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은 왕 마검의 주인-80화 (80/307)

# 80

& 눈의 계절 (3)

- 세상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는 물건은 무엇일까? -

*  *  *

그늘진 통로를 걸어 성안 쪽으로 들어서니, 역시나 축제 분위기였다.

어린아이들이 과일 바구니를 들고 마구 뛰어다녔고.

그중 몇 명이 골디온 복장을 한 연인 주위를 빙빙 돌았다.

그러자 여자 쪽이 치마를 잡고 깔깔거린다.

지나가는 광대들이 꽃잎을 뿌리고 나팔을 불었다.

시장은 이른 아침인데도 인산인해다.

오전이 이런데, 오후가 되면 어떻게 될지 상상이 안 간다.

골디온 복장을 하지 않은 사람도 눈에 띄었는데, 병사나 상점 주인들이 바로 그들이다.

“찾는데 좀 시간이 걸릴 겁니다. 다른 길드원과 연락을 해야 하거든요.”

그렇게 말한 바그너가 골목으로 사라지자, 세인과 세리스만 남았다.

어정쩡한 자세를 취하던 세리스가 세인에게 말을 건넨다.

“주변 구경이라도 할까요? 멍청하게 서 있는 것보다는 그게 나을 것 같아요.”

고개를 끄덕인 그는 앞으로 걸어 나갔다.

처음으로 눈에 띈 것은 성문 근처의 대장장이였다.

그는 뒤로 빗어 넘긴 하얀 머리를 가지고 있었다.

날카로운 눈매에 건장한 체구를 가진 노인이었는데, 금속 갑옷을 입은 상태로 망치를 두드리고 있었다.

검을 향해 몇 번 내리치던 그는 세인과 세리스를 바라보며 말했다.

“자식들을 그렇게 내몰지 말걸. 내가 나쁜 놈이야. 내가 죽일 놈이지.”

“….”

무슨뜻인지 몰라 어리둥절해 하고 있는데, 옆에서 낄낄거리는 소리가 났다.

고개를 돌려보니 그림을 파는 노인이 손짓하고 있었다.

“이봐, 저 영감은 미쳤어. 자식들이 전쟁터에서 죽었거든. 그 후로는… 알지? 저 상태라고.”

그러고 보니 대장장이 노인은 좀 지치고, 잘 먹지 못해서인지 창백해 보였다.

그에 비해 그림을 파는 노인은,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그들에게 벽에 걸린 것들을 소개했다.

“골라봐. 축제 기간이니까 싸게 해줄게. 골라 보라고.”

헤헤하고 웃으며 소맷자락에 손을 넣던 노인은 아침 추위를 피하려는 듯 몸을 움츠리며 말했다.

하긴 이런 시각에, 저렇게 팔팔하게 광장을 돌아다니는 사람들이 너무 건강한 거다.

세리스는 흥미를 느끼고 벽에 걸린 그림들을 둘러보았다.

그런데 한결같이 괴기스러운 그림뿐이었다.

아무리 시대가 이렇다지만 화풍에 문제가 있어 보였다.

예를 들어 전쟁을 그린 그림에는, 땅에 엄청난 크기의 검은 얼굴이 그려져 있다던가.

풍경화인데 산 옆에 사람 얼굴이 달라붙어 있다던가.

녹색 빛을 뿜어내는 산 같은 그림뿐이다.

“좀 섬뜩하네요.”

세리스의 평에 노인은 머리를 긁적였다.

“요즘 화가들의 정신세계가 다 그래. 살벌한 세상이잖아.”

변명처럼 말하는 노인을 등지고 가게를 나왔다.

몇 걸음 걷다가 뒤를 돌아보니, 노인은 투덜거리면서 납 상자에 그림 몇 장을 넣고 있었다.

저기가 보관함인가 보다.

그리고 아까의 대장장이 노인 옆을 스쳐 지나가는데, 갑자기 그가 입을 열었다.

“이봐.”

“….”

“여기 지하에 누군가가 갇혀 있어.”

그 노인은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것 같았다.

