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6
& 다시 시작되는 눈의 계절 (5)
세리스 본인 속이 어떨지 몰라도 그녀와 동행한 것은 세인으로서 다행이었다.
일단 그녀는 길을 지나오면서 북부 쪽의 정세를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상황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알고 지름길을 선택했다.
이따금 괴물들과 마주치면 죽이기도 잘 죽였다.
그리고 점점 뒤로 갈수록 세인이 나설만한 일은 없어졌다.
게다가 귀족으로 보이는 데다가 알맹이는 성기사니까, 치안을 위해 급조된 병사들도 어지간하면 가까이 다가올 생각을 못 했다.
검문을 피해 가는 것이다.
트리엔의 국경선을 따라 이동하기까지 둘은 적지 않은 대화를 나눴다.
여행길에 동행인이라고는 서로밖에 없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세리스는 세인을 관찰하며 자신 안의 끌림을 다시 생각해 보았고, 세인은 반대로 세리스를 관찰했다.
그리고 과연 다른 미래에서 그녀를 왜 자신의 기사로 만들었는지 재확인할 수 있었다.
여행이 수월해지는 것에는, 대부분의 몬스터들이 중앙으로 모인 덕이다.
결국, 흉악하고 강한 놈들은 보기 힘들어진 탓이 컸다.
마법 생물만 해도 북부에서 발견하는 것이 불가능에 가까울 정도다.
그 외에도, 가이더에 도착하기 직전 해프닝이 하나 있었다.
세인은 한밤중에 누워 있었는데, 모닥불이 머리맡에서 내는 타닥거리는 소리가 귀를 울렸다.
세리스는 하얀 검을 뽑고 그의 볼에 가져다 댄 상태였다.
그녀는 그렇게 선 상태로 세인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검날에 한쪽 볼을 붙이고 있던 세인은, 그런 그녀를 조용히 올려다볼 뿐이다.
세리스는 눈앞의 남자를 향해 입을 열었다.
“제게 무슨 짓을 했나요?”
세인은 뒤통수를 베개에서 떼지 않고 그냥 침묵을 유지했다.
“그렇지 않다면 지금이 설명되지 않아요. 생각해보면 처음에 만났을 때부터 그랬어요. 제게 무슨 수작을 부렸나요? 그렇지 않고서야 지금 제가 이렇게 끌려가는 상황이 너무나 이상하잖아요.”
세인이 상반신을 일으키자 그녀의 검도 그런 그를 따라 움직였다.
볼에서 목으로 미끄러지는 검날에 신경을 쓰는 것인지, 아닌지….
세인은 무표정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라이트닝 블러드라는 것을 알아요?”
“….”
“일단, 라이트닝 블러드에 대해서 이야기해 봅시다.”
그로부터 세리스의 검날이, 세인의 몸에서 떨어지기까지 한 시간이 걸렸다.
다음날 그들은 가이더를 가로질렀다.
보급선을 유지할 필요도 없었기에 몬스터들은 자취를 감추었지만, 그와 상관없이 황폐해진 대지 위를 달리는 그들의 마음은 쓰렸다.
세인은 침묵을 지켰다.
복잡한 표정의 세리스가 마음을 완전히 정리하길 기다려 주는 것이다.
“어디에서부터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 모르겠어요.”
일주일 동안 세리스가 꺼낸 말은 이것 하나뿐이었다.
그리고 다시 일주일이 흘렀다.
수도까지 얼마 남지 않은 거리에서 그들은 긴 행렬에 끼어든다.
난민들과 여러 사람이 공동의 목적을 위해 뭉친 집단으로, 그들의 목적은 오로지 수도까지의 안전한 여행이다.
두건을 깊이 눌러쓰고 후미 쪽에 따라붙은 그들을 향해, 맥스라는 쾌활한 청년이 달려온다.
그는 석궁을 등에 메고 있었고 휘파람을 즐겨 부는 사람이었다.
세인 일행이 수상한 사람은 아닌지, 확인하기 위해 말을 타고 달려온 그가 흠칫했다.
일단 세리스의 용모에 기세에서 눌리고, 그녀의 옷차림에 다시 눌렸기 때문이다.
“많이 지쳤는데 이분도 확인해야 하나요?”
세리스가 마치 네깟 놈을 상대한다는 거 자체가 귀찮다는 듯, 과장되게 세인을 가리키자….
맥스는 황급히 고개를 저어 보였다.
“아… 아닙니다. 하하하. 그럼 즐거운 여행 되세요.”
그리고 부리나케 사라져 버렸다.
그의 상단주에게 보고하러 간 모양이다.
이 집단은 한 상단의 주인이 호위병을 고용하는 것에서 시작되었다.
거기에 많은 사람이 옳다구나 하고 따라붙은 거다.
상단주로서는 사람이 많을수록 든든해지니까 마다할 이유가 없었고 말이다.
“저 마차 안에 누가 있는지 궁금하네요.”
드디어 세리스가 직접 세인에게 말을 걸었는데, 그 내용은 행렬 중앙의 화려한 마차에 대해서였다.
