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8
& 눈의 계절 (1)
한센은 가이더를 재건하려는 결사대에 속해 있었다.
왕자는 그런 집단 의지에 의해 살해된 것이다.
그는 해외에서 활동하는 블랙 라이어드 상단이 무기밀매로 어떤 짓을 하는지 이야기하는 한편, 세인의 목적지를 듣고 귀띔을 해주었다.
“거기의 비밀길드에서 정보 얻으시기에 수월하실 겁니다.”
“비밀길드.”
“정확히 어떤 목적 때문에 가시는지는 알 수 없지만, 브리리 길드라는 곳은 대가만 지급하면 어떤 정보든 물어다 줍니다. 상대 정체를 따지지 않고요. 그래서 이제는 폐쇄적인 비밀길드라는 처음 취지가 무색하게 되어 버렸죠.”
한센은 떠나가려는 세인을 가능한 한 오래 붙잡고 도움을 주고 싶어 했다.
그들이 밀담을 나누는 동안 세리스는 선택의 기로 위에 서 있었다.
사람은 태어나서 세 번 정도 펑펑 울어야 할 때가 있었고 세 번 정도 인생의 중요한 선택을 해야 하는 시기가 오는데, 지금이 마치 그 시기 중 하나인 것 같았다.
떠나가는 조세핀을 따라간다면 고국을 떠난 양심의 가책에서 해방될 수 있었다.
따라갈 명분도 충분했고 말이다.
그렇게 된다면 그녀의 인생에서 가치 있고 무거운 100개의 소원이 이루어질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 소원이 자신의 꿈과 맞닿아 있었다.
새로운 가능성과 함께 모험하는 것.
귀한 분을 모시며 연결될 수 있는 수많은 가능성이 어둠 속 등불처럼 열렸다.
그리고 그녀를 유혹하듯이 춤을 추었다.
반면에 이대로 남는다면 깃털 같은 무게인 하나의 소원에 매달리는 것으로 보였다.
형체도 불분명해서 가치와 척도를 잴 수 없는 마음 하나.
마음이란 너무나 가볍고 변덕스러워 깃털 같다.
그 사이에서 세리스는 자신을 추스르고 올바른 선택을 하려고 애를 썼다.
과연 그녀의 선택은 무엇일까?
* * *
다음 날 세인이 말들 옆으로 돌아와 보니, 세리스는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런 그녀에게, 세인은 골디온에 대해서 도움을 받을만한 집단을 한센이 알려주었다고 말했다.
그 말을 들은 세리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것참 잘 되었군요.”
* * *
브리리는 원래 도둑과 마법사 길드를 지칭하는 집단이었다.
도둑과 마법사의 결합이라니, 타인이 보기에 참 안 어울리는 조합이다.
초창기의 그들은 진리와 금을 탐구한답시고, 던전을 탐구하는 괴짜 집단으로도 알려졌는데….
이게 역사가 쌓이면서 점점 개별 전문화가 되고, 처음과 다른 방향을 가지게 되었다.
세리스와 세인은 가이더를 떠나 남하했다.
중부는 원래 풍족한 지대여서 그런지, 괴물들이 쓸고 지나갔어도 상태가 괜찮은 곳이 많았다. 물론, 이건 북부인의 생각일 따름이다.
현지인들은 생각이 전혀 다르겠지.
크게 돌아간답시고 강을 따라 우회했지만, 아주 멀리에서도 보이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괴물들이 높게 쌓아 올린 장벽이었다.
하늘을 나는 새도 통과하지 못할 높이의 장벽은, 안에 있는 괴물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것은 큰 공포심을 부채질하는 역할을 했고 말이다.
배 위에서의 둘은 난간을 붙잡고 멍하니 장벽을 바라보았다.
회색 장벽 표면에는 구름이 흐르고 있었다.
지독한 놈들이다.
저기까지 쌓아 올리다니.
“불안과 증오의 근원이 대륙 중앙에 자리를 잡았네요. 안타깝습니다.”