그 말을 내뱉고는, 금방 다시 눈빛이 탁해졌다.

그러면서 네 개의 이름을 차례대로 부르는데, 자식들 이름인 것 같았다.

“아아 불쌍한 나의 타니스.”

그리고 인파를 가르며 말을 끄는 남자들이 나타났다.

그들은 피곤한 표정으로 말고삐를 잡은 채, 아까의 그림 가게로 발길을 향하고 있었다.

웃고 떠드는 소리가 가득한 가운데 세인은 앞으로 계속 나갔다.

그런데 세리스가 그런 그를 따라오지 않는다.

그 때문에 그들의 사이는 점점 멀어졌다.

이 넓은 광장에 그들 둘뿐이라면 모르겠지만, 인파가 가득 차 있었다.

그들이 내는 소리는 너무 시끄러웠다.

그래서 세리스는 청각을 통해 자신을 부르는 소리를 들은 것이 아니었다.

시각을 통해 자신의 할머니 얼굴을 보았다.

크림힐트.

그녀의 할머니가 멀리에서 자신에게 손을 흔들고 있었다.

“할머니? 왜 여기에?”

그녀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할머니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자꾸만 오라고 손짓하니까 일단 걸어는 갔다.

“할머니 여긴 어쩐 일이세요?”

“나라고 좋아서 왔겠냐? 여긴 너무 시끄럽구나. 좀 저쪽으로 가자.”

크림힐트는 서 있어서 허리가 아프다는 듯이 세리스의 손을 이끌고 담벼락 쪽으로 움직였다.

서늘한 그늘이 그녀의 얼굴을 가로지르자, 그제야 정신을 차리는 세리스였지만 둘러봐도 세인은 안 보였다.

그때 문득 할머니의 손이 아주 차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 생각을 다른 인물이 뒤덮어 버렸다.

“가리지 않은 얼굴은 처음 보지?”

크림힐트의 말에 세리스는 눈을 연신 깜박였다.

그러자 그걸 따라 크림힐트 옆에 선 중년 남자도 장난스럽게 눈을 깜박여 보였다.

그걸 보며 세리스는 기묘한 예감에 입을 열었다.

“혹시… 천리안?”

처음 보는 인자한 얼굴의 남자는 고개를 끄덕인다.

항상 천에 싸여있는 얼굴이 아니라, 이렇게 보니 잘생긴 얼굴이었다.

그보다. 왠지 낯이 익은데?

그런 생각을 하는 세리스에게 다가오는 남자다.

“한번 안아보자.”

“아 저기… 안 될 건 없지만. 왜 가렸던 천을 치우신 거예요?”

그러나 남자는 그런 질문에 대답해주지 않았다.

다만 세리스를 아주 꼭 껴안으며 속삭였다.

“미안하다… 세리스.”

그리고 손을 들어 올려 세리스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되게 어색한 순간이었지만, 세리스는 왜인지 반항 못 할 그 분위기에 눌려 가만히 있었다.

손은 그녀의 머리를 마치 아이처럼 쓰다듬고 또 쓰다듬었다.

그런 남자의 뒤에서, 크림힐트는 그저 멍하니 서 있다.

*  *  *

한편 세인은 걷다가 세리스가 사라진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몸을 돌리려는 찰나.

멀리 나무 위에 앉아 있는 까마귀가 보였다.

그놈의 번들거리는 눈알에 멈춰섰는데, 어떤 소년이 곁으로 다가와 그에게 말했다.

“고마워.”

“뭐?”

소년은 눈을 빛내며 세인에게 말했다.

“내 가족을 챙겨줘서. 그런데 부탁을 하나 해도 될까? 당신은 친절한 사람이잖아.”

“넌 누구야?”

그러나 소년은 자기 할 말만 한다.

“내 아버지가 지하에 갇혀 있거든. 14호야. 나 대신 좀 보고와 줘.”

“이봐.”

“14번째 방이야. 잘 지내나 보고 와줘. 난 아버지 얼굴 보는 게 미안해서 차마 가지 못하겠어. 난 내 잘못을 깨달았어. 이미 너무 늦어 버렸지만.”

