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0
& 그만둬 (2)
* * *
번우드의 영지민들은 드워프를 반갑게 맞아 주었다.
전우나 마찬가지니까 말이다.
울프크릭과 그를 수행하는 드워프들은 그들과 어울리며 술 같은 것을 대접받았다.
그런데 이 번우드의 영지민은 그들이 보기에 허풍이 심한 것도 같았다.
‘하루아침에 백색 성이 생겼다니. 이거야 원, 허풍도 적당히 쳐야지.’
그런 허풍처럼 모든 게 가능하다면, 자신도 수백 개의 성을 가지고 싶었다.
그래도 쪼르르 달려온 아이가 꽃목걸이를 걸어주자, 울프크릭의 얼굴은 처음보다 아주 많이 풀렸다.
쑥스럽기도 해서 뭉툭한 검지로 코를 비비곤, 성으로 발걸음을 재촉한다.
비비안의 백색 성은 아주 아름다웠다.
층계부터 시작해서 홀과 테라스까지 하나의 예술품이었다.
투박한 드워프의 정서와는 그다지 맞지 않았지만, 울프크릭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정갈하고 향기도 좋은 성이었다.
비비안은 몸소 나와 이 드워프를 맞이해 주었다.
그리고 꽃목걸이가 잘 어울린다는 칭찬을 해주었다.
이 아름다운 소녀의 말에 울프크릭은 가슴에 손을 대고 허리를 숙여 보였다.
“당신들은 나를 곤경에서 구해주었고, 그 대가를 내게 요구하지 않았소.”
그때 코다로와 세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드워프는 그들에게도 허리를 숙여 보이며 고마움을 표시했다.
“우린 이미 같이 싸워달라고 요구했습니다.”
세인의 말에 드워프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건 나의 당연한 권리요. 복수는 요구가 될 수 없지. 그리고 이건 우리가 이제 나눌 동맹 이야기와 별개로 표시하는 고마움이오.”
세인에게는 무기를 만들어 주겠다고 했다.
무기 없이 싸우는 것을 보고 생각해낸 것이다.
코다로에게도 똑같이 해주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비비안에게는 미리 준비해온 것이 있었다.
“성을 가지신 분에게 이게 빠질 수는 없지.”
울프크릭이 손을 들자, 옆의 수행원 중 하나가 붉은 함을 들고 나섰다.
울프크릭은 그 함을 열고, 두 손을 집어넣었다.
그리고 꺼낸 것은 아주 새하얀 왕관이었다.
“와….”
그 아름다움에 마플이 좀 떨어진 곳에서 자신도 모르게 감탄사를 흘리자, 드워프들은 한껏 우쭐한 표정을 지었다.
창작자들은 이 짧은 순간을 위해 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왕관은 비비안의 성을 닮아, 날씬하고 가파르게 위로 솟아올라 있었다.
그리고 물방울 다이아몬드가 박혀 있다.
“이건 너무 과합니다.”
놀라서 뒤로 물러나는 비비안을 향해, 울프크릭이 엄숙하게 말했다.
“내 격을 낮추지 마시오. 나는 왕이요. 적어도 내 이름을 짧게 부를 수 있는 자는, 왕관을 쓸 자격이 있어야지.”
물론 그 왕은 때때로 바지를 벗어 재끼는 왕이었지만, 지금 이 분위기 앞에서 비비안이 그걸 알 리가 없었다.
“예?”
“이제부터 당신네는 나를 크릭이라고 불러도 좋습니다.”
“….”
아니 원한 적 없는데?
어쨌든 비비안은 왕관을 받아들였다.
선물은 받자마자 착용하는 게 예의라 해도, 함부로 쓸 수는 없는 물건이다.
그래서 고이 모셔만 두었다.
그리고 그녀의 뒤를 따라 위로 올라가는 드워프들은, 짧게라도 연회가 열릴 줄 알고 기대를 했다.
물론 그들의 기대는 산산이 깨어졌다.
그런 호화로움 따윈 검소함이 몸에 밴 영주들에게는 해당 사항이 아니었다.
크릭은 약간 얼떨떨한 얼굴로 테이블 앞에 앉았다.
기대했던 화려한 무용수와 감미로운 음악 대신, 코다로의 위에서 아래로 훑어보는 눈길을 감당해야만 했다.
그리고 그의 도발도….
“그래… 우리 드워프의 왕께서는 카드 좀 치시오?”
“….”
수행원들은 멀찌감치 물러나, 기사들이 앉아 있는 곳으로 안내되고 있었다.
