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은 왕 마검의 주인-67화 (67/307)

# 67

& 함락 (2)

울프크릭은 블랙스틸로 드워프들을 모았다.

그리고 그중 높은 자리에 앉아 있는 드워프들이 사흘 동안 설전을 벌였다.

거기에서는 드워프의 미래에 관한 이야기도 있었고, 다크 엘프와 번우드의 관계 모색도 들어 있었다.

울프크릭은 다른 드워프들의 이야기를 듣기만 했다.

그러다가 입을 연 것은 사흘째가 되는 날이었다.

“우리가 선택한 것은 좋은 방법이 아니었어. 우리가 최선이라고 믿었지만, 결과는 어땠지?”

그러자 드워프 중 두 개의 도끼를 등에 차고 있는 자가 울프크릭에게 말했다.

“자네는 많이 변한 것 같군. 고문 때문에 머리가 이상해진 것 아니야?”

그의 말에 울프크릭은 고개를 저었다.

“불같은 열정과 모루 같은 우직함으로 해결될 일이면 벌써 답은 나왔어. 하지만 오늘을 보라고. 나는 자네들과 같이 다크 엘프를 욕했어. 그런데 이제 와 우리에게 남은 건 뭐지? 다크 엘프는 엘프를 지켜냈어. 그리고….”

“그 더러운 변절자들 이야기는 하지 마!”

크릭 앞에 있던 드워프가 고함을 치자 분위기가 험악해졌다.

게다가 드워프들은 흉흉한 눈빛을 빛내며 울프크릭을 바라보았다.

사흘 동안 한숨도 못 잔 그들은 제정신이 아니었다.

충혈된 두 눈이 마치 짐승과도 같았다.

그 안광들을 바라본 울프크릭은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천천히 일어나 자신의 상의를 벗었다.

그러자 끔찍한 고문의 흔적이 드러났다.

하지만 돌아온 건 비아냥이다.

“뭐야? 자랑이라도 하려는 거야? 그 정도 자국은 누구에게나 있어. 하지만 정말로 심각한 건 우리가 굴종한 흔적이다. 그건 가슴에 남아 지워지지 않아.”

울프크릭은 자신의 앞에서 이야기하는 한 명에게가 아니라, 전부를 향해 이야기했다.

“우린 틀렸어. 그게 그렇게나 자존심 상하는 것이라면 나 혼자 틀린 것으로 해도 좋아. 하지만 그게 중요한 게 아니야. 이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 왕으로서, 너희들의 대표로서가 아니라. 너희들과 같은 고통을 받은 동료로서 나의 말을 진지하게 생각해봐라.”

“….”

드워프들의 표정이 굳어진 가운데 울프크릭을 말을 맺음했다.

“우리는 이미 선택을 했어. 그 결과 괴물들에게 잡혀서 실컷 고문당하고, 비참하게 취급당했어. 나는 우리들이 우리였다는 데에 자부심도 느낀다. 하지만 냉정히 말하건대, 우리는 실패야. 아무것도 지켜지진 않았지. 우리가 그렇게 끝까지 지키고 싶어 하던 자존심은? 그게 남아있나?”

그러면서 울프크릭은 바지마저 벗었다.

그러자 심각한 분위기가 돌변했다.

피식 웃음을 터트리는 드워프들도 있었고, 휘파람을 불거나 야유를 보내는 드워프 들도 있었다.

“어이 이봐, 그만둬. 그럴 것까지는 없잖아. 마음은 알겠는데 추하다고.”

도끼 두 개를 등에 메고 있던 드워프는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울프크릭은 그들을 설득하기 위해 자존심을 내팽개친 것이다.

그것은 그가 진심으로 종족의 미래를 숙고했고, 수정하려는 데에 진심이라는 소리였다.

물론 정이 가는 방법은 아니지만, 어쨌든 통한 것이다.

“빌어먹을, 제기랄. 그래 이야기나 더 들어 보자고.”

결국, 드워프들은 한풀 꺾인 기세로 울프크릭의 얼굴을 일제히 바라보았다.

*  *  *

세계수 지역에 흩어져 있는 요새 공략이 시작됐다.

괴물 왕들 입장에서는, 대륙을 기세 좋게 쓸어버리고 있었기 때문에 뒤통수를 맞은 격이었다. 생각해보면 언젠가 세계수와 완전히 결별하긴 해야만 했다.

중앙에 모여서 수비를 굳힐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이 시대를 떠나는 거고….

