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은 왕 마검의 주인-81화 (81/307)

# 81

& 눈의 계절 (4)

병사는 단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성안은 기이한 침묵에 둘러싸여 있었다.

그런 침묵의 소용돌이와는 다른 방향으로 안개가 휘돌았다.

어쩌면 성은, 세인과 세리스가 육신의 영역을 벗어나 방문한 것을 알아차렸는지도 모른다.

아니 확실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 기이한 침묵이 설명될 수가 없었다.

세인은 계단을 밟고 올라갔다.

그러자 텅 빈 공터가 보였다.

세인의 옆에 있던 조각상이 눈을 굴리며, 입을 열었다.

“이상한 것이 왔군.”

그리고 벽에 양각된 조각들이 물결치듯 움직였다.

여러 개의 인물이 붙어있던 구도는 흐트러지고, 그들의 코와 입은 한데 합쳐져 그로테스크한 형상을 빚어냈다.

그들은 마치 유부의 부름을 받은 듯, 기괴한 소리를 냈다.

그리고 아래쪽으로 빨려 들어갔다.

지하에 있는 주인에게 세인의 출현을 고해바치러 간 것 같았다.

세인은 걸어 나가며 건틀렛을 확장했다.

그리고 검은 갑옷이 그의 어깨까지 뒤덮었다.

그를 가장 먼저 맞이한 것은 성문 옆에 웅크린 생명체였다.

정확히 말해 골디온이라는 존재가, 먼 곳의 원한을 이곳으로 소환한 것이다.

그리고 가뒀던 그것에 이상한 조직을 융합시켜 만든 작품이었다.

오베론.

그는 몸의 근육을 꿈틀대고 있었다.

이 당당했던 왕의 얼굴은, 이제는 사형수의 머리 같았다.

왜 하필 사형수에 비유했냐면, 그의 얼굴은 절망으로 잔뜩 일그러져 있었기 때문이다.

뿔이 돋아난 자신의 머리를 두 손으로 쥐어뜯고 있던 그는, 앞을 보고 있던 얼굴을 옆으로 돌려 세인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울 듯한 표정을 지었다.

세인은 그에게 물었다.

“무엇이 당신을 그토록 이나 절망케 합니까?”

오베론의 얼굴은 불길처럼 일어나는 정욕을 참으려는 성직자처럼 일그러졌다.

마치 그의 얼굴에 거미줄이 일어나는 것처럼, 고뇌가 모자이크 조각으로 주름졌다.

오베론의 백성들이 그의 이런 얼굴을 보았다면 얼마나 괴로워했을까?

“골 · 디 · 온!”

보라색 입술을 움직인 오베론은 드디어 자리에서 일어섰다.

성인 남자의 네 배만 한 체구는 휘청이며 세인을 향해 발을 내디딘다.

그의 손에는 어느새 거대한 망치가 들려져 있었다.

부웅 소리를 낸 망치가 세인이 있던 자리를 때렸다.

옆으로 물러난 세인의 머리카락에 차가운 금속이 닿았다.

그 금속은 땅을 때린 후, 큰 준비 동작을 거치지 않고 옆으로 휘둘러졌다.

세인은 손을 들어 검은 건틀렛으로 그것을 막았다.

스파크가 일어났고 그의 발이 옆으로 밀려났지만, 몸에는 이상이 없었다.

그러자 오베론은 괴성을 지르며 자신의 상체를 분리했다.

그리고 망치 자루를 타고 앞으로 달려왔다.

그의 상체 밑에는 지네의 다리 같은 것이 달려있었다.

세인은 박치기하는 오베론의 머리를 잡고 아래로 끌어당겼다.

아슬아슬하게 분리되었던 오베론의 상체가 뜯겨 나가며 파육음을 냈다.

땅에 처박히는 오베론의 상체가 퍼덕거리며 달아나려고 할 때, 세인은 천천히 발을 오베론의 머리 위에 올려놓았다.

그때 오베론의 눈과 세인의 눈이 마주쳤다.

오베론은 더는 백성들의 두려움과 존경을 한눈에 받는 군주가 아니었다.

그의 두 눈은 이제 야생동물 그 자체였다.

발바닥을 땅에 붙인 세인은, 오베론을 이렇게 만든 골디온에게 적의를 불태웠다.

오베론의 머리가 부서지며 바닥에 진득한 피가 고이자, 주인을 잃은 하체는 휘청이더니 천천히 대각선으로 쓰러졌다.

그 하체가 세인의 몸을 잠깐 가리기 전에는, 세인은 아직 평범한 모습이었다.

