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은 왕 마검의 주인-66화 (66/307)

# 66

& 함락 (1)

윗부분이 부서진 분수대처럼 콸콸 솟아오른 검은 연기가 곧 바람에 휘청이며 씻겨져 나갔다.

그리고 옆으로 흩어지는 연기를 마지막으로, 검은 갑옷의 기사가 홀로 남아 있었다.

느린 걸음을 내딛는 주인을 따라서 등 뒤의 치렁치렁 한 망토가 움직인다.

울프크릭이 바라보는 가운데 그는 아래로 훌쩍 뛰어내렸다.

여기는 신호를 보내기 위한 곳이 아니라, 울프크릭의 안전을 위한 곳이었던 것이다.

동맹은 지도자끼리 맺는다.

울프크릭이 죽어버리면 지금까지의 수고를 되풀이해야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망루 옆에서 검은 그림자가 아래로 선을 그었다.

세인은 한 손을 벽에 박아넣어, 속도를 줄였다.

벽을 내리긋는 선에서 벽돌이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그 궤적은 토성의 성벽까지 이어지며 세인을 땅에 내려놓았다.

이제 땅에 서 있던 것들은 두 가지 행동을 취하고 있었다.

그들의 재산인 드워프들을 끌고, 땅속 깊은 곳으로 숨거나.

세인을 향해 달려오는 것이다.

세인은 그들과 마주하면서 두 팔을 활짝 치켜들었다.

그러자 두두두 소리를 내며 달려오던 말들 앞의 랜스가 그의 몸에 부딪혔다.

주변의 모두는, 그들의 눈으로 강철 랜스가 직각이 되어 꺾어지는 것을 보았다.

이걸 저 위의 울프크릭도 보고 있을까?

아마 그럴 것이다.

비명을 지르며 말이 쓰러지는 가운데, 세인의 팔에 걸려 넘어진 말은 기수와 함께 뒤로 반 바퀴를 빙글 돌았다.

기수의 몸뚱어리가 땅에 내동댕이쳐졌을 때.

허리가 절단 난 그는 얼굴을 뒤덮던 그림자를 보았다.

그게 바로 그의 마지막이었다.

콰직!

세인의 발이 괴물의 머리를 박살 냈다.

사방으로 터져나가는 피가 먼지 가득한 바닥과 뒤엉켰다.

방울방울 흘러가던 피는 구슬로 변해 다가오는 괴물들의 발치에 부딪힌다.

아직까지 괴물들이 세인을 향해 투기를 드러낼 수 있던 까닭은, 세인이 그러길 원했기 때문이다.

그는 살기를 드러내며 그들의 발에 족쇄를 채우지 않았다.

지금처럼 본능을 앞세워 다가와 죽기를 바랐다.

역시나 돌에 부딪히고 가시에 찔려 죽는 짐승들처럼, 그들이 이를 드러내며 세인에게 덤볐다.

네발로 달려오다가 땅을 박차고 뛰어오른 괴물은… 머리에 눈이 네 개였다.

그 눈들은 일제히 검은 기사를 담고 있었다.

그의 네팔도 과연 그러했다.

네 개의 손에 달린 검들이 아래로 휘둘러졌다.

그리고 그 검날들은 차례대로 세인의 어깨와 투구를 때렸다.

이건 농담인가?

간지럽지도 않다.

세인의 왼손이 녀석의 목을 움켜쥐었다.

그러면서 빗발치는 화살들 사이로 녀석의 입이 기괴하게 일그러지는 것을 보았다.

목줄이 조여드니 상대 입술도 따라 하는 것이다.

높게 들어 올린 괴물을 세인은 다시 아래로 끌어당겼다.

그 괴물의 등은 세인의 무릎 위에 작렬했다.

우두둑거리는 소리가 들리고 괴물은 입에서 피 화살을 뿜어낸다.

누운 형태의 괴물을 다시 들어 올리자, 그의 네 팔이 아래에서 대롱대롱 춤을 춘다.

덜그럭.

덜그럭.

네 개의 칼들이 땅에 떨어졌다.

세인은 녀석의 몸을 옆으로 휘둘렀다. 그리곤 달려오는 다른 놈의 몸을 후려쳤다.

땅을 뒤흔드는 소리가 났다.

괴물의 몸과 부딪힌 다른 괴물은 공중에 떠서 한 바퀴를 돌았다.

그러자 손에 들었던 괴물은 반이 찢겨 나간다.

세인은 오른손을 들었다.

그리고 날아온 랜스를 잡았다.

