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5
& 울프크릭 (2)
세인은 블랙 스틸로 오는 길에 고문자들을 만났다.
그들을 죽인 그는 시체를 덤불에다가 던져 버리고 마차를 탈취했다.
몰고 오면서 짧게 계획을 세운 그는 보초병들 앞에서 고문자 행세를 한 것이다.
가장 아슬아슬했던 순간은, 고문자들의 품에서 발견한 명령서를 들이밀었을 때였다.
그는 괴물들의 글을 모른다.
그러니까 거기에 ‘여러 명’의 고문자들을 통과시켜라, 라는 내용이 한 줄만 쓰여 있어도 정체가 발각되는 건 시간문제였다.
게다가 의심스러운 시선으로 바라보면 발각될 부분이 많았다.
그러나 북의 허리띠 너머의 연전연승에 도취되어 있는 게 그들의 현실이었다.
그들이 보기에 세인은 동류다.
게다가 이곳은 그들의 든든하고 아늑한 집이고 말이다.
술 냄새를 풍기던 보초병들은 그냥 세인이 언데드라고 생각되니까 긴장을 풀어 버렸다.
변신을 할 수 있는 종족은 다크 엘프가 유일한데, 드워프와 앙숙인 그들이 그럴 리는 없었다.
“뭐냐? 무슨 수작질이야?”
울프크릭은 자신의 족쇄를 벌리는 세인을 보며 소리를 쳤다.
그가 세인의 모습을 보자니 완전한 언데드였다.
불길할 정도로 잡티 하나 없이 검은 머리카락, 눈동자, 창백한 피부.
아름다운 얼굴이지만, 분위기가 영락없이 죽은 자였다.
하지만 세인은 고문 도구로 족쇄를 벌리는 중이다.
하도 여러 수작을 당한 울프크릭은 그렇다고 해서 경계를 풀지 않았다.
“자유로워지고 싶지 않나?”
그걸 질문이라고 던지는 거야 지금?
울프크릭은 어이가 없었지만, 어쨌든 그 물음은 그를 잠시나마 진정시켰다.
물론 입만 빼고….
“이 더러운 마물아 내게서 떨어져. 무슨 수작질인지 모르지만, 그냥 날 죽이라고!”
그리고 세인은 몸을 뒤로 살짝 빼내 침을 피했다.
울프크릭은 침을 뱉은 대가로 얼굴을 맞았다.
한 대 맞으니 머리에서 별이 빙빙 돈다.
세인은 그렇게 그를 재차 진정시키고는 족쇄를 분리해냈다.
하지만 문제는 그의 몸을 휘감은 사슬과 수갑이었다.
너무 견고해 보인다.
고문 도구가 툭툭 치니 금속성이 방에 울려 퍼졌다.
“이 괴물 자식!”
그때 세인의 차가운 눈빛이 울프크릭의 눈과 마주쳤다.
왠지 모르게 울프크릭은 상대의 눈에서 한기를 느꼈다.
뭐지 이 기분은?
“괴물이라도 손을 잡는 거야.”
“뭐?”
“네 백성을 봐. 지나오면서 짧게 본 나도 어이가 없더군. 저런 짓을 당하게 하느니 모든 걸 내려놓는 거야. 괴물과도 할 수만 있다면 자신을 양보하는 거야. 나중에 뒤통수를 치더라도 말이지. 내가 너라면 다크 엘프와도 손을 잡았을 거야. 그들은 최소한 대놓고 너희들을 해치지 않았잖아?”
다크 엘프의 끄나풀인가? 라고 생각하며 울프크릭은 세인을 쏘아보았지만….
답이 나오지 않았다.
그들이 왜?
깡!
통로에 불꽃이 튀겼다.
그렇게 세인은 고문 도구를 집어 던졌다.
그리고 검은 건틀렛을 꺼내 손에 끼었다.
다만 완전히 풀어주기 전에 선행되어야 할 게 있었다.
상황설명이다.
“나는 인간들의 지도자 중 하나다.”
“헛소리마.”
세인은 닥치고 좀 들으라는 표시로, 발을 들어 울프크릭의 머리를 걷어찼다.
상대의 키가 작으니 어렵지 않았다.