하지만 이렇게 빨리 세계수와 단절될 것을 예상한 것은 아니다.

힘 좀 쓰고 머리가 돌아가는 녀석들은 모조리 대륙으로 나간 마당에, 너무 방심했달까.

세계수 지역 괴물 주둔지는 도미노처럼 박살이 났다.

번우드 영지의 공격은 거세고 날카로웠다.

원래 그들은 전쟁터에서 목숨을 걸고 싸워 본 이력이 있는 용사들이었다.

거기에다가 엄청난 머릿수의 레인저가 합쳐졌다.

또다시 그 위에 해방된 드워프들이 합세했다.

드워프들은 이미 전의 순박한 종족이 아니었다.

모진 학대와 짐승 이하의 취급에 분기한 울프크릭이었다.

그는 자신의 백성들에게 적극적인 분노를 요구했다.

그리고 포로수용소가 해방될수록 그들의 기세는 더 높고 넓게 타올랐다.

관건은 대륙 쪽의 괴물들이 뒤쪽으로 병력을 빼느냐 마느냐였는데, 그들은 세계수 지역을 포기한 것 같았다.

이왕 중앙으로 내친걸음이고 인간들과 접전 중이었다.

그리고 세계수 지역에 미련이 없다면 거짓말이지만, 인간의 도시를 정복하며 쑥대밭을 만들고 있는 판이다.

거기에서도 먹을 것과 재물이 만만치 않게 나오니까.

괜히 병력을 분산시켰다가 급습을 당하거나, 그 먼 거리를 전부 커버하지 못할 것 같았다.

그러니 분하지만 내버려 두는 것이다.

오히려 그들은 진격로를 다 쓸면서 지나왔는데,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서로 묻기 바빴다.

“다크 엘프는 아닌 것 같다. 전령이 엘프들은 아니라고 말했어.”

“그럼 대체 누구야? 지나온 나라의 인간 중에는, 후방에 모여 뒤통수를 칠 저력이 없다. 아직은 말이다. 설마, 우리 중에?”

“배신자가?”

물론 그 배신자는 찾는 게 불가능한 배신자였다.

그들 중에 배신자는 없었으니까.

*  *  *

코다로는 노래를 부르며 낚시를 하고 있었다.

그가 앉아 있는 곳은 커다란 못이었는데, 떨어지는 빗방울이 수면 위로 하얀 파문을 만들어 내었다.

노래의 내용은 큰 잉어를 낚아, 흰매를 잡는 미끼로 쓰겠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의 낚싯대는 좀처럼 휘어질 줄 모른다.

비는 시간이 지날수록 거세어지고, 코다로의 몸은 젖었다.

그걸 보다가 걱정이 들었는지 옆에 서 있던 재칼이 다가왔다.

“이러다가 감기 걸리시겠습니다.”

“전쟁터에선 감기는 걸리지 않아. 그럼 전사의 자격이 없는 거야. 긴장하면 감기 걸릴 리가 없거든.”

그렇게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며, 코다로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모였나?”

“예, 다 집합했습니다.”

코다로는 미련이 남은 듯 낚싯대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뒤쪽 둔덕을 넘어갔다.

그러자 집결한 군중이 보인다.

쏟아지는 비에, 어느덧 기세 좋게 피어오른 운무가 둔덕 아래로 자욱이 깔렸다.

그리고 푸르른 숲은 더욱 선명한 빛깔로 사람들을 감싸 안고 있었다.

말이 푸르르 소리를 내며 머리를 흔드는 것도 보였다.

휘날리는 갈기에 옆에 있던 애꿎은 남자가 물방울들을 맞는다.

하지만 그는 성질도 못 냈다.

전방의 높은 곳에 코다로가 섰기 때문이다.

코다로는 모여든 용병들을 한차례 훑어보았다.

어마어마한 숫자였다.

“들어라. 요즘 머리가 복잡할 수도 있겠지만, 그냥 단순하게 생각해라. 세상에는 드물지만 확실한 게 몇 개 있어. 그중 하나는 내일을 생각하며 사는 놈은, 오늘만 살아가는 놈에게 죽는다는 것이다. 그러면 오늘만 사는 놈은, 내일만 사는 놈 주머니를 털다가…. 시체가 쓴 미래 계획을 발견하곤 내용을 본다. 그리고 꼭 이렇게 말해.”

“….”

“뭐야? 이 미친놈은?”

