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3
& 술래잡기 (2)
“이상한 일입니다. 왜 엘릭서들의 주인들은 각자 대상들이 난감해 하는 것을 요구하는 것일까요?”
거울 안의 홀리 디스트로이어는 그렇게 말했다.
힘이 극에 달하면 시간을 조종하는 마검에게 세인은 정작 무리한 것을 요구했다.
죽은 자들을 살려달라고 말한 것이다.
반대로 부활과 치유의 권능이 있는 홀리 디스트로이어에게는, 오히려 시간을 돌려달라는 세리스의 부탁이 있었다.
“병상의 세리스가 부탁했습니다. 뒤로 미뤄두었던 계약의 조건으로 당신을 지목했어요. 과거의 당신를 보게 해달라고. 그래서 저는 억지로 인과를 비틀었습니다. 그러는 데 시간이 걸렸죠. 하지만 저렇게 정신을 못 차려서야….”
“소원의 사용을 미룰 수 있는 거였나….”
“레드에게 고마워하세요.”
“뭐?”
“이 성이 지금까지 남겨진 이유는, 인간 최후의 보루로 삼기 위해 레드가 희생했기 때문입니다. 그가 세운 왕국은 당신에 대한 우정 때문에 박살이 났습니다. 레드라는 당신의 벗은 아주 비참하게 죽었습니다.”
세인이 거울을 유심히 바라보자, 그 안의 소녀는 그의 시선을 받아내며 이렇게 말했다.
“보세요, 지금을. 이게 다 당신 탓입니다. 마검이 깨어난 까닭은 그 시대가 마검을 필요로 했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그 필요 안에서 의지와 판단력을 발휘했어야만 했어요. 그런데 당신은 책임지는 사람들만 생각했죠. 죄책감에서 벗어나려고 몸부림쳤어요.”
거울 속의 소녀는 침착한 얼굴로 작은 입술을 계속 움직였다.
“그래서 하늘은 불타고. 바다는 메마르고. 당신이 사랑하던 사람들은 학살을 당했어요. 당신은 당신을 사랑하는 이들의 마음을 엉망으로 만들었으며, 그중 하나가 공교롭게도 저의 세리스죠.”
“….”
“세상이 이 정도쯤 되면 그녀가 정신을 차려야 해요. 그래야 힘을 빌려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의 세리스를 보세요. 거울에 비친 제 눈을 통해 당신을 보세요. 그게 힘들다면 제 입술을 빌려 당신을 정의해 드릴까요? 당신은 괴물이에요.”
통렬한 비판에 세인은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지금의 그는 아직 저지르지도 않은 일이지만, 성검의 목소리를 듣자 그녀의 고통이 마디마디 느껴졌다.
“당신이 방치한 세상을 보세요.”
그러면서 거울은 아비규환이 된 세상 구석구석을 비춰 주었다.
살아도 산 게 아닌 것들이 해일처럼 넘쳐나 산을 뒤덮었다.
세인은 그 앞에서 입을 굳게 다물었다.
그리고 시간이 흘렀다.
급할 것은 없다.
지금의 세상은 종결을 앞두고 있었으니까.
세인은 많은 생각을 해보고 마음을 정리해보았다.
충분히 시간이 흘렀을 때, 그가 불쑥 침묵을 깨며 말했다.
“그렇다면 돌이키면 되지.”
“….”
차가운 소녀의 얼굴을 바라보며 세인이 다시 말했다.
“내가 아직 저지르지 않은 죄에서 도망치지 않겠다. 내가 돌아갈 수 있다면, 네 시대가 오기 전에 내 시대를 완수하마.”
처음에는 그의 영지민을 살리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지금의 세인은 어느덧 더 큰 테두리 안에 들어와 있었다.
그것은 바로 세계를 생각하는 일이다.
세인의 굳은 얼굴을 응시하던 홀리 디스트로이어의 상이 흐릿해졌다.
세인은 앞으로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 거울에서 그녀를 이끌어내며 다짐했다.
“내 선택이 틀렸고, 돌이킬 수 있다면 돌이켜야지. 완수해야 하는 내 몫이 있다면 해내야 하겠지.”
과오를 수정하는 것에 망설임이 있을 수 없었다.
그가 성검을 손에 들었을 때 주변이 천천히 어두워졌다.
