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3
& 다시 시작되는 눈의 계절 (2)
검날은 검은색이었고, 엄청나게 단단해 보였다.
손가락으로 튕겨보니 청명한 소리와 울림이 따라왔다.
장검의 무게중심도 좋았다.
그 장검을 들고 위로 던져 좌우로 돌려보던 세인은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먼곳에 있던 마플은 마차 밖에 누가 서 있는 것을 알아차렸는지, 서둘러 차를 두 잔 가져다주었다.
그리고 개조한 마차의 뒷문으로 빠져나갈 때, 마침 심호흡을 한 세리스가 문을 열고 들어온다.
그녀는 여전히 아름다웠다.
성기사의 기준이 외모는 아니겠지만, 날개만 달렸다면 빛의 천사라고 해도 믿어줄 정도다.
그러니까 더욱 그녀의 얼굴이 필요하기도 하다.
그녀의 미모는 사람들에게 같은 인간으로서 호감을 주었고, 동시에 쉽게 접근할 수 없는 거리감도 주었다.
게다가 실력은 또 어떤가?
여행자가 아니라도 그녀를 욕심낼만하다.
그녀는 세인의 앞에 앉은 후 찻잔을 들어 올렸다.
그러다가 너무 뜨겁다는 것을 알고 내려놓았다.
“오래간만입니다.”
“이제 여긴 추운 지방도 아닌데 뜨거운 차는 필요 없지 않나요.”
세리스가 찻잔을 만지작거리며 그렇게 묻자 세인은 버릇이라고 답했다.
그리고 다시 흐르는 불편한 침묵.
세인은 알 수 없었지만, 세리스는 적개심보다는 일말의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녀는 결국 고국의 위기에서 등을 돌린 입장이다.
이제 언데드로 변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녀가 과연 그를….
악과 결탁했냐고 꾸짖을 자격이 있는가?
그 외에도 여러 생각이 파도쳤지만, 가장 혼란스러운 것은 자신이 왜 여기까지 찾아왔냐는 것이다.
상대가 여기 왜 왔냐고 물으면 뭐라고 답해야 할까?
“동료인 아비게일을 찾으러 오셨습니까?”
“예. 그렇습니다.”
세리스는 과도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을 표시했다.
“그는 여기에서 이곳 생활에 적응한 거 같던데요.”
세인의 입장에서는 각성자인 아비게일이 이곳을 벗어나 돌아다니다가, 몬스터에게 납치되면 좋아질 게 없었다.
“저를 원망하더군요.”
“원망이라… 사랑도 중요하지만, 깨끗한 이별도 중요한 겁니다. 어떨 때는 맺음이란 게 시작이나 과정보다도 더 중요하죠.”
세리스는 입꼬리를 움찔거렸다.
상대는 뭔가 큰 착각을 하는 것 같았다.
그런데 여기서 정색하며, 그런 관계가 아니라고 손사래 치는 것도 굉장히 이상하다.
무엇보다 그럴 분위기도 아니었고.
“그, 뭐…. 전에 봤을 때보다 키가 많이 자라셨군요.”
“….”
세리스가 꺼낸 물음은 너무나 보잘 것 없는 것이었다.
세인은 그녀에게 시간이 필요한 거 같아, 바이올린을 집어 들고 활로 그것을 켰다.
선명한 선율이 마차 안을 가득 채운다.
아름답지만 음울한 분위기의 곡이었다.
낮은 음조 속에서 세리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너무 나눠야 할 말이 많으니까 오히려 이런 상황에서 생각이 떠오르지 않는다.
그래서 너무 일상적인 주제만 다시 꺼내놓았다.
“비좁은 마차 안이 불편하지 않으신지요?”
“차가운 돌성보다는 심리적으로 편합니다. 지금은 모험가 신분이신가요?”
“예. 뭐 그렇다고 할 수 있죠.”
바이올린 선율 속에서 세인과 세리스는 말을 나누었다.
그리고 그 곡이 끝났을 때 작은 바이올린을 탁자 위에 내려놓는 세인이다.
그는 단도직입적으로 말을 꺼냈다.
“그렇다면 제가 당신을 고용해도 될까요?”
세리스는 두통이 일어나는 것을 느꼈다.
상대는 언데드였다.
대체 누가 누구를 고용하겠다는 건가?
그녀가 찻잔을 들고 식은 차를 입에 넣는데, 세인이 상체를 뒤로 젖히고 다리를 꼬며 말했다.