그렇게 말한 소년은 꼭 들어 달라는 듯이 그의 손을 잡아 흔들었다.

그리고 손을 놓은 그는 사람들 사이로 사라져 버렸다.

저 소년은 누군가하고 생각에 빠져 있는데, 바그너가 급하게 다가왔다.

“동료분은요? 목표가 옥상에 있다는 것을 알아냈어요.”

“글쎄. 안 보이는데.”

“예? 여기에서 흩어지면 찾기도 힘들 텐데. 이렇게 사람이 많은데 큰일 났네. 어쨌든 옥상인데… 갑시다. 홀로 있어요. 지금, 이 기회를 놓치면 안 됩니다.”

바그너는 세인을 데리고 빠르게 길을 안내했다.

그런데 세인은 그런 그를 뒤따라 가면서도, 아까 소년의 말이 귓가에서 떠나지 않았다.

여운이 너무 무겁게 남아 그의 귀에 메아리치는 듯싶었다.

바그너는 그런 그의 소매를 잡아끌며 층계로 이동했다.

그 층계는 탑을 향해 연결되어 있었다.

세인은 그 탑을 잠시 올려다보았다.

바그너는 움직임을 멈췄다.

왜냐하면, 세인이 그의 손을 뿌리쳤기 때문이다.

바그너는 의아한 얼굴로 그런 세인에게 물었다.

“왜 그러세요?”

세인은 바로 답하지 않고 주위를 살폈다.

언제 날아왔는지 근처에 까마귀가 내려앉은 것이 보였다.

녀석의 눈은 아침 햇빛을 받아 번들거렸다.

그리고 그 옆을 보니 활짝 열린 문이 보인다.

“지금 가지 않으면 골디온이 어디로 갈지 몰라요.”

“나를 어떻게 찾았어?”

“예?”

“찾기 힘들다며? 아까 처음 위치에서 한참 이동했는데 어떻게 찾았냐고?”

“….”

바그너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처음의 의아함을 표시하는 그 얼굴 그대로 굳어져 있을 뿐이었다.

마치 밀랍인형처럼.

세인은 몸을 돌려 까마귀 옆의 문 쪽으로 갔다.

그리고 아래로 향하는 통로로 들어가기 전, 마지막으로 바그너의 얼굴을 바라본다.

그의 얼굴은 그대로였다.

시끄러운 군중 사이에서 홀로 그러고 있는 모습이 너무 부자연스러웠다.

아래로 내려가자 지하감옥 같은 풍경이 그를 반겼다.

통로에서 나는 냄새는 이제 악취에 가까웠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간수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는 돌로 만들어진 통로를 걸어가며 주위를 살폈다.

14호.

14번째 방.

그런데 14번째 방을 찾기도 전에 활짝 열린 방을 보았다.

걸어가던 그대로 지나치던 그는, 이상한 느낌에 다시 돌아왔다.

그리고 방 안에 있는 남자를 보았다.

창을 등진 남자.

바그너는 왜소한 몸을 의자 위에 올려놓고 있었다.

그는 순교자처럼 두 손을 사타구니 사이에 모은 상태였는데, 마치 보이지 않는 수갑에 구속된 듯도 보였다.

그는 새하얀 얼굴을 들어 올려 세인을 바라보았다.

뭔가 큰 충격을 받은 듯 눈물 자국이 가득한 바그너였다.

하지만 세인은 그가 진짜 바그너라는 것을 몰랐다.

둘은 정식으로 한 번도 마주친 적이 없으니까.

세인이 아는 유일한 바그너는, 아까 남겨두고 온 바그너이다.

진짜 바그너는 충격에서 헤어나오려고 애를 쓰며 입술로 말했다.

“그는?”

세인은 상대가 충격 때문에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다는 생각을 하지 못하고, 그냥 벙어리인 모양이라고 생각하며 입술을 소리 내어 읽었다.

“그는… 깃발…. 그는 노란 깃발 아래에 있다?”

그러자 바그너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다시 푹 숙였다.

