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은 왕 마검의 주인-69화 (69/307)

# 69

& 그만둬 (1)

코다로와 드워프들.

그리고 레인저들이 합세하여 잔당 처지에 나섰을 때 세인은 그들의 곁에 있지 않았다.

어차피 레인저들의 수도 만만치 않지만, 이미 풀려난 드워프들의 수는 결코 적지 않았다.

경비나 하라고 남겨놓은 괴물을 쓸어버리는데, 어려움을 겪을 것 같진 않았다.

지금의 세인은 드워프들과의 관계에 집중하는 중이었다.

그래서 찾은 곳은 드워프들의 왕인 울프크릭이 아니라, 오히려 다크 엘프 쪽이었다.

그는 엘라이저 앞에서 옷을 벗고 있었다.

건틀렛까지 건네준 세인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으로 그녀의 곁을 지나쳐갔다.

그의 옷을 든 엘라이저는 잠시 세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지만, 세인은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미래에 그녀가 자신의 아내가 되고 그것이 불행으로 이어진다는 것은, 원치 않아도 세인이 엘라이저를 의식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일종의 거부감도 작용했다.

물론 그의 선택이 반영된 미래였겠지만, 지금 그의 입장에서 보면 결정을 강요하는 운명처럼 느껴진다.

이것은 전에 세리스와의 만남 때 느꼈던 감정이기도 했다.

같은 라이트닝 블러드라고 해서 느낄 수 있는 끌림을….

부자연스러운 강제력으로 인식하고, 멀어지는 일이다.

그건 일종의 우둔함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마음이 그렇게 움직였다.

그가 있는 곳은 천장이 높은 동굴이었다.

위쪽에서 흘러내린 투명한 나무뿌리가 폭포처럼 쏟아져 빛났다.

뿌리들이 무지개색으로 빛나는 이유는, 좌우로 빛을 발하는 광석들이 벽을 이루고 있었기 때문이다.

세인은 앞을 가로막고 있는 뿌리를 통과해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거대한 공동이 보이고, 그곳을 채운 나무가 보였다.

나무는 사람의 얼굴과 닮은 머리를 가졌고, 역시 커다란 의자에 앉아서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설마 알몸을 하실 줄은 몰랐소.”

트렌트는 인사도 없이 그런 말부터 던졌다.

세인은 주위에 앉을 곳을 찾더니 검은 바위에 엉덩이를 걸쳤다.

그리고 이야기를 했는데, 그의 태도는 어떻게 보일지 몰라도 이야기 내용은 공손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짧게는 각성자인 아비게일의 신변문제. 그리고 드워프의 문제 때문에 왔습니다.”

“길게는?”

“미래에 대한 문제입니다.”

“그렇다면 일단은 짧은 것부터 이야기해 봅시다. 알몸 상태가 되는 것까지 감수하셨으니, 나도 가능한 마음을 비우고 들어 보겠소.”

세인은 과거 엘라이저와의 대화로 미루어 볼 때, 다크 엘프의 왕이 마검의 존재에 대해 알고 있다는 판단을 내렸다.

그래서 이렇게 먼저 완벽한 무장 해제를 보여준 것이다.

“일단 아비게일은 양보할 수 없습니다. 그가 과연 제가 책임져야 할 사람인가에 대해서 고민도 해보았지만….”

“해보았지만?”

“오늘 아침에 아비게일이 마을 사람들과 웃으며 이야기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미 그의 생활은 여기에 뿌리 박혀 있더군요. 그래서 결정했습니다.”

트렌트는 의외로 불만을 제기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을 이야기해 보라는 뜻이었다.

“드워프의 왕을 저희가 있는 곳에 잠깐 모실까 합니다.”

“그 정도는 굳이 내게 이야기하지 않아도 되지 않소?”

“저희가 사는 땅은 그쪽이 빌려주신 거니까요. 드워프들과 관계가 소원한 지금, 그런 부분에 대해서도 허락을 구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땅 주인의 심사를 헤아리겠다는 것부터 알몸에 이르기까지, 거기 내포된 배려에 트렌트는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깊은 눈으로 세인을 계속 내려다보며 말했다.

“이제 긴 것을 이야기할 차례요.”

