라서 허리춤에 매달자!
불태워라!
우리는 하나다!」
황혼이 산 너머로 가라앉고 난 후.
어스름이 깔린 대지 위에서, 오징어 같은 구조물이 여러 개의 다리로 걸어 다녔다.
그 구조물들은 대리 연설자들을 태우고 있었고, 초록색의 불빛을 빙빙 돌리며 시끄럽게 외쳐댔다.
말하는 이동식 등대인 셈이다.
그 아래에는 오크들이 땅을 울리며 걷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도 움직이는 사각형의 깃발 테두리는 삼각형의 연속이었고, 안쪽에는 휘갈겨 쓴 부대 표시가 야광인 듯 녹색으로 빛났다.
깃발뿐만 아니라 오크들의 몸 곳곳에 칠한 도료가 빛을 발한다.
이들은 야간에 흔히 요구되는 은밀함을 충족시킬 의지 자체가 없었다.
정숙함과는 거리가 먼 전사들이었다.
그들이 걸친 갑옷은 끊임없이 번들거리며 달그락거렸다.
쇠사슬을 목과 팔에 칭칭 감은 전사들은, 네 개의 다리를 가진 코끼리 위에 탄 채로 긴 창을 비스듬히 들었다.
그리고 그들의 어깨 위에 앉은 머리 두 개 달린 까마귀가 주기적으로 하늘을 향해 날아오른다.
정찰을 위해서 말이다.
푸드덕거리는 소리와 함께 검은 깃털 한 장이 오크의 콧잔등 위에 내려앉자, 오크는 킁킁거리며 코를 벌름거리다가 그걸 떼어냈다.
땅 울림은 점점 옆으로 넓게 퍼진 인간의 마을을 향해 다가섰다.
사람들은 모두 피신한 모양인지 불빛 하나 없었고, 고즈넉한 분위기마저 감돌았다.
오크의 그림자들이 다가설수록 흔들리는 땅에 밀들이 바스락거렸다.
가엾은 식물들은 서로 부딪히며 불안한 듯 떨고 있었다.
그때였다.
수많은 오크의 머리 뒤로, 높게 솟아오른 사각형의 탑 안에서 신호가 있었다.
그러자 거짓말처럼 오크 대군의 움직임이 멈춘다.
심지어 움직이는 등대마저 잠잠해졌다.
이제 사위는 방금 전과 대비되는 침묵의 장막으로 가득 찼다.
그 순간은 영원처럼 지속되었다.
일제히 오크들이 멈춘 가운데, 탑 안에 있던 군단장.
오크가 아닌 하얀 리자드맨이 붉고 큰 눈동자를 뒤룩뒤룩 굴리며 가만히 있었다.
정지 명령을 내리느라 한 손을 올린 채로 말이다.
얼마나 지났을까?
리자드맨의 얼굴이 출렁였다.
아주 느끼하고 음흉하게 웃던 리자드맨은 지금 주변의 상황을 알아차렸다.
하지만 그는 재진군을 명령한다.
그리고 뼈로 된 의자에 등을 기대고 전방을 바라보았다.
이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다 안다는 듯이.
오크들은 점점 어두워지는 하늘 아래에서 검은 그림자로 군림했다.
밀밭에 허리를 담근 그들은 야만성과 폭력을 가진 이방인들이었다.
그때 광기를 준비하고 있던 그들에게서 폭발이 일어난다.
선두 쪽에서 잘려나간 오크의 몸체가 허공에 떠오를 때, 오히려 탑 안의 군단장은 손뼉을 쳤다.
그리고 속도를 빨리하라고 재촉한다.
밀밭에서 폭발이 일어나고 불길이 좌우를 달렸지만, 꾸역꾸역 몰려드는 오크들을 막기엔 역부족이었다.
오히려 불길을 뚫고 모습을 드러내는 괴물의 동체.
타다 달라붙은 재와 기름이 뒤엉겨 연기를 치우는 그 모습은 원시적인 공포의 재림이었다.
“오오. 죽여라.”
다시 오크들의 뒤로 떠오른 오징어 모양의 구조물이 그들을 조종하는 악마마냥 말을 토해냈다.
그리고 초록색의 광선이 불길을 뚫고 오크들의 건장한 어깨 위를 쓰다듬었다.
그리고 최면의 빛을, 하얗게 홉뜬 오크의 눈에 박아 넣었다.