당황하지 않은 그는 성검을 품에 안고 천천히 어둠 속을 걸어 나왔다.
이번에는 손을 앞으로 내민다든가 하는 짓은 하지 않았다.
다시 하얀 문을 통과하자, 그렇게 짧은 이야기 하나가 끝났다.
그는 계속 걸었고, 좀 더 멀리 있는 곳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던 다크 엘프 엘라이저를 보았다.
왠지 어색한 기분에 그녀의 얼굴을 보지 않고 부탁한다.
“이걸 스톰에게 전해줘요. 전 그의 퀘스트를 완수했습니다.”
다크 엘프인 그녀는 성검을 알아볼까?
알 수 없었다.
엘라이저는 잠이든 하얀 검을 허리에 차며 말했다.
“결국, 퀘스트를 완료했군요.”
그녀는 세인에게 그 말을 남긴 채, 등을 돌려 멀어져 갔다.
* * *
코다로는 호수에서 작은 배를 띄워놓고 낚시를 하고 있었다.
콧노래를 부르던 그는 좀 의기소침한 표정이었다.
“음….”
콧노래를 멈추고 우울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싸우는 게 좋았다.
거칠게 살면서 하루하루 긴박하게 달리는 삶에 익숙해져 있었다.
“미련이야. 평화만큼 소중한 게 어디 있어. 게다가 이 꼴로!”
그렇게 자신에게 호통쳐 보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때 갑자기 어디선가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에 뒤돌아보니 호수 가장자리에서 누군가가 자신을 부르고 있었다.
노를 저어 바깥쪽으로 가보니 세인이다.
그의 손짓에 코다로는 배를 떠나 걸어 나왔다.
무릎 아래가 흠뻑 젖었을 때 갑자기 뒤에서 굉음이 들린다.
헉? 하고 뒤돌아보니, 호수 중앙에서 엄청난 크기의 꼬리가 솟아나 좌우로 흔들거리고 있었다.
그것이 다시 가라앉았을 때 일어난 파도가 서서히 가장자리로 밀려온다.
그것은 결국 코다로의 허벅지 위쪽까지 적셨다.
“뭐야 저거? 괴물?”
그때 세인이 코다로에게 말했다.
“당신은 저것에 의해 살해당할 운명이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당신의 목숨을 구했습니다.”
세인의 말에 코다로는 씨익하고 웃어 보였다.
긴장을 풀어주려는 농담이었다면 역할을 제대로 한 셈이다.
“뭐, 그렇다고 해두죠.”
“전에 좋은 사람 옆에서 싸우는 게 꿈이라도 하셨죠?”
“멀리 나간다면서요. 갑자기 와서 하는 소리가 그겁니까?”
세인은 손을 내밀었다.
그 손을 맞잡으니 단단함이 느껴졌다.
“저는 이제 좋은 사람이 못될 것 같습니다. 하지만 같이 싸워주십시오. 그게 제 바람입니다.”
뭐랑 싸우는지는 모르겠지만, 나쁠 것도 없지.
코다로는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사실 저는 충분히 피할 수 있었어요. 미리 알아차렸거든요. 물고기 그림자가 수면 아래에서 보이더군요.”
그렇게 허풍을 치며 코다로는 맞잡은 손을 흔들었다.
“그렇겠죠.”
그리고 잠시 다물어진 입을 다시 떼어낸 세인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 영토 이름을 정했습니다. 번우드라고 하죠.”
* * *
스톰은 다크 엘프인 엘라이저를 통해 성검을 받아들었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보상이 이루어질 거라는 의미다.
검날을 가볍게 손가락으로 튕긴 그는 멋지게 말했다.
“아야.”
손을 베었다.
* * *
요즘의 비비안은 아늑함도 느끼지만, 약간 소외감도 느끼고 있었다.
세인과 코다로는 죽이 맞는지 자주 만나기도 했지만, 소녀라서 신경 써주는 건지….
아니면 관심사가 다르니까 방치되는 건지, 도통 알 수가 없을 정도였다.
그래서 책을 핑계로 세인을 찾아가도 보았지만, 대화가 좀처럼 이어지지 않는다.
하품하며 자리에서 일어난 비비안은 스스로 묻곤 했다.
이런 일상에 만족하는가?
“사춘기인가? 자꾸 마음이 복잡하네.”
