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은 왕 마검의 주인-72화 (72/307)

# 72

& 다시 시작되는 눈의 계절 (1)

눈이 가득한 공간에 작은 눈 덩어리가 뭉쳐서 서 있었다.

언뜻 보면 바위인 듯도 싶다.

그런데 넓고 평평한 곳에 바위가 오직 한 개라는 게 너무 튀어 보이기도 한다.

그 바위는 스스로 움직였다.

그것이 갑자기 위로 일어나면서 눈덩이가 부서지고 아래로 굴러떨어진다.

하얀 망토가 흔들거리고 남은 눈더미는 완전히 흘려냈다.

마지막으로 아름다운 금발 머리를 털던 그녀는 바로 세리스였다.

하얀 설원에 앉아 깜박 잠들었던 세리스는 조금 전까지 무서운 꿈을 꾸었다.

어떤 노파가 고문당하며 몸부림치는 것을 꿈속에서 본 것이다.

괴물들은 그 노파에게, 불에 달군 인두로 장난을 치고 있었다.

그러자 얼굴이 피투성이인 노파는 끊임없이 날카로운 소리를 질렀다.

크림힐트가 연상되는 것은 우연일까?

“그냥 개꿈일 뿐이야.”

그렇게 중얼거리며 그녀는 자신의 금발에 엉겨 붙은 얼음을 털었다.

그리고 큰 보폭으로 걷기 시작했다.

그녀는 현재 트리엔의 위쪽에 있었는데, 날씨가 참 궂었다.

심심찮게 진눈깨비도 날리고 해서 그녀의 머리는 개털처럼 끝이 갈라졌다.

얼마나 걸었을까.

세리스는 발걸음을 멈추고 귀를 기울였다.

어디선가 물이 흐르는 소리가 난다.

마침 물통도 비었는데 잘됐다 싶었는데, 그 전에 넘어야 할 관문이 있었으니.

바닥이 흔들리며 뭔가가 솟구쳐 올랐다.

뜨거운 김을 뿜어내던 그것은 지네에 가까웠다.

그 흉측한 모습을 보며 그녀가 검을 뽑으려고 하자, 덜그럭거리는 소리만 난다.

‘성에로 인해 검이 얼어붙었네.’

아쉬운 대로 검집 채로 뽑아 휘두르니, 그것에 맞은 놈의 성질만 돋우었다.

검을 잘 쓰는 그녀였지만, 오랜 추위에 몸이 굳어 있어서 매끄러운 움직임이 나오지 않았다.

괴물은 머리를 움직이며 긴 촉수를 휘두르는데, 그걸 뛰어넘은 세리스가 힘껏 검집을 세로로 내리쳤다.

그것을 머리에 정통으로 맞자 몸을 빙빙 돌리더니 쿵 소리를 내며 쓰러지는 지네였다.

벌려진 입으로 초록색 액체가 흘러나왔다.

김을 펄펄 내는 그 액체를 메슥거린다는 표정으로 바라보던 그녀가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검집을 허리춤에 넣으며 분홍색으로 얼어붙은 손가락을 보았는데, 문득 ‘내가 뭘 하는 거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언 손바닥을 녹이려 호호 불다가 피식 웃어 버렸다.

그녀는 이상한 끌림에 의해 방향을 잡아서, 여행을 계속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녀의 피는, 동류의 피를 찾는 훌륭한 나침반 역할을 하는 거 같다.

그래서인지 방향을 잃지 않고 세계수 지역에 도달할 수 있었다.

아주 넓은 개울을 어떻게 건너갈까 고심하고 있는데, 바위들이 느릿느릿 움직이고 있었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물달팽이들이다.

커다란 달팽이 위에 앉은 세리스는 속도를 포기하고 신발이 젖지 않는 길을 선택했다.

“이봐 더이스.”

“예?”

“오늘 나 좀 이상해.”

“원래 이상하셨잖아요.”

그게 뭔 대수냐는 듯 고개를 돌리던 더이스의 어깨를 행크가 잡았다.

그리고 그가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너도 저거 보이냐?”

“으음….”

더이스도 심각한 표정으로 자신의 턱을 장갑 낀 손으로 쓰다듬는다.

멀리에서 엄청난 미녀가 이쪽을 향해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제가 보는 환상. 행크님도 보여요?”

