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3
& 누가 악마인가 (1)
소년은 팔을 들어 손등으로 얼굴을 닦았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면서 몸을 돌리는데, 코 밑이 온통 붉은색이었다.
세인은 소년의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여기처럼 깊은 지하에서 이 모든 짓을 벌이기엔 너무나도 평범하게 생긴 소년이었다.
그는 검지를 들어 자신의 눈가를 톡톡 두들겼다.
그러면서 입을 여는데, 목소리도 낮고 단조로운 게 지극히 평범했다.
흔하게 볼 수 있는 어느 농가의 자식 같았다.
“이거 신기하지 않아?”
소년의 눈 밑으로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세인은 그것과 밑에 쓰러져 있는 시체들을 번갈아 보았다.
“뭐가? 눈물이?”
“아니, 아니. 멍청아. 그게 아니고 우리들도 눈물은 흘려, 내가 말하는 건 눈물이 흐르는 현상을 이야기하는 거야.”
소년은 다시 등을 돌렸지만, 세인은 그를 공격하지 않았다.
그저 바닥에 쓰러져 있는 시체들을 내려다보았다.
나이든 남성과 여성.
그리고 소년의 형으로 보이는 남자가 쓰러져 있었다.
그들은 모두 알몸이었고, 얼마나 시달렸는지 상태가 끔찍해 보였다.
소년이 걸어 나가자, 그 앞의 뼈 무더기들이 솟아오르며 계단을 만들었다.
계단의 정점에는 하얀 왕좌가 놓여 있었다.
거기까지 올라가 돌아앉은 소년이 착석한 상태로 팔걸이에 팔을 올려놓았다.
그리고 세인을 내려다보았다.
흥미롭다는 듯이 위아래로 머리를 움직이면서 말이다.
“나는 이 소년의 몸 안에 들어갔어. 껍질을 뒤집어쓰고 뇌도 먹어 치웠지. 그리고 앞으로 어떻게 소년의 부모에게 고통을 줄까, 천천히 상상했던 거야. 즐기는 건 아니고 인간을 이해해보고 싶었거든.”
즐기려고 했던 게 아니라는 말은 거짓말 같았다.
그가 그런 말을 하며 자신의 입가를 혀로 핥을 때 짓는 그 표정은 만족 그 자체였다.
“그런데 여행을 떠났던 이 몸의 형이 돌아온 거야. 그때 부모들이 짓는 표정이란,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았어. 그 형은 내 앞에서 꿈을 이야기하더군. 그래서 내가 말이야. 그 절정의 순간에…. 오!”
소년은 다시 손가락으로 자신의 눈가를 가리켰다.
눈가에서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이것 봐. 신기하지? 뇌가 없는데 눈물을 흘리고 있다고. 내가 한 짓을 이야기하니 말이야. 이것 봐. 몸이 슬퍼하는 건가?”
소년의 몸을 뒤집어쓴 존재는, 그의 몸으로 온갖 끔찍한 짓을 해댔다.
그의 손가락과 몸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는, 이제 신만이 아실 것이다.
소년은 흥이 나는 듯 바이올린을 들어 올렸다.
그가 지금 지배하고 있는 소년의 형이 들고 있던 물건이었다.
인간의 몸 안에 들어간다면 정말 많은 일을 할 수 있을 것 같지만, 그것도 아니었다.
일단 소년의 몸으로 본신의 힘을 낸다는 것은 매우 어려웠다.
게다가 성국에 간다면 신성력 앞에서 바로 발각될 것이고, 큰 왕궁의 경비는 만만하지 않으니까.
소년은 신난다는 듯이 바이올린을 켰다.
하지만 솜씨가 형편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소년이 평소에 바이올린을 다루어 봤을 리가 만무하다.
세인은 오버 더 데스의 검 끝으로 소년을 겨누었다가 포기하곤 다시 내렸다.
눈앞의 존재는 보통의 격이 아니다.
즉사를 선고해도 그걸 받아들일 리가 만무했다.
그런 세인의 몸짓을 내려다본 소년은 연주를 멈추고 말했다.
“왜? 내 연주가 마음에 들지 않나?”
“….”
“어디서 왔지? 넌 누구야? 위에 있는 놈들은 내가 심혈을 기울여 제작한 거야. 그런데 다 해치우다니.”
“….”
“벙어리인가?”
“인간의 영주다.”
“인간의 영주로는 안 보이는데.”
소년의 노란 눈동자가 세인을 위아래로 훑었다.
마족인가?
마족은 고대의 생명체인데?
그리고… 저 검.
