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5
& 다이아몬드
세인의 마음은 아주 복잡했다.
하지만 그는 여유를 가지고 고민하거나 번뇌하진 않았다.
그래서 앉은 자리에서 뭔가를 생각하다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감정의 정리는 나중에라도 할 수 있는 일이지만, 지금은 행동해야만 한다.
그래서 그는 방향을 잡고 빨리 걸었다.
그가 가는 방향은 바로 중부이다.
“왜 이렇게 서두르는 거죠?”
“검을 이미 뽑았으니까요. 이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일을 해야죠.”
하지만 세리스가 보기에 세인은 지금 매우 불안해 보였다.
자주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밤이 되어 주인 없는 헛간에서 잠들 때면, 그는 땀 범벅이 되어 헛소리를 해댔다.
악몽을 꾸는 것만 같았다.
그런데도 다음날 길을 재촉하려 하자 세리스는 한숨을 내쉬었다.
“목적지가 어딘지는 알 것 같아요. 중부죠? 하지만 거기가 급하다고 빨리 갈 수나 있는 거리인가요?”
“….”
그 말을 들은 세인이 그제야 고집을 꺾었다. 그리고 걷는 속도의 완급을 조절하기 시작했다.
마차나 말을 이용할 수 있는 곳을 일차적인 목표로 잡았다.
바쁜 여정은 그들만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세인과 세리스는 한 마을에서 상인과 다투고 있는 기사들을 발견하게 되었다.
“목숨이 달린 일이라고 말했지 않소?”
“저는 상인입니다. 상인은 당연히 제값을 받고 물건을 팝니다.”
“블랙 라이어드 상단이면 거대상단이라 신용이 있을 줄 알았는데, 가격을 이렇게 말도 안 되게 후려치기나 하고! 최악이군!”
“그런 말씀을 하셔도 상관없습니다만. 좀 뒤로 물러나 주십시오. 고의로 장사를 방해하려는 게 아니라면 말입니다. 검에서도 손을 떼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겁이 나서 말이죠.”
주위에서 들어보니 내용은 이렇다.
기사 일행 중에 위급한 환자가 있었는데, 그게 어떤 수를 써도 낫지 않고 오로지 비싼 약초를 써야만 해결될 수 있나 보다.
그런데 젊은 상인은 기사들에게도 주눅 들지 않고, 턱없이 가격을 후려친 것이다.
왜냐면 그의 뒤에는 엄청나게 성장해서 누구도 함부로 할 수 없는 블랙 라이어드 상단이 있었으니까.
“성기사들이 저러는걸 보면 엄청나게 큰 상처나 병인가 봐요. 신부님도 곁에 있을 수 있는데, 고치지 못하는 걸 보면.”
세리스는 그렇게 세인에게 속삭이며 안타까운 얼굴로 발을 동동 굴렀다.
그녀는 비록 그들과 일면식은 없지만, 같은 성기사라서 당연히 도와주고 싶었다.
그런데 여기에서 들어보니.
저 상인은 미쳤는지 어마어마한 가격을 부르고 있었다.
“여기 말고 다른 곳으로 가도 소용없습니다. 이 근방은 저희 상단이 꽉 잡고 있으니까요.”
성기사들에게 대놓고 저딴 식으로 말하는 걸 보면, 어쩌면 고의로 골탕 먹이는 걸지도 모른다.
저 정도면, 이미 서로간에 큰 불화나 이익 관계에서의 마찰이 있던 게 아닌가 싶다.
그래도 사람 목숨이 달린 일인데 너무하지 않은가.
세인은 블랙 라이어드 상단 깃발과 세리스의 얼굴을 번갈아 보았다.
그리고 그녀에게 물었다.
“수중에 돈이 얼마나 있습니까?”
“예?”
“말 살 돈은 됩니까?”
“예 그 정도는 되지만….”
세인은 품에서 가죽 주머니를 꺼내 그녀에게 던져 주었다.
그 묵직한 물건을 받아든 그녀가 얼굴을 굳힌다.
그리고 물었다.
“이걸 왜…? 설마?”
“전에 제 이야기도 들었고, 골디온을 죽인 걸 알면서도 동행하고 있잖아요. 그건 저와 적대하지 않는다는 뜻이죠? 그리고 이건 어차피 에메랄드 반지 대신입니다.”