그리고 세인의 몸을 잠시 가리고 아래로 쓰러지자, 세인의 전신은 검은 갑옷으로 뒤덮여 있었다.

찰나와도 같은 순간이었다.

그의 투구는 붉은빛으로 이리저리 선을 그으며 주위를 살폈다.

정확히는 노란 깃발이 있는 곳을 찾는 것이다.

분명히 지하 감옥에서 본 남자가 그에게 말했다.

노란 깃발을 말이다.

육안으로 아주 멀리 있는 노란 기가 발견되자, 그는 그쪽으로 뛰어가기 시작했다.

스무 걸음 정도 뛰었을 때 옆의 건물이 무너졌다.

“끼이이잇!”

그리고 이상한 소리를 내며 난가의 왕이 옆에서 그를 덮쳤다.

난가의 왕은 몸통 밑에 긴 뱀의 꼬리를 매달고 있었다.

그는 머리가 양쪽으로 갈라져 있었으며, 뾰족한 이빨이 돋아난 그 사이로 세인의 몸뚱이를 물고 땅에 처박았다.

난가의 왕은 먼지를 일으키며, 세인을 앞쪽으로 계속 끌고 갔다.

그의 꼬리가 이리저리 흔들리며 먼지 속으로 사라진 지 얼마나 되었을까.

발소리가 들리고 세인이 천천히 먼지 속에서 걸어 나왔다.

그리고 떼어낸 괴물의 머리를 땅에 집어 던졌다.

데굴데굴 굴러가던 그 머리가 멈췄을 때, 세인은 성벽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밟았다.

성은 이제 고요했다.

아무도 그를 막아서지 않았다.

성벽 위에 올라온 그는, 멀리에서 바람에 흔들리는 기를 향해서 달리기 시작했다.

이 성에 돌아다니는 원혼들은 힘이 강력했다.

그리고 그 뒤에는 뭔가가 도사리고 있다고 본능이 경고하고 있었다.

골디온은 사악한 왕관이다.

그 왕관이 죽은 자 조차 지배하려는 탐욕의 왕관이라면, 평소 그 왕관을 쓰는 이도 분명 있을 것이다.

검고 하얀 뱀이 뒤엉킨 듯 소용돌이치는 하늘에서 빗방울들이 하나둘씩 떨어져 내렸다.

그런 흐린 하늘 아래 고요한 성벽이 서서히 움직이고 있었다.

그 움직임은 세인을 깃발에게 인도하려는 듯이 보였다.

그러나 세인의 앞에서 성벽이 터져나간다.

그리고 솟구치는 돌무더기 속에서, 기괴한 생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으으….”

피눈물을 흘리는 남자의 얼굴이 박힌 뱀.

여러 개의 팔을 가진 그 뱀은, 위에서 흔들거리더니 아래로 처박혔다.

이빨이 세인의 들어 올린 팔을 물었을 때, 뱀의 입안에서 녹색 액체가 쏟아져 나왔다.

그 액체는 뜨거운 김을 뿜으며 세인의 투구를 적시고 어깨 위로 철철 소리를 냈다.

뱀의 몸체에 박힌 천리안은 괴성을 질렀다.

촘촘한 비늘이 바싹 조여지며 그의 그런 얼굴을 더욱 옥죄인다.

그 움직임에 천리안이 느끼는 것은 고통인가 희열인가?

그가 혀가 없는 입을 벌리고 소리를 지르자, 뱀의 입안에서도 화답이 있었다.

세인은 뱀의 목구멍에서 기어 나오는 노파의 얼굴을 보았다.

혀 대신 뱀의 식도를 거슬러 오른 노파는 바로 눈이 뽑힌 크림힐트였다.

각성자의 피를 얻기 위해 납치당한 천리안은 엄청난 고문을 받았다.

그리고 몸이 더이상 피를 생산해 내지 못하는 격통에 도달했을 때, 그의 화폐 가치는 더욱 올라갔다.

온몸의 피가 다 뽑힌 그는 죽었으되, 영혼이 왕관에 붙들려 괴물과 하나가 되었다.

크림힐트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피를 뽑히는 천리안 옆에서 괴물들에게 온갖 짓을 다 당했던 것이다.

눈 없는 크림힐트의 얼굴이 투구에 바싹대어졌다.

녹색 액체로 얼굴을 적신 노파는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았다.

마치 갑옷 속의 알맹이를 탐색하려는 듯이 말이다.

