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은 왕 마검의 주인-64화 (64/307)

# 64

& 울프크릭 (1)

이제 마을 이름은 번우드로 바뀌었다.

하지만 그건 이제 와 화젯거리도 안 된다.

하루아침에 하얀 성이 생겨나는 판이니까.

이런 불가사의한 일이 일어나니 영지민은 종일 그걸 가지고 떠들어도 시간이 모자라지 않았다.

특히나 아줌마들에게는 아주 크고 좋은 화젯거리를 던져준 셈이다.

더 놀랍게도 마을에는 교회가 있었다.

이것만 봐도 그들이 평소 스스로 어둠의 자식이라고 생각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 교회는 넓고 웅장하지 않았지만, 사람들을 자주 받아들였다.

그러다가 밤에 되면 그제야 조용해졌는데, 아스칼리온만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요즘 그의 기도대상은 소수에서 다수로 바뀌었다.

마을 사람들 모두에게 올리는 기도로.

인기척에 아스칼리온이 신부인 줄 알고 고개를 돌렸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고 말았다.

교회 안으로 들어온 것은 세인이었다.

그는 신기하다는 듯이 교회를 둘러보다가 아스칼리온의 앞에 와서 앉았다.

노인은 이미 무릎을 꿇은 상태였다.

그는 그런 자세로 세인의 말을 기다렸다.

“신부는?”

“요즘 고민이 많아서 자리를 자주 비웁니다. 영주님.”

아스칼리온이 세인을 생각해서 구체적이지 않게 뭉개며 말했지만, 세인은 금방 알아들었다.

그리고 혀를 찼다.

정체성에 괴로워하고 있군.

“생각하면 단순한 것을. 그의 생각과 마음은 변함없고, 그를 그렇게 만든 건 나이지 않나. 여기에 죄인이 있으니, 스스로 탓하며 채찍질할 필요는 없는데.”

아스칼리온 앞에서 세인은 많은 이야기를 해주었다.

전략적으로 어떤 문제를 빚을지 몰라, 마검에 대해서는 말하기 꺼렸으나….

그 외에 주민들이 알아야 할 것들.

그리고 최근에 그가 가지게 된 생각에 대해서 입을 열었다.

“내일이면 다들 알게 될 내용이야. 포고문으로 말이지. 말로 알려주는 병사들도 돌아다닐 테고. 당신만은 내 입으로 먼저 듣게.”

그가 보고 들은 미래에 대해서, 과거 어떤 선택의 기로에 섰고,

사람들을 부활시키려 했기에, 이렇게 변해 버린 것에 대해서 그는 털어놓았다.

사람들끼리 나돌던 이야기와, 지금 하는 이야기의 차이점은….

세인이 좀 더 자세히 진실을 이야기해주었고, 인정했다는 거다.

“결국, 자리를 비운 가엾은 신부가 화를 내야 할 대상은 나인 셈이지.”

그는 실컷 이야기 한 다음 끝을 맺었다.

“나는 결과적으로 너희들을 이렇게 만들었고, 어쩌면 대륙을 피로 물들일지도 몰라.”

그러면서 아스칼리온과 눈을 맞추는 세인이었다.

“내가 악마고, 광기에 물들어 있다고 생각해도 좋아. 내가 미래를 봤다고 당신 앞에서 말하는 것은, 그저 나의 상상으로만 빚어낸 허구일지도 모르지. 그렇게 생각하지 않나?”

“영주님.”

“그냥 당신에게는 먼저 이야기해주고 싶었어. 아침 해가 떠오르기 전에 말이야.”

그리고 세인은 가만히 앉아서 아스칼리온의 욕을 기다렸다.

“영주님 말씀처럼 어쩌면 일어날 수 있는 침략과 전쟁에 대해서, 불경하게 들리시겠지만, 저는 영주님을 응원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더 이상 영주님의 뜻을 의심하지도 않습니다. 제가 영주님을 응원할 수 없는 까닭은. 전쟁과 침략은 그 자체만으로 비극이고, 또 다른 하나는 정의의 완벽한 반대쪽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야기는 끝이었다.