함성과 함께 불타는 밀밭 뒤로 인간들이 일어날 때, 오크들은 더 빨리 걸었다.
그리고 점점 더 빨리 걷다가, 결국에는 땅 위를 미친 듯이 내달렸다.
그들의 타다 만 갈기가 흔들거리고, 양손 도끼는 어깨 위로 들려졌다.
거기에 지지 않겠다는 듯 인간 병사들이 창을 내세우며 달려든다.
두 종족은 마주 보는 파도처럼 부딪혔다.
그리고 병장기들이 서로와 서로를 쓸며 요란한 소리를 냈다.
오크 한 마리의 도끼가 부웅 소리를 내며, 도끼날의 예기 서린 빛으로 밤을 찢었다.
가로로 휘둘러진 도끼날은 달려오던 인간의 옆구리를 그대로 쳐버린다.
비명과 함께 인간의 몸이 한 바퀴 구르는가 싶더니 상반신과 하반신이 분리되어 장난감처럼 따로따로 놀았다.
그걸 본 오크는 얼굴에 튄 피를 긴 혀로 핥으면서 흐흐흐 하고 웃었다.
인간들의 방패가 오크들의 얼굴을 쳐내고 다시 가슴을 친다.
그 충격에 뒤로 밀려날 때, 창이 그들의 목에 박혔다.
그러나 오크는 목에 박힌 창을 붙잡고, 다른 팔로 창대를 때려 분질러 버렸다.
목에 창대를 박아 넣은 채 도끼와 칼을 휘두르는 그 모습은, 처참함과 공포 그 자체였다.
마을의 울타리가 뒤로 밀려나고 해일처럼 쏟아지는 발길에 결딴이 났다.
이제 초록색의 광선은 마치 춤을 추듯이 위아래로 율동 하면서 외치고 있었다.
“분노를 일으켜라 광기의 화신들아. 우리의 왕이 함께하신다. 우리의 왕이 함께 하신다! 짐승을 죽여라! 목매달아 처형해라!”
그 소리에 힘을 받은 오크가 자신의 가슴을 탕탕 두들기며 긴 포효를 뽑아냈다.
그리고 앞으로 펄쩍 뛰더니, 짚더미 위에서 창을 휘두르고 있던 인간의 앞에 섰다.
그가 짚더미 위에 올라서자 무게 때문인지 짚이 한쪽으로 심하게 쏠렸고, 인간은 비틀비틀하다가 그만 그의 흉갑에 이마를 부딪치고 만다.
“….”
그 남자가 공포에 질린 표정으로 천천히 고개를 드니, 오크가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의 더러운 숨결, 그리고 악취.
턱 아래로 흘러내린 타액이 찐득하게 볼에 묻어났다.
그의 땀방울이 오크의 타액과 엉겨 붙을 때, 오크의 양손이 남자의 머리를 잡았다.
그리고 으드득하는 소리가 났다.
부서지는 남자의 머리 조각이 양손에 묻자, 오크는 고개를 뒤로 젖히고 웃었다.
그리고 그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문지르며 몸을 들썩였다.
그때 뒤에서 날아오른 인간의 창이 오크의 가슴을 뚫고 나온다.
오크는 피범벅이 된 창날을 내려다보다가 옆으로 넘어졌다.
창대가 걸리적거리며 비스듬히 누운 오크에게서 창을 빼낸 병사는 악에 받쳤다.
고함을 지르며 창으로 연신 오크를 내리 찌른다.
마을은 박살이 나면서 인간들은 흩어졌다.
조각조각 난 나무판을 헤치고 나온 오크들은, 이미 죽어버린 인간들을 질질 끌며 전진했다.
그들은 쇠사슬로 인간의 목을 칭칭 감아 죽여 버리고, 도끼로 조각조각 냈다.
피 칠갑을 한 오크는 너무나 흥분한 바람에, 몸부림치는 인간을 끌어안고 그의 목에 자신의 이빨을 박아 넣었다.
그리고 고통에 자지러지는 인간을 꽉 껴안은 채로 피에 젖은 괴소를 터트린다.
오크 군단이 한창 인간 병사들을 밀어 버리면서 전진할 때, 멀리 떨어진 전방에서는 공성 병기의 준비가 한창이었다.
탑과 최면 건물을 무너뜨리기 위한 작업이다.