그리고 파르르 떨었다.

세인은 14번째 방이 생각나자, 그런 바그너 앞으로 가는 것을 포기하고 떠났다.

홀로 남겨진 바그너는 몸을 더 격하게 떨었다.

그는 도끼에 난도질당해 죽었다.

14번째 방은 바그너의 방과 달리 단단한 자물쇠로 잠겨 있었다.

그것을 뜯어내려던 세인은 문득 그러면 안 된다는 예감이 강하게 들었다.

화살같이 내리꽂히는 그 예감에, 당황해하다가 창살 사이로 얼굴을 들이민다.

그러자 방안에 하얀 머리를 풀어헤치고 앉아 있는 노인이 보인다.

등지고 있었기 때문에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그대는 누구요?”

“당신 아들이 저를 보냈습니다.”

“….”

그러면서 소년의 인상착의와 대화 내용을 이야기해 주니, 노인의 머리가 끄덕이는 것이 보였다.

이제 뭘 해야 하나 생각을 하는 세인에게, 노인이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마지막에 좁은 곳에서 얼마나 무서웠을까?”

그리고 세인에게 말을 걸어왔다.

“수고했네. 나는 자네가 자랑스럽네.”

이상했다.

갑자기 가슴이 콱하고 막히는 느낌이 들었다.

뭐지 이건?

갑자기 밀어닥치는 감정에 혼란스러워하고 있는데 노인의 말은 계속되었다.

“모든 걸 책임지려 하지 말게. 책임지는 건 우리 몫이 아니야. 그건 신의 몫이지. 우린 아무것도 책임질 수 없고, 손가락질할 수도 없어. 자네는 충분히 노력했네. 귀족같이 굴었어.”

이상하게도 평소 가슴을 짓누르던 중압감이 조금이나마 사라졌다.

그리고 용서받은 기분이 들었다.

세인이 뒤로 약간 물러나는데, 그 노인이 더 이상한 소리를 해왔다.

“수수께끼를 하나 내지. 세상의 가장 높은 곳에 있는 물건이 뭔지 아는가?”

“예?”

물기가 서린 눈가를 닦는데 노인, 가이더의 국왕은 말을 계속했다.

“그건 사람들을 미치게 하지. 그리고 끌어들여 어떻게든 자신의 밑에 두려고 해. 우린 그게 영광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끔찍한 속박일 때가 많아.”

“….”

“그것과 일대일이 된 자는 세상에 많지 않지만, 그렇게 돼도 그걸 이기는 건 굉장히 힘들다네. 그것들은 사람들을 가두고 손아귀에 쥔 다음, 거느리는 거야. 자네도 그 비슷한 형벌을 당해봤을 거 아닌가? 차가운 돌의 성채에서.”

노인의 음성이 끝맺음을 보이자, 어디선가에서 날갯짓 소리가 들려왔다.

어깨에서 느껴지는 무게감에 옆을 바라보니, 검은 까마귀가 앉아 있었다.

그리고 그 까마귀는 이제야, 세인이 오래전에 어딘가로 갔을 때 했던 말의 대답을 해주었다.

“난 이목을 흐리는 미끼 따위가 아니야. 나는 버거운 소원을 들어주었던 존재이다.”

“….”

“충분히 돌아다녔나? 그렇다면 이제 나가자. 더는 못 기다린다.”

“뭐?”

“그녀가 힘들어하고 있다.”

그리고 세인의 눈꺼풀이 미친 듯이 떨렸다.

부르르 떨리는 눈꺼풀이 들어 올려질 때, 흐린 하늘이 보였다.

먹구름이 가득 찬 하늘은 잔뜩 이지러져 있었다.

잠시 섬광과도 같은 고통이 관자놀이를 스쳐 지나갔지만,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그는 더듬거리며 머리 위에 달라붙어 있는 물체를 잡았다.

그리고 노인이 했던 말을 다시 상기했다.

‘세상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들은 사람들을 가두지. 가두고. 거느리는 거야.’

그의 손 안에서 왕관이 부서졌다.