더 기다렸지만, 이야기는 거기에서 끝이다.

고개를 깊게 숙이는 노인의 등을 두드려준 세인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교회를 빠져나가는데, 아스칼리온이 성가를 부르기 시작했다.

점점 멀어지는 노인의 목소리를 들으며, 세인은 그의 잠자리로 돌아갔다.

통신도 빠르지 않은 시대라서, 소국의 영주였던 세인이 골디언이란 자를 알 리가 없었다.

확실한 것은 골디온은 앞으로 인간의 영웅으로 변장할 것이다.

만약, 일이 잘 풀리지 않는다면 골디온에게 이쪽이 발각될 것이다.

그리고 그를 기필코 죽여야만 하는 세인의 검 끝은, 골디온이 두른 인간 방패를 향해 겨누어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다.

다음날 영지민은 포고문과 소리치는 병사들을 통해, 세인이 전하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들의 표정은 제각각이었지만, 생각보다 큰 동요는 없었다.

*  *  *

비비안의 성에서는 커다란 원형 테이블이 놓였다.

그 앞에 세인과 코다로, 비비안이 둘러앉았다.

카드와 지도가 가득한 탁자 위에서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차를 찾아 들며 세인이 말한다.

“제가 미쳤다고 해도 할 말은 없습니다.”

“이미 불가사의한 결과물을 본 후입니다. 지금 불가사의한 근거를 댄다고 해서 이상하게는 안 느껴지네요. 저만 그런가요?”

비비안은 그렇게 말하며 카드를 섞었다.

하루아침에 성이 나타나는 마당에 이상한 이야기로만 치부할 것도 아니었다.

그나저나 이제 그들의 카드는 여흥에서 놀이를 지나, 도박으로 발전하고 있었다.

큰일이다.

드디어 내기가 걸리기 시작한 것이다.

이 판만 해도, 검정 개의 밥을 누가 한 달 치 책임지느냐가 걸려있다.

어째 개 관리인인 마플의 입김이 작용한듯싶기도 한데, 여기서 그녀만 욕할 게 아니라….

검정 개는 평소에 정말 미친 듯이 음식을 밝혔다.

가끔 세인은 멀리에서 그 개를 바라보며, 저걸 다시 거둬들일까 말까 고민하는 눈치일 정도다.

코다로는 비비안이 던지는 카드를 집어 들어 펼쳤다.

그리고 최대한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려 노력하면서 말한다.

“길게 고민하자면 3년도 가능한 주제입니다. 하지만 저는 그런 거로 시간 낭비하고 싶지 않아요. 그냥 제 앞에 전장이 열린다면, 꼭 싸워야만 하냐며 샌님처럼 고민하는 게 아니라. 그 전장에서 믿는 사람의 편에 서겠습니다. 게다가 저는 이제 그 사람이 좋은 사람인지 나쁜 사람인지 가리지도 않습니다.”

그의 꿈은 어느덧 좋은 사람이 아니라, 믿는 사람 옆에서 싸우는 것으로 바뀌어 있었다.

“아니… 좀 가려야 하지 않을까요?”

비비안이 그렇게 말하며 목을 위로 약간 뺐다.

그러자 코다로는 발로 테이블 다리를 밀면서 의자를 뒤로 기울였다.

카드 패를 보호했다는 뜻이다.

둘의 이런 장난 같은 행동은, 전이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세 사람은 가끔 스스럼없이 서로를 대했다.

“천만에요.”

코다로는 카드를 내면서 계속 말했다.

“우리가 평민과 다른 점은, 불필요한 생각을 거세하는 훈련이 되어 있다는 것이죠. 시간 낭비니까요. 어차피 모두의 의사결정이 정해져 있다면 중간 단계는 건너뜁시다.”

그리고 손을 앞으로 내민 김에 지도 한 장을 펼쳤다.

그것을 보며 코다로가 말했다.

“우리의 목표는 어디입니까?”

*  *  *

세계수는 빛의 편에 있는 정령목이었지만 오염되었다.

