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은 왕 마검의 주인-79화 (79/307)

# 79

& 눈의 계절 (2)

“내가 이것을 보고 감동하리라 생각한 거야?”

남자는 조금 전 죽으려고까지 했던 인물이다.

돈에 마음이 쉽게 돌아설 리 없었다.

“당최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지껄이고, 이렇게 돈을 내밀며 동정을 던져주면 내가 감격할 거로 생각한 건가? 너무 감격해서 울부짖을 줄 알았어? 그러는 김에 화끈하게 회개하고?”

세인은 눈앞에 있는 남자의 상처를 보았다.

그리고 그 상처 앞에서 말했다.

“자네 이름이 뭐지?”

“맥그리거.”

“맥그리거. 내가 바다를 볼 수 있을까? 내 목소리를 들어봐. 이 목소리가 바다에 닿을 수 있을까?”

“….”

“맥그리거. 나는 아마 바다를 보지 못할 거야. 당신 앞에 내 얼굴을 보이지도 못할 거야. 나는 내가 원하는 곳으로 떠날 수도 없을 거야. 자네는 나와 같은 신세야. 자넨 방금 동정을 싸구려 취급했지만, 동정이 뭐 어떤가? 그런 따뜻한 시선조차 갈망해. 내가 아끼는 자들에게 나눠주고 싶거든.”

맥그리거는 탁자 위에 놓인 돈과 어둠 속에 잠겨있는 세인을 번갈아 보았다.

“나는 누군가가 나를 동정해 줬으면 좋겠어. 하지만 생각해보면 나는 동정받을 가치도 없지. 맥그리거. 누군가는 내가 병을 옮긴 사람들을 진심으로 동정해 줬으면 좋겠어. 그들은 동정받을 가치가 있을 거야. 하지만 그건 불가능한 일이지. 그들이 자존심 상해 할 테니까. 어떻게 생각해봐도 완전한 동정을 받고, 받아들인다는 건 어려운 일이야.”

이 남자는 조금 전까지 너무 상심한 나머지 죽음을 각오하고 있었다.

그래서 시비를 걸었다.

눈에 보이는 게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힘으로 누르려 했다면 원래의 목적을 달성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그는 흥분이 가라앉아 탈진한 사람처럼 보였다.

세인이 속삭이듯 말했다.

“넌 풍경화 안에 있을지도 몰라. 네가 원한다면 그 안에서 너를 되찾을 수 있을지도 몰라”

그는 품에서 다시 돈을 꺼내 맥그리거 앞으로 밀어주었다.

“비록 내가 갈 수 없는 풍경화 안에 있다 하더라도. 나는 너를 동정한다, 맥그리거. 죽으려고 하지 말고 살아봐. 네가 죽는다면, 넌 네 가족에게 팔 이상의 것을 잃게 하는 거야.”

맥그리거는 인간이었다.

세인은 지금 그게 부러웠다.

물론 맥그리거는 굉장히 상심했고 괴로운 상태였다.

죽음조차도 생각했었으니 얼마나 절망적일까?

하지만 그런데도 세인은 그가 부러웠다.

그리고 오늘 처음 본 맥그리거를 동정했다.

세인은 맥그리거 앞에서 그의 삶 전체를 재단하려 하지 않았다.

그의 과거를 심하게 캐묻지도 않았다.

그냥 맥그리거라는 타인 앞에서 자신의 상처를 이야기했다.

그리고 그를 동정하고.

누군가가 동정받았다면 좋겠다고 고백했다.

그뿐이었다.

그런데 그게 이상하게도 맥그리거를 너무나도 지치게 만들었다.

그는 자리를 털고 일어서는 세인을 향해 말했다.

적어도 아까처럼 막말은 아니었다.

“물리적으로 보면 팔 하나 잃은 것뿐이오. 물론 굉장히 불편하고 고통스럽지만 극복하지 못할 일은 아니지. 그런데 사람들이 나와 내 가족을 어떻게 보는지 아시오?”

“….”

세리스는 세인과 맥그리거를 번갈아 보았다.

세인은 그 자리에 서서 묵묵히 맥그리거의 말을 들었다.

“그 귀족은 내게 낙인을 찍었소. 팔을 잃었다는 상실은 극복할 수 있지만, 죄를 지었다는 그 낙인은 만회할 수 없는 것이오. 팔을 잃은 나와 내 가족들이, 이 삭막한 세상에서 어떤 취급을 받고…. 어떤 편견 아래 살아가야 하는지 아시오? 당신이 그걸 아느냐고.”

