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은 왕 마검의 주인-82화 (82/307)

# 82

& 눈의 계절 (5)

세계를 정복한다는 것은 기존의 질서와 균형을 뒤집는다는 뜻이다.

당연히 바다를 뒤집는 것만큼이나 어려웠다.

그래서 악의 무리는 많은 고심을 했다.

세계수 근처에 틀어박혀서 말이다.

세상을 지배하는 힘의 균형은 단순했다.

인간의 우세였다.

괴물들이 가장 강했다면 이미 지옥이 되어 있을 것이었다.

괴물 성질에 세력도 우세한데 가만히 있을 리가 없잖은가.

세계가 평화로운 까닭은 오로지 단 하나, 괴물들이 인간들보다 강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결국 인간들을 공략해야 하는 것이었다.

그러면 인간은 어떤 조직인가?

어려울 것도 없었다.

인간들은 왕을 중심으로 뭉친다.

그렇다면 왕을 공략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오는데….

“왕이 선두에 나와서, 직접 죽어 주겠어? 그 말은 그냥 나라를 공략하자는 뜻이잖아. 결국, 원점이야.”

그래서 음모가 필요한 것이었다.

왕들을 죽이는 것은 불가능하니 다른 쪽으로 생각을 돌려 보았다.

거기에는 고대 마왕 유고의 존재가….

힌트가 되어 주었다.

세상을 통틀어 완전한 사령 지배를 보이는 자는 유고뿐이었다.

완벽히 압도적인 수의 시체들을 일으키고 혼들을 조종하는 자.

그의 유산이 악의 수중에 들어오는데 엄청난 시간이 걸렸다.

유고의 유산은 작은 보석 같은 것이었는데,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다양한 쓰임새를 보였다.

결국, 유고의 유산은 감당할 수 없어 세계수 지역에 버려지게 되지만….

그 전까지는 많은 괴물에게 영감을 주었던 것이다.

그 보석에게서 지배력을 확인한 한 존재는 계획을 짜보았다.

일단 그 작동원리를 본따 왕관을 만들었다.

물론, 그 관을 가지고 유고처럼 능수능란하게 사용할 수는 없었다.

괜히 유고가 최강의 마왕인 것은 아니니까.

그런 지배력을 보인다는 건 힘들다.

하지만 실험 끝에 결국 어느 정도는 따라 할 수 있었고,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위력적이었다.

“왕들의 머리. 뇌에 가장 가까이 닿는 물건이 바로 왕관이야. 그리고 일단 만들면 누가 그걸 쪼개서 안을 확인하겠나? 이걸로 왕들을 조종하자. 그들을 상잔하게 만들자고.”

처음 완성된 왕관을 본떠 다시 여러 개의 왕관을 만들었다.

그게 바로 현재 골디온이 쓰고 있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말하자면 그의 계획은 실패했다.

강대국들의 왕들을 조종할 수 있을 정도로 은밀하고 강력한 왕관이 탄생할 수 있었다면, 세상에 어려운 게 없을 것이다.

하지만 상상한 대로 흘러갈 만큼 만만한 세상이 아니었다.

일단 성국이, 강대국의 왕에게 왕관 씌어주는 의식을 거행한다는 것부터가 문제였다.

교황이 왕관에 깃든 악의 기운을 눈치 못 채겠는가?

그래서 작은 나라의 왕을 조종하자니 그건 또 의미가 없었다.

“넌 똑똑한 척은 혼자 다 하더니, 결국 시간 낭비만 했군. 왜 소국을 조종해? 그냥 우리가 짓밟으면 되는데? 강대국이 어려운 거지. 작은 나라 정도면 언제라도 짓밟을 수 있어.”

다들 실패라고 말했을 때.

끝까지 포기하지 않은 그는 여러 개의 황금 왕관을 이용했다.

그리고 영웅을 날조하여 나라를 흔들 계획을 세웠다.

“왕보다는 못하지만, 그래도 영웅이라면?”

그래서 골디온 같은 존재가 만들어진 것이다.

새가 그 왕관을 물고 가서 다른 사람에게 씌우면, 왕관의 지배를 받은 존재는 골디온이 되었다.

그 왕관에 심어놓은 생각을 공유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브리리 길드원인 바그너가 말한 불가사의한 이동도 납득이 간다.