그래서 현대에 이르러 나무의 영역에는 상반되는 거주민이 자리 잡게 되었다.

엘프와 드워프는 오염되기 전의 거주민이었다.

어린아이들인 엘프.

근육질의 난쟁이인 드워프.

그다음은 다크 엘프였다.

다크 엘프는 순수하고 어린 존재인 엘프를 보호하기 위해 스스로 타락하는 길을 선택했다.

그런 타락은 고대에도 있었던 일이었다.

그래서 드워프 쪽에서는 변절자로 불렸다.

인간들의 입장에서도 다크 엘프는 당연히 악이었다.

괴물들 입장에서는 도움이 되긴 해도 완전히 믿을 수 없는 존재였다.

실제로 다크 엘프의 왕은 왕이라고 불리긴 하지만 발언권도 없었다.

결국, 회색분자 취급이라는 이야기다.

그런 처지의 다크엘프들은 모든 고통을 감내하며 트렌트 밑에서 엘프들을 보호했다.

어린아이 같은 엘프는 다크 엘프들의 보호 아래, 심처에서 뛰어놀고 있다.

어찌 보면 괴물들의 노예가 되어 고통받는 드워프들 보단 현명했다고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순수한 엘프들을 지켜내고 있는 셈이니까.

지금 세계수 근방의 상태는, 전화가 대륙의 중앙으로 이동 확대됨에 따라 왕들이 속속들이 자리를 비우는 상태다.

왕들이 군대를 이끌고 가이더를 통해 남하했다.

잘 닦인 진격로를 통해 중앙으로 모이는 것이다.

괴물들에 있어 세계수는 반갑지만은 않은 존재다.

힘을 약화하는 감옥이기도 하니까.

하지만 주둔지로는 이상향 그 자체였다.

세계수 근방은 너무나도 풍요로웠다.

그늘도 많았고 말이다.

타 세력의 손길이 닿지 않는 심처도 무궁무진했다.

괴물들이 좋아하는 것이 인간 고기나 동물들이라고 해도….

결국, 배고프면 뭐라도 위장에 처넣어야 하는데 여기에서는 뭐를 심어도 잘 자랐다.

농부들은 작물을 기르기 위해 변덕스러운 날씨 등등 많은 변수와 싸운다.

그런데 이렇게 토양과 볕, 여러 가지로 환경이 좋으면 사기나 마찬가지였다.

오히려 농사를 실패한다는 게 이상하게 생각될 정도다.

그뿐만이 아니라 광물 매장량도 많았고 희귀 광물도 많았다.

괴물 왕들은 바보가 아니니까 여기를 완전히 포기하지 못하고 보급기지로 썼다.

결국, 그들의 병참선 중 가장 굵고 긴 것은 세계수에서부터 비롯되어지는 것이었다.

그 선은 중앙로를 향해 달리고 있었다.

그런 의도로 남겨진 요새 중 하나가 바로 블랙스틸이다.

녹색 절벽으로 뒤를 막고 있는 이 요새가 블랙 스틸이라고 불리는 이유는 간단했다.

검은 암석으로 이루어진 주둔지였고, 노예인 드워프들은 괴물들의 학대와 감시를 받으며 광석을 캐고 또 캤다.

검은 바위들이 인위적으로 동그랗게 모여 벽을 만드는 곳.

위에서 올려다보면 커다란 원 안에 세워진 크고 작은 건물들의 집으로 마차가 다가왔다.

그 마차는 위병소에서 잠깐 멈춰섰다.

먼지가 잔뜩 묻어 있는 검은 천을 뒤집어쓴 마부가, 다가온 오크들에게 종이를 들이밀었다.

오크들은 그것을 받아들고 마부를 잠시 바라보았다.

그리고 자기들끼리 뭐라고 떠들었는데, 인간의 언어는 아니었다.

인간의 말을 할 줄 아는 병력은 대부분 밑으로 내려간 상태였다.

그들이 마부에게 말을 걸자, 마부는 벙어리란 표시로 자신의 입에 가위 표시를 했다.