“….”

“불구라고 해서 마치 다른 생물처럼 바라보는 그 시선이 쏟아질 때마다, 내가 무슨 생각이 들고 왜 가족 앞에서 죽고 싶은지 알 수나 있을 거 같소? 강하게 극복하라 말하지만, 그건 내게 달린 문제가 아니야. 시선을 던지는 사람들의 문제지. 팔은 증거일 뿐이야. 지워지지 않는 죄의 증거! 낙인! 그걸 당신이 아느냐고!”

세인은 두 손을 올려 옷의 깃을 세웠다.

그리고 싸늘하게 말을 내뱉었다.

“알아.”

그리고 세리스와 함께 펍을 나가버렸다.

남겨진 맥그리거는 한 손으로 자신의 머리를 헤집으며 고민에 휩싸였다.

이제 그에게는 두 가지 길이 남아 있었다.

하나는 이 돈으로 진탕 술을 마시고 또 죽을 자리를 찾아가는 일이었다.

또 다른 하나는 돈을 들고 집으로 돌아가는 일이다.

적지 않은 액수의 돈이었다.

그것을 움켜쥔 맥그리거는, 적어도 술을 찾진 않았다.

*  *  *

아주 멀리 성벽이 보였다.

그 경계선을 통과해 지나치자 건물 양식이 변했다.

지붕을 장식하는 재료도 그렇고, 벽에 칠해진 물감도 따뜻한 색이거나 푸른색이었다.

하얀 불 장대들은 넓게 펼쳐진 대로 주변에 지팡이를 거꾸로 박아 놓은 듯 서 있었다.

큰 규모의 마을들이 마차 옆으로 스쳐 지나갔고, 그런 과정을 몇십번이나 반복한 후에야 둘은 하얀 성채 앞에 도달했다.

여기는 골디온 성주가 다스리는 성으로, 헤일라 산간 지방의 끝쪽이었다.

해가 빨리지는 검은 산등성이로, 소금기를 머금은 바람이 자주 불어온다.

바다가 멀지 않기 때문이다.

푸른 강줄기를 낀 절벽 위에는 금빛 도개교가 놓여 있었고, 병사들이 잔뜩 모여 있었다.

그것을 바라본 둘은 일단 그 성에 가까이 가지 못하고 근처의 마을에 들렸다.

그리고 한센이 알려준 대로 길드와 접촉하기로 했다.

사람이 드문 펍에 앉아 있는데, 한 명의 젊은이가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반갑습니다. 전 바그너라고 합니다.”

하지만 아무도 손을 잡아주지 않자, 바그너는 머쓱한 표정을 지으며 그들의 맞은편에 앉았다.

펍은 어두침침한 불빛과 담배 연기 때문에 시야가 흐릿할 정도였다.

왜 굳이 여기에서 만나자고 했는지 이해가 갔다.

“굉장한 액수를 부르셨더군요. 그래서 제가 왔습니다. 제 자랑은 아니지만, 전 특급 손님만을 모십니다.”

실컷 자기 자랑하는 그에게 세리스가 물었다.

“성의 경계가 삼엄한 것 같은데, 일단 안쪽으로 들어갈 수 있을까요?”

바그너는 잠시 의아해하더니 이내 짝하고 손뼉을 쳤다.

그러자 카운터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던 주인이 움찔 놀라며 두리번거린다.

“아. 정문 쪽으로 가셨군요? 칼테일라 성은 출입문이 여러 개입니다. 그중 가장 경비가 허술한 곳이 수로죠. 상인들이 너무 많이 다니니까, 경비들도 별 신경을 안 써요. 그에 비해 정문은 골디온도 그렇고 귀족들도 지나가니까요.”

“우린 들어가기만 해서는 안 돼. 골디온에 대한 안내는?”

바그너는 세인의 음침한 목소리에 놀랐다가, 손을 입 옆에 대고 속삭였다.

“그건 비쌉니다, 매우. 왜 그런지는 아시겠지요?”

그런데 그런 말을 하는 그의 눈이 위아래로 오르락내리락했다.

세인이 그에게만 보이도록 다이아몬드를 꺼내 던졌다 받기를 했기 때문이다.

