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2
& 술래잡기 (1)
그 어둠 속에서 놀랍게도 마검이 말을 걸어왔다.
- 다른 힘이 널 부르고 있다. 응하겠는가? 원치 않는다면 내가 거절할 수 있다. -
세인은 가겠다고 말했다.
그걸 위해서 들어 온 거니까.
그게 끝이었다.
마검은 아무런 말도 건네지 않았다.
세인은 어둠 속을 걸어갔다.
여기가 스톰의 말대로 그의 창고라면, 과연 그가 어떻게 물건을 찾아내는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너무 오래 걷다 보니까, 앞에 벽이 버티고 있다면 언젠가 부딪힐 것만 같아 손을 내밀고 걸었다.
그리고 오래지 않아 바람이 불어온다.
쌩쌩.
그 소리가 귀에 느껴지고 추위가 살갗에 느껴졌다.
그리고 마지막은 시각이었다.
“여긴….”
세인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빨갛다, 온통 빨간색이다.
석양인가?
석양이라고 하기에는 일관된 적색이었다.
숨이 막힐 정도의 붉은 색은 농도라는 게 없었다.
그리고 그 아래에는 눈처럼 하얀 성이 자리 잡고 있었다.
으리으리한 성은 호수 위에 서 있었는데, 그 뾰족한 유리 지붕들로 붉은 하늘을 찔러대고 있었다.
성의 중앙에는 하얀 바탕으로 된 유리가 있었는데, 그곳엔 새가 붙어 있었다.
활짝 날개를 편 황금색 새.
호수 주변은 정말 황폐하다.
사막 위의 호수, 그리고 백색 성, 불길한 붉은 하늘.
그가 멍하니 그것을 보고 있는데 이변이 일어났다.
검은 까마귀가 날아와 그의 어깨에 내려앉는다.
그 새와 잠깐 눈이 마주쳤는데, 마정석을 박아 넣은 듯한 눈이었다.
그때 누군가가 앞에서 그를 부른다.
“이봐! 왜 멍하니 서 있는 거야? 역사 기록관! 빨리 오라고! 어휴 정말, 요즘 젊은것들은.”
병사가 와서 그를 끌고 성안으로 들어갔다.
지금의 그는 세인이 아니었다.
역사 기록관이다.
그리고 여기는….
놀랍게도 세계수가 있던 자리였다.
온통 황폐해진 이 사막 같은 곳이 말이다.
병사들이 두런두런 나누는 대화에서 세인은 그것을 깨달았다.
그는 위층으로 안내되었다.
그리고 우아한 여인의 앞에 섰다.
나이가 들었지만…. 젊었을 적에 아주 대단한 미모를 자랑했을 것만 같던 여인은 세인을 보고 자상한 미소를 지어 주었다.
그리고 새에 대해서도 한마디 했다.
“새는 오래전에 멸종된 줄 알았는데 의외네요.”
세인은 그 말에서 힌트를 얻었다.
과거에 군단장의 말을 듣지 않았다면 깨닫지 못했을 말.
다크 엘프의 말.
‘빅과 스몰 드래곤의 이야기. 미간 사이에 숨는다.’
‘보물은 가까이에 있다.’
세인은 새가 날아갈까 조심하며 곁눈질로 까마귀를 보았다.
이 녀석인가?
이 녀석이 바로 성검 홀리 디스트로이어?
병사들이 경례하고 멀어지자, 우아한 여인은 미소를 잃지 않고 까마귀와 눈싸움 하는 세인….
아니 역사 기록관에게 말을 던졌다.
“일단 내게 궁금한 것을 물어보렴. 안에 들어가려면 아직 시간이 필요하구나. 그녀는 지금 힘들어하고 있거든. 제정신이 아니야.”
세인은 눈앞의 나이든 여인에게 물어보았다.
“당신은 누굽니까?”
그걸 정말 몰라서 물어보는 게 아니라 의례적인 질문으로 받아들였는지, 중년의 여인이 손으로 입을 가리고 살포시 웃었다.
“이 성의 주인. 여왕 비비안이다.”
“….”
세인은 숨이 턱하고 막혔다.
뭐라고?
그러고 보니… 좀 닮은 것도 같았다.
그럼 여긴 미래인가?
아니면 성검이 만들어낸 환상?
그는 혼란스러운 머리를 살짝 흔들며 말을 계속했다.
“비비안… 그러니까….”
“님이라고 부르거라.”
지킬 건 지켜야지.
“비비안님. 왜 여기는 사막이 되었습니까?”
“괴물들이 세상의 모든 것을 파괴했잖니. 아, 기록하기 위한 질문이지. 괴물들이 세상을 파괴했다. 그래서….”
세인과 비비안은 세계수에 보금자리를 확장 시키며 살았다.
게다가 세인은 결혼까지 했고….