무엇보다도 그의 연구와 계략은 인간에 대한 이해를 배경으로 했다.

“인간 집단은 맹목적인 우상 심리가 있어. 그걸 건드려 주면 돼. 그들의 영웅은 곧 우리의 스파이며. 우리의 메신저지. 왕에게 전달될 수 없다고? 그렇다면 발상의 전환을 해보자고. 거꾸로 우리가 한 인간으로 왕을 만들어 버리면 어떤가?”

혼돈의 시대에 일어나는 우상 심리.

그런 이해를 바탕으로 한 계략이었다.

몬스터들도 인간을 가능한 공략하기 위해 연구를 많이 한 것이다.

“시대만 잘 만나면. 혹은 잘 만들면….”

계획이 착착 진행된다면 암살 우려도 없었다.

누군가가 눈치채고 골디온을 암살한다 해도, 어차피 알맹이만 바꾸면 되니.

골디온은 불사나 마찬가지였다.

불사의 꼭두각시.

불사의 방패.

불사의 노리개.

그게 바로 골디온이었다.

아니, 골디온들이었다.

세인의 주위에서 두 개의 신형이 불쑥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은 세인 뒤의 골디온과 마찬가지로 금빛 왕관을 썼다.

셋에게 포위된 형국 속에서 세인은 갑옷을 해제했다.

그의 얼굴이 드러나고 하얀 피부 위로 빗방울이 쏟아졌다.

눈을 가늘게 뜨고 그것을 맞고 있는데, 세인의 뒤에 있던 골디온이 가면을 벗었다.

가면 뒤에 숨어 있는 얼굴은 바로 바그너였다.

왕관은 바그너를 난도질하고 몸을 취했다.

그래서 그의 머리는 거꾸로 박혀 있었다.

바그너가 입은 옷에 피가 배어 나왔다가 비에 씻겨 내려간다.

거꾸로 서 있는 바그너의 눈동자는 중력 때문인지 아래쪽을 향해 있었다.

바그너의 왕관이 그렇게 얼굴을 드러내자, 나머지 두 왕관도 가면 뒤의 얼굴을 보여 주었다.

멀리에서 이런 기묘한 상황을 보자면, 세인과 그들 셋은 그들만의 이상한 의식을 치르는 것처럼도 보였다.

하지만 점잖은 의식은 아니었을 것이다.

오히려 인간에 대한 조롱에 가까웠다.

세인은 앞의 두 명이 가면을 벗자 주먹을 쥐었다.

두 골디온은 바그너처럼 거꾸로 머리를 박아 넣지 않았다.

대신 얼굴에 존재하는 일곱 개의 구멍을 나무뿌리가 뒤덮고 있었다.

그것이 목까지 흘러내려 마치 수염처럼 보일 정도다.

그런 끔찍한 모습에도 불구하고 세인은 상대들을 알아볼 수 있었다.

한 명은 가이더의 국왕이었고, 한 명은 여기로 소환된 지 얼마 안 된 왕자다.

가면을 벗은 골디온 셋이 동시에 허리춤의 쌍검을 뽑아 들었다.

그리고 세인의 주위를 빙빙 돌기 시작했다.

움직이는 신발에 돌조각들이 밀려나는 가운데, 여섯 개의 검날이 일제히 춤을 추었다.

그 안에는 학대받은 망자들이 만든 원의 구심점인 세인이 있었다.

그는 정확한 상황은 몰랐지만, 어쨌든 누군가가 이런 말도 안 되는 짓을 저질렀다는 사실을 진작에 깨닫고 있었다.

그는 끝까지 자신의 정체를 숨기려는 음흉한 자이기도 하다.

천천히 움직이는 골디온들은 어느 순간 무서운 속도로 검을 내리쳤다.

그렇게 여섯 개의 날들이 세인의 몸에 닿으려 할 때, 마검 오버 더 데스가 검날을 드러냈다.

수직으로 솟아오른 매끄러운 칠흑의 검날은, 여섯 개의 살기 속에서 전혀 긴장감 없이 움직였다.

그리고 아주 살짝, 세인의 이마에 툭 하고 닿는 느낌이 들자, 세인의 주변에서 검은 연기가 바람처럼 불었다.

그 바람은 세 골디온의 공격을 아무것도 아니게 만들었다.

