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은 왕 마검의 주인-84화 (84/307)

# 84

& 누가 악마인가 (2)

검은 그림자를 사방에 가득 드리운 괴물의 목이 점점 길어지며 천장에 부딪혔다.

이곳은 절대 작은 공간이 아니었는데, 삽시간에 괴물의 존재감으로 가득 찼다.

세인은 괴물의 머리를 보다가 더는 고개를 뒤로 꺾을 수 없었다.

괴물의 목은, 세인의 머리를 지나 반원을 그리며 땅 위로 내려왔다.

스륵, 스륵 스르륵.

천장을 타고 올라가 내려온 목이 구불구불하게 움츠러들었다.

그러고 한 번에 쭉 바깥쪽으로 뽑아내니, 일순간 폭발적으로 길어진다.

그리고 세인은 완전히 뒤를 잡혔다.

소년의 몸을 강탈했던 괴물의 머리에는 뿔이 달려 있었다.

그 뿔 마디마디는 초록색 금으로 나누어져 있었고, 노란 안광을 빛내며 옆으로 돋아난 비늘들이 보인다.

노란 빛은, 촘촘하게 뒤덮여 있는 비늘들을 보다 입체적으로 부각 시켰다.

드래곤은 검은색이었다.

그의 우람한 가슴 부분을 올려다보고 있는데, 드래곤이 날개를 펼쳤다.

그러자 싸아악 거리는 소리가 나면서 물이 덮쳐온다.

피막에 부딪힌 물의 분풀이인가.

날개가 펼쳐진 충격파로 인해, 물이 벽을 만들며 세인의 몸을 세차게 때렸다.

그는 몸을 옆으로 돌려 피해를 최소화 했다.

그런 그의 머리 위에서, 초록색 발톱을 앞세운 기둥이 아래로 떨어져 내린다.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뼈로 만든 섬이 박살 났다.

뽀얗게 일어나는 하얀 잿가루 같은 것들이 세인의 얼굴과 몸에 묻었고, 부서지는 섬 아래로 굴러떨어지는 그의 모습은 순간 석고상 같아 보였다.

앞발의 공격 외에도 그를 위협하는 물체가 있었다.

바로 그의 뒤에서 아가리를 벌리는 드래곤의 머리였다.

초록색의 빛은 드래곤 머리에 주름진 선을 물들였다.

명화에 나오는 끔찍한 악마.

보물상자의 탐욕스러운 주인.

금화를 이불처럼 깔고 자는 존재.

그리고 파충류들의 왕.

모든 의미가 그 하나의 모습에 담겨 있었다.

아가리에서 나온 초록색 불빛이 세인의 등을 덮었다.

세인은 재빨리 마검을 갑옷으로 만들고, 몸을 구부렸다.

검은 안개를 위에서 아래로 뒤집어쓰며 숙인 그의 손바닥이 바닥에 닿자마자, 드래곤은 브레스를 발사했다.

초록색의 섬광이 쏟아져 나오자, 기파에 휩쓸린 물들이 솟구쳐 오르다 못해 펑펑 터지며 증발했다.

뿌연 막이 겹겹이 일어나고 뜨겁게 달구어진 안개가 사방을 휘저었다.

그 열기에 바닥에서 눈을 감고 있던 시체들은 일제히 비명을 내질렀다.

하지만 그 비명은 끊임없이 일어나는 진동에 함몰되었다.

지하 전체가 아수라장이 되는 가운데 수증기를 가르며 초록색 불이 세인을 덮쳤다.

우르릉 우르릉거리며 지진이 일어났다.

턱까지 덜덜 흔들리는 것을 느끼며 세인은 거칠게 떨리는 몸을 가까스로 지탱했다.

그러나 그가 견딜 수 있다고 해도, 땅이 버티지 못했다.

지면이 뒤집히는 듯한 착각이 일어나며 그가 한 바퀴 돌았다.

그리고 몇 바퀴 더 돌더니 아래로 떨어져 내리기 시작한다.

밑에 빈 공간이 더 있었던 것이다.