코다로가 양손을 허리춤에 올려놓자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손바닥 아래의 곡도 손자루가 움직이는 소리였다.

용병들은 기침 소리도 내지 못하며 그의 말에 집중했다.

“가이더의 사람들은 이제 머리가 복잡해질 일은 없지. 이미 죽었으니까. 너희들도 죽었었지. 그때 너희들 곁에 있던 사람이 누구냐?”

그때 사람들이 외쳤다.

“코다로님 이십니다!”

“누가 너희들 앞에서 창에 찔려 죽었냐?”

“코다로님 이십니다!”

“내가 창들에 찔리면서도 전진하는 거 못 본 사람?”

코다로가 그렇게 물어보며 둘러보자, 감히 아무도 손드는 자가 없었다.

코다로는 곁에 다가온 재칼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거만하게 말했다.

“삶은 간단해. 하지만 전사의 삶은 그런 삶 중에서도 더욱 간단하지. 내 전우가 아닌 놈은 떠나라. 굳이 잡지 않겠다.”

용병대장들이 그런 놈이 있으면 죽여 버리겠다는 듯이 눈을 빛낼 때 코다로는 말했다.

“게다가 일하면 난 상을 준다. 결국, 난 너희들 곁에 서 있고 상까지 준다.”

그때 한 용병대장이 용감하게 외쳤다.

“상은 필요 없습니다, 코다로님! 우리에게 믿음을 주십시오!”

어조를 보면 믿게 해달라는 이야기가 아니라, 믿어 달라는 이야기다.

고개를 끄덕인 코다로가 말했다.

“그래도 상이 없으면 섭섭하지. 벌만큼이나 짜릿한 게 상이니까.”

그러자 용병들이 이를 드러내며 소리 없이 웃었다.

비는 이제 가득한 세로 선으로 숲의 남자들을 때리고 있었다.

그러나 말 이외에는 아무도 추위를 못 느끼는 것 같았다.

코다로는 ‘가자’라는 말도 없이 걷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뒤를 용병들이 뒤따랐다.

그들의 기세는 한결같이 흉흉했으며, 무기는 빗속에서도 예기를 잃지 않았다.

집결지인 숲을 빠져나와 군중이 향하는 곳은, 바로 괴물들의 핫 게이트였다.

갈색의 돌을 세워놓고 경계 삼아 지어진 요새는 한눈에 봐도 견고해 보였다.

그들은 저 요새를 함락하기 위해 모인 것이다.

이곳이 핫 게이트라고 불린 이유는, 이 뒤로 포로 수용소와 식량요새가 줄줄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눈앞의 요새는 그런 길목을 막고, 방비하는 전략적 요충지였다.

거주하는 전투 괴물들도 많았다.

오히려 노예가 없는 순도 높은 전투 요새가 여기다.

코다로는 그 앞에서 손을 벌렸다.

그리고 말했다.

“자, 그럼 이제 파티를 시작하자.”

몰려간 용병들은 말을 타고 요새 주위를 빙빙 돌았다.

그리고 반은 그 앞에 진지를 치고, 나머지는 정문 앞을 왔다 갔다 하며 이목을 끌었다.

화살이 날아왔지만, 사정거리 밖이다.

화난 괴물 수십 마리가 밖으로 나왔고 처참하게 죽었다.

원래도 강한 용병들이었지만, 다시 태어난 이후로 압도적으로 강해져 있었다.

거기다가 레인저 훈련까지 받은 상태다.

그리고 뒤에는 코다로가 버티고 있었다.

퇴로를 열어 놓았지만, 도망가는 놈은 없었다.

오히려 다른 쪽에서 괴물들이 투입되었다.

요새가 괴물들로 꽉 찼을 때, 레인저들이 뒤를 급습하며 퇴로를 봉쇄한다.

“이제 피를 말려라.”

그렇게 말하며 코다로는 말을 끌고 앞으로 나갔다.

정문이 열리고 엄청나게 강한 괴물 몇 마리가 나온다.

코다로가 대장인 것을 보고 사기를 꺾으러 나온 듯싶었다.

하지만 그들의 기세도 오래 가진 못했다

왜냐하면….

코다로가 그런 놈들을 잔인하게 요리해 버린 것이다.

당연히 코다로 진영에서 함성이 울려 퍼졌다.

이제 기세는 완전히 이쪽으로 넘어왔다.

레인저들과 코다로의 용병들은 서두르지 않았다.