일단 다 들어보고 이야기를 하겠다는 식의 말에, 세인은 자신이 스톰의 창고를 통해 간 미래에 대해 말해주었다.

성검이 그를 소환하게 된 이유에 대해서도….

그런 세인의 말을 주의 깊게 듣던 트렌트의 입장에서는, 세인의 말을 믿지 않을 수가 없을 것이었다.

괴물들의 미래에 대한 계획은, 현재 세인으로서는 절대 알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세인은 증거를 들이밀며, 자신이 정말로 미래에 다녀왔다는 것을 상대편도 믿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게 아니라면 괴물들의 계획도 그렇고, 골디온이 괴물 편인 걸 어떻게 알겠는가?

트렌트는 세인의 마음을 읽듯이 의도를 콕 집어 질문했다.

“내게 골디온이 누구고, 어디 있는지 자세히 묻고 싶소?”

비록 대답은 하지 않았지만, 진실을 갈구하는 눈빛이었다.

그에 트렌트는 사실대로 말했다.

“나도 그건 모르오. 정확히 말해 다크 엘프가 괴물과 긴밀한 관계는 아니었소. 굴욕과 감시가 섞인 관계였지. 그래서 멀리 있는 골디온의 위치에도 관심이 없었고 말이요. 깊게 엮이기도 싫었고, 우린 그저 우리 할 일만 한 거요.”

“실례지만 뭐 하나만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물어보시오. 당신은 알몸으로 수치를 감수했으니. 나는 아까 말한 것처럼 마음을 연지 오래요.”

그런데 세인은 막상 상대가 괴물의 하수인 짓을 한 것에 대해서 따져 묻듯 이야기하려고 하니, 엄두가 나지 않았다.

너무 큰 실례 같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늙은 나무는 그런 기색마저도 눈치챈 것 같다.

“당신은 아이가 있소?”

“없습니다.”

“나는 아주 오래 살았소. 그쪽 기준에서 보면 말이오. 그렇게 살면서….”

그는 잠시 무거운 눈꺼풀을 감았고, 누군가를 떠올리는 듯했다.

아주 오래전에 만난 사람.

한 명의 남자.

그리고 여자.

그들의 여행을….

“생각도 많이 했지요. 그러다 보니 지혜도 차곡차곡 나이테처럼 쌓이더이다. 하지만 그런 것과 감정은 별개라오. 너무 강한 감정의 끌림을 만나면 말이오.”

“….”

“이성이 농축된 지혜로도 마음을 단속할 수가 없지. 우리에게 있어 어린 엘프들이 그런 존재요. 본능이 앞서는 대상이요. 그 대상은 물과 불을 분간할 수 없게 만들며, 맹목적이게 만드오. 그들을 위해서면 무엇이라도 감수할 수 있을 것 같고, 어떤 오욕도 초월할 수 있을 것만 같소.”

그러면서 트렌트는 인질 이야기를 해주었다.

엘프들의 육신은 트렌트와 다크 엘프들의 보호 아래 있지만, 심리적으론 괴물들의 협박에 잡혀있는 인질이었다.

트렌트와 세인의 대화는 계속되었다.

그들은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고, 어느덧 가장 중요한 주제로 흘러가고 있었다.

다크 엘프들이 이제 누구의 편에 서느냐였다.

트렌트와 다크 엘프들이 장님이나 귀머거리가 아니라면, 세계수 지역을 뒤흔든 소식 정도는 모를 리가 없었다.

“우리가 처음의 입장을 견지하면 어쩌려고 비무장 상태로 앉아 있는 거요?”

“그런 마음 씀씀이라면 처음부터 땅을 빌려주시지 않았겠죠. 하지만 품고 계시지 않습니까. 온정을…. 그건 올바른 선택을 좌우하는 요소 중 하나입니다.”

“….”

“한때나마 자식 일에 눈이 멀 수도 있습니다. 그건 사랑이니까요. 하지만 언젠가는 그 자식들을 교육해야 할지도 모릅니다. 올바른 잣대에 대해서도 설명할 자격을 갖추려면, 선행되어야 하는 것도 있겠죠. 최소한 사랑스러운 자녀 앞에서 떳떳해야 하지 않을까요?”