그 힘 그대로 휙휙 몇 바퀴 돌리더니, 다시 날아온 쪽을 향해 바라보지도 않고 던진다.

피융, 소리를 내며 날아간 랜스가 괴물의 몸을 관통한다.

그것도 모자라 허우적거리는 괴물을 뒤로 끌고 나갔다.

그 괴물은 손으로 다른 괴물의 어깨를 잡고도 뒤로 계속 물러난다.

결국, 성벽에 박제된 벌레 꼴을 보이고야 축 늘어졌다.

“충분하구나.”

잔뜩 몰려든 적들을 보며 이제야 데스 나이트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팔을 휘두르는데, 모든 게 터져 나갔다.

그 끔찍한 유린에는 반드시 가혹한 처형이 뒤따랐다.

쏟아지던 피는 형벌처럼 부서져 생명체들을 적시고, 다시 적시며 몰아쳤다.

데스 나이트의 검은 몸이 떠오른다.

그의 망토는, 박찬 땅 밑에서 죽음의 손아귀가 되어 넘실거렸다.

손아귀는 휘몰아치다가 주먹을 쥐었고, 땅을 두드리며 세인을 의도했던 것보다 더 높이 띄워 올렸다.

그렇게 떠오른 세인은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그의 무릎이 바짝 세운 그레이트 실드에 부딪혔을 때 불꽃이 번쩍였다.

그러면서 함몰되는 방패 아래로 무릎이 닿자, 짓뭉개지는 괴물이 보였다.

그 무서운 힘은 잠시 땅에 닿더니 다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다가오는 것들을 향해 무자비한 철권을 휘둘렀다.

이런 죽음의 기사 앞에 아무것도 의미가 없었다.

철퇴는 그의 몸을 흔들리게 하는 것조차 실패했다.

방패는 무용지물이고, 칼날은 갑옷의 표면에 선 하나의 흔적조차 긋지 못했다.

그 폭력 아래 사방이 피로 뒤덮이자, 이제야 괴물들은 뒤로 주춤주춤 물러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비장의 카드를 꺼낸다.

우르르!

우르르!

멀리에서 수레바퀴를 움직이자 땅이 꺼지며 모래를 집어삼켰다.

쇠사슬이 철렁이며 어두운 공간으로 떨어지는 소리가 나더니, 장치가 움직였다.

세인은 팔짱을 끼고 이제 일어날 현상을 기다렸다.

그 거만함에 치를 떨며 주위는 흥분으로 뒤덮였다.

“그린! 그린! 그린!”

“그린! 그린!”

“오오, 그린!”

공포를 감추려는 듯 고블린과 오크들은 뻐드렁니를 드러내며 외쳤다.

손을 들고 붉은 혀를 드러낸 그들은, 손바닥으로 벽과 바닥을 치기도 한다.

마치 북처럼 말이다.

그런 응원을 받아 땅속에서는 거대한 것이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오오! 고통의 용광로에서 태어난 그린을 보라!”

그때 누군가가 인간의 언어로 큰소리를 질렀다.

그 고함에 호응하기 위해 괴물들이 자신들의 언어로 온갖 욕설과 고함을 토해냈다.

그 욕망을 듣고 느끼면서 데스 나이트가 웃었다.

음침한 웃음은, 굽혔던 허리를 세우던 초록 괴물에게로 집중되어 있다.

초록 괴물의 정체는 오우거, 그린.

과거 산의 정상에서 납치된 소년.

질리언의 동생인 그는 어머니인 마지와 합쳐져 최악의 괴물로 거듭났다.

이 비극적인 연성 끝에 그는 오우거라는 이름을 얻었다.

거대한 상반신은 창조각을 박아넣은 판금 조각들로 뒤덮여 있었다.

어깨에서부터 시작되어 손등까지 뒤덮인 가시도 강철이다.

“우아아아!”

오우거가 땅을 두 주먹으로 내리쳤다.

그러자 지진이 일어난 듯 사방이 흔들렸다.

긴 고개를 위로 빼내며 포효하자, 오우거의 목에 걸린 쇠사슬이 쩔렁거리는 소리를 냈다.

괴물들은 이제 숫제 자지러졌다.

주변에서 금방이라도 까무러칠 듯 몸을 흔드는 모습이 가관이다.

데스 나이트의 붉은 눈이 오우거의 몸체에 찍힌 수많은 손바닥 자국들을 보았다.

원래의 무늬처럼 물결을 이룬 그 자국들은, 비명으로 얼룩진 드워프들의 흔적이다.

괴물들은 인간이나 드워프를 먹었다.