성을 포위한 채 꾸준히 괴롭혔다.

괴물들에게는 나름 신선한 경험이었을 것이다.

항상 공격하는 쪽이었지, 수비하는 경험은 없었을 테니까.

시간은 계속 흘러가고, 레인저들은 놀이처럼 성에 화살을 날렸다.

마치 성이 거대한 과녁이 되어 맞추기 놀이가 된 것 같았다.

지원군이 다른 곳에서 오면 코다로의 부대가 가서 박살을 냈다.

그게 끝도 없이 계속되었다.

그러다가 결국 성채는 백기를 들고 말았다.

그걸 본 코다로가 실소를 흘리며 선언한다.

“포로는 없다.”

백기를 들고 정문 앞으로 나오는 괴물을 보며 그가 손짓하자, 옆에서 재칼이 장궁을 건네 주었다.

코다로는 그걸 들고 팽팽한 활시위를 힘껏 당겼다.

어지간한 장사가 아니면 당기기 힘든 시위인데, 뒤로 힘껏 젖혀졌다.

활에 화살이 걸리고 잠시 좌우로 이동한 다음 쏘아졌다.

그것을 맞은 괴물은 백기와 함께 뒤로 몇 바퀴나 굴러갔다.

그러다가 땅에 머리를 부딪치고 죽어 버렸다.

코다로 곁의 용병들은 큰소리를 지르며 무기를 쳐들고 흔들었다.

다음부터는 순조로웠다.

허기와 공포에 시달리던 괴물들을 탈출하는 족족 잡아 없앴다.

어차피 제대로 된 지휘관들은 다 대륙으로 간 상태였다.

그들은 머리를 쓸 줄도 몰랐다.

그리고 코다로는 그들을 남김없이 청소했다.

마지막은 열린 정문으로 말을 몰고 들어가, 불태우고 모조리 죽이는 것이었다.

딱 하나 남은 괴물이 인간의 언어로 살려달라고 외칠 때, 코다로는 곡도로 대답했다.

괴물의 머리가 허공으로 떠올랐다가 코다로의 발에 채여 벽에 맞았다.

그걸 보며 코다로는 말했다.

“포로는 필요 없다고.”

이 핫 게이트가 승부처였다.

그런 것 치고는 꽤 싱겁게 끝나버렸지만, 그다음부터는 일사천리로 일이 진행되었다.

간혹 괴물들이 드워프 포로들을 성벽에서 떨어뜨리며 시위를 하기도 했다.

그리고 인질 삼아 협박하기도 했지만, 코다로는 이를 드러내 보이며 웃었다.

아직 드워프를 동료라고 부르기엔 애매했다.

한편이 된 지 얼마나 되었다고 드워프가 죽는 것에 눈을 깜짝해야 하는가?

코다로는 그런 생각이었다.

모진 생각이지만 흔들림 없는 지휘관의 모습에 용병들도 동요가 없었다.

“너희들의 그런 행각은 스스로 무덤을 파는 것일 뿐이다. 더 좁고 깊게 말이야.”

광기에는 광기로 대응하라.

그가 방금 만든 가훈이다.

코다로가 그 성을 함락시킨 다음에 한 짓은 끔찍했다.

그냥 죽이는 게 아니라, 온갖 방법으로 괴물들을 요리했다.

산채로 불태우는 것은 이야깃거리도 되지 않았다.

어쩌면 그는 그런 폭력이란 방법으로, 용병들에게 어필하고 싶었는지 모른다.

나를 배반하면 가만 놔두지 않겠다고 말이다.

물론, 용병들은 그럴 생각이 꿈에도 없었다.

그들이 가면 어디로 가겠는가?

머독조차 고개 돌린 잔인함을 보인 코다로가, 살아있는 괴물 몇 마리 끌곤 다음 요새에서 처형해 버렸다.

그리고 그 시체를 정문에 던졌다.

“항복하면 살려준다. 그러지 않으면 다 죽여버리겠다.”

거기는 식량 요새였다.

관리하는 놈들은 많았지만, 전투에 나갈 전사들은 상대적으로 너무 적었다.

밖을 포위한 레인저들의 수가 몇이며, 코다로의 병력이 몇인가?

결국, 항복하고 나오던 괴물들을 코다로는 모조리 도륙했다.

그리고 말했다.

“약속은 지성체들끼리 하는 거야. 너희들은 그런 대상이 아니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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