그리고 상체를 일으키니 아직 배 위였다.

그는 현실에서 성 안에 들어가 보지도 못한 것이다.

왕관을 쓰면 그것에 현혹되고 정신을 잃는다.

그리고 지배당한다.

바그너는 골드 축제라고 이야기 하고 그들에게 분장용 옷을 내밀었다.

거기에는 왕관이 달려있었다.

그래서 세리스와 세인은 기절했던 것이다.

결국, 왕관은 그들을 현혹하는 촉매제였다.

마검은 당장 위기에 빠진 세인을 깨우지 않았다.

세리스와 세인에게 시간을 들여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 있었나 보다.

왕관의 현혹에 빠진 그들은, 이미 성안에 들어갔다가 나왔다.

하지만 그들의 육신은 계속 나룻배에 기절한 채로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마검은 알맞은 때에 까마귀 형상으로 그를 깨웠다.

그런데 지금은 그런 사실보다 중요한 게 있었다.

세인은 벌떡 일어나 정신을 잃은 세리스의 몸 위에 올라탄 남자를 발길질했다.

바그너 행세를 했던 그는 세리스의 목을 조르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다음은 세인 차례일 것이다.

그는 외부인이 골디온을 찾는다는 것을 깨닫고, 이런 수작을 부렸다.

왕관들을 쓰게 유도한 후, 기절한 틈을 타 목숨을 빼앗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상대가 마검의 주인일 줄 꿈에도 몰랐다.

거센 발길질에 머리가 터져 나가며 물에 빠지는 남자였다.

그런데 배가 미친 듯이 흔들렸다.

지금 막 깨어나 일어서며 발길질을 했으니 중심이 잡힐 리가 있나.

결국, 배는 뒤집히고 세리스와 세인도 검은 물에 빠져버렸다.

철벅이는 소리와 함께 수면 아래 쥐죽은 듯, 머리채를 늘어뜨리고 있던 검은 수풀들이 위로 떠올랐다.

그리고 밀려나왔다.

그중 상당수가 허우적거리는 세인의 팔과 다리를 감았다.

검은 머리카락이 들러붙은 가운데, 세인은 푸드덕 거리며 날아오르는 까마귀를 보았다.

까마귀의 깃털중 하나가 팔랑거리며 그의 머리에 닿았다.

그리고….

눈 녹듯이 사라져 버린다.

*  *  *

“윽… 으윽.”

차가운 수온에 정신이 드는지 콜록거리며 간신히 눈을 뜨는 세리스를 부축하며, 세인은 강가를 빠져나왔다.

그녀의 발이 질질 끌리는데, 그녀는 이런 현실보다도 자신이 꾼 꿈이 충격적이었나 보다.

할머니 곁의 천리안이 자신을 다독여 주는 꿈.

“이상한… 이상한, 꿈을 꾸었어요.”

헐떡거리며 미간을 찌푸리는 그녀를 짚단 옆에 눕혀 놓았다.

그러자 그녀의 허리춤에 매달려 있는 검이 땅에 닿아, 철그럭 거리는 소리를 낸다.

세인은 손가락으로 그녀의 착 달라붙은 머리카락을 옆으로 넘겨주었다.

“잠시 혼자 있을 수 있겠어요?”

“예?”

짚을 그녀의 몸 위에 덮어준 세인은 멀리 보이는 성을 바라보았다.

그 성은 여전히 아침 안개에 휩싸여 있었다.

“지금 가야 할 곳이 있어요.”

“….”

이미 말릴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닌 것 같아, 세리스는 축축한 소매로 자신의 볼을 닦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왕의 머리 위에 있는 왕관은 세상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자리 잡은 물건이다.

그리고 어떤 왕관은….

그 집착이 지나쳐 사자(死者)마저 끌어들이고, 거느린다.

그 탐욕이 원혼들을 쥐고 흔든다.

성안에서 그 잔혹한 왕관에 붙들린 원혼들이 모여 있었다.

세인은 크릭이 줬던 검은 장검을 그녀의 발치에 던져두었다.

그리고….

안개를 두른 성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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