모든 게 순조로워 보였다.
“그는 누구랑 결혼했나요?”
“다크 엘프인 엘라이저님이지.”
“….”
괴물들은 중앙에서 힘을 쓰다가 골디온이라는 인물에게 멸망 당했다.
골디온이라는 영웅이 괴물들의 행각을 종식 시키고, 세상에는 평화가 찾아왔다고 믿었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어. 골디온과 괴물들은 서로 협상을 한 거야. 골디온은 괴물들을 미래로 보냈어. 그리고 해치운 것으로 위장을 했지. 대단한 사기극에 모두 속았어.”
“미래로….”
“각성자들의 피는 영적 화폐야. 그 화폐를 지불해서 그들은 미래로 가버린 거야. 각성자들을 모아 피를 연성해서 문을 연 거지. 골디온은 인간 편에서 가증스럽게도 그런 그들을 도왔고 말이야. 그런데 우린 그것도 모르고 감쪽같이 속아 넘어갔지.”
시간이 지난 후 나타난 괴물들은 어마어마하게 강해져 있었다.
“세계수는 풍요로운 곳이지만, 결국 그들의 힘을 약화하는 감옥이었어. 그들이라고 마냥 좋아서 이 안쪽에 지낸 게 아니야. 세계수는 그들의 수호자이자 억압하는 가해자였어. 반반씩 섞인 게 바로 세계수였던 거야.”
그리고 비비안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몬스터들 입장에서 보자면 가까이는 세계수라는 감옥이, 밖에는 인간들이 있었지. 인간들과 총력으로 붙으면 결국 패배는 불 보듯 뻔해. 남부의 힘이 있거든. 그래서 수를 낸 거야. 시간을 빨리 돌리는 동안 그들의 억압도 힘을 잃은 거야. 한번 끊어진 사슬과 골디온이 영웅 행세를 하며 모은 병력이 합쳐지자, 불과 기름이 만난 것 같았지.”
언젠가 세인은 ‘왜?’라는 질문을 해본 적이 있다.
왜 대륙으로 오려는 거지?
그리고 비둘기파도 그렇고, 세리스도 호언장담했었다.
괴물들은 승산이 없다.
절대 아래로 못 온다.
칠 대 삼.
하지만 인간 쪽에 괴물과 내통하는 존재가 있었고, 그는 괴물들과 협력해 세상을 멸망으로 몰아 넣었다.
괴물들은 불리한 현실에서 승부를 보려고 한 것이 아니다.
그들은 각성자들의 피를 대가로, 미래를 향해 가버렸다.
골디온은 대륙을 구한 영웅으로서 나라를 확장하고 병력을 모았다.
인재들은 그가 후안무치한 악당인 줄도 모르고, 수도로 몰려들어 충성을 맹세했고 말이다.
그리고 세계수의 족쇄를 끊는 데 성공한 괴물들은 자유를 얻었다. 그리곤 강해져서 미래에 나타났다.
세인은 무심코 창밖을 보았다.
사막, 눈이 따가울 정도로 적색인 하늘.
이게 세상의 전부나 마찬가지다.
세인은 그 외에도 이것저것 물었다.
그리고 여러 가지 사실을 알게 된다.
그중 하나는 이거다.
“코다로님이 죽었다고요?”
“호수에서 당했어, 괴물에게…. 참 허망한 죽음이었지. 그렇게 갈 사람이 아니었는데 방심이라도 했던 걸까?”
“그때가 언제인가요?”
세인은 갑자기 코다로의 말이 생각났다.
낚시하러 한동안 자리를 비울 거라는 말.
“과거에 세인님이 자리를 비웠을 때야. 세계수 지역에 자리를 잡고, 이 번우드 마을이 한창 개발 중이었을 때지. 그땐 참 좋았는데….”
“번우드 마을….”
“자유민을 지향하자는 의미로 지어진 이름이지. 원래는 세금 안 내는 자들의 마을을 지칭하는 말이었지만…. 그때가 행복했었어. 세인님이 내게 선물을 주셨을 때가 기억나. 그때는 감동 그 자체였지.”
문득 비비안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때 꼭 고맙다는 말을 했었어야 했는데… 하지 못했어. 너무 놀라서 말이야. 꼭 고맙다는 말을 했었어야 했는데…. 그게 너무 후회된다.”
그 후로도 충격적인 사실이 꼬리를 물었다.
세인을 과거형으로 말하는 비비안에게 물으니, 그는 죽었다고 했다.
세인은 지금 이 공간의 비비안을 통해 엘릭서와 라이트닝 블러드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들었다.
“세인… 님은 왜 죽었습니까?”
