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은 왕 마검의 주인-86화 (86/307)

# 86

& 전쟁 (1)

“죄송합니다. 그 가격에는 팔 수가 없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세리스가 어이없다는 듯이 말하자, 상인은 오히려 더 어이없다는 듯이 눈을 크게 뜨고 말했다.

“실례지만 귀머거리세요? 그 돈으로는 말을 살 수 없다고요.”

다시 생각하건데, 이제는 확실히 블랙 라이어드 상단과 성기사들 간의 분쟁이 있는 것 같았다.

세리스와 세인은 마시장에 왔고 말을 구입하려 했지만, 번번이 거절당했다.

세리스의 복장을 본 상인들이 하나같이 고개를 흔든 것이다.

이럴 거면 다른 옷으로 환복하고 올 걸 그랬다.

“이 말이 무슨 명마도 아니고 그냥 평범한 말이에요. 영양 상태도 그리 좋아 보이지 않아요. 그런데 저는 지금 두 배 가까운 가격을 부른 거잖아요. 당신 말에 대해서 잘 몰라요? 이 돈으로도 안 된다고요?”

“어디에서 오셨는지는 모르지만 그건 아주 옛날의 셈법입니다.”

“아, 그래요? 요즘 셈법은 어떤 건데요?”

“전보다 훨씬 합리적이죠. 파는 사람이 팔 물건의 가치를 매긴다는 겁니다.”

주변의 상인들까지 팔짱을 끼고 한심하다는 듯이 바라보는 통에, 세리스는 분하지만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나오면서도 세리스는 씩씩댔다.

“이건 뭔가 잘못됐어요.”

“이제 말을 구할 필요가 없어요.”

“예?”

세인의 턱짓에 세리스는 전방을 바라보았다.

거기에는 무장한 병력들이 보무도 당당하게 행군을 하는 모습이 보였다.

목적지는 바로 대륙 중부였다.

이제라도 말을 타고 달린다면 그들을 추월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얼마나 차이를 벌릴 수 있지?

근소한 거리에서 완전한 마검의 힘을 쓰면, 결국 그들이 휘말린다.

지금 상황에서는 천천히 움직이며 사태의 추이를 살피는 게 나았다.

멀찌감치에서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움직이는 깃발들을 바라보던 세인이 불어오는 흙먼지에 입을 막고 있는 세리스를 돌아보며 말했다.

“그러고 보니 어제저녁 이후로 아무것도 못 먹었군요. 시장한 데 요기라도 하고 갈까요?”

“….”

*  *  *

인간의 대표들은 그들대로 생각이 많았다.

그중에서 가장 많은 상념을 가진 존재는 바로 드레퓨스의 군주인 바이칼이었다.

그의 나라가 중부에서 가장 가까우니, 이해 못 할 것도 아니다.

홍옥이 박힌 황금 왕관을 삐딱하게 쓴 그는, 팔꿈치를 무릎에 닿게끔 허리를 굽히고 생각에 빠져있다.

주위의 신하들은 그의 생각을 반대하지 않으려 숨소리를 줄이고 있었다.

드디어 바이칼이 허리를 폈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골디온이 무참히 살해되었다. 그리고 그 주변이 황폐해졌어. 이건 누가 봐도 선전포고이자 테러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 수 있었느냐 따지는 것도 좋지만 시간이 없다.”

그러면서 그가 대전 바닥에 놓인 지도를 검지로 가리켰다.

좌우에 서 있던 신하들도 두 손을 공손히 모은 채 그 지도에 시선을 던졌다.

“안타깝구나! 드레퓨스가 강의 뒤쪽에 있었다면 좀 더 사태의 추이를 지켜볼 수 있을 것인데.”

바이칼이 다스리는 땅은 강 위쪽에 있었다.

그리고 강 뒤쪽에 고이트가 있다.

바이칼에서 위로 죽 올라가면 산맥, 그 너머에서 중앙 평원이 나온다.

드레퓨스는 큰 힘을 가진 강대국이었다.

여기를 침략한다는 건 괴물 쪽에서도 쉬운 일이 아니다.

중앙 평원이 점령당하면서 팽팽한 긴장감이 느껴졌던 것도 잠시, 드레퓨스는 평온을 되찾았다.

진격을 멈췄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의 강력한 도발로 인해 드레퓨스의 침묵은 깨졌다.

아니, 깨져야 한다고 지금의 바이칼은 굳게 믿었다.