검을 유심히 바라보던 소년은 장탄식을 흘렸다.
동시에 그의 손에서 미끄러진 바이올린이 계단 아래로 나뒹군다.
그제야 상대가 누구인지 정확히 알아차리는 소년이었다.
“정말로 존재했군. 나도 긴가민가했거든. 고대 마왕 유고의 유산이 남아 있다면, 엘릭서도 가능하리라 생각은 했지만 정말로 존재할 줄은…. 일부 왕들의 말이 맞았다. 그런데 왜 그동안 발견하지 못했던 것일까? 그렇게나 눈들을 풀었었는데.”
세인이 앞으로 걸음을 옮기려 하자 소년이 손을 들어 가로막았다.
“엘릭서여. 우리 대화를 해보자. 어차피 네 목적은 파괴잖아? 그렇다면 우리와 손을 잡지 못할 이유는 무엇인가? 파괴를 원한다면 언제나 선봉에 세워주겠다. 쾌락도 부도 약속하지. 나와 함께 저 괴물들을 물리치자. 그게 바로 정의야. 지금 서로의 정의가 상충한다고 생각한다면, 차라리 약자의 편에 서라. 소수의 편에 서는 게 정의에 보다 가깝지 않겠나.”
“괴물?”
인간을 괴물이라고 말하는 소년에게 세인이 이를 드러내자, 소년은 희극처럼 두 손을 위로 들어 올렸다.
“가장 넓은 땅을 차지하고서 멋대로 주먹을 휘두르고 있지. 그들이 세운 왕들은 수많은 양들에게 권력을 받아서는, 땅의 이익만을 위해 쓴다고. 살아 있는 것의 권력을 받아 무생물인 땅에 베푸는 거야. 엘릭서, 듣고 있나? 아니라면 라이트닝 블러드. 너는 어떻게 생각하나?”
“너희들이 한 짓을 생각해. 그리고 여길 보라고.”
세인이 주위를 가리켰다.
“너희들도 학살을 자행하잖아. 나는 그래도 내 욕망에 따라 그런 짓을 해. 왜 이런 짓을 하냐면, 순수하게 하고 싶기 때문이야. 하지만 너희들은 협상 테이블에 앉아 대화라고 부르는 주고받기를 시작하지. 거기 어디에 감정이 있나?”
“….”
“단순한 계산만 있을 뿐이야. 그런 더하기 빼기 때문에 전쟁이 일어나고, 너희들은 서로 죽이고 죽여. 마을을 불태우던 인간에게 물어볼까? 정말 마을을 불태우고 싶었는지? 사적인 감정이 없는 그 의도가 사실 순수한 살해보다 훨씬 잔인한 거야. 욕망이라는 동기도 없이. 필요하니까 벌이는 일들은 아무런 의미도, 감정적인 납득도 없잖아.”
“인간은 침략자가 아니다.”
“이번 시대 하나를 보면 그렇겠지. 어둠의 몸을 해서는, 짧게 사는 짐승처럼 이야기하는구나. 너는 인간의 편에 섰기 때문에 오늘 이렇게 내 행사에 어깃장을 놓는 거겠지? 그래서 그렇게 당당한가? 나무의 감옥에서 벗어나, 자유를 꿈꾸며 달린 소수의 약자에게 검을 들고 으스대는 그 꼴이 참으로 저열하구나.”
소년은 무릎 위에 두 손을 모으고, 턱을 치켜 올렸다.
마치 사형수가 다가올 결말을 알면서도, 목에 뒤집어 씌워질 올가미에 반항하듯이 말이다.
“지금 내 기분이 더러운 건 너희들이 악랄하고 잔인하기 때문이 아니야. 그건 이해할 수 있거든. 산다는 건 그런 거야. 능동적으로 살려면 뼈저린 분노에 몸을 맡길 수도 있고, 악이 될 수도 있겠지? 정말 화가 나는 건 너희들이 스스로 악인 줄 모른다는 거야. 무슨 정의라도 행사하는 양 우리들을 괴롭히고, 성토하기 바쁘지.”
두 팔을 과장되게 들어 올려 보이며 소년이 말했다.
“과연 누가 악인가? 누가 이 대륙을 가장 많이 차지했나? 누가 강자인가? 누가 누구의 눈치를 보지? 누가 우리들을 심판하고, 내키는 대로 형량을 정했냐고. 그전에 너희들에게 자격이 있나? 우리 죄를 물을 자격이 있냐는 말이다.”
“….”
