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1
& 난국
북쪽은 그렇다 치고 중앙 대륙의 정세는 어떻게 흐르고 있을까?
그들은 그들대로 급박했다.
괴물들은 사방에서 모여들며 힘을 집중시켰다. 악의 세력은 가이더와 주변국을 효시로, 북부를 우산처럼 뒤덮기 시작했다.
전화에 휩싸인 작은 나라들이 짓밟히고 나자 다음은 제대로 된 방파제와 맞닥뜨렸다.
그 굳건함 앞에서 힘을 모으기 위함인지 괴물들은 집결되는 양상을 보였고, 대륙의 중부가 바로 그 전란의 핵이 되었다.
전국의 사람들은 그래도 이 방파제가 오래 견뎌줄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것은 근거보다는 믿음에 기인한 확신이었다.
남쪽에서는 프리미엄 테이블이 매일 만들어 지고 있었고, 수많은 미팅 끝에 전략과 지원 계획이 나왔다.
“실드 벨트 다음은 곡창지대다. 식량도 식량이지만, 그다음은 진격을 막을 길이 없다. 그대로 남쪽과 부딪힌다.”
모두의 의견은 그런 현실을 직시했다.
그리고 군을 움직이는 한편 구호물자를 급파했다.
그러나 전선은 공중에서도 이어지고 있었으므로, 붉은 띠는 이미 곡창지대를 넘어선 지 오래였다. 그리고 하늘을 나는 가고일 같은 괴물들은 끊임없이 지원군을 지연시켰다.
남부에는 거대한 나라들이 모여 있었다.
그래서 전국의 인간들이 무엇을 걱정하는지 알았지만, 그들도 일단 자국을 챙겨야 할 것 아닌가.
결국, 정예병들은 성문을 넘지 못했다.
그렇다 해도 그들이 내놓은 것은 결코 작은 것들이 아니다.
하지만 부족했다.
모든 것을 희생하려는 움직임이 결단코 아녔다.
남부는 앞으로 닥칠 전화에 대비해 힘을 쌓아놓고 있었다.
아, 위기의 시대는 결국 영웅을 낳는가.
이때 의연히 일어선 남자가 있었으니, 그의 이름은 골디온.
바로 황금 관과 황금 장갑.
그리고 황금 가면을 쓴 의기의 사나이였다.
그는 자신의 가산을 털어 중부의 지원에 협력했을 뿐만 아니라 모두를 설득하고 다녔다.
“실드 벨트는 성벽은 낮으나 적의 발을 붙잡기 위한 최적의 설계와 구성으로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원래대로 지원을 해주기만 한다면, 견고한 그 성능과 역할을 다할 것입니다. 그들이 우리의 국경을 넘어서면 이미 늦습니다. 왜 실드 벨트 지역을 이대로 유기하십니까?”
그의 꾸짖음에 좌중은 숙연해졌다.
그렇다.
실드 벨트는 고대에 지어진 난공불락의 띠였다.
다만 그것이 제 역할을 하려면 꼭 필요한 게 있었으니, 뒤쪽에서 퍼붓는 무제한의 지원이었다.
고대에 일어난 대전쟁은 그것을 충분히 가능케 했다.
그때는 누구도 의심할 수 없는, 인간들의 절체절명 위기였다.
그러므로 자연스레 모두 하나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골디온은 그것을 꼬집으며 자신이 직접 지원대의 원수가 되어, 총력을 다해 실버 벨트를 뒷받침하겠다고 자처했다.
“이번이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하십시오. 물자만으로 적을 막을 기회입니다. 우리의 살갗을 다치게 하지 않고, 적을 물리칠 수 있단 말입니다.”
우리의 영웅인 골디온은 그리하여 모두의 지지를 받으며 남부를 떠났다.
그리고 그의 영웅담은 널리 퍼졌다.
그의 희생과 여행담이 음유시인들의 입술에서 나와 하프를 타고 울려 퍼졌다.
모두 그를 응원했고 축복했으나, 하늘에서 떨어지는 괴물 놈들은 악랄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들은 총공격을 골디온에게 퍼부었다.
골디온은 자랑스럽게도 그들을 다 물리치는 데 성공했으나, 큰 상처를 받고 그만 후퇴하고 말았다.
“골디온은 실패했군.”
실드 벨트 지역의 중앙이라고 할 수 있는 곳에 하얀 탑이 서 있었다.