어머니 유품을 가지고 그런 짓을 하는 세인도 세인이지만, 바그너는 거기에 홀딱 넘어가 침을 삼켰다.

“성에 안내해주고 골디온의 위치를 찾아주면, 이건 그 순간부터 당신 거야.”

“정말 운이 좋으신 겁니다. 저희 조직도 최근 조직원들이 사고를 당해서, 골디온을 의심하고 있었거든요.”

바그너는 하루 자고 내일 아침 일찍 출발한다고 말했다.

경비들은 새벽이 되면 밤샘 근무 때문에 제정신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세인과 세리스는 펍의 이 층으로 올라가 여장을 풀고 푹 잤다.

아침이 되자 문밖에서 노크한 바그너는 손은 빈손이 아니었다.

그는 광대가 입는 의상 같은 것을 팔에 걸치고 있었다.

“그게 뭐지?”

“지금은 골드 축제니까요.”

골드 축제란 골디온에 광적으로 열광하는 자들이 만들어낸 기간이었다.

골디온 복장을 하고 돌아다니는 이 무엄한 짓을, 골디온은 너그럽게 받아 주었다.

그의 인기는 평소에도 그렇지만 요즘 들어 아주 높았으므로, 시민들의 사랑이 반영된 것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상점들은 평소보다 싼 가격에 물품을 팔았고, 밤이 되면 아름답게 세공된 유리구슬에 초를 넣어서 주변을 밝힌다.

그러면 연인들이 향초 등을 사러 야시장을 방문했다.

골드 축제는 호화스러운 이름 그대로 볼 것이 많았고, 사람들도 활기 넘치는 시간을 보내는 기간이다.

세인은 우스꽝스러운 금색 가면과 왕관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생각해 보면 위장에 아주 좋았다.

골디온을 찾기 어렵다고 투덜댈 필요도 없었다.

안내인도 있는 데다가, 진짜 골디온이 착용한 가면 같은 것은 순금이라 눈에 금방 띌 테니까.

하얀 바탕에 금색 무늬가 들어가 있는 천을 뒤집어쓰니, 밑단이 치렁치렁하게 늘어졌다.

“얼굴을 가린 천이 벗겨지지 말라고, 무거운 재료를 왕관에 썼습니다. 고개가 아플 수도 있어요.”

아닌 게 아니라 바그너의 말대로 왕관을 쓰니 목이 뻐근해 왔다.

작은 나루터에서 세 사람을 태운 나룻배가 움직인다.

세 개의 금관을 쓰고 가면과 함께 일렬로 앉아 있던 셋은, 멀리에서 보면 광대 셋이 움직이고 있는 것 같았다.

여기에서는 특이하게 보이지만, 성안에 들어가면 이런 옷차림의 사람들이 넘쳐날 것이다.

그 인파에 자연스럽게 섞여 골디온을 찾아내면 된다.

그러면 세인이 검을 휘두르고… 목적은 끝이다.

이걸 하려고 그 먼 거리를 여행한 것이었다.

노를 젓는 바그너는 골디온에 대해 이야기를 시작했다.

“외지인이 보면 그의 행색이 이해가 안 되겠지만 사연은 간단합니다. 그가 소영주 때 성에 불이 났는데, 영주를 구하기 위해 침실로 뛰어들다가 화상을 당한 거죠. 영주는 그런 골디온이 기특하기도 하고 그래서, 그에게 금가면과 왕관. 장갑 등을 내렸죠. 그리고 그때부터 시민들은 그의 그런 면을 좋아하게 된 겁니다. 그런 매력은 나라 밖으로까지 번져나갔고요. 그리고 말이죠….”

말이 너무 장황해지려 하자, 세인이 바그너의 말을 끊으며 중얼거렸다.

“그래서 지금 그는 어디 있는데?”

*  *  *

골디온은 바그너와 함께 있었다.

골디온이 있는 곳은 지하의 밀실이었고….

그리고 브리리 길드의 유일한 생존자인 바그너는, 지금 철제 의자에 꽁꽁 묶여 있었다.

브리리 길드를 소개해준 한센도 이 유서 깊은 길드가 이렇게 순식간에 박살 났을 줄은 상상도 못 했을 것이다.

골디온은 역시나 번쩍이는 순금 왕관과 가면. 그리고 장갑을 끼고 있었다.

치렁치렁한 하얀 옷에는 온갖 기하학적인 무늬가 새겨져 있었다.