“멋대로 남을 가두는데 찬동하고 꾸짖고, 집단으로 소수를 괴롭히며, 보면 죽일 듯이 달려들지. 그리고서는 잡는 족족 가죽을 벗기려고 혈안이 되며! 태연스레 약자의 가죽을 뒤집어쓰고 다니면서 정의를 부르짖는 얼굴을 봐라. 멀리 갈 것도 없이 네 얼굴을 보라고. 너희들은 태연히 우리의 물건을 빼앗고, 가죽을 벗기는 주제에 내가 살가죽 하나 뒤집어썼다고 그런 눈초리야?”
소년은 답답했다.
“제대로 된 역사도 모르며, 누구에게서 어떤 선물을 받았는지도 모르는 인간의 편에 선 자야. 우쭐대지 말아라. 너야말로 저능하고 편협한 악마의 종자다. 집단의 편에 서서 우리에게 선대의 죄를 묻고, 멍에를 씌우고 감히 신을 대신해 판결하는 오만한 놈아.”
“….”
“우리는 살기 위해 너희 집단을 끝없이 증오한다. 이제 우리에게는 그런 선택밖에 없다. 너희에게 정의를 부르짖을 권리는 없어. 너희는 악마니까. 비열하고 배은망덕한 생명체들이니까. 우리의 이마에 낙인을 찍기 전에, 너희들의 낯짝이나 거울에 비춰보란 말이다.”
소년은 왕좌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세인을 손가락질했다.
마치 그의 원죄를 고발하는 것처럼 거침이 없었다.
그의 손가락질을 받으며 세인은 검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그 상태로 걷기 시작했다.
소년은 뒤로 물러나지 않았다.
오히려 세인의 기세 앞에서도 비아냥대듯이 말했다.
애원조를 섞어서 말이다.
“오, 마검을 든 강자여. 내가 빌면 약자인 나를 용서해주고 놓아 줄 건가?”
“아니.”
단호한 대답에 소년이 웃었다.
“너는 내가 무슨 설득을 하든 빌든, 깨우치고 회개를 하든 나를 죽일 것이다. 나는 그것을 알고 있었어. 네가 그런 살해자인 줄 알면서도 말을 걸어본 거야. 하지만 너는 처음부터 하나밖에 생각하지 않았어. 그건 불변이었지. 자 그럼 여기서 누가 가장 꽉 막힌 후레자식이냐?”
세인은 마검을 뒤로 빼며 뒤에 누워있는 시체 중 하나를 가리켰다.
“네가 빼앗은 몸의 형은 음악가였다.”
“바이올린을 보면 멍청이라도 그걸 알 수 있을 거야.”
그의 비아냥에도 상관하지 않고, 세인은 말을 계속했다.
“그의 이름은 브레멘이다. 그는 그냥 음악가였고, 음악을 사랑했어. 그뿐이다.”
소년은 알아들을 수 없는 말 앞에서 대꾸를 하기보단 이를 드러내 보였다.
세인은 괴물들을 증오했다.
이미 그게 한도를 넘어서서, 선과 악을 구분 지을 수 조자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제는 괴물을 죽일 수만 있다면, 무엇도 중요치 않을 지경이다.
소년은 인간을 연구했지만, 그 원동력은 인간의 말살을 위한 욕구였다.
그도 세인이 괴물을 저주하고 죽이고 싶어 하는 것처럼, 정말 최선을 다해 인간을 죽이고 싶었다.
한숨을 내쉰 소년이 말했다.
그는 마검을 눈짓했다.
“왜 꽉 막힌 네 손에 그런 섭리가 쥐어졌는지 모르겠다. 너는 네가 정의롭다고 착각하는지 모르지만, 높게 쳐줘봐야 고작 한 종족의 편을 들 뿐이다. 앞뒤 가리지 않고 말이야. 막 감옥을 벗어난 죄인들에게, 이제 와 간수 짓을 하기엔. 중립성이라고는 하나도 없잖아.”
그러나 세인은 자신이 정의라고 말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편파적이라고 지적받는 상황에서도 자신의 의지를 관철할 뿐이다.
더 이상의 회유는 소용없다 판단했는지 소년의 몸이 양 갈래로 찢겨 나가고, 동시에 광풍이 양쪽에서 몰아쳤다.
“과거에 저지른 일로 인해 죗값을 받아야 한다면, 그 형벌의 기한은 누가 정하는 거냐? 신이 너희에게 위임해 줬나? 신을 본 적이나 있어? 무기한의 징역을 말할 권리는 너희에게 없어.”
그리고 무서운 괴물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점점 자라나 천장에 닿는 몸체.
그것을 바라보는 세인의 고개는 뒤로 꺾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