감시자의 석탑이라고 불리는 이 탑은 비정상적으로 좁았으며 그 끝이 높았다.
중앙에는 작은 석실이 있었는데, 바로 나라에서 가장 시력이 좋은 자가 머무르는 곳이었다.
그러나 이제 그는 없다.
그는 경계에 태만했고, 적이 몰려왔을 때 여기에서 술집 작부와 뒹굴고 있었다.
바닥에는 술병이 굴러다녔고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당연히, 그는 사형당했다.
하얀 머리를 정갈하게 어깨 뒤로 빗어넘긴 노인은 기세 좋게도 판금 갑옷을 입고 있었다.
그 무게와 금속 벙어리 장갑을 보면 움직이기도 힘들 것 같은데, 그의 이마에는 땀방울 하나 없다.
그는 실드 벨트의 책임자이자 탄다니스의 국왕인 오베론이었다.
이 노인은 강렬한 눈길로 전방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는 최근 여기에서 그의 군대가 나아가 산산이 깨지는 것을 목격했다.
그리고 절망의 다른 이름과 공포의 부름을 귀로 들었다.
그의 피부는 전방의 괴물들이 내뿜는 광기에 따끔거리고 있었다.
오베론은 장검을 무릎 위에 놓고 오연한 시선을 유지했다.
그게 바로 국왕의 책임이다.
그러나 그런 그의 기세와는 정반대로 이 전쟁은 도저히 승산이 없었다.
왜 아니겠는가?
실드 벨트도 이제 옛말이다.
산의 능선을 따라 그 위에 지은 성벽은 이제 한없이 턱이 낮아 보였다.
괴물들의 투창과 투석기에서 날아든 바위에, 상처와 아픔을 호소하고 있는 지경이다.
무엇보다도 물자가 없었으며 지원도 전부 도달하지 못했다.
“가장 결정적인 것은 골디온의 패주다. 남부에서는 신인인 그에게 모든 것을 건 모양이지만, 결국 그만큼이나 인재가 없었단 말인가…. 한낱 애송이에게 구국의 임무를 맡기다니. 통탄스럽구나.”
하얀 수염을 쓰다듬으며 오베론은 중얼거렸다.
그의 오연한 눈빛 아래로 출렁이는 검은 괴물들의 파도가 보였다.
그들 사이사이에는 마치 해파리와도 같은 구조물들이 떠 있었는데, 끊임없이 주위에 녹색 광선을 내리쬐었다.
그럼 그것을 맞은 괴물들이 울부짖는 광신도의 모습을 아낌없이 보여주는 것이다.
그의 뒤로 근위대가 나타났다.
그들의 갑옷 중 성한 것이 없었다.
그들은 왜 나타났을까?
답은 그들이 끌고 온 남자에게서 나왔다.
“아버님!”
젊은 남자는 절망 어린 표정으로 오베론의 발치에 엎드렸다.
그러면서 손을 뻗는데, 차마 오베론의 발을 잡지는 못하고 손을 오므린다.
“타니스. 내 아들아.”
오베론의 음성은 자애롭다기보다는 차갑고 준엄했다.
아무리 들어도 아버지가 아들을 부르는 음성은 아니었다.
그의 표정도 그렇고 말이다.
“제발”
그러나 애원에도 불구하고, 오베론은 아들에게 차가운 시선을 주었다.
옛날 사라진 가이더의 국왕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잘 들어라. 너도 알다시피 상황은 절망적이다. 계속 지체했지만 이제 더는 나도 봉쇄를 고집할 수가 없구나.”
근위대의 얼굴은 잿빛으로 물들었다.
국왕의 말은 사실상 패배 선언이었다.
오베론은 검집으로 아들의 턱을 들어 올리며 냉혹하게 말했다.
“우리는 어떻게든 한 달을 벌어야 한다. 그리고 국민들의 가슴에 필사의 힘을 북돋아 줘야만 한다. 다행히 내겐 네 명의 자식이 있고, 네가 바로 첫 번째다.”
“제발!”
“네가 죽음으로서 우리의 병사들은 의기를 일으키고 그 힘으로 일주일을 버틸 수 있다. 그다음은 둘째다. 그다음은 셋째다. 걱정하지 말아라. 넷째 다음은 내가 될 테니.”
타니스는 개처럼 끌려가면 울부짖었다.