그리고 마차의 문을 열었는데, 거기에는 고문 도구들이 아주 가득했다.

마차의 진동 때문에 옆으로 굴러다니고 있는 아이언 메이든 표면에는 피가 엉겨있다.

그것을 본 보초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결국 마차를 통과시켰다.

블랙스틸에서는 광물연마를 위해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는데, 이 열쇠는 드워프들의 지도자인 울프크릭이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고집불통인 이놈은 아무리 괴롭혀도 입을 열지 않는다.

물론 연마술뿐만이 아니라 여러 중요한 것을 요구하긴 했지만….

도저히 굴복할 낌새가 보이지 않자, 특별히 전문가를 초빙한 것이었다.

죽이지 않고 무한에 가까운 고통을 주려면 전문가가 필요하다.

마차는 블랙 스틸 내부를 가로질러 갔다.

가끔 머리 두 개 달린 낙타가 마차를 보지 못하여 살짝 부딪혔고, 낙타 짐꾼이 불같이 화를 내기도 했다.

길 위는 돌아다니는 괴물들로 북적거렸다.

시장바닥으로 조성해 놓은 곳도 보인다.

그리고 활발하게 돌아다니며 시끄럽게 떠드는 그들의 뒤로 노예들이 보였다.

몸 선이 굵은 난쟁이들이 쇠사슬을 매단 채 짧게 뛰어 이동 중이다.

순박하고 우직하게 생긴 그들의 모습은 뭐라 말할 수 없이 처참했다.

장난으로 몸과 얼굴에 낙서하듯이 그어놓은 문신만 해도 그랬다.

이들은 여기에서 가축 이하였다.

마부가 마차를 움직이는 당나귀를 재촉했다.

그리고 아까 그 종이를 보여주며 울프크릭이 갇힌 곳을 찾아갔다.

그가 마지막으로 도달한 곳은 직사작형의 건물이었다.

이제 주변은 검은 암석에 보호받는 토성으로 변했다.

안내인을 따라 아래로 내려간 고문인은 철문을 열고 복도에 들어섰다.

뒤에서는 쾅 소리와 함께 철문이 닫히는 소리가 났다.

졸졸졸.

바닥에는 양옆으로 작고 긴 홈이 패여 있었는데, 배수로인 모양이었다.

위쪽에서는 천장에 붙은 야광석들이 길을 만들었다.

고문인은 고문 도구가 든 가방을 질질 끌며 전방으로 이동했다.

앞에는 드워프들의 왕인 울프크릭이 의자에 묶여 있었다.

동맹자의 배신으로 미주를 마시고 잠이 든 그는, 모욕적이게도 잠들어 있던 의자째로 운반됐다.

그리고 그의 백성들이 보는 앞에서 소의 등에 묶여 돌아다니고 실컷 조롱을 당했다.

그의 최종 도착지는 여기였고, 그 후로도 온갖 희롱과 고문을 당해야만 했다.

울프크릭 앞에 선 고문인은, 상대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이 먹잇감을 어떻게 요리할지 고민하는 걸까?

그 모습은 흡사 일류 요리사가 닭을 바라보며 느끼는 감흥 같은 거?

울프크릭은 그림자가 드리워지자 눈을 떴다.

그리고 눈을 가늘게 만들며 상대를 올려다보았다.

그는 붉은 머리를 가지고 있었는데, 장발이었을 머리는 가위질로 엉망진창이었다.

몸에는 흉터들이 가득했다.

근육은 많이 줄어들었고 입술은 하얗게 갈라졌다.

이 작은 눈을 가진 난쟁이는 한때 대단한 투사였지만 여기에서는 조롱거리 생쥐, 그 이하도 이상도 아니다.

그때 고문인에게서 말이 흘러나왔다.

“악취가 지독하군.”

고문인은 벙어리가 아니었나?

울프크릭이 그때 침을 뱉었다.

침을 맞는 악취미는 없었으므로, 그 행동에 고문인은 뒤로 물러서며 그것을 피했다.

그리고 두건을 뒤로 넘긴다.

그러자….

세인의 얼굴이 드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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