세리스의 말을 곁에서 들으며 세인은 주스를 계속 마셨다.
남부에 가까워질수록 땅이 기름지고 풍요롭다는 게 잘 느껴졌다.
음식 하나만 해도 수분과 농도가 달라졌다.
“그래도 세계수 지역보다는 못하지만.”
강에서 내린 그들은 야영을 하며 점점 더 내려갔다.
큰 길이 나타나고 검문도 심해졌는데, 세리스 때문에 다 통과할 수 있었다.
일단 성기사가 언데드와 동행한다는 것은 아무리 이런 시대라 해도 너무 엽기적인 상상이었다.
그리고 세인은 얌전히 굴었기 때문에, 겉으로 보면 굉장히 음침해 보이는 사람 정도로 느껴졌다.
세리스가 병사들 곁을 지나치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것 좀 적당히 먹을 수는 없어요?”
게다가 세인은 남부지방의 음식이 어떤가 싶어서 손에 먹을 것을 자주 들고 있었다.
손에 감자를 들고 움직이는 그를 의심하는 것은 힘들었다.
이게 작정하고 노린 거라면 썩 괜찮은 위장이다.
* * *
하루는 초원을 걷고 있는데, 땅의 반이 그림자로 뒤덮였다.
세인과 세리스는 같이 걸어가며 먹구름이 비를 뿌리는 광경을 보았다.
빗줄기가 옆에서 서서히 다가오는 동안 그들은 두건을 깊게 눌러 썼다.
그렇게 비를 맞으며 얼마나 걸었을까?
그들은 꽤 큰 마을에 도착할 수 있었다.
풍차들이 주위에 서 있는 그곳은 강한 바람이 자주 불었다.
초입 구에 서 있는 펍에 들린 그들은 창가를 피해 앉았다.
그중에서도 세인은 가장 안쪽의 깊숙한 자리에 앉았고, 세리스는 바깥쪽이었다.
둘은 음식을 주문하고 잡담을 나눴다.
그러다 음식이 나왔는데 놀랍게도 스테이크였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스테이크 옆에는 커다란 옥수수알과 싱싱한 채소가 곁들어져 있었다.
목이 말랐는지 포크보다도 커다란 물잔에 손이 가는 세인을 보면서 세리스는 입을 열었다.
“옛날에 도박으로 재산을 탕진한 사람이 있었어요.”
작지만 아름다운 목소리가 들리자, 애써 고개를 돌리고 있던 펍의 사람들이 세리스에게 다시 얼굴을 돌렸다.
그러나 그녀의 복장과 외모를 보고는 고개를 원위치시켰다.
“그 남자는 죽으려고 생각했어요. 어떻게 죽을까 생각하다가, 방법을 정했어요. 중요한 건 그 방법이 얼마나 아프냐 안 아프냐가 아니라. 마지막에 자존심을 지키고 싶었던 거예요. 그래서 그는 최고로 좋은 옷을 입으려고 옷장을 열었죠.”
세인과 세리스는 포크와 나이프를 움직여 스테이크를 썰었다.
큼지막한 고깃덩어리를 꼭꼭 씹어 먹은 그녀는 만족감을 느꼈다.
그러면서 이야기를 계속했다.
“그런데 옷장 안에는 창문이 있었던 거예요. 그 창문은 그에게 안도감을 주었어요. 구름이 흐르고 따뜻한 햇볕이 비추던 호수는 너무나도 아름다웠어요. 그는 창문 너머로 넘어가 거기에서 죽고 싶다고 생각하는 게 아니라. 그 광경에서 힘을 얻었어요. 그리고 결심한 거예요. 그날을 기점으로 다시 태어나기로.”
그러면서 그녀는 그 남자가 다시 자신의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을 식사 내내 이야기했다.
펍 안은 아늑했고 음식은 나쁘지 않았다.
게다가 세리스의 이야기까지….
그녀의 낮지만, 기분 좋은 목소리도 곁들여지니 천국이 따로 없었다.
식사를 마친 세인은 물잔을 들어, 자신의 입을 물로 헹군 후 눈을 감았다.