이럴 수는 없다고 말이다.
그러나 그의 친부는 눈을 감고 들어주지 않았다.
결국, 첫째 왕자는 억지로 말에 태워져 성문 앞에 내팽개쳤다.
성벽 위의 병사들은 이제 탄다니스의 왕자가 죽는 것을 지켜봐야만 했다.
그리고 그의 처절한 죽음은 분기를 일으켰다.
모두가 악에 받친 고함을 지르며 성벽 위에서 끓는 기름을 아래로 쏟아부었다.
그리고 뒤쪽 성문이 열리고 피난 행렬이 이어졌다.
주변의 다른 나라에서는 전령을 보내 결사 의지를 흔들리게 한다고 다그쳤지만, 오베론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가 보기에 이미 실드 벨트는 가망이 없어 보였다.
그의 자식들이 차례차례 죽어감에도 병사들은 좀처럼 힘을 내지 못했다.
사실 이 정도만 해도 많이 버텨준 것이긴 하다.
괴물들의 힘은 너무 압도적이었고, 세계수에 있던 강한 놈들은 다 몰려와 지평선을 채운 마당이다.
“다만 저것만은 누가 알려야 할 텐데….”
오베론은 땅 쪽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오크들이 가득한 지면에는 어느새 검은 얼굴이 떠올라 있었다.
거인의 얼굴인가?
아니면 착각인가?
그것은 하얀 눈자위를 움직이며 끊임없이 누군가를 찾아다녔다.
오베론은 당장이라도 달려가서 자신이 눈앞에 있노라고 외치고 싶었지만….
아직은 아니다.
그의 죽음은 이곳이 함락당할 때 같이 떨어질 것이다.
마치 목숨줄이 끊어진 연처럼.
전선은 점점 악화되었다.
그리고 만물에 끝이 있듯…. 드디어 견디지 못하고 성벽이 허물어졌다.
그리고 학살이 자행되었다.
그 끔찍함은 필설로 형용하지 못할 정도였다.
왕 중에 그나마 살아남은 것은 난가의 국왕이었다.
그는 현명하게도 화가를 불러 자신의 감시탑에 앉히고는, 성벽 앞에서 일어나는 불가사의한 현상을 화폭에 옮겨 담게 했다.
“전령들이 실종되고 있다면 직접 가는 수밖에.”
그렇게 중얼거리며 한장 한장 납으로 만든 상자에 옮겨 담았다.
그가 움직였을 때는 오베론이 처참하게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였다.
사실 그때의 움직임도 늦은 감이 있었다.
“피하셔야 합니다.”
사색이 된 기사들은, 명마들이 이끄는 마차에 국왕을 태우고 미친 듯이 달렸다.
국민들은 이미 피난시킨 지 오래다.
난가의 국왕도 오베론을 따라 했던 것이다.
주변국의 질타를 받았지만 대체 국민들이 무슨 죄가 있는가?
성벽에 갇혀 있다가 학살당하는 것보다는 나으리라.
그러나 하늘은 난가의 국왕을 도와주지 않는 것 같았다.
밤새 내린 비로, 마차의 상태는 좋지 못했다.
결국, 마차의 바퀴 축이 부러졌고 말이다.
다른 마차로 옮겨 타긴 했지만, 추격은 가까워지고 있는데 점점 달리는 속도가 느려지고 있었다.
그리하여 한 명의 기사가 용감하게 나서며 난가의 국왕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말했다.
“제 말이 지쳐 도저히 달릴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잠시 쉰 후에 뒤따라가겠습니다.”
그 결기 어린 말에 난가의 국왕은 젊은이의 얼굴을 유심히 보았다.
그의 얼굴은 진작에 파랗게 질려 있었다.
핏기를 띄우는 것은 오로지 굳게 깨문 입술뿐.
“이 바보 같은 놈. 감히 너의 주인 앞에서 무슨 망발이냐. 저들은 인간이 아니란 말이다. 너는 성벽 너머를 보고도 그걸 깨우치지 못했느냐! 물러서라!”
상대가 인간이라면 적국의 기사라 할지라도 일단 추격을 멈출 것이다.
그리고 저 젊은이와 대결을 벌이는 행위가 끝날 때까지 추격을 멈출 것이다.
적어도 그 정도의 품위는 기대할 수 있었다.
같은 인간이니까.