눈을 깜박이는 그녀 앞에서 세인은 말을 끝맺었다.
“당신이 해야 할 계산은 간단해요. 저들이 구하려는 생명을 생각해서 에메랄드 반지를 줬을 거 같다면…. 이제 그걸로, 에메랄드를 대신하면 됩니다.”
고개를 끄덕인 세리스는 손가락을 입에 넣고 휘파람을 길게 불었다.
그러자 성기사들이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본다.
그녀는 자신의 옷과 팔에 박힌 문장부터 보여주었다.
같은 성기사라는 것을 알린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어떤 반응을 하기도 전에 주머니를 휙 하고 던졌다.
성기사 중 한 명이 얼떨결에 그것을 받고 열어보았다.
그리고 망치로 머리를 한 대 맞은 표정이 되었다.
그 안에는 무려 다이아몬드가 들어 있었으니 말이다.
“이…이걸, 대체 왜?”
중얼거리는 그에게 동료들이 몰려들었다.
그리고 앞다투어 주머니 안의 물건을 보려 했다.
세리스는 자신을 보던 성기사의 질문에 대한 답으로, 이번에도 자신의 팔을 가리켜 보았다.
그리고 몸을 돌렸다.
괜히 옆에 있는 세인에게까지 시선이 쏟아지면 곤란하니까.
그런데 주머니 안의 물건을 본 노기사가 발걸음을 재촉하던 그들을 따라잡았다.
그리고 말을 걸었다.
“이보시오.”
“….”
“이보시오. 아무리 그래도 저건 너무 감당하기 어려운 물건이오.”
세리스는 답답했는지 돌아서며 그에게 말했다.
“누군지는 모르지만 살려야죠. 그렇지 않나요? 목숨보다 비싸고 중요한건 없어요.”
그때 노기사의 눈은 세인을 향해 있었다.
그는 덜컥 몸을 정지시켰다.
혹시 세인의 정체를 눈치챈 걸까?
다급해진 세리스에게 시선을 다시 돌린 노기사가 무거운 음성으로 말했다.
“다이아몬드는 그 자체만으로도 높은 가치를 가진 물건이오. 게다가 당신이 이걸 선뜻 건네준 의도는, 거기에 더 큰 가치를 얹어준 것이오. 모르는 사람을 위해 보석을 포기했으니까. 내 이름은 콜드 베인. 결코, 이 은혜를 잊지 않겠소. 저 사람에게도 내 말을 꼭 전해 주시오.”
“알겠습니다.”
둘을 향해 깊이 허리를 숙여 보인 성기사는 일행들이 몰려있는 자리로 돌아갔다.
그리고 그들에게서 주머니를 받아들더니 젊은 상인에게 던졌다.
“이제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을 내놔라. 이 더러운 장사치야.”
그러자 놀랍게도 상인의 태도가 싹 변했다.
물론 주머니 안의 물건이 뭔지 열어본 직후였다.
다이아몬드라는 물건은 그만한 마력을 가진 보석이었다.
“거스름돈은 얼마나….”
콜드 베인은 그와 더 말을 섞기도 싫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거기에 부여된 가치는 돈으로 매길 수 없는 것이다. 너는 억만금을 줘도 거슬러줄 수 없어. 그러니 잔말 말고, 그걸 받고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을 내놔라.”
“….”
* * *
세인은 왜 이리 황급히 중부로 가려는 것일까?
골디온을 해치우는 일은 처음부터 굉장히 난항을 겪을 것으로 예상했다.
온갖 변수가 발생할 수 있는 여행이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세리스가 도와줘도 발각될 가능성은 언제나 있었다.
그리고 골디온이 수비를 굳건히 하거나 출타 중일 수도 있었다.
그런데 결과적으로는 정말 빠르고 쉽게 목표를 달성한 셈이다.
그 대가로 결국 완전한 마검의 힘을 사용해 버린 것이 문제지만 말이다.
그는 자신이 저지른 짓에 진저리 치고 절망하기에 앞서, 하나의 생각을 떠올렸다.
‘어차피 뽑은 검날이다. 그렇다면 중앙으로 향하자.’
지금 중부에 있는 괴물들의 진영 근처에는 인간들이 없었다.
그게 뭘 의미하는가?