그리고 장난감처럼 가지고 놀며 입에 담을 수 없는 짓을 했다.

여기만 해도 그렇다.

구덩이가 열리면 그 위에 철봉을 세운다.

그리고 오로지 입을 이용해 철봉에 오래 매달려 있게 한다.

손목과 발목이 밧줄에 묶인 그들은 몸부림치면 구경꾼들의 야유와 박수가 주변을 채웠다.

밑으로 떨어진 족족, 드워프들은 그대로 오우거의 욕조물이 되었다.

드워프들이 어두운 구덩이로 떨어져 내릴 때의 비명은 끔찍했다.

애, 어른, 여자, 남자 가릴 것 없이….

아래로 궤적을 긋는 그 절망의 음향.

그리고 침묵을 건너뛰고 뒤이어진 소리는, 바로 물이 찰박이는 소리다.

그들의 피가 모여 만드는 소리.

애원과 흐느낌의 잔향 속에서 오우거가 물장구치는 소리.

데스 나이트는 수많은 원혼을 매달고 몸을 드러낸 오우거의 앞으로 걸어갔다.

오우거가 크게 양팔을 드리운 모습은 그 자체로 녹색의 성채 같았다.

그의 포악한 눈빛.

득의양양한 그 시선이 데스 나이트에게로 쏟아질 때, 투구에서 이런 소리가 들려왔다.

“고작 이런 장난감이냐.”

드디어 살기가 칼날을 드러냈다.

그리곤 그 날을 밟아 올라가듯 데스 나이트가 위로 치솟았다.

주변의 괴물들이 주변에서 보았을 때, 발견할 수 있는 것은 길고 붉은 선이 불길한 혜성처럼 꼬리를 긋는 것뿐이었다.

엉겁결에 무거운 팔을 올리던 오우거의 몸에 붉은 화살이 박혔다.

이글거리는 눈빛 아래로, 빗장뼈를 딛고 있는 것은 세인의 발이다.

세인은 한쪽 팔을 들어 바깥쪽에서 들어오는 오우거의 팔을 막았다.

암석과 정이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그리고 세인을 안으려는 것인지 다른 팔이 쇄도해 올 때, 그것도 다른 팔로 막아섰다.

그는 강철같은 손가락을 벌려 녹색의 기둥을 잡았고, 거인 같은 힘으로 오우거의 두 팔을 뜯어낸다.

믿을 수 없는 광경에 모두가 입을 벌렸다.

그리고 찢겨나간 오우거의 팔 아래로 치솟았던 망토가 옆으로 휘몰아쳤다.

그 망토는 오우거의 목을 잡더니 단단하게 고정한다.

“미물아.”

그때 오우거는, 자신의 턱 밑에서 속삭이는 소리를 들었다.

“죽어라.”

데스 나이트의 손이 오우거의 머리를 관통했다.

그리고 안쪽의 턱뼈를 잡고 뜯어냈다.

그것은 아래를 뜯어내고도 모자라, 윗 턱을 치니 윗쪽이 부서진다.

이빨들이 우수수 아래로 떨어졌다.

손에 닿는 것들을 움켜쥐고 저항감을 무시하며 뜯어내니, 그 피에 젖은 잔해들이 공중에서 춤을 추었다.

매우 역겹고 무서운 장면이었다.

몸부림치는 오우거의 상체는 아래로 숙여지다가, 세인이 손으로 머리를 잡았다.

그리곤 마구 헤집자, 오우거는 발작하는 것처럼 덜덜 떨다가 허리를 번쩍 세웠다.

고통.

고통.

다시 고통.

명멸하는 고통의 연속.

머리와 몸을 오르락내리락 하는 고통의 연쇄가 오우거를 관통하고, 다시 관통했다.

그것은 집요하고 잔인하게 계속되었다.

그 앞에서는 차라리 죽음이 은혜였다.

무서운 비명이… 잔혹한 고통에 학대받던 자의 절규가 세상에 휘몰아쳤다.

이제 완전히 공포에 질린 괴물들은 오우거를 차례차례 분해하는 검은 기사의 모습에 덜덜 떨 수밖에 없었다.

솟구쳐 오른 오우거의 살점들이 그들의 머리 위로, 비처럼 쏟아졌다.

거기에 담긴 핏방울은, 그들의 모든 것을 조롱하고 예고하는 것만 같다.

잔혹한 죽음에 대한 예고 말이다.

폭포처럼 흘러내린 초록색 피가 검은 기사의 갑옷에 엉겨 붙었다.