“당신도 알았겠지만, 괴물들은 결국 사라질 거요.”

“그리고 당신 자녀들의 미래 앞에 나타나겠죠. 그리고 그때 자녀뿐만 아니라, 모두에게 닥칠 운명을 지금 아셨을 겁니다. 저는 이미 입으로 그 증거를 대었습니다. 괴물들과 긴밀한 관계가 아니라고 하셨죠? 그런 상대가 당신에게 무슨 회유를 했든, 제가 말한 미래가 진실입니다.”

세인은 더 채근하지 않았다.

그저 트렌트의 고뇌하는 얼굴을 일별하곤 자리를 빠져나왔다.

그런 그에게 엘라이저가 옷과 건틀렛을 내밀었다.

그것을 착용하는데 엘라이저가 물어왔다.

“당신은 우리가 어떤 선택을 할 것 같아요?”

세인은 말없이 그저 가라앉은 눈빛만 던져 주었다.

트렌트는 바보가 아니었다.

최소한 어리석은 선택은 하지 않을 것이다.

엘프들을 위해 괴물들과 손을 잡을 정도면 결국, 어떤 선택이 엘프들의 미래에 도움이 될지 결단을 내릴 것이었다.

“이미 저희는 당신들에게 도움을 받았습니다. 그게 철회되지 않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도 무장을 해제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당신은 이상해요.”

떠나가려고 하는데 엘라이저의 목소리가 그를 잡았다.

“그 힘을 가지고 동맹을 강요하고…. 멋대로 굴어도 누가 뭐라고 하겠어요?”

그녀는 세인을 떠보는 것 같기도 했다.

“당신 종족과 당신은 괴물이 아닙니다. 저는 뒤늦게 그걸 알았습니다. 그런데 당신은 종종 착각하는 것 같군요. 자신을 괴물처럼 여기는 것 같아요.”

“….”

괴물처럼 말하지 말라는 표현에 엘라이저는 가만히 서 있었다.

한쪽 눈을 빛내며.

다크 엘프는 엘프를 위해 타락했다.

그런 희생이라면 세인도 경험이 있었다.

누군가가 세인에게 영지민을 타락시킨 것은 어쩔 수 없었다고 말해준다면….

세인은 그건 틀린 말이라고 말할 것이다.

세인이 생각할 때 그건 명백히 자기 탓이었다.

그는 분명 죄책감에 휩싸여 있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다른 종족에 대해서는, 자신과 다른 잣대를 적용했다.

괴물이 아니라고 말해주는 잣대다.

세인은 떠나가기 전 엘라이저에게 물었다.

“이제 당신의 이름을 불러도 됩니까?”

하지만 엘라이저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  *  *

드워프들의 왕인 울프크릭은 세인이 한 일을 알았다면 엄청 화를 냈을 것이다.

“뭐? 내가 왜 그 더러운 변절자 놈들의 땅으로 들어서는데 허락을 구해야 하나? 내가 고문당하는 동안 더러운 배신자 녀석들은 대체 뭘 했는데?”

그러면서 붉어진 얼굴로 욕을 엄청 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울프 크릭은 당연히 세인의 행동을 몰랐다.

그는 요즘 백성들이 풀려나는 것에 기뻐하고 있었고, 그들을 다독이느라 정신이 없었다.

물론 괴물 놈들도 엄청 죽여 없앴다.

돌산의 드워프 본거지들을 찾은 것뿐만 아니라, 이제 역으로 괴물 놈들을 노예로 굴릴 생각에 눈을 빛내고 있었다.

“두 마리씩 시켜서 왕자 맷돌을 돌리게 할 것이야! 물론 이 교대다!”

왕자 맷돌은, 원래 괴물 여섯 마리가 붙어서 낑낑거려야 한 바퀴 돌아갈 법한 맷돌이다.

하지만 그의 그런 행동이 과하다고 말할 수 있는 이가 아무도 없었다.

드워프들이 이를 가는 가운데 사슬에 묶인 괴물들이 돌산으로 줄지어 들어갔다.

이제 그들의 생은 종 친 거나 다름없었다.

어떤 드워프는 채찍을 만든다고 정신이 없었다.

괴물들을 후려갈기려고 말이다.