“들어라. 이번에 우리 적들은 적대 의지를 강력하게 밝혔다. 우리 뒤쪽에서 칼을 찔렀고, 저곳의 땅에 만족하지 않는다는 의사 표현을 한 것이다. 어차피 벌어질 전쟁이다. 그렇다면 역사에 기록되는 쪽으로서 먼저 일어서야 유리하다. 승리의 지분을 요구하기 위해서이기도 하다.”

그때 한 신하가 용감하게 바이칼의 앞에 나섰다.

“주변국들도 다 인내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우리가 먼저 나서기에는 짊어져야 할 것이 너무나도 많습니다.”

바이칼이 그 신하를 괘씸하다는 듯 노려보자 신하는 부들부들 떨었다.

선대 왕이 현군 자질이 있었다면, 지금 드레퓨스의 왕인 바이칼은 폭군 기질이 다분한 남자였다.

반역죄라는 항목으로 처형장의 이슬이 되어 사라진 신하들도 여럿 된다.

그때 신하에게는 천만 다행히도, 밖에서 병사가 달려와 타국의 사신이 왔다고 알렸다.

“방문 이유는?”

원래 사흘 정도가 지나야 정식으로 바이칼과 만날 수 있는데, 이리 묻는다는 것이 운이 좋은 것이다.

그리고 왕성에 방문한 사신이 사유를 제출했을 것이기 때문에, 지금 물어보면 방문 사유를 알 수 있다.

바이칼이 사신의 소식에 답을 하면 그 자체로 협상이 이루어지는 결과를 낳기도 한다.

협상이란 그 자리에서 임기응변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미리 조율하고 짜 맞추는 것이다.

그러니 당연히 사신이 전해줄 내용을 미리 알아야만 했다.

“골디온의 죽음, 그 제반 사항에 대해 정밀하게 조사를 한다고 합니다. 그때까지 동맹국으로서 수비를 굳건히 해주고 있으면, 더할 나위 없는 감사를 보낸다고….”

그러니까 해석하면 사실이 밝혀질 때까지 경거망동하지 말아 달라는 것이다.

왕은 보고를 막느라 들어 올린 손을 내리고는 신하들을 하나하나 쳐다보았다.

그리고 일어나 명령을 내리려 하는데, 앞으로 나와 충언하는 신하가 있었다.

“전하. 저희가 나서면 다른 동맹국들도 협약 때문에 앞으로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전면전이 발발합니다. 결국, 불미스러운 일이 생긴다면 가장 큰 뒷감당은 우리의 몫입니다. 또한 시간적으로도 우리가 적의 공격을 가장 많이 받을 것입니다. 백성들을 생각해 주시옵소서.”

“….”

“드레퓨스가 움직이면 남부 전체가 일어나는 것이고, 인간 전체가 일어나는 전쟁의 효시가 되옵니다. 그래서 각국의 사신들이 모여 만나기를 간청하고 있습니다. 저들 하나하나가 동맹국들의 소리입니다. 선전포고의 화살을 쏘지 말아 달라고 말하기 위해….”

“선전포고는!”

그때 바이칼이 주먹을 쥔 채 외쳤다.

그 사나움은 마치 입에서 불을 뿜는 것만 같았다.

“이미 저들이 먼저 했소. 모르겠소? 그대들은 다 허수아비들이요? 어차피 우리가 가장 먼저 두들겨 맞을 수밖에 없다고! 이 왕성을 지키려면 병력이 앞으로 나가 방패를 더 만들어줘야 한단 말이오. 그들이 골디온을 왜 죽였을 거 같소? 심심해서?”

그는 두 팔을 벌려 보이며 대전을 거닐었다.

그가 지나가자 신하들이 분분히 고개를 숙인다.

마지막으로 휙 뒤돌자 망토가 펄럭였다.

“여기서 지금 나만 그들이 천인공노할 공작을 벌였다는 것에 화를 내는 것이오? 이 땅이 그렇게 죽음의 대지로 변하면, 경들이라고 무사할 거 같은가?”

그러나 목숨을 걸고 자기 생각을 말하던 신하의 고집도 강경했다.

“산맥을 넘어온 후에 대응해도 늦지 않습니다. 보고와 대응은 빨리 이루어질 것입니다. 저희 병사들은 언제나 그런 상황을 유념하에 연습해 왔습니다.”

“산맥을 경보용으로 쓰는 멍청이가 어디 있나? 산맥을 한 겹의 갑옷으로 만들어야지!”

그렇게 말하는 바이칼은 예고도 없이 허리에 걸려있던 검을 뽑아 그 신하의 목을 쳐버렸다.

