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은 왕 마검의 주인-74화 (74/307)

# 74

& 다시 시작되는 눈의 계절 (3)

여행 경로는 간단했다.

세리스가 온 길을 거꾸로 돌아가면 된다.

트리엔의 국경을 따라 옆으로 간 후, 가이더를 지나쳐 아래로 내려갈 것이다.

그리고 괴물들이 모인 중앙을 피해 둥글게 반 바퀴를 아래로 돈다.

물론, 그때의 거기 사정은 좋지 않을 것이고 습격을 받을 수도 있었다.

그래도 가능한 한 멀리 돈 다음 후방 쪽에 도착한다.

어떻게든 거기 인간들이 모인 곳에서 골디온을 찾고 그를 끝장내는 것이다.

계획의 주 골격은 이런데, 막상 어떻게 진행될지는 신이 아니니 알 수 없다.

어떤 변수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을까.

*  *  *

구멍.

세리스는 지금 구멍을 보고 있었다.

그런 그녀의 옆에서 세워놓은 말은 아주 침착하게 눈을 반짝이고 있다.

세인은 갑자기 말을 멈추고 구멍을 들여다보는 세리스를 방해하지 않았다.

대신 주위를 살폈는데, 주변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왜 그러죠?”

세인의 물음에 세리스가 대답했다.

“없어졌어요.”

“뭐가요?”

“지네가요.”

세리스는 바닥에 고인 초록색의 액체를 보며 생각했다.

다른 지네가 잡아먹은 것일까?

구멍 안은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깊었다.

일단 방패를 어깨에서 떼고 팔에 든 그녀는, 말에 다시 올라탔다.

그걸 본 세인도 그녀를 따라 했다.

“올 때 해치웠던 지네가 없어졌어요. 아무래도 주변에 포식자가 있는 것 같아요.”

가장 큰 걱정은 땅속에서 솟아오르는 거다.

그걸 그들이 피할 수 있다고 해도, 말들이 습격받으면 아주 곤란하다.

아랫배를 공격당하면 당연히 치명상이고, 말 한 마리를 버리면 짐은 두 배로 늘어난다.

그러면 예상한 이동 시간보다, 두 배가 아닌 세 배로 늘어난다.

이 추운 허허벌판에서 말이다.

세리스와 세인은 불어오는 바람 속에서 귀를 기울였다.

그렇게 얼마 가지 않아 발견한 것은 커다란 바위였다.

눈이 쌓여 하얀 바위.

“올 때 바위가 있었습니까?”

고개를 저은 그녀는 말에서 내렸다.

그리고 방패를 세운 채 앞으로 가는데, 금빛 머리가 뒤로 흩날린다.

그 상태로 눈을 움직여 아래를 보니, 바위 밑이 초록색 액체로 젖어 있는 것이 보였다.

‘배가 불러서 자는 거라면 그냥 멀리 돌아갈까?’

그런 생각을 할 때였다.

불현듯 바위가 쪼개지며 두 개의 머리가 솟아올랐다.

눈이 달린 원통형의 기둥이다.

그 기둥은 자신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곡선을 그리며 바닥에 충돌했다.

그 소리가 울려 퍼질 때 세인도 땅에 발을 디뎠다.

세리스는 꿈틀거리며 바닥을 쓸어오는 기둥을 뛰어넘으며 피했다.

동시에 방패를 옆으로 젖혀, 허공을 가로지른 다른 기둥을 막아낸다.

쿵 소리와 함께 그녀의 신형이 오른쪽으로 밀렸다.

옆으로 몇 바퀴 굴러 충격을 흡수한 그녀는 다시 방패를 들어 전면을 막았다.

그러자 숨 가쁘게 날아와 그 방패에 충돌한 기둥이 뒤로 물러났다.

두 개의 촉수를 뽑아내고도 선방을 하지 못하자, 바위는 완전히 몸을 일으킨다.

그리고 두 팔을 벌리며 위에서 촉수들을 분수처럼 뽑아내었다.

줄기줄기 솟구치는 촉수들은, 눈 대신 입을 가지고 세리스와 세인에게 달려들었다.

그때 처음으로 세리스의 방패 뒤에서 검광이 번쩍였다.

비스듬히 선을 긋는 하얀 빛에, 촉수가 잘려져 나뒹군다.

그 꿈틀거리는 것을 발로 걷어차며 세인이 앞으로 나섰다.

그는 검은 방패를 약간 돌리며 세 번의 공격을 막아냈다.

그리고 뒤를 흘낏 보고 상체를 숙였다.

그런 세인의 등을 밟고 위로 점프할 때, 세리스의 망토가 가파르게 펄럭이며 고개를 든 세인의 시야를 가렸다.

허공에 떠올랐다가 다시 아래 착지한 세리스는, 순식간에 방패를 들어 촉수 두 개를 막았다.

그리고 검을 들어 눈과 입들을 찍었다.

푹푹푹 소리가 짧게 울리고 마지막은 괴물의 가슴에 박아 넣는다.