그것을 바라본 크릭은 헛기침을 하며 농담이 지나치다고 말했다.
하지만 농담이 아니었다.
“작은 여흥 정도는 즐길 줄 아시냐는 말입니다.”
크릭은 얼굴을 찡그리며 말했다.
“왕의 기본 중 하나는 청결성이요. 그 청결성에는 정신적인 것도 포함이 되는데, 내가 도박을 즐길 것 같소?”
그리고 세시간 뒤 크릭은 소매를 걷어붙이고 있었다.
덕분에 그의 우람한 팔뚝이 테이블 위에서 잘 드러나 보였다.
높은 의자 위에 앉은 크릭이 빨리 패 안 돌리고 뭐 하냐며 성을 내고 있는 중이다.
“잠깐? 지금 섞을 때 새끼손가락의 움직임이 이상한 거 같았는데?”
그 외에도 디테일한 부분을 지적하느라 난리였다.
청동 술잔들이 테이블 위를 돌았고 크릭은 그것을 벌컥벌컥 마셨다.
비비안은 과일주를 짧게, 짧게 마셨다. 그리곤 발간 볼에 두 손을 올려 가렸다.
추가된 인원은 고작 한 명이었다. 하지만 고작 한 명이라도 무시할 수 없는 게….
한 명의 드워프가 테이블 앞에 추가되니, 카드놀이에 활기가 돌고 있었다.
코다로는 어떻게든 이겨 보겠다고 열을 올렸고, 크릭도 지지 않고 응수했다.
배짱 배팅이 이어졌다.
크릭의 수행원들은 멀리에서 크릭의 얼굴이 굳어지는 것을 보고, 설마 카드 패 때문에 저러고 있지는 않겠지? 라는 생각을 했다.
물론 카드놀이만 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중부까지 우리가 같이하길 바라는 거요?”
“그건 드워프들끼리 논의할 내용입니다. 이미 노예를 관리하기로 하셨고, 요새 공략에 도움을 받았습니다. 남은 건 여기 세계수 지역에서 서로 반목하지 않는 것 정도가 되겠군요.”
“당신네는 협상을 할 줄 모르는군.”
크릭이 그렇게 말하자, 비비안이 응답했다.
“우린 다크 엘프들의 호의에 기대어 살고 있어요. 그런 처지에 누군가와 협상할 것은 아니죠. 저희는 하나를 주고 하나를 빼앗는 거래를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미래를 의논하기 위해 모였습니다.”
그러자 크릭이 상체를 앞으로 뺐다.
그 몇 센티 앞으로 나온 걸 가지고, 나머지 셋은 뒤로 패를 물렸다.
보여주지 않겠다는 뜻이다.
그러건 말건 크릭은 은근한 목소리로 제안을 해왔다.
“그래서 말인데. 나는 당연히 당신들이 마음에 드오. 좋은 이웃은 금방 알아볼 수 있지. 어때요? 정말로 우리 바위산에 와서 좋은 이웃이 되어 주는 게? 대가 따위는 당연히 받지 않겠소.”
비비안은 상대가 많이 취했나 보다, 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새침하게 말했다.
“여기 성을, 거기로 옮기는 재주라도 있으신가요?”
김이 팍 샌다는 표정으로 크릭이 상체를 다시 뒤로 물렸다.
그런데 그때 세인은, 크릭의 왼손이 테이블 위를 짚으며 카드 한 장을 가지고 들어가는 것을 보았다.
호오?
이거 보통이 아닌데?
덕목 어쩌고 하더니 꾼이 여기 있었군.
그가 옆을 보니 비비안은 눈치챈 것 같았다.
하지만 이건 크릭 대 코다로와의 일전이나 마찬가지인 판이었으므로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그냥 그런 짓을 지적하는 것 자체가, 관여하느라 격이 떨어지는 것 같아 지목하지 않았을 뿐이다.
코다로는 그것도 모르고 자신의 패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 맹렬함 속에는, 어떻게든 이 난쟁이를 이겨 먹겠다는 의지가 보인다.
세인과 비비안은 서로 눈을 마주치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틀렸어.
새 손님이 완전히 꾼이야, 꾼.
코다로. 자넨 가망이 없다네.
그때 크릭이 근엄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런 그의 얼굴에는 이 판은 신성한 한판이며, 작은 수작질조차 절대 용서치 않겠다는 단호함이 깃들어 있었다.
“그럼 이제 내 차롄가?”
그날 코다로는 임자를 만났다.
* * *
아비게일은 자신의 재능을 찾아냈다.