울창한 숲에 몸을 숨긴 인간들은 바퀴 자국이 선명한 땅을 밟으며 밧줄과 바위를 점검했다.
도르래가 바쁘게 움직이며 준비가 끝나려는 찰나.
경비병이 이상한 진동을 감지했다.
“설마, 이건….”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진흙 바닥이 위로 불쑥 솟아오른다.
그 힘이 어찌나 강한지 나무로 만든 구조물들이 흔들리다가 옆으로 쓰러져 인간들을 덮쳤다.
불쑥불쑥 솟아오른 언덕이 갈라지며, 뾰족하게 회전하는 생체 무기가 모습을 드러냈다.
눈이 없는 땅의 파괴자.
두더지를 닮은 거대 생명체들은 잠시 뾰족한 주둥이를 높이 수직으로 세웠다.
그리고 참았던 숨을 아래쪽에서 뱉어내곤 다시 들이마셨다.
그들이 그런 행위를 반복하자 원뿔 기둥 아래에서 물방울들이 튀었다.
분무기처럼 퍼지는 그 침방울들을 옆에서 맞은 인간들이 몸을 바들바들 떨었다.
앞으로 벌어질 참사를 예견했기 때문이다.
어떤 병사들은 소리를 지르며 창으로 두더지 몸체를 찔러댔지만, 가죽이 너무 두꺼웠다.
찌르다가 뒤로 나자빠지는 인간도 보인다.
결국, 원뿔이 수평을 이루고 주변의 모든 것을 분쇄하기 시작했다.
인간들은 물론이고 쓰러진 나무, 박살 난 공성 병기들의 조각이 원뿔에 걸려 휘돌았다.
요란한 소리가 나며, 우거진 숲 위로 조각들이 분수처럼 떠오른다.
그러나 여기에서 끝이 아니었다.
뒤늦게 땅에서 암컷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은 수컷보다 훨씬 몸집이 작지만, 가공할 능력이 있었다.
주둥이가 벌어지며 푸르스름한 빛을 띄운다.
멀리에서 보면 커다란 요정들이 푸른색 고깔모자를 쓰고 모여있는 것만 같았다.
펑펑 소리를 내고 위로 치솟은 푸른 불덩어리들이 하늘을 아름답게 수놓는 것도 찰나.
곧 무서운 속도로 유성우들이 쏟아졌다.
펑펑!
숲이 초토화되고 인간들은 나무를 엄폐물 삼아 달리고 달렸다.
그러다가 푸른 불에 맞으면 비명을 지르며 불타는 머리를 잡고 비틀거렸다.
머리를 태우며 등 쪽까지 파고 들어가 척추뼈를 파랗게 물들이고야 끝나는 그 불길.
그 사이에서 일어난 스켈레톤들이 몸부림치는 불덩어리를 조롱하듯 낄낄거렸다.
바닥에서 솟아오른 해골 병사들은 뼈 검을 휙휙 돌리더니 앞을 가리켰다.
전진하겠다는 의지다.
우연이었을까.
때마침 뒤쪽에 있는 오크 진영에서도 함성이 터져 나왔다.
그 호응을 받아 용기백배한 해골 병사들이 하얀 물결을 이루며 달려온다.
“우리가 첫 번째 저지선이다! 기사들이여! 오늘 밤 용사가 되어라!”
그 물결을 내려다보고 있던 선임기사가 소리를 지르며 주위에 늘어선 기사들을 독려했다.
그리고 건틀렛으로 투구 덮개를 내려썼다.
그렇게 결전의 의지로 가득 찬 두 눈은 투구 덮개에 가려졌다.
그러나 그들이 말을 타고 있는 그 모습에서 비장한 기운이 줄기줄기 흘러나왔다.
“우리는 전우를 위해 죽을 것이다. 돌격!”
하나둘씩 말들이 경사진 아래로 뛰어내렸다.
그 말발굽에 차인 흙덩이를 가슴으로 맞이하며, 뒤의 기사들도 선두의 행동에 동참한다.
동시에 세웠던 랜스와 검이 눕혀지며 아래쪽에서 올라오는 해골 병사들을 겨누었다.
휙휙 하고 주변의 나무그림자들이 무서운 속도로 기사들을 스쳐 지나갔다.
누군가는 이 속에서 자신의 일생을 목격했을 것이다.