그러면서 다시 주룩주룩 아래로 비를 내린다.

그리고 땅에 닿아 만드는 초록색 개울.

오우거의 거대한 몸체가 뒤로 떨어지며 마지막 지진을 만들어냈을 때, 기사는 오우거의 시체를 지나갔다.

아무렇지도 않게 태연스레 걷는 움직임이 소풍을 나온 것만 같았다.

그 움직임은 여유롭게 앞쪽으로 향한다.

이제 사방은 공황상태였다.

의미 없는 화살을 날리는 놈도 있었고, 반대 방향으로 도망가는 놈도 있었다.

세인은 손에 잡히는 대로 휘두르고 부쉈다.

그러면서 피의 궤적을 만들었다.

불화살이 날아왔을 때 그것을 투구 안에 넣고 씹더니 불을 뿜는다.

화르륵 하고 직선을 이룬 불길이 괴물을 뒤덮었다.

그 괴물은 아우성치며 춤을 추다가 바닥에서 뒹굴었다.

그래도 불은 쉽사리 꺼지지 않았고 주변에 옮겨붙었다.

검은 기사의 못다 표현한 증오를 대변하려는 듯, 불길은 위를 달구며 내려오던 서늘한 공기와 혀를 주고받았다.

그런 그들의 치열함에, 검은 연기가 쉴 새 없이 태어나 위로 꼬리를 흔든다.

그걸 보며 세인이 중얼거렸다.

“좋은 신호구나.”

*  *  *

망루 위에서 믿지 못할 광경에 경악하고 있던 울프크릭은, 성문 밖에서 먼지를 일으키며 달려오는 기마를 보았다.

하늘로 치솟는 검은 연기가 그들에게 신호를 보낸 것이다.

세인이 울프크릭에게 기대하던 것을 발견하지 못했다면, 마검의 날이 그를 향했을 거란 사실은 그로서는 알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다만 그 기마들을 보면서 안도의 한숨을 쉴 뿐이다.

건물 안으로 들어간 세인은 기둥 하나를 뽑고 나왔다.

반대편 벽을 뚫고 창처럼 튀어 나온 기둥 끝에, 오크 한 마리가 정통으로 맞아 반대쪽 벽에서 부서졌다.

무너지는 건물을 통과한 세인은 그 기둥을 들고 이리저리 휘둘렀다.

항복의 표시로 손을 들어 올리는 놈이든, 누구든 그 기둥은 용서하지 않았다.

비틀거리며 도망가던 고블린이 기둥 끝에 밀려 불길과 함께 나뒹굴었다.

그 위로 검은 기사의 비웃음이 저주처럼 쏟아져 내렸고 말이다.

비명과 애원은 단지 이 참극의 조미료였다.

살해자의 조소와 기둥은 그들의 모든 것을 찍어 누르며 죽음을 선고했다.

마지막으로 번쩍 위로 들린 기둥이 한 건물 옆으로 걸쳐지고, 세인은 그 위를 걸어 올라갔다.

이제는 완전히 공포에 질린 괴물들이 그런 그를 제지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

오우거도 장난처럼 머리를 부숴버린 기사다.

뭘 어떻게 더 막겠는가?

기둥을 걸어 올라가자 밑의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그야말로 아비규환.

그것에 결코 아랑곳하지 않는 세인이 깃대에 달린 괴물들의 깃발을 잡아 뜯는다.

그리고 양손으로 잡고 북북 찢어 버렸다.

그걸로 갑옷에 엉겨 붙은 초록색 피와 먼지를 닦았다.

그리고 버린다.

그가 괴물들에게 해줄 수 있는 최대한의 모욕이다.

인간들이 크고 작은 성문을 통과해 요새에 침입하자.

살아남은 괴물들은 머리를 땅에 처박고 벌벌 떨었다.

이제 소탕은 세인의 손에서 지금 달려온 자들에게 넘겨졌다.

말에 탄 자 중 한 명인 윌은 기둥을 타고 걸어 내려오는 세인을 보았다.

그는 현재 검은 건틀렛만 착용한 상태였다.

윌이 서둘러 물통을 건네자 그것을 받아든 세인이 꿀꺽꿀꺽 목을 축였다.

그리고 나머지는 거꾸로 들어 머리 위를 적셨다.

그의 턱 아래에서 물들이 투명한 수염을 만들어 냈다.

잠시 후….

윌은 세인이 주는 빈 물통을 받아들며 그가 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겨우 하나가 끝났다. 이제 시작이다.”

아직 주변에 괴물들의 보급 기지는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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