그것은 요리가 아니라 바로 청소였다.
생각해보니 청소는 뭔가를 죽여야 할 필요가 없었다.
아주 평화적이고 온화한 작업이었다.
아침 일찍 제일 먼저 나와 길을 쓸고 있으면 영혼까지 깨끗해지는 것 같았다.
아비게일은 이제 번우드에 익숙해졌다.
처음에 정을 붙이기가 어렵지, 알고 보면 다들 좋은 마족들이었다.
“아. 원래는 인간이었으니 뼛속까지 마족은 아닌가?”
원래 마족은 마법사의 책 같은 고대 문헌에서나 나오는 건데 말이다.
어쨌든 주민들의 정체성보다 청소에 몰두하는 아비게일이다.
그는 휘파람을 불며 청소에 열을 올렸는데, 그런 행동은 부지런한 청년으로 소문나기 좋았다.
당연히 마을 사람들은 그가 자신들의 집 앞까지 청소해 주자 온갖 선물을 가져다주었다.
사과나 말린 감 같은 것을 말이다.
아비게일은 점점 번우드와 동화되어 갔다.
그의 기억 속에서 세리스는 여전히 미운 사람이었지만, 여기에서의 생활은 마음에 들었다.
그런 그의 청결함이 마플의 눈에 띄었고, 성의 청소까지 맡게 되었다.
아비게일의 청결성은 결벽증에 가까웠으므로, 성 구석구석을 청소하니 너무 기뻤다.
구석구석이 깨끗해지는 것을 본 기분은 그 자체만으로도 보람이 있다.
성의 향기도 그가 제안한 것이다.
가끔 바퀴벌레 사체를 만나 까무러치는 날만 빼고는, 성실한 아비게일에 대한 하녀들의 만족도도 아주 높았다.
그래서 오늘도 아비게일은 늦은 시각까지 성에 남아 있었다.
그리고 누가 시키지 않았는데도 청소를 열심히 하는 중이다.
그런데 복도 건너편에서 누가 걸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그래서 빗자루질을 하다가 고개를 들고 보니 난쟁이다.
그는 바로 크릭이었는데 아주 기분 좋게 취해 있었다.
아직 앞에 있는 아비게일을 눈치채지 못한 상태다.
거기까진 좋았는데 갑자기 바닥에 침을 퉤 하고 뱉었다.
취했으니까.
뒤늦게 수행원들이 나와 크릭을 찾으려 두리번거렸지만, 아직 그들과는 거리가 있었다.
아까 낮에 성이 아름답다고 감탄한 것은 잊었는지, 크릭은 비틀거리며 걸었다.
그리고 바지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설마, 설마….
아니겠지….
아닐 거야….
아비게일은 드래곤을 만난 것처럼 두 손으로 입을 가리고 부들부들 떨었다.
그 모습은 마치 소나기를 맞은 아기새 같았다.
아까 침 뱉은 것만 해도 아비게일은 까무러치기 직전이었는데, 믿지 못할 광경이 이제 그의 눈앞에 펼쳐지려 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아비게일은 소스라치며 속으로 외쳤다.
이건 꿈이야.
꿈일 거야.
제발 꿈이라고 말해줘.
제발!
오, 제발!
결국, 콧노래를 부르던 크릭은 바지를 내리고 벽을 짚었다.
그리고….
쿵!
“엇, 뭐야? 이게 무슨 소리야?”
크릭은 딸국질을 하다가 놀라며 바지춤을 올렸다.
소변을 보다가 들린 소리에 놀란 그는 주위를 두리번거린다.
“허억?”
보니까 복도에 웬 청년이 입에 거품을 물고 쓰러져 있는 게 보였다.
크릭은 당연히 달려가 그의 상체를 안아 들고, 그의 뺨을 때렸다.
“뭐야? 정신 차려! 무슨 일이냐?”
찰싹찰싹 맞다가 깨어난 아비게일은 크릭의 손이 자신의 볼을 때리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리고 그 손은 방금, 그걸 만진 손이다.
아비게일은 이제는 아예 발작을 일으키다가 목을 뒤로 꺾었다.
그때 수행원들이 달려와 물었다.
“울프크릭님! 무슨 일이십니까?”
“나도 몰라. 깨웠는데 또 기절했어.”
크릭은 온몸에서 경련을 일으키는 아비게일을 보며 얼굴을 찡그렸다.
“이거 위험해 보이는데, 인공호흡이라도 해야 할까?”
“….“
물론 그건 아비게일을 두 번 죽이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