세인과 함께 바닥을 이루던 인간들이 떨어져 내리는 가운데, 이글거리는 노란 안광이 위에서 아래로 선을 그었다.

어느새 날개를 접은 드래곤은, 그 육중한 몸을 아래로 던져 세인을 추적하고 있었다.

대체 얼마나 깊고 넓게 판 공간인 것일까?

떨어져 내리는 세인은, 옆에서 같이 떨어지고 있는 하얀 폭포를 보았다.

지하수인건가?

그렇다면 이 밑에는….

그가 수면 위로 곤두박질치자, 충격파가 일어나며 위로 긴 물줄기를 일으켰다.

그리고 드래곤이 허공에서 쏘아낸 브레스가 수면 위를 달렸다.

물들이 끓어 오르며 수많은 기포를 만들었고, 그 거품들은 세상이 무너지는 듯한 소리를 내며 서로 부딪혔다.

세인은 어두운 바닥에 몸을 맡기며, 위쪽 수면 위에서 하얗게 번지는 물방울들을 보았다.

그리고 그것들이 걷히며 초록색 불길이 수차례 수면 위를 덮는 것도 볼 수 있었다.

그다음은 직접 끝장을 내겠다는 것인지, 드래곤이 물속으로 뛰어든다.

물은 때아닌 횡액에 기겁하며 위아래와 좌우로 흩어졌다.

물속에서 위풍당당하게 헤엄치는 드래곤은 세인을 찾으려 이리저리 움직인다.

그의 접힌 날개가 뒤에서 망토처럼 움직이는데, 아래에서 올려다보자면 여러 갈래의 긴 지느러미처럼 보였다.

세인은 거대한 꼬리가 움직이는 방향으로 눈만 따라가며, 쥐 죽은 듯 잠자코 있었다.

거대한 형태가 멀어지고 난 뒤 멀리에서 분노에 찬 진동이 느껴졌다.

물속에서 포효를 지른 드래곤은 성질이 나는지 앞발로 사방을 긁어내렸다.

그러나 역시 잡히는 것은 없었다.

세인은 갑옷을 해제하고 다시 검을 쥐었다.

오버 더 데스를 아예 꺼내지 않았다면 모를까, 꺼냈다면 답은 나온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마검의 힘이 아니면 저놈을 죽이지 못해. 하지만 한계 없이 휘둘러지는 힘은 피아를 가리지 못하지.’

그렇다고 검을 휘두르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

그때 어둠 속에서 뭔가가 쑤욱하고 머리를 들이밀었다.

‘발견했다.’

드래곤이 눈을 빛내며 세인이 있는 쪽으로 헤엄쳐 오고 있었다.

그리고 입을 벌리는데, 그 안에는 초록 불빛이 가득했다.

세인은 검으로 상대를 겨누었다.

하지만 아직 어떤 행동을 한 것은 아니다.

드디어, 초록색의 물결이 드래곤의 입에서 토해져 나왔다.

저것은 물속에서도 뜨거울까?

아니면 더 소름 끼치도록 차가울까?

죽음의 운무처럼 퍼지던 섬광은 층층이 드래곤과 세인 사이를 채웠다.

그 빛의 파도가 세인의 얼굴을 초록색으로 물들였고, 그의 모든 것을 집어삼키려는 찰나, 오버 더 데스가 진정한 힘을 발휘했다.

초록색의 파동을 압도하는 검은 파동이 일어났다.

그리고 그건 초록색 빛은 물론이고 드래곤까지 삼켜 버렸다.

그리고 포식의 순간 잠시나마 시간이 멈춘다.

*  *  *

그때 세리스는 먼 곳에서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그녀가 특별해서라기보다는 성 근방의 모든 사람이 느끼는 것이다.

하늘은 여전히 검었지만, 아주 불길하게 보였고 낙뢰는 이제 미친 듯이 성을 때리고 있었다.

검을 잡고 성으로 향하려던 그녀는 흠칫하며 하늘로 시선을 던졌다.