“여기를 발견했을 때, 내겐 두 가지 선택이 있었어. 너희 드워프들을 무시하는 것과 존중하는 것이다. 그래서 여기로 왔다. 드워프들을 일단 알아보기 위해서. 너는 그들의 머리잖아. 왕을 보면 공동체의 성격을 알 수 있지.”
“….”
“아직도 괴물들에 대한 적개심이 있구나. 그거면 충분하다. 녀석들을 최대한 잔인하게 죽이고 싶겠지.”
울프크릭은 이번에는 묵묵히 세인의 행동을 지켜보았다.
그의 건틀렛은 너무나도 수월히 사슬들을 끊어 보였다.
그리고 수갑 따위는 손가락으로 짓이겨 버린다.
강도가 엄청난 금속인데 진흙처럼 말이다.
그 비현실적인 광경 앞에서도 울프크릭은 생각에 잠긴 표정이었다.
“내가 너와 같은 처지였다면 나는 무릎을 꿇었을 거다. 그리고 괴물 놈들만 죽일 수 있다면 어떤 수치라도 감수했을 거야. 복수해야 하니까.”
세인의 말에 울프크릭은 변명처럼 말했다.
그도 이제 슬슬 돌아가는 상황이 파악되기 시작했다.
“네가 괴물의 모습이든 아니든. 그걸 떠나 나는 함부로 무릎을 꿇을 수 있는 몸이 아니야. 나라고 무슨 짓을 해서든 그러고 싶지 않겠나? 이게 수작질 중 하나라고 해도 말이야.”
“….”
“그 정도로 간절하다. 여기에서 내 동포가 고문당해 죽는 걸 보면서 내가 얼마나 괴로워했는지 아나? 그들은 장난처럼 내 가족과 부하를 죽였어. 바로 내 눈앞에서! 그 탓에 더욱 깊어진 내 분노만큼 내 생각도 많이 바뀌었다. 하지만 내 자존심은 백성들의 것이야. 불의 앞에 애원하고 싶어도, 나는 그걸 할 수가 없단 말이다. 내가 무릎을 꿇지 않는 게 바로 그들의 마지막 자존심이다.”
자살하고 싶어도 그럴 수 없는 까닭은 바로 백성들 때문이다.
그가 죽으면 드워프들의 실낱같은 지지대도 무너지니까.
“여긴 우리 둘뿐이니까 뭐 어때? 비밀로 하면 되지.”
그러면서 세인은 무릎을 꿇으라고 강요하는 대신 손을 내밀었다.
잡고 일어나라는 뜻이다.
울프크릭은 그 손을 보며 콧방귀를 뀌었다.
흥!
그러고 나서는 세인의 손을 손등으로 쳐내곤 비틀거리면서도 자신의 발로 일어선다.
그가 비장에 찬 음성으로 물었다.
“좋아 다음 계획은 뭐냐?”
세인은 그런 울프크릭을 보며 대답했다.
“높은 곳으로 올라가는 것이다.”
울프크릭은 바닥에 굴러다니는 고문 도구를 집어 들었다.
하지만 무기로 쓰기엔 성에 안 찬다.
“더럽게 못 만든 물건이군.”
그는 세인을 지나친 후 고문 가방을 뒤져 망치를 찾아냈다.
무게 중심이 엉망이라고 투덜거린 그에게 세인이 말했다.
“나가자.”
쾅쾅!
철을 주먹으로 두들기는 소리가 통로에 울려 퍼진다.
고문이 벌써 끝난 건가?
아니면 다른 용무로?
의아해하는 안내인이 철문을 열려고 할 때였다.
꽝!
철문이 날아가며 안내인과 함께 뒹굴었다.
그리고 피가 바닥을 적셨다.
철문이 뜯겨나간 자리에서 울프크릭은 약간 질린 얼굴로, 손을 내밀고 있는 세인의 등을 보고 있었다.
세인은 건틀렛을 벽에 박아 넣었다.
그리고 그 상태로 전진했다.
벽이 파이면서 시끄러운 소리를 냈다.
동시에 벽에 걸린 물건들이 떨어져 내리면서, 그의 어깨를 치고 바닥에서 땡그랑 소리를 냈다.
횃불 걸이가 뜯겨나간 벽돌과 함께 아래로 떨어지며 불똥을 쏟는다.