하지만 괴물들은 달랐다.
저 젊은이의 의기는 보답받지 못한다.
노리개처럼 희롱당하다가 결국 삼켜지고 말 것이었다.
거기에는 어떤 품위도, 희생을 바라보는 자들에 최소한의 예의도 없었다.
마차가 출발하고 한참을 달려서야 국왕은 물었다.
“아까 그 녀석은?”
그의 물음에, 무뚝뚝한 음성으로 근위대장이 답했다.
“남겨졌습니다.”
난가의 국왕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 그것이 시작이었다.
기사들의 말은 차례대로 지쳐갔다.
마치 짜기라도 한 듯이 말이다.
그리고 멀어지는 국왕의 마차를 본 젊은이들은, 지체 없이 말의 머리를 칼로 내리쳤다.
그게 바로 괴물들에게 뜯어 먹힐 말들에 대한 자비였다.
그나마 남겨진 젊은이들은 그런 한 줌의 자비조차 얻지 못한다.
난가의 국왕은 눈물을 흘렸다.
소매로 눈가를 닦으면서 괴물들을 저주하고 저주했다.
할 수만 있다면 영혼을 팔아서라도 녀석들에게 복수 하고 싶었다.
괴물들이란 인간들에게 있어 그런 존재다.
“국가의 기둥들이 이렇게 사라져 가는구나. 나는 무능한 왕이다. 내 죄가 깊어 저세상에 가서도, 그들에게 잘못을 빌지 못하겠구나. 무능한 죄로 지옥에 떨어질 테니.”
그 탄식을 들은 근위대장이 마지막으로 말했다.
“제 말도 지쳤습니다. 부디 마지막 뜻을 이루소서.”
난가의 왕은 힘없이 멀어지는 근위대장의 등을 바라보았다.
* * *
실드 벨트가 함락당하고, 악의 군세는 대륙의 중앙에 똬리를 틀었다.
그리고 기괴하게도, 거기에서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대체 무슨 일을 꾸미는 걸까?
각 나라에서 의용군들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지만, 국왕들은 그들을 제지했다.
물론 남부의 강대국들은 쉽게 당할 리가 없다. 하지만 최후의 보루 인만큼 신중을 기해야만 했다.
그들까지 무너지는 날에는 손쓸 수 있는 여지가 없었으니까.
결국, 지략가들은 탄식했다.
“인간이 불리한가? 아니다. 우리의 진정한 힘은 무너지지 않았다. 이제 사대 육이 되었을 뿐이다. 이제야말로 전면전이다. 우리가 굳게 뭉칠수록 힘은 가파르게 올라간다. 남은 나라들이 손을 잡으면 높은 확률로 우리가 이긴다. 우리의 승리는 약속되어 있다. 그러나 상처를 입을까 두려운 사자들이 좀처럼 엉덩이를 바닥에서 떼지 않는구나. 앞의 코끼리가 무서운 게 아니라, 사냥이 끝난 후 다른 사자들이 두려워서.”
괴물들은 이제 인간들을 자극하지 않았다.
작은 병력이 가서 연소하였고, 강대국들은 서로 눈치만 보았다.
“우리는 아직 강합니다. 분연(奮然)히 떨쳐 일어나면 이길 수 있단 말입니다. 실드 벨트가 함락되지 않았다면 분명 상처 없는 승리를 거뒀을 겁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습니다.”
병상에서 일어난 골디온이 나라의 정상들을 만나 설득하고 다녔다.
때마침 그들의 목소리를 대변할 영웅이 필요했으므로, 골디온의 존재감은 급부상 할 수밖에 없었고 말이다.
평화에 젖어서인가.
인간들은 승리가 점쳐지는 전쟁을 일으키지 않았다.
괴물들도 동결된 움직임을 보이는 마당에 묘한 신경전은 해를 넘어섰다.
그리고 시간이 지날수록 망한 나라들에 다시 인간들이 들어서기 시작한다.
어떤 상황에서도… 자국을 회복하려는 노력의 일환인가.
“참으로 답답하다, 이 상황이. 어찌 되었든 저들을 그냥 놓아둘 수는 없잖은가.”
영웅 골디온의 시름은 깊어져만 간다.
그런 그를 지켜보는 주변인들도 마찬가지였다.
하루하루 입안이 바싹 말라가는데, 괴물의 군대는 좀처럼 움직일 줄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