“나랑 같이 골디온을 죽이러 갑시다.”
“푸흡!”
결국 세리스는 입에 머금고 있던 찻물을 뱉었다.
세인은 그걸 또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자 캑캑거리며 민망해 하던 그녀가 손수건을 꺼내며 물었다.
“골디온이요? 설마 남쪽에 있는 그 영웅 말씀하시는 건가요? 그 골디온이요? 골디온이란 이름은 흔한 게 아닌데….”
손수건으로 입가를 훔친 세리스가 두 손을 맞잡으며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그러니까 우리 정리해 보죠. 당신의 과거는 제가 잘 압니다. 그리고 그런 점에서는 일말의 존경스러운 마음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과 작금의 현실은 별개입니다. 요약하자면, 지금 언데드이신 당신이 선과 빛을 섬기는 성기사인 저에게…. 같이 손을 잡고 인간들의 영웅인 골디온을 죽이러 가자 말씀하시는 겁니까?”
“죽이는 게 내키지 않으시면 동행까지만 해도 됩니다.”
“그러니까 왜요. 왜 제가 그걸…. 아니 그게 가능하다고 생각하세요? 희롱하려는 의도가 아니라면… 무엇보다도 정말로, 그 제안에 제가 동의할 거로 생각하세요?”
세인은 정색하는 그녀의 얼굴보다 그녀의 허리춤에 걸려 있는 검을 보았다.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말이다. 그리고 대답했다.
“네.”
* * *
마플은 검은 개를 안아 들곤, 이리저리 돌아다니고 있었다.
바로 세인의 마차 근처에서 말이다.
안의 대화를 엿듣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은데, 차마 그럴 수는 없고….
그녀가 안은 검정 개만이 이리저리 달랑달랑했다.
개는 아무래도 좋은 표정이었다.
하품까지 하면서 말이다.
“진정하시오. 그러다가 넘어지겠소.”
“궁금하지도 않으세요?”
“뭐 궁금하긴 하지.”
맥이 뒤통수를 긁자, 마플은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잘되었으면 좋겠어요. 제발요.”
맥의 생각으로는, 마플이 생각하는 것처럼 연분홍빛 대화가 안에서 이루어지진 않을 것 같았다.
그러나 여기에서 그녀의 기대를 깨 놓는 것도 못 할 짓이라, 그냥 잠자코 있었다.
그런데 마플은 대꾸 없이 무기를 닦고 있는 맥에게 벌컥 성을 냈다.
“지금 무기가 눈에 들어오세요? 중요한 순간이라고요! 이렇게 다들 무덤덤한 사람들 천지니, 후계자가 생길 리 있겠어요?”
“상대는 인간이라니까.”
“우리도 마음은 인간이에요!”
“내 말은 그게 아니라….”
그때 마차 문이 벌컥 열리며 세리스가 나왔다.
그녀는 누가 봐도 극도로 혼란스러운 표정이었다.
막무가내식 ‘용건만 간단히 화법’으로 인해 그녀는 충분히 당황하고 있었다.
울타리 쪽으로 따라 걸으며 마플이 손을 뻗었다.
그리곤 ‘거긴 문이 없는데….’라고 말하려 할 때, 세리스는 그 울타리를 훌쩍 뛰어넘었다.
그리고 뚜렷한 방향도 없이 비틀비틀 걸어갔다.
누가 봐도 깊은 고민에 빠진 상태였다.
“아니 좋은 문 놔두고 왜 저런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보는 둘도 혼란에 빠졌다.
무슨 이야기를 한 거야?
하지만 그렇다고 세인에게 달려가서 물어볼 수도 없는 일이다.
그리고….
이주일이 지났다.
세인은 여행준비를 했다.
같이 가겠다는 사람은 많았지만, 동행인은 적을수록 좋았다.
“때가 되면 어련히 부르겠어? 내 생각에는 여기에서 더 훈련을 하는 게 좋을 거 같아.”
맥이 망설이다가 말했다.
“소수일 때 정체를 숨기는 게 용이한 건 알지만, 더이스라도 데려가시죠. 수행인 하나도 없이 어찌 여행을 하시려고요?”
세인은 징이 잔뜩 박힌 가방에 여러 물건을 넣고 단추를 잠갔다.
그리고 맥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는 정말로 걱정하는 표정이었는데, 세인은 손짓으로 그를 가까이 앉게 했다.