그 상태에서 세인은 울프크릭에게 턱짓을 했다.
드워프는 처음에는 그게 무슨 뜻인지 몰랐다.
그러다가 곧 알아차리곤, 얼굴을 붉히며 깡충깡충 뛰어 반대쪽 벽에 걸린 횃불 걸이를 박살 냈다.
떨어지는 횃불을 발로 밟아 끄니 암전이 찾아온다.
이 소란통에 먼 곳에서 있던 발소리가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세인이 불을 끈 이유는 울프크릭의 몸을 생각해서이다.
그의 몸은 많이 피폐해진 상태고, 혼전이 되면 눈먼 화살까지 감당해 낼 수 있을지 의문이니까.
벌컥 문이 열리고 간수들이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그들끼리 뭐라 뭐라 지껄이는데, 불을 켜라는 소리 같았다.
세인은 서두를 것 없이 천천히 걸어갔다.
그가 다가오는 것을 적들은 알지 못했다.
소리를 요란하게 내며 뛰어간 게 아니니까.
적이 어둠을 향해 내민 검 끝이, 세인의 가슴에 닿을락 말락 하는 찰나.
치치익 하고 연기가 피어나며 불이 켜졌다.
그리고 그들은 어둠 속에서 드러나는 세인의 평온한 얼굴을 보았다.
반쯤 감은 그의 눈앞에서 괴물의 얼굴이 박살 났다.
“끼아악!”
새된 비명과 함께 뒤로 넘어가는 녀석의 팔이 잡혔다.
그리고 불 몽둥이가 뒤로 꺾어졌다.
세인의 손에 의해 억지로 꺾인 그 불 몽둥이는 얼굴이 박살 난 괴물의 머리를 지졌다.
그러면서 불이 다시 꺼질 때, 세인의 몸에 불똥이 튀긴다.
다른 간수들이 무기를 휘두른 것이다.
그러나 세인은 그것을 건틀렛으로 장난처럼 막아냈다.
그다음은 괴물의 팔을 놓아주고 몸을 회전시키며 팔꿈치로 다른 간수를 쳤다.
갈비뼈들이 차례차례 부서지는 소리가 뒤쪽의 울프크릭에게도 들릴 정도였다.
쾅!
벽에 몸을 부딪친 간수는 다시 앞으로 튕겨나며 복도에 쓰러졌다.
그리고 벌벌 떨었다.
녀석은 지금 얼마나 추울까?
피가 줄줄 새고 있으니 말이다.
세인의 공격이 좁은 통로에 번개처럼 몰아쳤다.
그 살해의 궤적을 가로막는 것은 무엇이든 터져나갔다.
마치 장난감들을 희롱하듯이 그들을 지나쳐간 세인은 문을 밀어젖힌다.
그러자 빛이 쏟아져 들어오며 뒤쪽에 싸늘한 시신이 되어 있는 괴물들의 몸체를 조명했다.
울프크릭은 그런 그들을 깡충깡충 넘어오고 있었다.
“이제 어디로 가지? 구원군은 어디 있는데?”
그런 물음을 던져오는 울프크릭은 당연히 블랙스틸 내에 변장한 병사들이 있을 줄로 알았다. 세인은 그를 잡아끌며 대꾸했다.
“높은 곳으로 간다고 아까 말했잖아.”
그러면서 직사각형의 건물을 빠져나와, 흙으로 만든 성벽 위로 올라가는 계단을 밟았다.
그러면서 가로막는 모든 녀석을 물리쳤다.
번들거리는 흉갑을 입은 괴물이 소리 지르며 도끼를 휘두른다.
그걸 고개를 젖혀 피한 그는 복부에 정권을 먹였다.
콰드득!
검은 건틀렛이 흉갑에 박힐 때 마치 소용돌이가 일어나듯이 금속의 결들이 일어난다.
그리고 그것은 힘을 이기지 못하고 균열로 번졌다.
쇳조각들이 사방으로 튕겨 오르고 건틀렛은 피를 맛보았다.
괴물의 등을 뚫고 나온 건틀렛은 그 손가락들을 만개한 꽃잎처럼 활짝 피웠다.
그리고 쇄도해 오는 창날을 봉우리처럼 잡는다.