그때 뱀의 머리 옆이 아가미처럼 갈라지며, 여러 개의 손이 쏟아져 나왔다.

그리고 세인의 몸을 잡아가는데, 그 하나하나가 강철도 찢어버릴 힘이었다.

그것도 모자라 더 힘을 보태려는 것인지 성벽 위를 점령한 뱀의 육중한 몸체가 이리저리 비틀린다.

어떻게든 앞으로 밀기 위해 용을 쓰는 것이다.

크림힐트가 웃고 천리안은 울부짖었다.

하얀 손들이 요동치며 세인을 붙잡을 때, 그는 오히려 갑옷을 거둬버렸다.

그리고 샤아악 하는 소리와 함께 뱀의 대가리 위에 검은 검날 같은 것이 솟아났다.

아주 잠깐이었지만, 그 순간 세상이 멈춘 착각이 들었다.

시간의 수레바퀴가 멈추고 대신 세인의 몸이 움직이고 있었다.

샤악.

샤아악 하는 소리가 나고 뱀의 머리가 절단되었다.

그리고 피 폭포가 쏟아져 내린다.

얼굴이 절단된 노파가 울부짖으면서 성벽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까?

철썩! 하는 소리와 함께 살이 으깨지는 소리가 들린다.

몸을 웅크린 세인은 그 소리를 똑똑히 들었다.

그리고 몸을 편 그는, 품에서 검날이 아닌 건틀렛을 꺼냈다.

아직이다.

놈이 도망가면 곤란하지.

“뭐지?”

그때 지하에서 흠칫 놀라는 생명체가 있었다.

그는 잠시 하던 행위를 멈추고 귀를 기울인다.

그리고 중얼거렸다.

“착각인가?”

우르르 소리를 내며 무너지는 성벽을 바라보던 세인은 다시 갑옷을 입고 옆으로 뛰었다.

더는 정면으로 진입할 수 없을 정도로, 앞이 무너진 벽돌로 가득했기 때문이다.

그가 지붕에 착지하자 건물이 무너져 내렸다.

이 층에 착지한 검은 기사는 일 층을 통해 걸어 나왔다.

그리고 박살이 난 뱀의 사체를 무심히 지나쳤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한 것인지 바닥이 울리고 망자들이 쏟아져 나왔다.

하나같이 울긋불긋한 관을 쓰고 있는 그들은 눈이 없었다.

입을 벌렸는데 혀도 안 보인다.

쥐들의 소행인 걸까?

토해내는 울음소리는 혀로 세공되지 못해 탁하고 원초적이었다.

그 울림이 한데 모여 어두운 하늘 아래를 뒤흔들었다.

그들은 가쁜 숨결과 함께 기어왔다.

사방에서 쏟아져 나와 한데 모이니, 두두두 하는 소리가 지면과 건물들을 뒤흔들었다.

인위적인 지진에 나무들이 몸살을 앓을 때 세인은 검은 해일에 뒤덮였다.

이리저리 사방에서 때리는 움직임 속에서 그는 손을 폈다가 쥐기를 해보았다.

엄청난 힘이 손에 흐르고 있었다.

이래서야 도저히 질 것 같은 느낌이 안 든다.

그의 등에서 검은 불길처럼 망토가 일어나며, 망자 몇을 쥐고 솟구쳤다.

기괴한 비명을 내며 위로 떠 오른 망자들을 그대로 놓으니, 아래로 떨어져 박살이 난다.

세인이 이리저리 움직일 때마다 칼날처럼 끝을 세운 망토가 움직이며 망자들을 베었다.

그들의 팔과 다리가 분수대의 물방울처럼 높게 떠오르더니, 지붕 위에 구르며 펄떡거렸다.

거침없는 움직임에 이리저리 밀려나는 검은 물체들을 건틀렛이 뭉갰다.

그런 학살을 좀 더 자세히 관찰하려는 듯, 성벽 표면이 물결치며 옆으로 움직인다.

여러 개의 눈이 생겨난 벽은 바쁘게 돌아가며 세인의 움직임을 쫓았다.

누가 앞을 가로막던 노란 깃발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하늘은 이제 검은 뱀이 완승을 거둔 듯, 새까맣고 기고만장한 울음소리로 가득하다.

그 찢어지는 소리가 날 때마다 낙뢰가 수직으로 선을 그었다.

저항에도 불구하고 세인이 가까이 다가오는 것을 알아차렸을까?

노란 깃발 아래에 번쩍이는 형체가 나타났다.

황금 왕관과 황금 가면을 쓴 골디온이었다.