그리고 부드럽게 말했다.
“정말 모르겠나? 나는 강하고 적은 바깥에 있어. 그리고 그들만 없어진다면 결국 내가 어떻게 돼도 상관이 없지. 왜냐고? 내겐 뒤를 맡길 수 있는 동료가 있으니까. 우리 솔직하게 이야기해 보지. 평화의 시대라면 비비안이 통치를 잘할 거 같나. 아니면 내가 통치를 더 잘할 것 같나?”
맥은 무거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런 평가는 저로선 생각만으로도 불충입니다. 저는 당신의 기사이며 밖의 병사들은 당신의 것입니다.”
세인은 일어나 창문을 열어젖혔다.
밤하늘 아래로 불을 밝힌 집들이 가득 차 있는 게 보인다.
“여기는 평화롭지. 다들 행복해하고 겨울도 없어. 나는 그들의 병사를 원하지만, 그 병사들은 결국 그들의 아들이자 남편이야. 할 수 없는 거야. 나는 도저히 방법이 없기 때문에, 그들의 희생을 다시 강요하고 있지.”
“세인님.”
“밖에서 일이 잘 풀릴지도 몰라. 잘못돼도 괴물과 골디온만 없어지면 여긴 천국이나 마찬가지야. 코다로님은 선두에서 용감히 싸우지. 그의 전투력을 의심할 수 있나? 과거의 난폭한 단점도 많이 없어졌어.”
“한때는 그런 점이 마음에 든다고 하셨지요.”
세인이 웃었다.
“내 말은, 그는 나름대로 중도를 찾았다는 이야기야. 전투에서는 그를 완전히 믿을 수 있어. 비비안이야 내치에서 기대 이상을 해낼 거고. 그녀는 왕이 갖추어야 할 중심을 지녔어. 두 사람이 이 비옥한 땅에서 서로 협력하면 어떻게 될까?”
“….”
“이게 이 공동체가 가진 차별성이야. 우리는 좋은 지도자들도 있고, 그 지도자는 서로 협력할 수 있어. 이런 건 괴물들에게는 찾아볼 수 없는 것이지. 잘못 되도 내겐 믿고 뒤를 맡길만한 배후가 있다고, 그들은 언제 어디서든 잘 할 거야.”
복잡한 얼굴의 맥 앞에서 세인은 다시 말했다.
“전쟁을 준비하고 실력을 더 길러. 그래서 나쁠 것이 있나? 그리고 간만에 찾아온 이 평화를 즐겨봐. 당신들은 그럴 자격이 충분히 있어. 그게 아니더라도 여기에서 출발할 일이 없다면 더욱 좋지.”
세인은 마른 입술을 혀로 한번 핥곤 다시 입을 뗐다.
“그러다 운이 좋다면 이상적인 공동체를 만들 수 있을지도 몰라. 알고 보면 다크 엘프도 그렇고, 드워프도 좋은 이웃이야. 우린 앞을 생각하지만, 뒤도 생각해야 하는 거야. 생각할 수 있는 많은 수를 고려해 봐야지. 난 이 암살에 기필코 성공할 거야. 그런 마음으로 출발하는 거야.”
“영주님. 제발….”
“당신은 현재 기사 단장이나 마찬가지이지 않은가? 내가 없다면, 누가 대신 멀리 보고 뒤를 생각해야 하지?”
침묵을 유지하던 맥은, 변함없는 눈빛으로 입을 뗐다.
“저는 최선을 다해 전쟁을 준비하겠습니다. 오로지 그게 제가 여기에서 할 일입니다. 그리고 부르시면 달려가겠습니다. 골디온을 죽이고 돌아오실 때, 만나야 하는 것이 바로 영주님의 부하들입니다.”
“….”
세인은 두건이 달린 검은 망토를 두르고 쇠 구슬이 박힌 벨트를 허리에 찼다.
그리고 단검과 장검을 챙기고, 건틀렛도 착용하였다.
방패는 너무 큰 걸 피했다.
싸울 땐 좋지만 이동할 때는 거추장스러우니까.
벌꿀과 호두를 짓이겨 만든 젤리들이 가득 담긴 통.
그리고 물주머니 외에도 가져갈 것이 많았다.
“이럴 때는 마법 주머니가 있었으면 좋겠어.”
“동화 같은 말씀을 하시는군요.”