그리고 위에서 아래로 내리긋는데, 초록색 상처가 그 길을 따라 입을 벌렸다.

허우적거리며 팔로 세리스를 낚아채려 했지만, 세리스는 이미 녀석의 허리를 가르며 뒤로 돌아간 상태다.

넓은 등판이 보였는데, 그 등판은 잘린 허리 때문에 아래로 추락하는 중이었다.

세리스는 침착하게 낮아지는 등을 밟고 올라, 검을 역수로 쥐었다.

그리고 다른 한 손을 검 자루 끝에 대고 힘껏 박아 넣는다.

우드득!

목등뼈가 나간 소리와 함께 괴물은 완전히 정지했다.

죽은 것이다.

세리스가 검날을 괴물의 몸에 대고 문질렀다.

달라붙어 있는 체액을 벗겨내기 위해서였다.

“올 때 이런 괴물들이 많았습니까?”

세인이 묻자 세리스가 고개를 저었다.

“중앙으로 괴물들이 몰리니, 오히려 다른 지역은 비었어요. 전처럼 반나절 이동하면 불쑥불쑥 나오는 일은 없어졌죠.”

무기를 집어넣은 둘은 다시 길을 재촉했다.

하얗게 보이는 태양이 설원의 아래쪽으로 가라앉으려 하자 식사를 준비했다.

세인이 일어나 망토를 벌리고 바람막이 역할을 하자, 세리스는 부싯돌을 부딪쳤다.

딱딱 소리가 나고 고동색 발화 종이에 불이 붙었다.

시간이 지나 둘은 마주 앉아 냄비를 구경했다.

세인은 주머니칼로 감자를 깎았다.

큼직큼직하게 말이다.

쪼그리고 앉아 그걸 보고 있던 세리스는 양념 주머니를 꺼내며 물었다.

“짜게? 아니면 싱겁게?”

세인은 일초의 고민도 없이 대답했다.

“짜게 하죠.”

끓는 냄비 안에 감자와 양파를 넣었다.

그리고 잘라낸 고기도….

마지막으로 양념과 사각형의 설탕이 들어갔다.

세인은 가방을 뒤적이며 치즈를 꺼냈다.

치즈는 돌처럼 굳어져 있었다.

그것도 냄비 안에 넣으려는데, 세리스가 말렸다.

“느끼해요.”

둘은 치즈를 품에 안고 웅크리고 있었는데, 말 들은 뒤에서 푸르르 소리를 내며 제자리걸음을 한다.

“두 세시간 정도 더 가야 하지만. 쉴 곳이 있어요.”

세리스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세인은 냄비 뚜껑을 열었다.

안에서 노릇노릇한 냄새가 풍겨 나왔다.

식는 걸 방지하기 위해 둘은 작은 그릇에 음식을 덜어 먹었다.

그래서 냄비 뚜껑은 필요할 때가 아니면 열리지 않았다.

배를 채운 두 남녀는, 허기가 날아가고 힘이 솟아오르는 기분이었다.

이제, 두 시간만 걸으면 된다고 하니 일어나야 할 때다.

그러면 별빛을 보며 잠들 수 있겠지.

…그때였다.

멀리에서 인간의 형체가 아른거린 것은.

세인의 손이 옆으로 다가갔다.

거기에는 검은 장검이 망토 자락에 덮여 누워 있었다.

그러나 세리스는 고개를 저어 보였다.

그녀의 눈짓에 세인은 물었다.

“아는 사람?”

“일단 그렇다고 해두죠.”

다가온 자는 삐쩍 마른 젊은 남자였다.

그는 아주 두꺼운 옷을 걸치고 있었는데, 연신 기침을 해댔다.

“오해하지 마시오. 난 사람이요. 대장장이지. 식사한 거요? 혹시 실례가 안 된다면….”

그러면서 남자는 세인을 살폈는데, 검은 두건을 눌러쓴 직후라 이상한 것을 발견할 수 없었다.

손에는 장갑을 끼고 있어, 유달리 창백한 피부를 알아볼 수도 없었고 말이다.

그때 세리스가 숟가락을 들었다.

그리고 냄비를 땅땅 때려 보았다.

그러자 누가 들어도 텅 빈 냄비 소리가 났다.

“그거 아쉽군.”

입맛을 다시는 남자는 등을 돌렸다.

미련 없이 떠나려는 것 같던 그때, 세리스가 물었다.

“어디로 가나요?”

“내 이름은 빌이고 동료들과 헤어졌소. 어디로 가는 게 아니라 근방에 있을 그들을 찾아야지. 그전에 내 물건부터 챙겨야 하겠지만.”

“그 물건이 뭔가요?”

“동화요. 지금 열 개의 동화가 있는데 한 닢만 더 찾으면 집에 가서 푹 쉴 수 있소. 지네에게 쫓기다가 하나를 흘려버렸지. 그게 있어야 도박 빚을 다 갚는다고.”

그 남자가 사라지고 난 후, 세인은 전보다 말랑해진 치즈를 들고 말에게 먹였다.