먹구름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그리고 중앙에서 아무런 예고 없이 나타난 굵은 줄기의 번개가 수직으로 내리꽂혔다.

곧 일어날 굉음을 막으려 손으로 귀를 가리는데, 땅이 걷잡을 수 없이 흔들렸다.

*  *  *

이제 드래곤의 거대한 몸체는 보이지 않는 손에 사로잡힌 것 같았다.

차가운 물 속에는 이미 검은 기운만이 가득한 가운데, 검은 손들이 아우성치며 드래곤을 위로 끌어 올렸다.

그리고 물이 연속으로 폭발하며 위로 솟구쳤다.

넓은 공간이 곧 무너질 듯 흔들리고, 보이지 않는 망자들이 비명을 질렀다.

그들의 날카로운 소리는 곧 흐느낌으로 변했다.

고오오오-.

발광하듯 할퀴는 힘이 아래에서부터 천천히 모든 걸 부셔나갔다.

물이 증발하고 벽이 무너졌다.

돌무더기와 안개들이 뒤섞이며, 무서운 압력으로 드래곤을 위로 밀어냈다.

드래곤은 어떻게든 저항하려는 듯 허우적거렸지만, 그건 그를 더욱 비참하게 만들 뿐이다.

검은 손톱들이 드래곤의 비늘을 갉아먹으려는 듯이 그어댔다.

그 소음은 마치 수만 마리의 벌떼들이 일순간 동시에 달라붙은 것만 같았다.

한계를 가늠할 수 없던 검은 힘은 뼈로 만든 섬이 있던 곳까지 드래곤을 밀어 올렸다.

그다음에는 지상으로 질주한다.

벽에 붙어 있던 얼굴들이 터져 나가며 피들이 아래로 흐르다가 역류했다.

핏방울들이 벽을 타고 데굴데굴 구르다가, 균열이 일어난 벽 사이에서 소리 없는 비명으로 증발했다.

열기가 벽 멱을 훑었고, 다음은 빛을 머금은 한기가 벽에 균열의 줄기를 일으켰다.

그리고 밑에서부터 하나씩 하나씩 모든 것이 사라져 간다.

이제 여기는 한때 드래곤의 은신처였던 곳이 아닌 절망의 우물 자체였다.

죽음은 그들에게 퇴거 명령을 내렸고, 마음의 준비를 할 시간마저 주지 않은 채 밀어붙이고 있었다.

헤아릴 수 없는 수의 원혼들이 죽음에게 잡아 먹혔다.

그렇게 먹어치우고도 만족을 모르던 아우성은 위로 달려나갔다.

지진이 일어나고 성이 부서지기 시작할 때, 지면에 앞발을 박아 넣은 드래곤은 안간힘을 쓰면서 버텼다.

완전히 밖으로 밀려나지 않으려고 말이다.

하반신이 지하에 박혀 있는 드래곤은 울부짖으면서 입으로 불길을 쏘아낸다.

그렇게 날아간 초록색 구체들이 성벽에 하나둘씩 명중할 때마다, 돌들이 터져나갔다.

성이 무너지는 속도는 더욱 가속화되었다.

검게 일어난 힘은 먹구름과 호응하며, 땅을 붙잡고 끊임없이 뒤흔들었다.

더는 버틸 수 없음인가.

결국, 저항을 포기한 드래곤은 몸과 함께 머리를 땅에 처박았다가. 턱을 지렛대 삼아 느릿하게 지면을 밀었다.

그에 따라 위로 일어난 드래곤의 머리가 어느새 그의 앞에 선 세인을 본다.

기진맥진한 패자 앞에서 세인은 마검을 높이 들어 올렸다.

처형식을 치르려는 듯이 말이다.

드래곤의 눈에서 토해지는 분노의 빛이 세인의 옷에 초록색 물결을 만들었다.

그 물결은 세인의 몸을 타고 올라가 얼굴까지 초록색으로 물들였는데, 세인의 붉은 눈동자가 그 빛을 찢었다.

동시에 오버 더 데스도 위에서 아래로 움직였다.