울프크릭은 측근들과 함께 번우드의 땅을 밟고 있었다.

그들의 군대가 작지 않은 것에 이미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번우드 마을은 아주 넓었다.

발전상태만 높았다면 도시라고 불리기에도 손색이 없는 규모였다.

언데드들이 하하 호호 웃으면서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것을 보니, 울프크릭은 한편으로는 말세라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그걸 입 밖으로 내지 않기로 했다.

세인의 무위에 그는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드워프가 여간해서는 기죽지 않는데, 간이 오그라들 정도였다.

오우거를 박살 냈으니 말이다.

여기에서 울프크릭은 상대의 힘에 짓눌리는 게 아니라, 지속적인 관찰을 선택했다.

상대의 힘이 강하다고 해서 굴종할 것이었다면, 진작 몬스터들의 고문에 항복했을 것이었다.

그는 세인이 강한 힘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걸로 자신을 핍박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에게 손을 내밀었다는 것도 기억했다.

그 엄청난 힘 안에서 세인은, 그리고….

“야망을 꿈꾸는 거 같지도 않고, 행복해하는 거 같지도 않아.”

세인은 동지를 원했다.

그걸 드워프들에게 넌지시 내비쳤다.

하지만 그 수단으로 폭력을 행사하는 대신, 자신의 힘을 보여주고 인정받으려 했다.

공동의 목표를 이야기하며 설득하려 했다.

그리고 호의를 베풀었다.

“계산보다 어려운 게 호의지.”

계산은 숫자로 측정될 수 있지만, 호의는 그게 아니었다.

울프크릭은 세인의 모습을 계기 삼아 자신이 책임지는 종족의 변화를 꾀하려 했다.

그리고 그건 지금까지 착착 진행되었고, 결과적으로 그는 세인과 그의 세력에게 큰 은혜를 입었다.

그건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오늘의 그는 옷도 좋은 것을 입었고, 선물도 고르고 골라 선택했다.

울프크릭의 부하들은 언데드 본거지로 들어간다고 하니 걱정이 이만저만 아니었다.

그래서 병사라도 많이 끌고 가길 원했지만, 울프크릭은 오히려 벌컥 화를 냈다.

“우리 해방에 도움을 줬어! 그리고 같이 싸웠지! 그는 내게 압도적인 힘을 보여주면서도 당연한 것만 요구했어!”

“….”

“더러운 괴물들 밑에서 시달리다 보니 의리도 잊어버린 거냐? 그들은 이미 우리에게 괴물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했어! 내 말에도 불구하고 너희들이 그를 괴물로 보는 것까지는 내가 어쩔 수 없다 치자. 오만과 편견은 자유니까. 하지만 최소한 쇠사슬을 끊어준 자에게 갖출 도리를 다해라!”

그런 말을 말로만 하는 게 아니라, 도낏자루에 손을 올려놓고 말하니 박진감이 넘쳐났다.

부하들은 그들의 왕이, 고문에도 불구하고 성질이 전혀 안 죽었다는 것에 기뻐하면서도 괴로워했다.

앞으로도 사고 많이 치겠군, 하면서 말이다.

그리고 멀찌감치 물러서 점잖을 떨고 있는 장로들은 그들끼리 속삭였다.

“그래도 전처럼 바지는 안 벗는군.”

“다행이야.”

“사실 그런 진심 따위 하나도 반갑지 않다고.”

진심은 언젠가 통하긴 하지만, 그 과정조차 아름다웠으면 하는 게….

연륜 있는 드워프들의 바람이었다.

어쨌든 번우드 마을을 가로지른 울프크릭은 교회가 있다는 것에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농담해 지금?”

사실 언데드의 신이 따로 있는지는 몰라도….

교회 양식을 보면, 그가 아는 신이 바로 저 집의 주인인 것 같았다.

그런데 그 신이, 언데드가 올린 기도에 과연 흐믓해 할까?

그가 차마 말은 못 하고, 교회를 손가락질하며 옆의 드워프들에게 시선을 보냈다.

그러자 그 시선을 받은 드워프 장로 중 한 명이 진지하고 근엄한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다.

“남의 집에 와서 남의 믿음 가지고 왈가왈부하는 게 아닙니다. 뭐 오만과 편견은 자유지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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