데굴데굴 굴러가는 신하의 머리에 사람들이 뒤로 물러나는 가운데, 바이칼이 검 끝을 겨누며 호령했다.

“바보 같은 소리도 작작해야지! 길어지면 지나치다! 선대 왕을 모셨던 자라고 해서 참고 들어주는 것도 여기까지다. 더 나설 이가 있는가?”

“….”

결국, 드레퓨스는 개전을 선포했다.

그리고 이미 산맥에 몰려있던 병력을 앞으로 전진시켰다.

산맥 바로 앞이 국경이었으므로 그걸 넘어간 이상 적극적인 공격 의사를 표현한 셈이다.

이에 당황한 것은 뒤에 포진한 동맹국들이었다.

강국의 지배자들 성격은 제각각이다.

그러나 그들은 조상들을 통해 뼛속 깊이 각인된 행동지침이 있었다.

남부의 나라들은 행동을 같이한다는 것이다.

드레퓨스가 무너지면 대문의 한 축이 무너진다.

그걸 구경만 하다가는 다른 쪽 축도 무너지고, 대문이 열린다.

계속 멀리서 좌시하다간 결국 하나하나씩 격퇴당할 것이다.

그러다 보면 안방까지는 금방이다.

이제 더는 서로의 눈치만 보며 앉아있을 수는 없었다.

어쨌든 이런 판국을 끌어냈기 때문에, 사람들 사이에서 먼저 일어난 바이칼을 영웅으로 칭송하는 자가 나올 수도 있었다.

그러나 몇몇 왕은 중얼거렸다.

“우리의 승리는 정해져 있다. 그러나 그 승리는 피의 강을 바탕으로 만들어질 것이다.”

그 넓고 깊은 강바닥에는, 무수한 인간들의 시체가 쌓여 있을 것이었다.

강국들이 최고의 힘을 뽑아내려면 같이 한 몸처럼 움직여야 했다.

다른 왕들은 탄식하며 군대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판은 짜여졌고 이제 돌이킬 수 없었다.

전통(傳通)을 발목에 매단 새들이 대륙 전역을 뒤덮었고, 전령기를 단 말들은 그 어느 때보다도 빠르게 달려나갔다.

점점 짙은 전운이 감도는 가운데 괴물의 왕들도 준비를 끝마치고 있었다.

대머리의 노인이 마지막으로 다른 왕들에게 동의를 구했을 때 모두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진행하겠소.”

거대한 망치를 질질 끌며 장벽 쪽으로 나간 오우거들이 그걸로 회색 벽을 후려쳤다.

파편이 바깥쪽으로 튕겨 나가며 구멍을 만든다.

그 길을 통해 군대가 줄줄이 밖으로 나갔다.

군대는 결국 여러 갈래로 진군을 시작했다.

그들 대부분은 드레퓨스, 그리고 어쩔 수 없이 같이 일어선 고이트 군과 맞닥뜨릴 것이었다.

엄청난 수의 괴물들이 전진하는 가운데, 회색 장벽 안에 남은 괴물들 사이에서는 비장함이 감돌았다.

한편 세계수 지역에 있던 비비안은 다크 엘프 첩자들이 가져다준 정보를 보고 있었다.

트렌트 왕은 결국 비비안의 동맹자가 되어줄 것을 승낙했다.

비비안과 코다로가 제일 먼저 한 일은 날쌘 다크 엘프 몇을 대륙 아래로 내려보낸 일이었다.

종이에 쓰인 글을 읽던 비비안의 얼굴이 굳어지자, 옆에 있던 코다로가 손을 내밀었다.

회의장에는 그들 말고도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코다로가 종이를 읽는 가운데 비비안이 입을 열었다.

“아래쪽에서 인간들이 주도한 남부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참가국은 그들 전부입니다.”

회의장 안의 사람들은 장탄식을 터트렸다.

순간의 상황을 이해 못한 크릭만 빼놓고 말이다.

“좋아 그거 잘됐군!”

몇 명이 얼빠진 얼굴로 크릭을 바라보는 가운데, 비비안은 침착함을 유지하며 상황을 설명했다.

짧고 간략하게 말이다.

“제국의 발표가 있을 겁니다. 그들의 적은 이제 모든 어둠의 자식들입니다. 그 포괄성 안에는 여기도 당연히 포함됩니다. 그들이 보면 여긴 악의 진원지니까요.”

그때 만세를 하던 크릭은 안색이 굳어진 주위를 둘러보더니 천천히 팔을 내렸다.

어?

이게 아닌가?