검고 예리한 힘이 수직으로 움직이자 드래곤의 머리와 몸체에 선이 생겨났다.

그리고 선을 중심으로 양쪽이 조금씩 엇갈리더니 옆으로 벌어진다.

그 사이에서 뿜어져 나오는 피가 위로 솟구치며 시끄럽게 고막을 울렸다.

드래곤의 피는 오버 더 데스에 오염된 검은 색이었다.

그 검은 힘은 자제를 모르고 사방을 잡고 뒤흔들었다.

결국, 절대적인 힘 앞에서는 드래곤조차 철저한 약자일 뿐이다.

완전한 힘을 드러낸 오버 더 데스는 드래곤을 일도양단하는 것에서 멈추지 않았다.

드래곤의 마지막까지 녹이려는 듯 앞을 휩쓸다가 하늘을 뒤덮었고, 저주처럼 다시 아래로 쏟아져 내렸다.

그리고 마침내 성 주위의 건물들까지 검게 불태웠다.

악마의 재앙처럼 내려와 상대를 가리지 않으며 소멸을 안겨주었고, 멀리까지 달려나가 보이는 족족 생명을 먹어치웠다.

아무것도 모르고 집 안으로 들어가 있던 사람들은 쓰러지거나 탁자에 고개를 처박으며 유명을 달리해야만 했다.

그 검은 힘은 파도처럼 지면을 타고 살아있는 모든 것을 유린했으며, 거기에서 무사할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라이트닝 블러드인 세리스 뿐이었다.

엘릭서는 그녀의 목숨에 침입하지 않음으로써, 또 다른 엘릭서.

자신과 동등한 존재를 존중한 것이다.

그다음, 더 넓은 주위는 어떻게 되었을까?

검은 폭풍이 벽을 만들며 밀려오자 산 자들은 그 앞에서 속수무책이었다.

숨을 곳을 찾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거다.

가축들의 사체와 사람들이 시체가 들판을 뒤엎었고, 담장과 성벽을 타고 넘은 죽음이 계속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그 앞에서 수많은 생명이 자신을 잃었다.

나무는 시들고 개들은 옆으로 쓰러졌으며, 물도 원래의 색깔을 잃고 죽어버렸다.

물고기들은 물 위로 둥둥 떠 올라 아래로 내려가다 폭포 밑으로 처박혔다.

검은 바람이 불어오자.

생명을 잃은 벌레들의 사체가 땅 위에서 먼지처럼 이리저리 움직인다.

골디온이 사는 지역에서 아주 멀리 떨어진 사람들은 겨우 무사할 수 있었다.

그들은 눈앞에 일어난 신의 저주를 보며 경악했고, 무릎을 꿇고 기도를 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 떼죽음 앞에서 제정신을 유지할 수가 없었다.

원하는 만큼 실컷 포식한 검은 연기는 마지막에 흡족한 움직임으로 바람에 몸을 맡겼다.

위로 솟아올라 흩어지는 알갱이 사이로 보인 생명의 불티.

그것마저 스러질 때 모든 것이 덧없었다.

그렇게 무구한 죽음이 산과 들판을 점령했을 때, 드래곤은 마지막으로 검은 연기에 휩싸여 모든 것을 내주고 있었다.

악마 같은 짓.

세상에서 가장 악마 같은 짓을 한 세인은 최후의 기력을 쥐어짜내듯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비틀거리며 천천히 드래곤에게 다가갔다.

상대가 재가 되어 통째로 사라지기 전에, 그는 드래곤의 사체에서 뭔가를 뽑아낸다.

앞이 잘 보이지 않는 듯 한참을 더듬거려 찾아낸 물건은 웅웅거리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딱딱한 보석 같은 것이다.

용의 심장 부근에 있던 그것은 세인의 주먹보다 크지 않았다.

‘살해자, 악마, 강도.’

그 순간 죽은 드래곤의 속삭임이 세인의 귓가에 울려 퍼진 것만 같다.

착각일까?