선두부터 중앙까지 무장한 용병들이 호위를 섰는데, 유독 심하게 들러붙은 곳이 바로 단단해 보이는 하나의 마차였다.
거기 한곳에 여덟 명이나 붙어서 같이 움직이니, 당연히 시선을 끈다.
다른 사람들도 수군거리며 그 마차를 주시할 정도다.
대체 누가 탔을까?
대단한 귀족?
아니면… 그냥 졸부?
엄청난 미인일 수도 있겠지.
세인은 자신에게 말을 건 세리스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세리스가 주저하다가 자신의 손을 그의 손 위에 덥석 올렸다.
그러자 그 손을 공손히 옆으로 치운 세인이 말했다.
“입이 심심해서 그런데 땅콩 남은 거 있나요?”
“…예.”
그리고 그날 밤 습격이 있었다.
습격자들은 복면을 쓴 남자들이었는데, 그들은 깜찍하게도 양동 작전을 펼쳤다.
처음에는 중앙의 마차를 습격하다가 패주하는 척을 했다.
맥스와 혈기가 넘친 다수의 젊은이는 소리를 지르며 그들을 추적했고 말이다.
용병대장의 돌아오라는 소리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그들은 멀리 달려가 버렸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두 번째 습격조가 들이닥쳤다.
그들은 불화살을 쏘며 마차를 유린했다.
나중에 맥스와 사람들이 달려왔을 때 상황은 이미 끝난 후였다.
그런데 반전이 하나 있었으니.
마차에는 아무도 타지 않고 있었다는 것이다.
“꾀를 써서 한 번의 공격을 낭비하게 했군요.”
세리스는 그렇게 말하며 허겁지겁 달려 나온 상단주의 얼굴을 보았다.
그녀는 시종일관 무덤덤한 표정이었다.
상단끼리의 알력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런 그녀의 표정이 굳어진 것은, 같은 후미 쪽의 한 남자를 발견했을 때였다.
콜록거리는 신경질적인 남자.
병색이 완연한 남자.
무섭게 굳어지는 세리스의 얼굴을 보며, 세인은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아는 분입니까?”
“전에 제게 청혼했던 남자예요.”
세리스가 자신도 모르게 그렇게 중얼거리자, 세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삼각관계라니, 아비게일이 고통스러워한 이유가 있었군요.”
“….”
농담에도 불구하고, 세리스의 표정은 좀처럼 펴지지 않았다.
그녀는 습격이 다시 있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 예상이 맞아떨어지기 전에 세인은 실수 하나를 저질렀다.
행렬이 잠시 쉬는 시간을 가졌다.
그리고 많은 사람이 강줄기 옆으로 붙었다.
몸에 들러붙은 먼지를 씻고 물통에 물을 받기 위해서다.
세인은 그들과 멀리 떨어져 물통에 물을 받았다.
그런데 그런 그와 같은 행동을 하는 여성이 한 명 있었다.
수더분하고 통통한 얼굴에, 지친 안색으로 손을 씻는 여인.
그녀는 고풍스럽지만 낡은 옷을 입고 있었다.
그리고 꽤 지쳐 보였다.
물에 담갔다가 빼낸 손은 조심스럽게 위로 올라가, 품에 안고 있는 아기의 얼굴에 닿았다.
풍만한 가슴을 드러내고 아기에게 젖을 물리고 있던 그녀는, 근처에 세인이 있는 줄 모르는 것 같았다.
세인은 그녀의 드러난 한쪽 가슴보다는, 그 가슴을 입으로 물고 있는 아기에 시선을 집중했다.
눈빛이 초롱초롱하고 또렷한 아기다.
그 눈빛을 바라보고 있는데 멀리에서 그녀의 남편 목소리가 들려왔다.
“조세핀, 조세핀! 어디 있는 거야! 아퍼, 아프다고!”
다 죽어가는 그의 목소리보다, 그녀의 이름에 세인은 몸이 굳어졌다.
그리고 미처 두건을 다시 내려쓰는 것을 생각하지 못했다.
남편의 부름에 황급히 몸을 돌리는 부인과 세인의 눈이 마주쳤다.
그 여성은 세인의 얼굴을 볼 수 있었으며, 그래서 당연히 그가 보통 인간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아기를 안지 않은 손으로 자신의 입을 가린 그녀에게, 세인은 두건을 눌러쓰며 검지로 자신의 입술을 가려 보였다.
“쉿.”
꽤 놀란 그녀가 고개를 황급히 끄덕인다.
그리고 첨벙첨벙 소리를 내며 멀어졌다.
세인은 그녀가 비록 고개를 끄덕였지만, 당연히 사람들에게 알릴 것으로 생각했다.
그의 판단으로 그녀는 습격받고 있는 처지였고….
인간이 아닌 자가 행렬에 섞여 있으니, 당연히 의심받을 거로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그를 잡으러 오는 사람이 없었다.