그의 눈 쪽 뻥 뚫린 구멍으로 한기가 새어 나왔는데, 음성도 얼음 굴을 연상시키듯이 차가웠다.

“어떻게 나를 의심하게 되었지?”

바그너는 피투성이가 된 얼굴로 맥없이 골디온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는 현재 절망한 상태였다.

어린아이가 생각해봐도 전 길드원을 죽인 마당이다.

뭐가 이쁘다고 바그너를 살려주겠는가?

골디온은 상대가 대답하지 않자 황금 장갑을 뻗었다.

그 바람에 상체가 약간 기울어졌는데, 목에 감긴 치렁치렁한 금목걸이가 늘어져 서로 부딪혔다.

정말 어지간히도 금을 좋아하는 사람이다.

손가락으로 바그너의 귓불을 애무하듯이 만지작거린 골디온은 그에게 속삭였다.

“이거 보여?”

그때 바그너의 눈은 골디온의 다른 손끝을 보았다.

새끼손가락이 까닥이는 쇠막대기 밑으로 도끼날이 보인다.

그는 조금 전 그걸로 길드원 사람을 난도질했다.

영웅이라고 불리는 골디온의 실체는 이런 것이었다.

그런데 거기에 전율할 새도 없이 바그너는 비참하게 죽게 생겼다.

골디온이 도끼자루를 잡은 손에 힘을 주자, 눈을 감은 바그너가 말했다.

“처음에 당신을 의심한다는 게 어려울 겁니다…. 일단 그 힘들어 보이는 의심이란 것을 하기 시작한다면…. 하다못해 재봉사도 그걸 알고 있을 겁니다.”

“….”

“당신은 주기적으로 체격이 바뀌어요. 목소리와 행동은 그대로이지만 걸음걸이도 미세하게 달라져요. 척추가 다르니까요. 그러니 신발 굽이 닳는 것도 다르죠. 음식은요? 음식 먹는 속도. 가리는 차이.”

결국, 요리사나 구두장이도 알려고만 하면 알 수 있었다.

“이동만 해도 그래요. 당신은 도저히 불가능한 연설 스케줄을 소화해 냅니다. 아무리 말이 빨리 달려도 불가능한 거리를 소화한다고요. 그 거리를 그 시간 내에 단축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새뿐입니다. 알겠어요? 당신을 의심하는 게 힘들고 이상한 게 아니에요. 당신을 의심하려는 선택이 힘든 거죠.”

원하는 대답을 들은 골디온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금방 들어 올리진 않으려는 듯, 도끼 머리가 좌우로 움직이며 돌바닥을 비비는 소리가 났다.

그 소리는 바그너가 일생에 들어본 소리 중에서 가장 끔찍한 소리였다.

그리고 그 도끼가 번쩍 들렸을 때, 바그너는 소리를 질렀다.

무서워서 말이다.

살려달라고 마구 빌었다.

골디온은 그제야 껄껄 웃었다.

그리고 중얼거렸다.

“왜 그들이 나를 의심하지 않았는지 알아?”

물론 외지인인 바그너는 모른다.

공포에 질린 바그너는 그런 공포를 잊기 위해 뭐라도 외쳐야만 이 끔찍한 순간을 버텨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래서 이렇게 외치려고 했다.

그걸 내가 어떻게 아느냐고 말이다.

그래서 입을 열었다.

“그걸!!”

*  *  *

“그걸….”

“….”

“그걸 잡으십시오.”

바그너의 말에 세리스는 그가 던져준 밧줄을 잡고 일어났다.

배가 잠시 좌우로 흔들렸지만, 밧줄을 잡고 일어난 세리스가 중심을 잡았기 때문에 문제없었다.

팔짱을 끼고 꾸벅꾸벅 졸고 있던 경비는 축제 복장의 그들을 보고 그냥 통과시켜 주었다.

상인으로는 안 보였지만, 몰려든 나룻배가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아침 안개가 잔뜩 낀 성안으로 들어서는 세인은 고개를 돌렸다.

멀리 검은 물 위로 다시 검은 나무가 서 있는 것이 보였고, 나뭇가지에는 검은 잎 대신 검은 까마귀들이 잔뜩 앉아 있었다.

그들은 까악 거리며 일제히 울었다.

그런 그들을 일별한 세인은 세리스를 따라 다시 걸음을 옮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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