검은 연기 앞 세인은, 자신이 한 짓에서 도망가지 않았다. 한참을 녹아내리는 용의 갈비뼈 안에서 홀로 서 있었다.

그러다가 결국 거친 숨을 몰아쉬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뼈들이 아래로 떨어지며 흘러나온 연기가 세인의 등을 타고 올라갔다.

그 흐름은 그의 뒷덜미를 핥으며 정수리에서 끝난다.

그가 주저앉은 등 뒤의 배경으로 보이는 것은 무너진 성.

바위가 무더기로 깔린 성벽과 구멍 난 벽 밖으로는 지옥도가 펼쳐진다.

검은색 하늘과 맞닿아 있는 벌판은 온통 잿빛이었다.

푸석푸석한 땅은 천천히 움직이는 세리스의 발을 제대로 견디지도 못했다.

검붉은 기운이 넘실거리는 불길한 하늘 아래, 그녀는 세인의 곁에 도달했다.

그리고 잘 떨어지지 않는 입술을 열었다.

“괜찮으세요?”

“당신은?”

“저는 무사해요. 대체 성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거예요?”

그때 세리스는 흠칫했다.

세인의 검은 눈동자는 유난히 불길한 기운과 함께 그녀의 상을 담고 있었다.

그의 표정조차 죽음 직후의 망자 같았다.

생기를 찾아볼 수 없다.

“이 파탄을 내가 만든 것 외에는 아무것도.”

“뭐라고요?”

“내가 저지른 짓입니다.”

“….”

세리스는 처참하게 변해버린 주변 환경과 힘없이 주저앉아 있는 세인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다시 말했다.

“설마, 눈이 안 보이는 거예요?”

세인은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저지른 짓은 섬뜩하고 끔찍했다.

그리고 무자비했다.

악마 그 자체였다.

이런 환경을 보고 나면 누구라도 그에게 검을 찌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때마침 그는 힘이 바닥난 상태였고, 눈도 보이지 않았다.

세리스는 성기사였고, 지금 세인이 어떤 짓을 했는지 그의 입으로 자백받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세인은 등 뒤에서 세리스가 검을 뽑는 소리를 들었다.

목을 힘없이 늘어뜨린 채로 말이다.

그 하얀 검날은 천천히 이동했다.

아래로.

아래로.

푹.

세인의 옆에 검날이 박혔다.

손에 힘을 준 세리스는, 검을 지팡이 삼아 세인을 부축해 일으켰다.

땅에 박힌 검날은 둘의 무게를 지탱해 주었다.

비틀거리며 일어나는 세인 옆에서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머릿속이 복잡하겠지만 아무 말도 하지 말아요. 걸을 수 있겠어요? 일단 이곳을 벗어나야 할 것 같은데.”

둘의 뒤로 무저갱처럼 입을 벌린 곳에서는 위험한 기운이 연기처럼 솟아 나오고 있었다. 게다가 구멍 근처의 지반에 균열이 잔뜩이다.

“대답해 봐요. 걸을 수 있겠어요?”

“방금 아무 말도 하지 말라면서요?”

“….”

둘은 그렇게 서로를 의지하며 걷고 또 걸었다.

일단 성터에서 멀어지자 자리에 주저앉아 쉬었고, 다시 일어나 걷기를 반복했다.

그게 세 번 정도가 되자, 세인은 눈앞이 가물거리며 시력이 되돌아오는 것을 느꼈다.

완전한 실명이 아니라 일시적인 현상이었던 것이다.

그로부터 며칠이 지났지만 계속 죽은 대지가 나왔다.

이따금 하늘을 나는 새조차 땅에 떨어져 뒹굴었다.

그 사체를 뜯어먹을 곤충들은 이미 다 죽어 버린 지 오래다.

황폐한 공간은 계속되었다.

지독한 농담처럼 말이다.

세인은 자신이 저지른 죄악의 선상 위에서, 끝나지 않는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는 착각마저 느꼈다.

결국, 그들은 아주 한참이 지나서야 죽은 지대를 벗어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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