원래 죽기 전의 인간은 자신의 삶을 돌아보기 마련이니까.
말들은 숨이 가쁜지 종종 구슬프게 울어댔다.
그러나 기사들은 그들을 진정시키기는커녕 오히려 박차를 가했다.
그렇게 거침없이 죽음과 맞닿는다.
질주 속에서 주변 나무들이 선처럼 느껴지고, 전방의 해골들도 점에서 면으로 변했다.
이제 그들은 무기를 든 채 그 면들을 꿰뚫는다.
그 순간, 분명 엄청난 충격과 소리가 울려 퍼졌을 것이나.
이 흥분한 집단은 전혀 그것을 느끼지 못했다.
팽창된 동공 속, 무기 끝에서 부서져 나가는 해골들이 보였다.
동시에 일어나는 뿌연 재들이 그들의 갑옷을 하얗게 불태우는 것만 같았다.
확산하는 백색 화염 속, 입을 크게 벌린 해골들의 머리에 창끝을 쑤셔 박았다.
힘껏 휘두르는 검광들이 말 주위를 장식하며 괴물들을 조각 조작 잘라냈다.
말의 몸체에 부딪힌 해골 병사들이 비명을 지르며 땅 아래로 처박히고, 발굽에 짓밟힌다.
하얗게 몸을 물들이며 기수와 말이 위로 뛰어오르는 가운데, 뼈 화살이 그들의 동체를 두드렸다.
그 바람에 최초로 쓰러져 나뒹구는 기사가 생겨난다.
말의 동체가 꺾어지고 그 밑에 깔린 기사는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해골들이 득달같이 달려들어 그들의 무기로 하늘을 가득 가렸을 때, 기사는 쓰러진 채로 달과 별을 보았다.
최후의 순간에 보는 것이 밝은 태양이었다면 정말 좋았겠지만, 이것도 괜찮다.
그렇다 이 정도면 괜찮았다.
그렇게 자위하는 기사의 몸 위로 날카로운 무기들이 혜성처럼 쏟아진다.
그 시간 산 정상의 기사들은 열을 이루며 산등성이를 뒤덮었다.
그들은 먼저 떠난 동료의 참혹한 죽음을 위에서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다른 선임기사가 검을 들어 올리며 소리쳤다.
“먼저 간 이들이여, 외로워하지 말라! 우리가 곧 뒤따라 가겠다!”
그 말이 신호가 되어, 철컥철컥!
덮개를 내리 씌우는 소리가 들렸다.
그것은 좌에서 우로 전염되듯 퍼져 나간다.
“가자!”
다시 말들과 기사들이 아래로 뛰어내렸다.
땅을 울리는 소리. 그리고 이어지는 처참한 비명.
죽음의 충격.
그것을 내려다보는 산등성이 위에 다시, 기사들이 일렬로 섰다.
말이 내뱉는 입김 뒤에서 다른 선임기사가 수직으로 세운 창대를 들고 외쳤다.
“우리도 뒤따라 간다!”
그 뒤로 말을 타고 올라오는 기사들이 물결을 이룬다.
산의 뒤쪽은 달빛에 반사된 갑옷 빛으로 가득 찬 상태였다.
산을 오르는 기사들은 그들의 노래를 불렀다.
인간을 위한 진군가였다.
지금 기사들의 움직임을 대변해 주듯이 노래 가사에는 전술도 강한 무기도 없었다.
강한 무기는 기사를 나약하게 만든다.
강한 무기를 들면, 그 무기 뒤에 숨은 기사는 겁쟁이가 된다.
강한 무기를 맹신하면 그릇된 확신과 믿음에 흔들린다.
강한 무기를 빌리지 않는다 해도.
기사를 기사로 만드는 것은 인간의 긍지였다.
오로지 인간이라는 사실만이 죽음을 넘어서게 하며, 저 괴물들 앞에 당당하게 설 수 있도록 만드는 힘이었다.
공포에 승복하지 않는 기사들은 죽음이 기다리고 있는 산 아래로, 낭떠러지에서 떨어지듯이 뛰어내렸다.
그렇게 반복되는 죽음 속에서 한 선임기사가 외쳤다.
그는 이제 죽어갈 옆의 전우들을 대신해 선언했다.
예고된 기사의 끝 앞에서.
“나는 내일이라는 절망 앞에 굴복하지 않는다!”
기사의 죽음을 바치겠노라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