“그래. 엄청난 미녀인데? 그런데 언제 한번 봤던 것 같기도 하고….”

더이스는 손을 번쩍 들고 흔들어 보았다.

그리고 행크에게 물었다.

“지금 미녀가 뭘 하는 거로 보이세요?”

“너 따라서 손 흔드는데?”

“아. 환각 아닌 거 같은데요.”

그런데 문제는 상대가 인간처럼 보였다.

바람도 쐴 겸 번우드 외곽으로 나왔던 둘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  *  *

세리스는 천리안의 도움을 받아 목적지를 잡고 왔다.

그리고 피의 끌림을 받았다.

그 외에 여러 가지 복합적인 작용이 있었을 것이다.

예를 들면 가문에서 벗어나고 싶은 것….

하지만 그런 것은 본능이나 그녀 밑바닥에 가라앉아 작동하는, 무의식 같은 것이었다.

이성적으로 보면 그녀에게 있어 번우드의 주민들은 당연히 괴물이고 증오해야만 한다.

그러나 그녀는, 멀리에서 웃고 떠드는 주민들을 보며 혼란스러움을 느꼈다.

소리를 지르며 죽이겠다고 달려오는 게 아니라, 그녀를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바라보는 소년 소녀들도 있었다.

입구에서부터 그녀를 마을 안쪽으로 안내하는 자는 인간 대장장이 소년인 잭이었다.

그는 세리스가 흥분하지 않도록 친절하게 굴며 동행했다.

“저분인가요?”

“입구에서 자기 신분을 밝혔다고 합니다.”

발코니 쪽에서 선 존재들은 위에서 세리스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비비안과 코다로 그리고 크릭까지 말이다.

크릭은 돌아가는 상황을 몰랐지만, 그냥 잠자코 있었다.

비비안과 코다로는 세인에게 미래에 대한 이야기를 소상하게 들었다.

그리고 그녀가 세인이 말한 ‘세리스’라면, 좋은 감정이 들 수밖에 없었다.

최소한 그녀가 어떤 유형의 인간인지는 안다.

성품도…. 아니, 다짜고짜 검을 쓰지 않으리라는 것도 알고.

하지만 저 여성의 입장에서는 지금 얼마나 황당할 것인가?

“만만치 않은 검사처럼 보이는데 저 인간을 여기에 들여도 되는 거요? 검을 휘두르면 어쩌려고? 아니 그보다 당신들은 대체…. 본인들이 언데드라는 자각이 있소?”

그리고 드워프 입장에서 이렇게 언데드를 대신 생각해줘야 해?

크릭의 우려 섞인 발언에도 불구하고, 비비안과 코다로는 저희끼리 속닥거렸다.

“잘되었군요. 전력에 보탬이 될 텐데, 인연은 인연인가 봅니다.”

“이번 생에서는 이루어질 수 있을까요? 저 간절한 사랑이?”

“아직은 간절한 사랑은 아니겠죠. 지금까진 딱 한 번 봤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저희끼리 열심히 속닥거리는 비비안과 코다로 옆에서 크릭이 끙 소리를 냈다.

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그런데 모두가 예상하지 못한 순간이 도래했다.

그건 바로 어떤 만남으로 인한 것이었다.

높이 솟아오른 백색 성의 위쪽을 바라보다, 시선을 내린 세리스는….

자기 생각을 잘 정돈하기도 전에, 세상에서 가장 음울한 기운과 마주쳤다.

그건 바로 부들부들 떨며 서 있는 아비게일이었다.

눈에 눈물을 가득 머금고 있는 아비게일을 본 세리스는, 당연히 그가 이 갑작스러운 만남을 기뻐하는 줄 알았다.

그런 세리스가 반색하며 소리쳤다.

“아! 아비게일! 무사하셨군요!”

다행히 인간인 상태고 말이다.

하지만 아비게일 입장에서는 전혀 반갑지 않았다.

그는 한동안 충격받아 멍청한 상태에 빠졌다가, 가까스로 길 위에 올라온 것이었다.

혼돈, 짜증, 어이없음, 황당, 원망 기타 등등….

온갖 감정이 그의 가슴 속에 소용돌이쳤다.