눈을 감고 마검을 제어하려 애를 쓰던 세인은, 천천히 검날을 이마에서 떼어냈다.

그러자 일순간 정지한 듯한 골디온들이 아주 미세하게 움직이기 시작한다.

세인과 골디온들을 삼킨 연기는, 다시 흩어지며 훨씬 옅은 안개가 되었다.

그리고 응축해서, 검은 반구를 만들었다가 흩어지기를 반복했다.

그 움직임에 따라 골디온들도 동작을 맞추려는 듯 속도를 조절했다.

느려진 시간 안에서 검날 여섯 개가 세인의 몸에 닿았을 때, 붉은빛이 골디온 사이를 가로지른다.

세인은 그 살기를 따라 몸을 빼어냈다.

그러면서 사각사각 소리를 낸 마검이 골디온들의 몸짓 사이를 가른다.

세인은 어설픈 몸짓으로나마 포위 속을 완전히 빠져나왔다.

그리고 터지는 엄청난 굉음.

“으아아악!”

뒤늦게 풀려난 공기가 여백을 채우려 사납게 으르렁거리는 소리를 냈고, 빗방울들은 사방으로 터져나갔다.

그리고 팔다리가 잘린 골디온들이 하나둘씩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경련을 일으키려 하는 몸을 가누려 무던히도 애를 썼다.

결국, 바그너가 비틀거리며 간신히 일어날 때 세인이 다시 움직였다.

순간 시간이 얼어붙으며 바그너를 붙잡았다.

그리고 마검은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고 허수아비를 베듯이 바그너의 목을 베고 지나간다.

다시 돌아온 마검이 옆으로 기울어지는 바그너의 왕관에 닿았을 때, 왕관은 비명을 지르며 부서졌다.

덜덜 떨리며 바그너의 몸이 검은 연기로 화해 흩어졌다.

너무나도 허무한 소멸이었다.

하지만 마검이 제대로 모습을 드러냈을 때부터, 그들의 허무한 결말은 예고되어 있었던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때 왕자와 왕이 서로의 몸을 겹치며 지지대 삼아 일어나려고 했다.

바그너에게서 검을 회수한 세인은 검 끝으로 그런 그들을 차례차례 겨누었다.

검이 무슨 마법봉도 아니고 도저히 닿을 거리는 아니었다.

하지만 세인은 그들을 겨누며 선고했다.

“죽어라.”

왕자의 입이 커다랗게 벌려졌다.

왕자의 입에 있던 나무뿌리들이 저항하려는 듯 꿈틀댔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뒤에서 검은 연기가 왕자의 얼굴을 잡고 뒤로 끌어당겼다.

얼굴 가죽이 뒤로 밀려나는 가운데, 연기는 온몸을 던져 왕자를 뒤집어씌웠다.

그리고 와르르.

먼지로 화해 왕자가 무너지는 소리다.

그 옆의 가이더 국왕이었던 자도 똑같은 순서를 밟고 있었다.

세인은 심적 부담이 큰 듯, 눈가를 경련하며 둘이 내려앉는 모습을 보았다.

검을 아래로 내리는 세인에게 이제 남은 것은 세 개의 검은 흔적뿐이다.

그리고 그것마저도 빗물이 먹어치우고 있었다.

- 마검 오버 더 데스는 주인보다 격이 낮은 자에게 즉사를 선고하는 권능을 가진다.

가볍게 생명을 박탈한 검.

위험할 정도로 검고 아름다운 검이 비스듬히 눕혀졌다.

빗물은 검신을 타고 흐르다가 끝에서 뚝뚝 떨어져 내렸다.

그는 꺼낸 검을 거둬들이지 않고 끝으로 땅을 찍었다.

그러자 지진이 일어나며 땅이 갈라졌다.

쩍 하고 벌어진 그 틈은 세인을 그대로 삼켰다.

완전히 검의 형상을 한 엘릭서를 들자, 세인의 가슴에서는 감정이 숨을 멈춘듯했다.

그래서 아득한 높이에서 아래로 곤두박질치고 있음에도, 그의 얼굴에는 작은 균열도 보이지 않았다.

그의 눈동자는 붉은빛을 띠었고, 그렇게 살기를 머금은 채로 아래쪽을 바라보았다.