그렇게 중얼거리며 멍하니 침대 위에 있는데 마플이 호들갑을 떨며 방문했다.
“비비안 영주님 어서! 어서 이걸 써보세요!”
“뭐?”
“어서요 영주님!”
마플은 숨넘어가 죽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헐떡거렸다.
흥분 상태를 보아하니 위험한데?
그나저나 눈을 왜 가리라는 거야?
그렇게 생각하며 비비안은 마지못해 얼굴을 내밀었다.
설마 이거 납치는 아니겠지, 라는 생각을 하며.
마플은 너무 흥분해서 목소리가 가팔라져 있었다.
그 상태로 비비안의 손을 잡고 밖으로 끌고 나갔다.
그리고 한참을 걷는다.
“얼마나 걸어야 하는 거야. 사람들이 볼까 무섭잖아!”
“이른 아침이라 사람이 없어요. 영주님! 가장 먼저 이걸 보셔야 한다고요!”
화를 내자 마플은 찔끔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잡은 손을 흔들었다.
이걸 보면 굉장한 흥분 상태다.
그러자 오히려 비비안은 두려워졌다.
대체 무슨 일이지.
결국, 그녀는 마플의 인도에 따라 어느 한 지점에서 멈춰섰다.
그리고 마플은 말했다.
“짜잔!”
눈가리개가 벗겨지자 비비안은 잠시 정신을 못 차렸다.
그리고 얼떨떨한 표정으로 있다가, 곧 자신의 두 눈을 의심했다.
“이게 무슨?”
꿈인가?
아직?
지금 여기 꿈속이야?
그렇게 되뇌는 그녀의 옆으로 어느샌가 코다로가 서 있었다.
그리고 세인은 다른 쪽에 섰다.
둘은 팔짱과 뒷짐을 지고 앞쪽을 감상했다.
코다로는 여유 있게 이 충격적인 장면 앞에서 휘파람까지 불었다.
“대단하군요. 이런 게 가능합니까? 내건 없소? 이건 너무 레이디 우대 아닙니까?”
“이걸 가능하게 하느라 힘들었습니다. 기적 같은 상황도 있었고요.”
“내건 없다는 말을 그렇게 길게 하지 말죠.”
투덜대는 코다로 옆에서 비비안은 눈가를 비볐다.
호수 위에 커다란 성이 서 있었다.
그 성은 백색이었고, 아침 햇빛을 받아 호수 표면과 더불어 반짝반짝 빛났다.
새들이 열을 지어 떠올라 성을 지나가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뾰쪽한 유리 지붕들은 아침이 밝아오는 파란 하늘을 찔러대고 있었다.
그녀는 성에 붙어 있는 황금 새를 본다.
하얀 유리 바탕에 붙어 있던 새는 날개를 활짝 펼치고 있었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할 수 있는가…?
그런 것에 집중하기보다는 자신의 펜던트를 만지작거렸다.
디펜더스의 문장은 여러 가지인데, 그중 하나가 출병식 때 쓰는 날개 펼친 황금 새 문장이었다.
펜던트에도 있고 성에도 붙어 있는 것.
눈물을 흘리는 비비안 옆에서 세인이 말했다.
“비비안님은 모두를 위해 성을 희생하셨죠. 그 고통은 어마어마했을 겁니다. 그러니 저건 당연한 것입니다. 당신의 결단이 부른 결과물이죠.”
“이게 꿈이 아니라면. 아니 꿈이라 해도 전 그럴 자격이 없어요.”
“선물에는 이유만 필요하지 자격은 필요 없어요.”
그때 세인은 갑자기 나이 든 비비안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래서 울먹거리며 몸을 들썩이는 비비안의 어깨를 잡고 그녀의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비비안님, 부탁합니다. 하나만 말씀해 주세요. 제게 고맙다고 말씀해 주세요.”
“예?”
세인이 그녀를 향해 다그쳤다.
“고맙다는 말 하나면 됩니다. 저를 위해서 해줄 수 있잖아요?”
비비안은 주룩주룩 눈물을 흘리더니 북받쳐 오르는 가슴을 진정시켰다.
그리고 가까스로 말했다.
“고맙습니다…. 정말로… 고마워요.”
세인은 그런 그녀를 끌어당겨 안아주었다.