그것은 목구멍에서 울분으로 승화되었다.

아비게일은 너무 억울하고 서운한 마음에 다짜고짜 소리를 질렀다.

원래 이런 성격이 못 되는데, 그동안 하도 맺힌 게 많아서 어쩔 수가 없었음이다.

“세리스님! 대체 제게 무슨 짓을 한 거예요!”

그의 외침은 주변을 뒤흔들었고, 주민들은 예의 바른 청년의 처음 보는 모습에 흠칫하며 뒤로 물러났다.

“예? 아비게일, 어… 어쨌든 만나서 반가워요.”

다가서는 세리스에게서 뒤로 물러난 아비게일은 도리질을 쳤다.

그리고 양손으로 자신의 몸을 감싸 안고 울분을 계속 토해냈다.

그러면서 세리스가 악수하자고 내민 손을 자신의 손으로 탁하고 쳐버렸다.

“물어내요! 물어내! 내 인생을 물어내!”

아니 그걸 내가 왜 물어내?

세리스는 잠시 어리둥절해졌다.

“….”

“당신은 양심의 가책도 없어요? 이 잔인한 사람!”

발까지 동동 구르며 우는 아비게일을 보자 주변이 괜히 숙연해졌다.

아니 왜 숙연한 거야?

멍청히 서 있는 세리스의 귀에, 주민들이 속닥거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설마 이거 그거야?”

“그럼 이게 이거지 저거겠어? 넌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해?”

“평소 저 착하고 온순한 총각이 왜 저렇게 길에서 울부짖겠어. 아무 이유 없이 저러겠어?”

“여자가 이쁘게 생겼는데 얼굴값을 하느라 바람둥이인 모양이야.”

“어지간하면 저 소심한 총각이 저렇게는 안 하는데, 오죽하면…. 쯧쯧.”

“어휴! 순정을 꾀어서 희롱하는 바람둥이들은 다 씨를 말려야 해.”

작게 속삭이며 집으로 들어가는 주민들과 길바닥 위에 엉엉 울며 무릎을 꿇는 아비게일.

그의 얼굴에서 닭똥 같은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그러니까, 세리스는….

지금 자신이 뭔가, 굉장히 몹쓸 사람이 된 느낌을 받았다.

아니 따지고 보면 정말 그런가?

망치로 한 대 맞은 표정의 그녀는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한다.

아비게일은 계속 엉엉 울었고 말이다.

아비게일에게는 한 맺힌 속을 푸는 현장이었고, 세리스에게는 불유쾌한 오해가 계속되는 가운데….

코다로는 이 광경을 내려다보며 진지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뭐야? 삼각관계야? 이런 건 이야기에 없었잖아?”

비비안도 약간 멍한 표정이었다.

*  *  *

어쨌든 아비게일을 끌고 가다시피 해서 그의 집으로 들어간 세리스는, 동료로서 용서를 빌었다.

아주 싹싹 빌자 아비게일의 마음도 좀 풀어지는 듯이 보였다.

세리스는 번우드의 정보를 얻고자 아비게일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아비게일이 줄 수 있는 핵심정보는 거의 없었다.

중요한 순간, 그는 잭과 함께 정찰 때문에 마을을 떠나 있었었으니까.

그다음은 뭐 이러쿵저러쿵해서 여기에 정착한 것인데, 그중 말도 안 되는 이야기도 있었다.

세리스는 약간 측은한 얼굴로 아비게일을 바라보며 입을 연다.

“하루 만에 하얀 성이 생겼다고요? 저 성이?”

그녀의 손가락은 창문 밖의 성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러자 얼굴에 눈물 자국으로 가득하던 아비게일이 손수건에다가 코를 풀며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그때는 얼마나 놀랐는지… 어휴.”

세리스는 혀를 차며 말했다.

“아비게일. 물론 저도 죄송한 마음이 있지만, 그와는 별개로 아닌 건 아닌 거예요. 정신 좀 차리세요. 세상에 대마법사는 없어요. 그런 건 동화책에서나 나오는 거예요. 저런 시설이 하루아침에 생겼다고요? 무슨 창고를 짓는 것도 아니고, 그건 불가능해요. 정말 괜찮은 거예요?”