그리고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그렇게 앉아 포만감과 이야기를 듣고 있는데, 세리스가 끝맺음을 했다.
“그렇게 아이들을 낳고, 그는 아내 곁에서 행복하게 죽어갔어요. 그는 힘들 때마다 옷장 안의 불가사의한 창문 너머를 보고 힘을 얻었던 거예요. 그 힘이 그 사람을 다시 태어나게 하고 살게 했죠. 훗날 장례식을 마친 그의 자손들이 옷장에서 무엇을 발견했는지 알아요?”
세인은 눈을 감은 채로 단숨에 대답했다.
“그림.”
세리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맞아요. 옷장 안쪽 벽에 걸려 있는 것은 아주 낡은 풍경화였어요.”
“….”
“사람이 바뀌는 것에는 큰 이유가 필요하지 않아요. 고작 풍경화 한점만으로도 사람은 얼마든지 새롭게 변할 계기를 마련할 수 있는 것 같아요.”
눈을 뜬 세인은 세리스를 바라보았다.
흘러내린 금발 머리를 하얀 귀 뒤로 넘긴 그녀는 아름다웠다.
가냘픈 턱선 밑으로 이어지는 목선 뒤로 누군가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다가오는 사람은 악취를 풍기는 남자였는데, 면도를 안 해서인지 듬성듬성 나 있는 턱수염이 지저분해 보였다.
눈을 반쯤 감은 그는 술 냄새를 풍기며 비틀거렸다.
“이야, 이거 굉장한 미인이군. 빈자리에 앉아도 되겠어요?”
남자는 자신을 새초롬하게 올려다보는 세리스 앞에서 히죽 웃어 보였다.
그리고 시비를 걸려는 듯, 완전한 양해를 구하지도 않고 털썩 의자에 앉아 버린다.
그리고 세리스의 물잔을 잡아가는데, 세리스가 저지하려는 것을 세인이 손짓으로 말렸다.
꿀꺽꿀꺽 소리가 나며 남자의 목울대가 움직였다.
이제 펍의 안주인은 위험한 상황이 벌어질까 봐 안절부절못하였다.
척 봐도 보통사람이 아닌 여자 옆에, 저런 남자가 앉았으니 사달이 나리라 본 것이다.
그러나 세인은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오히려 남자를 관찰하는 눈치다.
그가 이렇게 나오니 세리스도 어떤 행동을 못 취하고 추이를 살펴볼 뿐이었다.
“오, 옷차림이 아주 좋은 걸 보니 부잣집 아가씨 같구먼. 그런데 어딜 가시나? 남자는 호위하는 사람인가 보지? 그런데 왜 이렇게 분위기를 잡고 있을까?”
옷차림이 엉망인 남자는 마구 떠들어 댔다.
그러다가 딸꾹질을 해대며 세리스의 몸에 손을 대려고 했다.
참다못한 그녀가 남자를 제압하려 하자, 세인의 입이 열렸다.
“그건 왜 그렇게 된 거지?”
“뭐?”
남자는 세인의 장갑 낀 손이 자신의 헐렁한 팔 쪽을 가리키자, 눈길을 외투로 돌렸다.
그리고 히죽 웃었다.
“이게 궁금해?”
“싸우다가 다치기라도 했나?”
남자는 껄껄대며 팔 잃은 이야기를 해주었다.
다 듣고 나니 귀족의 판결을 받아 팔이 잘렸다는 끔찍한 이야기였다.
게다가 그의 가족들도 팔이 잘렸다는 것이다.
“핑계를 대었지만 괘씸죄지. 귀족의 눈 밖으로 났기 때문에 받은 벌이야.”
그러면서 남자는 한참을 떠들어 대었다.
그러다가 기력이 빠지는지 금세 침울해졌다.
그는 낙담한 얼굴이 되어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세인은 그런 상대의 이야기를 다 들어주면서, 남자가 많이 망가졌다고 생각했다.
육체도 육체지만 정신이 말이다.