검은색 옷에는 은색 브로치가 매달렸다.
평민 신분이 아니라는 인상을 줄 것이고, 때론 비상금으로 쓰일 것이다.
물론, 안주머니에는 재칼이 언제인가 눈치를 보며 바친 다이아몬드가 들어 있었다.
그게 바로 여비다.
장화를 신고 밖으로 나와 보니, 동그란 물통 위에 앉아 있는 세리스가 보였다.
그녀는 하얀 장갑으로 반짝이는 뭔가를 굴리며 깊은 생각에 잠긴 눈치였다.
등을 약간 구부리고 있는 세리스의 옆모습은 매혹적이었다.
그녀는 세인이 의뢰비로 준 에메랄드 반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걸 그녀에게 선뜻 넘겨줬다는 뜻은 뭘까?
영주였던 과거에 얽매이지 않는다는 뜻인가?
아니면… 그냥 말 그대로 의뢰비인가?
세리스는 당장이라도 세인에게 물어보고 싶었다.
지금의 당신에게 있어 가이더의 의미는 뭐냐고 말이다.
하지만 나라에서 도망친 변절자나 마찬가지인 자신이….
그런 질문을 던지기엔 힘이 들었다.
“준비됐습니까?”
“저야 여기 왔던 그대로 떠나가면 될 일이죠.”
세리스의 얼굴을 보며 세인은 말했다.
“너무 혼란스러워하지 마십시오. 마지막에 아니다 싶으면 당신이 제 등을 찌르면 될 일입니다. 언데드가 인간의 영웅을 죽이려 할 때, 그 위기를 타개하는 것은 성기사의 본분에 맞겠죠. 생각해 보면 미리 이런 음모를 알고 저지하기 위해 동행한다는 게 얼마나 좋은 일입니까.”
세리스는 그의 말에 동의해서라기보다는, 그냥 피곤해서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이주일 내내 아비게일에게 배신자란 소리를 들으며 시달린 것도 있고, 요즘 생각을 하도 많이 했더니 만성 편두통이 생길 판이다.
사실 쟁점이 된 것은 아비게일을 데려가느냐 마느냐였다.
영지민 중 인간 대장장이인 잭은, 연장을 만들어야 해서 젖혀두어도….
아비게일은 마법사다.
인간이고 말이다.
하지만 세리스는 반대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아비게일은 쓸 만한 마법사지만, 짐짝으로도 끝내줬기 때문이다.
무슨 일만 터지면 기절하는데, 사실 거기에 들어가는 신경이 장난 아니었다.
뒤로 넘어가는 사람 받아주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그래서 결국 두 사람만 떠나게 된 것이다.
그들은 세인의 말인 흑마를 놔두고, 빅풋이라는 품종의 말에 탔다.
빅풋은 어깨가 넓고 다리가 짧은 우람한 말이다.
달리는 속도는 기대할 수 없지만, 대신 지구력이 장난 아니고 충직했다.
번우드의 주민들은 모조리 밖으로 나와서, 세인과 세리스가 떠나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거기에는 비비안은 물론, 코다로도 섞여 있다.
“다녀오세요. 가급적이면 빨리.”
“그날을 준비하고 있겠습니다.”
그들의 배웅에 세인은 답례했다.
“생각보다 오래 걸리진 않을 겁니다.”
그때 세리스는 서 있는 아비게일과 시선을 맞추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원망스러운 눈빛을 보내고 있는 아비게일은 아직도 삐쳐 있었다.
두 사람을 태운 빅풋 두 마리는 천천히 움직였다.
그러면서 점점 멀어져 가는데, 갑자기 세인이 탄 말은 획 하고 반 바퀴를 돌았다.
그리고 다시 약간 돌아와, 서 있는 비비안에게 뭔가를 요구했다.
“비비안님. 제가 다시 돌아왔을 때 꼭 왕관을 쓴 모습을 보여주십시오.”
그녀는 여태까지 크릭이 선물한 왕관을 한 번도 쓰지 않았기 때문이다.
마치 앞으로도 전혀 그럴 일이 없다는 듯.
세인의 말에 비비안이 사람들 사이에서 활짝 웃었다.
가능한 떠나는 자의 부담을 덜어주려는 억지웃음이었다.
“기꺼이.”
손을 흔드는 사람들을 뒤로하고, 그렇게 세인과 세리스는 여행길에 올랐다.
그 여행은 골디온을 죽이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