그는 높은 건물의 지붕 위에서 서서히 다가오는 검은 기사를 내려다보며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땅이 요동치며 검은 망자들을 잔뜩 뱉어냈다.

이번에는 중무장한 놈들이었지만 세인이 귀찮다는 듯이 손을 휘젓자, 찢어져 바닥에 나뒹군다.

땅에서 흑마를 타고 솟구쳐 오른 해골은 거대한 창을 세워 들고 있었다.

솟아오르는 기세 그대로 세인의 등을 찍으려 했는데….

그것을 이루지 못한 까닭은 상대가 뒤를 바라보지도 않고 창끝을 잡았기 때문이다.

말이 몸부림치고 해골이 창을 아래로 찍어 누르려고 할 때, 창대가 부러졌다.

그리고 그제야 몸을 뒤로 돌린 세인의 손이 말의 옆구리를 후려쳤다.

퍼엉!

말의 주둥이에서 검은 피 화살이 쏟아져 나왔다.

그리고 반으로 접힌 말의 몸체가 땅 위에 구를 때, 세인은 해골의 몸을 잡고 머리를 뜯어냈다.

그리고 골디온 앞에서 시위하듯이 해골의 턱 뽑힌 머리를 집어 던졌다.

일직선으로 날아간 두개골은 골디온의 근처를 맞혔다.

우르르 소리를 내며 벽돌들이 아래로 떨어지자, 골디온은 옆에 도열한 가고일 석상에게 턱짓했다.

그러자 가고일들이 몸을 뒤틀었다.

아래로 돌조각들이 우수수 떨어질 때 가고일들은 홰를 치며 날아오른다.

그리고 아래의 검은 기사를 향해 부리를 겨누었다.

세인은 땅 위에서 날아오는 가고일들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았으므로 가고일의 부리가 그의 가슴에 부딪힌다.

비틀거린 세인은 그대로 양손을 내밀어 가고일의 목을 잡고 뽑았다.

그리고 미꾸라지처럼 요동치는 그 목을 들어, 옆의 가고일에게 후려쳤다.

돌조각들이 사방에 튀며 가고일들이 터져나갔다.

전법을 바꾸려고 마음먹었는지 가고일 한 마리가 뒤에서 세인의 어깨를 발톱으로 쥐었다.

그대로 하늘로 들어 올려 떨어트리려는 것이다.

그러나 세인의 몸은 땅에서 들리지도 않았다.

대신 망토가 솟구치며 아래에서 위로 가고일의 몸체를 관통했다.

세인은 퍼덕거리는 가고일을 손에 쥐고, 날개 죽지부터 뜯어내었다.

그 모습은 마치, 내려다보는 골디온에게 시위하는 것 같았다.

고작 이거냐?

낙뢰가 그렇게 만들었을까?

금빛 광채가 지붕 위에서 반원을 그렸다.

마치 등대처럼 검은 기사를 유혹하는 것만 같다.

사방을 세찬 빗소리만이 가득 채웠는데, 골디온과 검은 기사 사이에는 무형의 힘겨루기가 벌어지고 있는 것 같았다.

질식할 것 같은 간극은 점점 좁혀졌다.

결국, 골디온은 그를 막지 못했다.

골디온이 위에 있는 건물 안으로 들어간 세인은 계단을 밟지 않았다.

그는 거대한 원형 기둥에 주먹을 날린다.

퍽!

소리를 내며 돌조각들이 옆으로 튕겨 나갈 때, 그는 연타를 날렸다.

기둥 하나가 박살이 났지만, 건물은 아직 건재하다.

하지만 이게 시작이었다.

그가 걸어가며 어깨로 기둥을 박자 중간 부분이 함몰되었다.

그런 상태로 앞으로 밀자 기둥은 박살이 나며 천장을 뒤흔들었다.

이 층 바닥이 무너지는 가운데, 세인은 계속 기둥들을 부숴나간다.

노란 깃발을 달고 있는 건물은 아래로 폭삭 내려앉았다.

그것은 혼자 무너지지 않고, 주변의 성벽을 붙잡고 좀 버티다가 같이 함몰되었다.

엉망진창이 된 잔해 속에서 검은 기사는 비를 맞고 서 있었다.

그리고 드디어 그의 등 뒤에서 금빛의 골디온이 몸을 일으켰다.

황금 가면 속의 흰자위가 스스르 움직이며 옆으로 쏠렸다.

그의 등 뒤로 세인이 등을 보이며 서 있었다.

둘은 그렇게 서로 등을 마주한 채 상대를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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