골디온 살해가 이렇게 쉽게 이루어졌고, 검은 이미 뽑혔으니 그가 홀로 가서 거기를 친다면?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 생겨서 내가 실패하더라도…. 결국, 나 하나만 죽으면 끝난다.’
돌아가는 추이를 관망만 하기엔….
원래 계획대로 세계수 지역의 아군이 대륙으로 진입할 때, 공격받을 가능성도 배제 못 한다.
그들의 외모 때문에 말이다.
그러니 지금 그가 한 생각은 아주 틀렸다고 보기도 모호했다.
그런데 이런 생각을 그만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괴물들도 생각이란 걸 한다.
일단 뇌가 있으니까.
중앙에 건설된 괴물들의 진지 내에는, 엄청난 숫자의 병력이 모여서 무기를 만들고 있었다.
그들은 미래로 갈 생각에 가슴이 부풀었다.
드디어 세계수를 떠나왔다, 그리고 이 세계를 떠나 자유로워진다.
다시 돌아왔을 땐, 속박에서 벗어난 그들은 강해져 있을 것이다.
게다가 드래곤을 남겨두고 가니 뒤도 든든했다.
그는 분명히 훌륭하게 인간들을 이간질하고 최대한 약화할 것이다.
적을 약하게 만들고, 아군을 강하게 만든다.
그건 필승의 길이었다.
계획은 계속 순항 중이었고 말이다.
그런데 어느날 이변이 일어났다.
그것을 알아차린 것은 얼마 전이었다.
드래곤과의 연락이 끊긴 것이다.
괴물 왕 중 하나인 대머리 노인은 심각한 얼굴로 탁자를 두드리고 있었다.
그는 현재 자신의 심처에서 고뇌에 빠져 있는 중이다.
그의 피부는 녹색이었고 눈은 하얗다.
그리고 귀가 아주 크고, 귀밑으로 작은 뿔들이 박혀 있었다.
그 뿔에 부딪히는 것은 큰 원형 귀고리다.
따닥.
따다닥.
이것은 그의 긴 주황색 손톱이 매끈한 탁자를 두들기는 소리였다.
맹렬하게 머리를 굴리던 그는 한숨을 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어둡고 흔들리는 복도를 걸었다.
그 복도는 거대한 애벌레의 내부였다.
그 애벌레는 회의실로 연결되어 있었는데, 회의실 문을 열자 대머리 노인 외에도 갖가지 모습을 하고 앉아 있는 존재들이 보인다.
그들 하나하나가 각 종족을 대표하는 강력한 왕이었다.
대머리 노인의 얼굴처럼 그들의 표정도 아주 굳어져 있는 상태다.
“드래곤이 죽었소.”
대머리 노인의 말에 좌중은 탄식을 내뱉었다.
“수정구로 확인한 건가요?”
“틀림없소.”
고블린 왕의 말에 대머리 노인이 대답하자, 웅성거리는 소리가 회의실을 가득 채웠다.
그들은 존댓말로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고, 반말을 하기도 했으며 경어체를 쓰기도 했다.
왕이라고 해서 완전히 수평관계는 아니었다는 뜻이다.
대머리 노인은 참을성 있게 그들이 진정되길 기다렸다.
나머지 왕들은 충분히 떠든 후 대머리 노인의 입만 바라보았다.
그걸로 보아 대머리 노인의 발언은 큰 영향력을 가진 것만 같다.
“이제 잘 들어보시오. 그의 빈 자리도 문제지만, 더 큰 문제는 누가 과연 그를 죽였나 하는 거요. 감시자들의 보고로는 각 나라에서 어떤 움직임도 없었어요. 아무도 그를 의심하지 않은 상태였고. 군도 움직인 적이 없고. 성국도 조용하단 말이오. 그런데 하루아침에 그가 죽은 거요.”
“빌어먹을! 자꾸 빙빙 돌리지 말고 말해보시오. 당신의 판단을!”
“라이트닝 블러드요.”
“으으….”
그렇게 시작된 왕들의 탄식은 멈춰질 기미가 안 보였다.
누군가는 너무 비약이 아니냐고 투덜댔지만, 노인은 일축해 버렸다.
“드래곤이 죽었소, 드래곤이! 엘릭서와 결합한 라이트닝 블러드라면 가능한 일이오. 그 정도의 압도적인 힘. 그리고 은밀함. 그것 말고 대체 뭐가 우리의 뒤통수를 치겠소? 죽음이 휩쓸고 지나간 듯 검게 죽은 대지가 뭘 말해주는 것이겠소?”