그리고 그런 그의 품 안에서 비비안은 엉엉 울었다.
코다로는 그들의 뒤에서 뒤늦게 집 밖으로 나와보며 놀라는 사람들을 향해 웃었다.
이렇게 스톰 퀘스트는 한 소녀를 감동시키고 끝났다.
* * *
한편 세리스는 정말 천리안의 말대로 가문을 떠났다.
그의 말을 액면 그대로 믿지는 않았지만, 여행에는 목표가 필요했다.
천리안은 마지막으로 그녀에게 목적지를 말해 주었다.
세계수.
결국, 그녀는 세인이 있는 세계수 지역을 목적지로 삼았다.
그녀는 가이더를 통해서 가는 게 아니라 멀리 돌아서 가는 길이었다.
여행자에겐 위험한 여행길이었지만, 다행히 그녀의 검술 실력은 보통이 아니었다.
수많은 어중이떠중이가 덤볐고 작살을 냈다.
그녀는 그러고도 쌩쌩 했는데, 정작 그녀의 검은 시간이 갈수록 너덜너덜해졌다.
이까지 빠지는 상황이 도래하자, 결국 그녀는 검을 구입하기 위해 작은 가게에 들렀다.
그 가게는 외딴곳에서 홀로 장사를 하고 있었다.
간판에는 격이 맞거나 예쁜 여자랑만 거래한다는 괴상망측한 글이 붙어 있었다.
“이렇게 한 칸짜리 작은 가게인데도 손님을 가려?”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가게로 들어가는데, 잘생긴 한 남자가 앉아 있는 게 보였다.
남자는 그녀를 위아래로 훑더니 근엄하게 말했다.
“음… 통과.”
뭔가 기분이 나빠졌지만, 필요한 걸 사고 빨리 나가자.
“이거 얼마에요?”
“키스 아니면 은화 반 개 줘. 둘 중 하나를 선택해.”
그녀는 은화를 힘껏 쪼갠 후 남자에게 던졌다.
투덜거리며 은화 반 개를 줍는 남자 앞에서 세리스는 하얀 검을 뽑아 보였다.
원래 뭐 이렇게 비싸냐고 화를 낼 생각이었는데, 이거 보통은 넘는 검 같다.
검신의 강도와 아름다움에 놀라고 있는데, 남자가 은화를 줍더니 허풍을 쳤다.
“그거 굉장한 검이야. 엄청난 힘이 깃든 검이라고. 하지만 그 검은 사람을 가려가며 힘이 깨어나는데. 넌 아마 안 될 것 같아. 왜냐면 성질이 더럽거든. 그 검은 천사 같은 아가씨에게만 반응해. 왜냐면 천사의 의지가 깃든 검이라서 그래.”
“….”
“그 검은 좋은 시대를 여는 검인데, 넌 분명 그런 시대를 열 수 없을 거야. 왜냐면 성질이 개떡 같으니까. 돈을 면전에 던지다니 네가 사람이야?”
폭풍처럼 이어지는 수다를 귓잔등으로 들으면서도 세리스는 설마 했다.
그녀는 성기사라 성검에 대한 그림을 몇 번 봤었다.
하지만 화폭 속의 그림은 굉장히 과장되어 있었다.
그리고 이런 가게에서 성검을 판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다.
그건 과대망상이지….
“뭐 어쨌든 쓸만한 검 같아요. 그래도 은화 반 개면 비싸요. 너무 비싸요.”
검을 허리에 차며 세리스가 그렇게 말하자, 남자는 너 되게 짜증 나니까 어서 꺼지라고 말했다.
그리고 특히 마지막에 비싸다는 말을 두 번이나 강조한 게 밥맛이라고 했다.
더 있다가는 물통을 집어 던질 기세라 세리스는 그냥 나왔다.
그리고 길을 재촉했다.
남겨진 남자는 잠시 그대로 앉아 있더니, 가게 철수에 들어간다.
남자의 모습은 어느덧 코볼트 스톰으로 변했다.
의자를 접는 그의 중얼거림이 주변에 울린다.
“그래 깨어나서는 안 되지. 그런 시대는 일러. 잠들어라, 성검. 쉴 땐 쉬는 거야. 오래 푹 쉬길. 네 정당한 둥지. 주인의 손아귀에서.”
그 후로 코볼트 스톰을 본 이는 아무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