한차례 힘겨루기가 벌어지고, 그들을 뒤로 잠깐 당겼다가 밀쳐낸 세인은 그대로 주먹을 벼락처럼 내리쳤다.
그 바람에 폭죽처럼 터진 뼈와 살 조각들이 울프크릭의 얼굴을 떼렷다.
울프크릭은 손바닥으로 얼굴을 닦아냈다.
그러면서 열심히 앞을 밀고 나가는 세인의 뒤를 따랐다.
방패라면 부수고. 갑옷이라도 부순다.
세인은 그렇게 전진하며 폭이 넓은 검 하나를 빼앗았다.
그리곤 그것을 휘두르며, 다른 건틀렛을 낀 손도 빠르게 움직였는데….
손아귀가 적의 저항을 뚫고 들어가 목을 잡아 올리면, 무자비한 검의 끝이 적을 쑤셨다.
적이 울부짖든, 애원하든 아무 상관없이 그 일은 착착 진행되었다.
괴물들을 죽이는 세인의 얼굴은 끔찍할 정도로 무표정했다.
생명체를 죽인다는 죄의식은 한 올 만큼도 없었다.
그를 따라 드디어 성벽 위로 도착한 울프크릭은 잠시 투덜거렸다.
“이럴 거면 내가 굳이 왜 망치를 들고 있는 거야? 제길!”
결국, 그는 한 놈도 때려보지 못했다.
큰 원을 형성하기 위해 완만히 휘어진 성벽 위에서 드워프는 더 이상 바보같이 우리 어딜 가야 하냐고 묻지 않았다.
대신 망치를 들고 잽싸게 뛰었다.
가장 높이 치솟아 있는 망루를 향해서 말이다.
지금 그들이 하는 행동은 비상식적인 것이었다.
고립지를 향해 전력 질주하고 있었으니까 말이다.
울프크릭은 달리면서 기괴한 신음을 내뱉었다.
“크흑.”
그도 그럴 것이 성벽 아래로 오와 열을 맞추며 걸어가는 드워프들이 보였기 때문이다.
쇠사슬에 묶인 그들은 가축처럼 끌려다니고 있었다.
흘러내린 머리카락들과 찢어진 옷들 사이로 비위생적인 상태의 살이 드러나 보였다.
게다가 그들은 성벽 위의 소란에 멍청한 얼굴로 위쪽을 바라본다.
그런 드워프들의 얼굴에는 연이은 고통으로 생기가 보이지 않았다.
달리는 울프크릭의 얼굴에 두 줄기 선이 그어졌다.
그의 눈물은 가슴을 적셨다.
이럴 때는….
저 언데드의 말대로 울어도 괜찮을 것이다.
아래에서는 그가 우는지 안 우는지 알 수가 없을 테니까.
그러니까 이 슬픔은 비밀이다.
짐승처럼 울부짖은 울프크릭이 망루로 이어지는 계단에서 내려오던 괴물들에 몸을 던졌다.
거친 소리와 호흡이 이어지고….
육탄돌격에 방패를 든 괴물 병사들이 허우적거렸다.
힘과 속도 그리고 지적 판단도 전투에 큰 영향을 끼치지만, 정말로 중요한 게 전투엔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기세다.
그 기세라는 것은 천재 지략가도 정의하기 어려운 무형의 정의이다.
그건 때로는 목숨을 건 필사의 집념이나….
얼음보다도 차가운 분노, 내지는 그 모든 것이었다.
지금의 울프 크릭이 바로 그랬다.
그는 고문당한 몸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날뛰었다.
번쩍이는 칼과 튼튼한 방패를 든 괴물들은 오히려 그의 서슬에 맥을 못 추었다.
휘둘러진 투박한 망치는 드워프의 바위 같은 분노를 가지고, 용암 같은 피를 요구하듯 휘둘러졌다.
“이 더러운 놈들아! 나는 너희들의 피를 요구한다! 내게는 그것을 요구할 정당한 권리가 있다! 죽어라! 죽어라!”
피투성이가 된 울프크릭은 시체들을 가득 남겨놓고 미친 듯이 위로 올라갔다.
그러면서 내려오는 모든 것에게 뛰어들며 용맹하게 망치를 휘둘렀다.