“영주님 이제 저희의 계획은 소용이 없는 겁니까?”

더이스가 손을 들고 질문을 하자, 종이를 내려놓은 코다로가 대신 대답해 주었다.

“시간상으로 불가능하다. 우리가 중앙을 공격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가시적인 승리를 따내면 괴물들과의 차별성을 주장할 수 있었겠지. 하지만 이제는 아니야. 지금 동참 의사를 밝혀도 수포가 될 가능성이 크다. 그들은 백성들 앞에서 몸을 일으킨 이상 역사에 남을 승전보를 기록해야 해. 그런데 뭣 하러, 차후 있을 오해의 여지나 후환을 남겨 두겠나?”

남부의 힘도 우세한 마당이다.

중앙을 치고 빼앗긴 땅을 되찾는다는 명분과 함께 위로 올라온다.

그리고 세계수 지역까지 차지한다.

어차피 이제 핏값을 감수하기로 한 마당인데, 그들은 절대 멈추지 않을 것이다.

그들 입장에서는 정의와 이익이 걸린 전쟁이었다.

비비안은 깍지를 낀 두 손을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지금으로서는 통제할 수 있는 영역에만 집중하고, 그 안에서 할 수 있는 일을 해야만 했다.

“다크 엘프들과 세인님이 접촉하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위험하니 여기로 복귀시킵니다. 그리고 우리는… 전쟁준비를 합니다. 멍하니 앉아서 당할 수는 없으니까요.”

정작 코다로의 속마음은 그게 아니었지만, 어깨를 으쓱하며 입을 열었다.

“다들 기운 내라고. 얼어붙은 땅을 가지러 여기까지 오려면 많은 시간과 물자가 들어갈 거다. 그래서 적당히 타협하고 중앙만 친 뒤 물러날 수도 있어.”

분위기를 풀려는 그의 의도가 통했음인가.

자리에서 일어나는 사람들은 애써 미소를 지으며 종이뭉치를 들고 밖으로 나갔다.

번우드 지대가 점점 시끄러워지는 가운데, 코다로와 비비안은 그런 밖을 창문에서 보았다.

그리고 대화를 나눈다.

“중앙으로 내려갔다면 침략자라는 오명을 뒤집어썼을 텐데, 그것만은 다행인 건가요.”

“그래요, 좋게 생각합시다. 어차피 내려갔어도 굉장한 피해를 감수해야만 했어요.”

지금은 굉장한 피해 정도가 아니라, 생존을 걱정해야만 하는 처지다.

아무리 생각해도 남부의 강대국들이 괴물들을 처리하지 못할 거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변경에서 자랐다지만, 비비안과 코다로도 세상을 가늠할 눈과 귀가 있었다.

“그렇다고 인간들이 곤궁에 빠지기를 바랄 수도 없는 상황입니다.”

“그들에게 죽을 수도 없고요.”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던 둘은 막상 세인과 세리스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않았다.

세인이 골디온을 해치운 건 확실했다.

남부가 움직였으니까.

문제는 술렁인 정도가 아니라 남부 전체가 다 들고 일어선 거지만 말이다.

골디온이 머무르던 곳이 초토화된 것을 모르던 둘은, 새삼 골디온이 그렇게나 지지도가 높은 존재였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저는 마검이 얼마나 강한 힘을 가졌는지는 솔직히 모르겠습니다. 이제 상황이 어떻게 흘러가고 어디에서 돌변할지도 모르겠어요. 확실한건 이제 인간의 피가 많이 흐르겠군요. 저는 남부가 더 오래 참을 줄 알았어요.”

비비안은 유리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보며 중얼거렸다.

그러고 보니 그녀의 얼굴은 이제 소녀보다는 한 명의 지배자에 가까웠다.

점점 위엄있는 책임자가 가져야 할 무게를 지니고 있었다.

그러고 보면 이 소녀도 전과 달리 많이 변했다는 생각을 하며, 코다로는 창문을 열었다.

유리에 비쳤던 비비안의 고뇌에 찬 얼굴이, 천천히 열리는 창문을 따라 점점 멀어졌다.

대신 신선한 바람이 안쪽으로 들어왔다.

그 안에서는 싱싱한 내음이 담겨 있었는데, 푸른 숲이 가져다주는 청량함이다.

“어쨌든 우린 이렇게 살아 있습니다. 과거의 절망적인 상황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았어요. 앞으로도 안될 건 또 뭡니까? 되도록 기분을 무겁지 않게 유지합시다.”

이런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창문 밖의 하늘은 기분 좋은 파란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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