갈라진 벽면에는 수많은 얼굴들이 스쳐 지나갔다.

지하의 주인이 불러내어 가두고, 고문한 영혼들이었다.

그들은 박제된 것처럼 벽에 음영을 새기고 있다.

가끔은 아래로 지나치게 쭉 늘린 얼굴도 보였다.

한결같이 고통스러운 표정이었고, 얼굴 표면은 입으로 뱉어낸 액체로 번들거렸다.

그런 무늬들이 숱하게 세인의 주변을 스쳐 지나갔다.

떨어져 내리는 속도 만큼이나 무서운 빠르기로 말이다.

언제까지 추락하려는 걸까?

갑자기 역한 냄새가 아래쪽에서 흘러나오자.

세인은 물구나무서기를 하듯 거꾸로 향하던 몸을 뒤집고, 발로 땅에 착지했다.

당연히 엄청난 충격파와 소리가 그의 주변을 휩쓸었다.

보통 때라면 즉사였을 것이다.

그러나 마검을 든 그의 육체는 모든 충격을 견디어 냈다.

바닥에 고여있던 물들이 세인의 머리카락 위로 솟구치는 가운데, 그는 잠시 낮췄던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검을 들고 어두운 공간을 걸었다.

처음에는 바닥이 울퉁불퉁하게만 느껴졌지, 정확히 어떻게 되어 있는지 몰랐다.

그런데 흙탕물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희석되었다.

세인이 원하자 마검은 검 끝에서 붉은빛을 아래로 방사했다.

그러자 붉게 물드는 바닥의 형태가 적나라하게 눈에 들어왔다.

수많은 벌거벗은 인간들이 한 치의 틈도 없이 밀착한 상태로 누워 있었다.

옆으로.

옆으로.

그리고 다시 옆으로.

아주 멀리 보이지 않는 구석까지 말이다.

그들은 한결같이 두 눈을 감고 있었는데, 그 상태로 보아 죽은 것인지 산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검을 들고 이리저리 느리게 휘두르자, 붉은빛이 어두운 공간을 가로질러 갔다.

그 자극에 반응한 걸까?

누군가가 세인에게 다가왔다.

그런데 상대는 모습을 드러내기도 전에 선고에 사라졌다.

“죽어라.”

그대로 쓰러지는 소리가 나더니 곧 잠잠해진다.

밀려와 세인의 무릎을 건드는 물결만이, 이제 사라진 그의 존재를 뒤늦게 증명했다.

세인은 앞으로 걸어 나가며 마주치는 모든 것들을 죽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냥 모든 게 증오스러웠다.

완전히 검으로 변한 오버 더 데스를 들고 있어서일까.

지금 주변을 감싼 어둠보다도 짙은 먹물이 마음속에서 무럭무럭 자라나고 있었다.

게다가 그런 짙은 감정은 지금의 그에게 아무런 거부감을 일으키지 않았다.

어쨌든 그는 이 방대한 공간의 끝에 도달할 수 있었다.

거기에서 그런 자신의 증오를 투사할 상대를 만났다.

기괴한 지하의 끝에는 해골들이 가뜩 쌓여 있었다.

어떤 구조물을 만들려는 의도를 가지고 쌓아 올린 것은 아니었지만, 어마어마하게 많았다.

투명한 물 위의 그 뼈들은 하나의 섬을 형성하고 있었다.

세인이 그 위에 올라서자, 뼈를 밟는 소리에 전방의 존재가 머리를 옆으로 살짝 기울였다.

그 존재는 소년이었다.

그것도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소년.

그 소년은 엉덩이 골을 완전히 드러낸 채 등을 보이고 있었다.

뭔가를 먹는 듯 쩝쩝 소리를 냈는데, 그러다가 옆구리를 북북 긁었다.

소년의 팔꿈치부터 손가락 끝까지는 아주 선명한 붉은 색이다.

그것은 하얀 소년의 피부와 대비되어 두드러져 보였다.

세인은 그에게 다가가며, 상대의 갈비뼈가 늘어났다가 줄어드는 것을 보았다.

숨 쉴 때마다 보이는 현상이다.

소년은 침입자가 등 뒤로 가까이 다가오는 것을 알고 있을 텐데도, 끝까지 고른 숨을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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