“우리의 계획을 눈치챘을까?”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절대적인 힘이 우리 목전으로 다가오고 있다는 게 큰 문제요. 계획도 살아 있을 때 진행하는 거니까.”
회의장이 다시 소란스러워진 건 당연한 일이다.
많은 왕이 조금 전까지만 해도 엘릭서를 부정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제 와서 엘릭서라니.
“증거도 없잖아! 엘릭서가 나타났다는 증거.”
“드래곤이 죽고 그 주변이 초토화되었소.”
노인은 지나친 억측 아니냐는 말에, 앵무새처럼 그 대답만 했다.
그리고 덧붙였다.
“최악이라는 가정하에 이제 말해 봅시다. 그는 왜 이 시점에서 정체를 드러냈을까? 그리고 뭘 노리는 것일까? 우린 뭘 해야 할까?”
마주치면 죽을 수밖에 없는 절대적인 힘 앞에서 어떻게 해야 하지?
왕들은 장고에 들어갔다.
그러면서 의견을 교환했다.
어쨌든 이 진지에는 정말 강력한 군대가 있었다.
군단장급만 해도 사방에 넘쳐난다.
문제는 그들이 직면해야 할 힘이, 신화 급의 힘이라는 것이었다.
상식의 선에서 이루어지는 일이 아니란 소리다.
“미래로 가는 건? 얼마나 앞당길 수 있지?”
“앞으로 아무리 빨라도 일 년.”
“일년….”
“정말로 많은 것을 버리고 간다는 가정하에 일 년이오. 물론 계획도 착착 진행되어야 하겠지. 각성자들이 순조롭게 조달된다는 가정하에….”
이미 수많은 인간의 피는 바쳤다.
하지만 보통 인간의 피와 각성자들의 피는 값이 달랐다.
인간들의 피가 넓이를 넓히는 것이라면, 각성자들의 피는 깊이와 관계가 있는 식이었다.
이런 의식에서는 가치 높은 생물의 피일수록 더 비싸게 치는 식이다.
“요즘 다크 엘프들의 낌새가 수상해. 너무 늦어지고 있다고.”
누군가가 투덜거릴 때 노인은 두 손으로 탁자를 짚었다.
그리고 양 손가락으로 탁자를 두들기며 말했다.
“내가 그라면 전력으로 이곳을 향해 오고 있을 거요. 검날을 뽑았다는 뜻은, 우리에게 칼을 겨누기로 결심했다는 뜻이요. 내가 아무리 바보라도 그가 여기까지 오는데 일 년이 채 안 걸린다는 건 장담할 수 있소.”
그는 이런 상황에서 농담까지 했다.
그때 한 왕이 손을 들었다.
그리고 무거운 음성으로 말을 했다.
“당신의 말이 다 맞다고 치고…. 이제 우리가 뭘 생각하고, 어떻게 대비해야 하죠?”
노인은 그의 앞에서 이렇게 말했다.
“크게 변하는 건 없소. 우린 우리가 뭘 원하는지 정확히 알고 있으니까. 하지만 처음의 계획대로 우리가 모든 걸 완벽히 다 가질 수는 없을 거요. 이점에 대해 다들 동의하시오?”
그러자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편을 죽였소. 드래곤이 바보도 아니고 회유를 안 해봤을 리가 없지. 하지만 실패하고 그가 죽었다는 건, 상대가 중립이 아니라는 소리요. 또 그의 입장에서 보면, 왜 우리 먼저가 아니고 드래곤에게 찾아갔을까? 보급선이 끊긴 일. 세계수 지역에서 일어난 드워프들의 반란은 과연 개별적인 일일까, 등등…. 상대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상대의 계획이 그려지고, 성향이 대충 나옵니다. 정보를 모으면 그림이 그려지오.”
“….”
“그렇다면 그림을 보고 선택을 해야죠. 이제 필요한 건 전체적인 그림을 본 감상이 아니라 선택이요.”
무엇을 선택하고 무엇을 포기할 것인가?
또 그런 선택을 위해 얼마나 단호하게 굴 수 있는가?
패닉에 빠져 손을 놓고 있다면 왕이 될 자격도 없었다.
괴물의 왕들은 눈을 빛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