그러면서 그가 낸 소리는 마치 태양을 삼킨 목소리 같았다.
아무리 견고한 사슬 메일을 입고 있어도, 눈에서 분노의 빛을 줄기줄기 흘리며 날뛰는 악귀에겐 무용지물이었다.
어떤 녀석은 옆구리를 맞아 층간 너머로 비명을 길게 이으면서 떨어져 내리고….
어떤 녀석은 무릎이 박살 나서 몸을 숙이는데, 그 낮아진 머리를 벼락처럼 망치가 후려쳤다.
세인과 울프크릭은 그렇게 가장 높은 망루에 도착했다.
꺼진 화로를 중앙에 놓고 있는 정상은 꽤 넓었다.
그 화로 안에는 검은 재뿐이다.
그것을 내려다본 울프크릭은 세인에게 시선을 던졌다.
이걸로 신호를 보내기엔 턱도 없었다.
망루로 올라온 이유는 당연히 신호였을 것이다.
그런데 아무리 봐도 이건 실패다.
“구원군은 어디 있지?”
질문을 던진 울프크릭은 세인이 가리키는 검지 너머를 보았다.
멀었다.
성문 밖이다.
언뜻 보면 지평선에 가까워 보이기도 했다.
울프크릭.
그는 침을 뱉는 게 아니라….
엉망으로 잘린 붉은 머리를 바람에 날리며 피식 웃었다.
그는 깊게 생각하길 포기했다.
“여기서 죽겠군. 뭐 좋아. 내 한은 내 백성들뿐이다. 이 육신에는 미련이 없다.”
그때 세인이 문가로 다시 돌아가는 울프크릭의 어깨를 잡았다.
난쟁이의 몸에는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고 있었기에 어깨는 따뜻했다.
의문을 담은 눈빛이 그를 올려다볼 때 세인은 대답했다.
“아까 한 말을 다시 하지. 복수를 위해서는, 백성의 생존을 위해서는…. 어떤 오욕과도 손을 잡아야 하는 거야.”
“무슨 말이야? 네가 강한 건 인정하지만, 밑의 모두를 다 상대할 수는 없다. 우리에게 미래는 없어. 그렇다면 최대한 많은 놈을 죽이고, 내 머리를 망치로 내리쳐 죽겠다.”
살아서 더 농락을 당하기 전에 말이다.
그리고 자신이 앞에서 날뛰는 걸 보면, 백성들도 그 자살을 이해할 거다.
왕은 할 만큼 했다고 느낄 거다.
그렇게… 느끼게 해주겠다.
세인은 울프크릭에게 다시 말했다.
“수치를 감수해야 해. 자존심을 내려놔야 한다. 쉽지 않나? 어차피 우리의 자존심은 없었어. 백성들의 자존심을 대리할 뿐이니까. 그러니까 네 백성의 복수를 위해 내 손을 잡아라. 왜냐면 네 백성의 분노는, 훨씬 전부터 그들의 자존심을 뛰어넘었기 때문이다.”
세인은 마검의 검날을 꺼내지 않았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그렇게 드러낸 검날은 결국 피아를 가리지 못한다.
아직은 그런 단계였다.
꺼낸다면 드워프고 뭐고 다 죽을 것이다.
“나는 그 분노가 필요하다. 그 증오에 물든 손이 필요해.”
하지만 검날을 드러내지 못한다고 해도 외부에 신호 정도는 할 수 있었다.
울프크릭은 이제는 언데드인지, 뭔지 모를 세인의 건틀렛이 진동하는 것을 느꼈다.
그 진동은 자신의 어깨로 전해지다가 멈추었다.
세인이 손을 떼어냈기 때문이다.
검은 연기가 건틀렛에서 뿜어져 나와 세인의 몸을 뒤덮었다.
그리고 그 속에서 붉은빛 두 개가 번쩍거렸다.
그 빛과 함께 살기가 요동치다, 급기야 허공에 파동을 일으킨다.
마치 죽음을 알리고 길게 우는 레이스의 신호처럼.
뒤로 주춤주춤 물러나는 울프크릭을 향해 두 개의 붉은빛이 말을 걸었다.
“이제부터 네가 손잡아야 할 수치를, 그 두 눈으로 확인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