다음 쉬는 시간에, 물가에서 아기에게 물을 먹이고 있는 그녀에게 다가갔다.
머리카락 몇 올이 이마 밑으로 흘러내린 그녀는 남편 병시중을 들어서인지 매우 지쳐 보였다.
약간 놀라며 일어나는 그녀에게 세인이 물었다.
“왜 제 정체를 알리지 않으셨습니까?”
“예?”
“제가 누군지 아셨지 않습니까? 그런데 왜 사람들에게 알리지 않으셨습니까?”
그러자 조세핀이란 이름을 가진 통통한 여성은 고개를 흔들었다.
“저는 당신이 누구인지 모릅니다. 우린 처음 봤잖아요. 다만 성기사님과 함께 계시니, 제 작은 우려는 여인네의 착각일 뿐이라고 여겼습니다.”
세인은 그런 대답을 하는 여성과 품에 안고 있는 아기의 얼굴을 번갈아 가며 보았다.
이 여인은 지금 그의 겉모습을 보고, 인간의 적인 존재로 세인을 인식한 게 아니었다.
지금, 그를 한가지 잣대로 판단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
인간이라고 해서 상대를 무조건 이럴 거라고, 덮어놓으며 속단할 수 있는 게 아니듯이.
정작 상대와 속을 나눠보지 않으면, 상대에 대해 모르는 게 당연하다.
하지만 그걸 인간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자에게 적용한다는 건 실제로 어렵다.
보통 여인으로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이다.
보통사람은 이런 여성을 보고 미쳤다고 할 것이다.
원래 너무 일반인의 틀을 벗어난 시각은 미친 거로 보이니까.
“아기가 귀엽군요.”
그러자 여성이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아무리 봐도 가망이 없어 보이는 남편을 향해 다시 걸어갔다.
아기를 안고서….
그녀의 뒷모습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는데, 어느새 세리스가 그런 그의 뒤쪽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말했다.
“눈치 채셨군요.”
“조세핀이란 이름은 흔하지 않거든요. 귀족들은 그 이름을 당연히 피하고, 평민들은 쓸 엄두를 못 내죠. 그런 이름을 크게 부르는 남편 쪽이 멍청한 겁니다.”
“왕자비의 이름이었으니까요.”
세리스의 말에 세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세인은 알지 못했지만, 과거에 아비게일이 이렇게 말했던 적이 있었다.
세리스가 왕자의 청혼을 거절했다고 말이다.
가이더를 버리고 조세핀의 임신을 핑계 삼아 해외로 도망갔던 왕자는 결국 병을 얻었다.
불치병이었다.
그는 병석에서 끔찍한 고통을 매일 감당해야만 했다.
조세핀이 과부가 되는 것은 시간문제다.
그런데 그런 그를 대체 누가 노리는 것일까?
“네 계략은 훌륭했다.”
조세핀의 옆 방석을 겹치고 숨을 거칠게 몰아쉬는 왕자가 그렇게 말하자, 앞의 남자는 허리를 숙였다.
“고작 한번을 막아냈을 뿐입니다.”
그 남자는 바로 상단주로, 왕자를 보호하고 있었다.
가이더스의 왕자는 선대왕의 우려대로 타국에서 광대 취급을 당했다.
매일매일 모욕을 받았고, 조세핀은 그의 아내라는 이유로 그 모욕을 같이 나누어야만 했다.
그녀는 그냥 남편의 손에 이끌려 고국을 등졌을 뿐이다.
애초부터 선택권이 없었다.
그런데 왕자를 맡고 있는 나라에서 생각하기에 절호의 기회랄 수 있는 순간이 왔다.
몬스터들이 중앙에 모이니, 다른 곳은 당연히 공백 상태가 되었다.
그건 가이더도 마찬가지다.
많은 귀족이 죽고 주인 없는 땅이 넘친다.
중앙의 괴물들이 다시 위로 복귀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
그리고 오히려 변방의 소국에 수작질을 부리면, 손가락질할 눈도 드물다.
그래서 그들은 왕자를 가이더로 보냈다.
그리고 불탄 수도에서 왕위를 계승하는 동시에, 노는 공지들을 모조리 차지할 생각이다.
“그 작자들은 내게 약속했어! 대신 내 병을 치료할 공간과 재물을 제공해 주겠다고! 그런데 도중에 마음이 바뀐 것 같다. 고약한 놈들! 이제 믿을 사람은 너뿐이다. 나를 보호해라. 수도에 가면 상을 주겠다.”
누가 봐도 가망이 없어 보이는데, 뻔한 수작질에 놀아나는 왕자였다.
조세핀은 평소에 그런 그를 옆에서 말렸지만 돌아오는 것은 손찌검뿐이었다.
지금의 왕자는 믿었던 자들의 변심에 화가 나 있다.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상단주가 허리를 숙여 보이자 왕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오냐, 장하다. 과연 충신이로다.”
하지만 습격은 계속될 텐데, 과연 그가 막아낼 수 있을까?
적들도 바보는 아닐 텐데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