“억울한 일을 당해서 상심한 건 이해해. 하지만 이런 행동은 현명한 게 아니야. 당신이 여기에서 목숨을 잃으면, 팔이 없는 당신의 식구들은 어떻게 살아가지?”
그러자 남자는 껄껄 웃었다.
그리고 비꼬듯이 이야기했다.
“현명? 넌 현명한 세상에서 살아가는군. 얼마나 현명하게 살아가고 있길래 그렇게 꽁꽁 자신을 숨기고 살아가지? 무슨 병이라도 걸렸나?”
이렇게 시비를 붙이고 있으니, 주변에서 술을 마시던 사람들은 얼굴이 하얗게 변하며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펍을 빠져나갔다.
아마 칼부림이라도 벌어질 수 있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누가 봐도 세리스는 귀족이었고, 검까지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남자의 행동은 자살 행위, 그 자체였다.
본인은 자포자기로 저렇게 군다고 생각할는지 모르지만, 죽고 싶어 환장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세인은 불쾌함을 드러내지 않았다.
오히려 남자의 말에 동조했다.
“그래 어쩌면 병에 걸렸는지도 몰라. 그렇게 볼 수도 있겠군.”
의외의 답변에 세리스와 남자는 침묵했다.
그리고 세인의 이야기는 끝난 게 아니라 계속 이어졌다.
“나는 나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병을 옮겼어. 그래서 그들은 원래와 다르게 변해 버렸지. 부정할 수 없이 내가 했던 일이야.”
타인이라는 것은 어렵게 생각하면 한없이 어려웠다.
속을 알 수가 없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쉽게 생각하면, 정말 쉽기도 했다.
타인이니까 말에 책임을 져야만 할 필요도 없었고, 감정을 드러내도 되었다.
어차피 여기에서 일어서면 영영 보지 않을 타인이니까.
“나는 내가 병을 옮겼다는 게 너무나도 고통스러웠어. 왜 아니겠어? 내가 얼마나 밤마다 좌절하고 상심한 상태로 잠드는지. 그리고 아침에 일어나 어떤 공허함을 느끼는지…. 자네는 아마 모를 거야.”
“….”
그렇게 말한 세인의 분위기는 너무 무거웠고, 숨 막힐 듯한 절망감이 절절히 느껴졌다.
“상심한 얼굴로 목숨을 도외시한 자네에게 묻고 싶은 것이 있어. 어때 보이나?”
“뭐?”
남자가 뚱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그가 입을 벌렸을 때 듬성듬성 나 있는 이가 보였다.
“뭘 말하는 거야?”
옆에서 쏟아지는 세리스의 눈빛을 무시하며, 세인은 등받이에서 몸을 떼었다.
그리고 말했다.
“지금의 나를 봐. 내가 어떻게 보여? 어떻게 느껴지지? 나는 가끔 먼 곳을 바라보며 생각하곤 했어. 어딘가로 훌쩍 떠나 아무도 모르는 내가 되는 거야. 그곳에서의 나는, 지금 당신이 보는 사람과 다른 사람이야. 그리고 아무도 내게 책임을 요구하지 않지. 거기에서는 나는 평범한 여자를 만나 사랑을 나누는 상상을 하곤 했어.”
“….”
“ 가끔 바다도 생각해 보았어. 책이나 그림으로만 보는 바다를 직접 보면 멋지겠지? 당신 앞에서 얼굴을 드러낼 수조차 없는 나의 목소리를 느껴봐. 정체를 드러낼 수도 없고, 남들에게 병을 옮긴 내가…. 당신 앞의 내 목소리가, 과연 꿈을 이룰 수 있을까? 어때? 내 목소리를 들으니 그게 가능하리라 느껴지나?”
세인은 옷에 손을 넣어 뭔가를 집더니 앞으로 불쑥 내밀었다.
남자의 시선은 세인의 손에 고정되었다.
세인의 손에는 돈이 쥐어져 있었다.
그는 그것을 앞으로 밀어 남자에게 가까이 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