그리고 둘은 말없이 출발했다.

빌이 사라진 쪽의 반대 방향이었다.

얼마 가지 않아 그들은 옆으로 쓰러져 있는 남자의 시체를 발견할 수 있었다.

아까 만났던 빌이었다.

그의 손에, 아까 보여줬던 동화는 없었다.

등의 관통상을 보면 괴물에게라기보다는 같은 인간에게 당한 듯싶었다.

너무 얼어붙어서인지 괴물들도 먹지 않은 모양이다.

마치 바위처럼 굳어져 버렸으니까.

죽은 지 아주 오랜 시간이 흘렀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말들은 빌의 시체 옆을 천천히 지나쳐갔다.

그 위에서 세리스가 말했다.

“제가 올 때는 동화 아홉 닢이었어요. 그래서 한 닢을 그에게 줬죠. 그런데 그는 이제 열한 번째 동화를 찾고 있네요.”

불쌍하고 탐욕스러운 빌의 시체를 뒤로하고, 둘은 두시간 정도의 강추위를 더 견뎠다.

그리고 도착한 곳은 비스듬히 아래쪽으로 파인 동굴이었다.

그 안에 들어가 말들을 쉬게 하고 모포를 바닥에 깔았다.

이미 하늘은 어두워지고 별들이 깔린 지 오래였다.

이제 조금만 더 가면 눈의 허리띠 지역이 끝난다.

세리스는 모포 속에서 몸을 녹이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다.

그중에는 야만족들의 왕이 나타났다는 소리도 있었다.

황폐해진 땅 위로 다시 사람들이 모인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살기 위해서 뭉치고, 뭉친 집단을 정복하기 위해 뭉쳤다.

이익을 위해 다시 돌아온 사람들도 있었고, 다른 국가에서 유입된 난민들도 있었다.

그런 북부와 남부는 지금 혼란 상태다.

동굴 밖으로 부는 바람 소리가 거칠게 고막을 자극했지만, 동굴 안은 아늑했다.

그리고 동굴 밖에서 보이는 밤하늘에, 제자리를 찾아간 별들이 아찔하게 반짝인다.

“땅콩 드실래요?”

세리스는 그렇게 한번 예의상 묻고 부스럭거리더니, 땅콩을 입에 넣고 씹었다.

그 군것질하는 소리를 들으면서 세인이 뒤늦게 대답했다.

“아뇨.”

세상에서 제일 눈치 없는 사람이 바로 뭐 먹을 때 말 거는 사람이다.

지금의 세인처럼….

“왜 홀리 레이크로 돌아가지 않았습니까? 성국이라면 당신을 대환영할 텐데.”

세리스는 두 손으로 머리를 받치고 대답했다.

“거기에서 저는 성장할 수 있었고 많은 은혜를 받았죠. 언젠가는 꼭 갚아야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제 고향은 아니잖아요. 저는 고향을 져버렸어요. 그 죗값은 영원할 겁니다. 사실 이제 죄인이 된 몸으로 어디를 가야 할지 모르겠어요.”

“….”

“진지한 말이 나온 김에 하나 물어봐도 될까요?”

“예.”

“가이더의 깃발도, 영주님의 깃발도 안 보이던데…. 영주님의 가슴 속에서 이제 가이더와 그곳에서 받았던 직분은 없는 겁니까?”

여러모로 대답하기 곤혹스러운 질문이다.

세인은 고개를 돌려 세리스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별을 바라보고 있는 그녀의 눈꺼풀은 반쯤 감겨 있었다.

어쩌면 잠이 들려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녀의 하얀 피부는 어두운 동굴 안에서 두드러져 보였다.

그리고 분홍빛 입술과 하얀 치아.

콧날과 목까지 이어지는 선은 화가가 놀린 붓끝의 획 같았다.

“명망 있는 군주에게 투신하십시오. 당신의 재능을 썩혀서는 안 되는 겁니다. 그건 인간들에 대한 또 다른 배신이에요. 무너진 가이더에 죄책감이 있다면…. 그걸 갚는 방법은 당신의 능력을 사회에 봉사하는 것이죠.”

세리스는 고개를 천천히 옆으로 돌렸다.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 전체가 그에게 향하는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 조금 전까지 별빛을 담았던 호수 한 쌍이 반짝였다.

그렇게 눈동자를 빛내며 세리스가 속삭였다.

“당신은 이제 언데드잖아요. 그런데 왜 인간 걱정을 하는 거죠?”

세인은 상체를 약간 들어 올려 얼굴을 그녀 쪽으로 향했다.

그리고 세리스는 조용히 그걸 기다리고만 있었다.

설마 지금 키스를 하려는 것일까?

이렇게… 갑자기?

그렇게 점점 다가오던 세인의 얼굴은 갑자기 위로 향한다.

그리고 머리맡의 촛불을 불어 훅하고 불어 꺼버렸다.

그와 함께 일종의 기대감도 같이 꺼져버린다.

이제 동굴에는….

쥐죽은 듯한 정적이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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