그녀도 눈치채지 못한 사이에 대마법사로부터 성검까지 구입한 마당이지만, 본인이 그걸 알 리가 없었다.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자신의 얼굴을 들여다보는 세리스를 보며, 아비게일은 울컥하는 심정이 되었다.

버리고 갈 땐 언제고, 지가 언제부터 나를 걱정해 줬다고 이런 안쓰러운 얼굴이란 말인가?

그리고 하루아침에 성이 생겼다는 그의 말은 사실이지 않은가?

그는 사실을 사실이라 우기고 싶은 일곱 살짜리 꼬맹이가 되었다.

“진짜입니다. 진짜라고요. 하루 만에 생겨나 있었습니다. 주민 모두가 아는 사실이에요!”

“아, 예….”

세리스는 뭔가 피곤하다는 표정으로 아비게일을 바라보았다.

미안한 건 미안한 거고, 허황한 건 허황한 거다.

그래서 조심스럽게 물었다.

“요새 술 하세요?”

“….”

답답한 아비게일은 자신의 가슴을 펑펑 쳤다.

아 세리스 당신은 정말….

*  *  *

세인은 마차에서 바이올린 연습을 하던 중에 비비안과 코다로의 방문을 받았다.

그리고 누가 번우드에 방문했는지 알게 되었다.

“이건 좋은 기회입니다. 골디온을 찾는 게 수월하겠군요.”

최근에 그들이 테이블에서 나눈 의견들은 이렇다.

괴물들도 문제지만, 다른 중요한 건 바로 골디온이었다.

괴물들을 처치해도 저 간악한 인간의 배신자는 언제든 음모를 꾸밀 수 있었다.

게다가 처치하기도 훨씬 까다롭다.

인간을 방패 삼고 있었는데, 자신들은 인간들에게 있어 어둠의 자식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들이 인간들 앞에 나서서 뭐라 주장한들, 인간들이 믿어줄 리가 없었다.

이제는 공신력 이전에 공격받는 것을 우려해야 할 처지다.

그렇다고 드워프가 나서서 인간 사회에 영향을 끼칠 수 있을까?

눈에 보이는 괴물들도 무서운 적이지만, 인간들 틈에 섞인 골디온이 정말 골칫거리였다.

게다가 그의 얼굴도 모른다.

하지만….

찾아내서 제거해야만 했다.

그 과정에서 군대를 끌고 갈 수 없는 노릇이었고….

결국, 그들은 더러운 방법인 암살에까지 생각이 미쳤다.

“침략에, 암살에…. 밑바닥이군요, 우리는.”

그런데 암살도 쉬운 게 아니었다.

어떻게든 인간들 틈에 섞여야 하는 거니까.

“잭이라는 소년은 한번 전투에 참여했고 정찰도 해냈지만, 이번 일에 참여시키기에는 무리가 있습니다. 이건 쉬운 일이 아니니까요. 그렇다면 저분이 딱 맞죠. 그녀는 인간이며, 빛을 대표하는 성기사인 데다가… 검 솜씨로 촉망받는 검사입니다. 신분도 낮지 않고요. 충분히 간다면, 역할을 해줄 수 있을 겁니다.”

“다른 인간인 아비게일과도 아는 눈치고요.”

그때 코다로가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둘이 서로 너무 잘 알아서 문제지요.”

비비안이 팔꿈치로 옆구리를 찌르자, 그제야 입을 다무는 코다로였다.

“여하튼 그녀를 잘 설득해 보세요.”

골디온을 제거하기 위해 출발한다면, 괴물들이 모인 중앙을 멀리 돌아갈 것이었다.

그리고 인간들이 포진한 후방 쪽으로 빠져서 골디온을 암살해야만 한다.

골디온 암살 후에는 되도록 인간들과의 충돌을 피하며 복귀해야만 했고….

그다음은 북의 군사를 남하하여 괴물들을 친다.

인간을 설득하는 것도 불가능에 가까워 보였으므로, 당장 이보다 더 좋은 생각은 떠오르지 않았다.

“크릭님이 이걸 주시더군요. 여간해서는 부서지지 않을 거랍니다.”

코다로와 비비안은 세인에게 한 자루 검을 주고 마차를 나섰다.

그러고 보니 코다로의 곡도도 예전의 곡도가 아니었다.

세인은 검집을 집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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