“그는 바보였어. 매일 생각했던 거야. 어떻게 하면 모든 것을 돌이킬 수 있을까? 자신이 한 짓을 말이야. 훗날 나에게 말해줬을 때도, 나는 괜찮다고 말했거든. 지금의 행복이 소중한 거니까. 하지만 그는 죄책감에 괴로워했어. 자신의 사람들을 괴물로 만든 것을…. 그래서 고민하다가 잘못된 결정을 내리게 돼.”
세인은 그 말을 들으며 주먹을 쥐었다.
맞았다.
그는 속으로 어떻게 하면 되돌릴 수 있을까 고민 중이다.
“엘릭서 중에 홀리 디스트로이어는 정화와 부활 권능이 있어. 그건 기적이나 마찬가지며 아무런 부작용이 없지. 마검이든, 네크로멘서든, 교황이든, 치유나 부활에는 어마어마한 대가를 치러야 해. 대신 자신의 영혼을 바친다든가 하는 일이지. 하지만 기적의 성검은 그냥 살려버려. 그게 바로 성검의 힘 중 하나야. 그래서 생각한 거야 세인은.”
뒤늦게 안 사실을 토대로 세인은 뭔가를 계획하게 된다.
그리고 실행에 옮긴다.
“세리스를 기사로 거둔 세인은 주군으로서 그녀를 강제했어. 명령했지. 그 명령은 바로….”
- 나를 죽여라!
“그 당시 세인을 열렬하게 사랑하고 있던 세리스에게는 청천벽력같은 일이었지. 하지만 생각해봐. 홀리 디스트로이어가 제대로 깨어나 힘을 발휘하려면, 세리스가 라이트닝 블러드로서 성검의 절대적 힘을 발휘하려면, 한 시대에 하나의 엘릭서라는 규칙을 지키지 않으면 안 돼. 절대적인 힘은 한 시대에 하나니까. 그러면 전제돼야 하는 건 뭐지?”
마검 오버 더 데스.
그 주인인 세인의 죽음.
그 필수불가결.
“세인은 그녀로 하여금 오버 더 데스를 주고 자신을 죽이도록 했어. 그게 얼마나 끔찍한 일인지. 그는 정말 알았을까?”
“….”
“결국, 그의 뜻대로 홀리 디스트로이어의 힘을 얻게 된 세리스는 사람들을 인간으로 되돌렸지. 하지만 그들이 과연 기뻐했을까? 어차피 터전을 일궜어. 거기에 적응한 지 오래였다고. 그리고 그들에게는 인간에 대한 회귀보다, 현실적으로 영주가 더 필요했어. 자신들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지도자. 그런데도 죽기 전 세인의 아집은 지독했어. 그는 자신의 죄책감에 매몰된 거야.”
세리스는 성검으로 세인의 시체를 붙잡고 몇 번이나 살리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가망 없는 일이었다.
왜냐면 그가 살아나기에는….
이미 성검의 엘릭서는 활성화되어 버렸으니까.
살리면 그 자체로 모순이기 때문이다.
한 시대에 하나의 절대 힘.
“다크 엘프인 엘라이저는 세인이 죽은 뒤, 그 충격에 자살했어. 결국, 세인은 비극을 자초한 거야. 하지만 아무도 그를 말릴 수 없었지. 그의 속죄가 부른 비극에 많은 사람이 다쳤지.”
그 후로도 세인은, 충격을 받은 얼굴로 세상이 얼마나 망가졌는지에 대해 들었다.
바다는 불타고, 하늘은 변하고….
골디온의 폭정에 시달리던 인간들은 그것도 모자라 무참히 학살당했다.
그리고 괴물들은 자기끼리의 싸움을 반복했다.
여기가 바로 지옥이었다.
그러나 지옥도 곧 끝난다.
지금 세상은 멸망 직전이니까.
세인이 휘청이는데 건너편의 문이 열렸다.
그러자 비비안은 말했다.
“들어가 봐. 정신이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녀의 증언도 들어야지. 우리가 이제 남길 수 있는 것은 비극적인 기록밖에 없어. 네가 그걸 해줘야 해. 그렇다면… 언젠가, 언젠가….”
불빛이 완전히 꺼져버린 세상에 다시 축복이 있어 기적적으로 싹을 틔우고, 그 기록을 읽는 존재가 나타날 수 있을까.
충격을 받은 세인의 옆에서 재촉하듯이 까마귀가 까악 하고 울었다.
세인이 비틀거리며 걸어간 곳은 커다란 방이었다.
거기에는 너무나 절망적인 상태의 세리스가 누워 있었다.
성검은 당연히 보이지 않았고, 그녀는 고열에 시달리며 정신을 좀처럼 찾지 못했다.
늙어버린 세리스의 얼굴을 내려다보자, 그녀가 겪은 충격과 고통이 너무나도 잘 느껴졌다.
그녀의 눈은 멀어 있었다.
스스로 자해한 것이다.
그때 세리스가 손을 뻗자, 세인은 엉겁결에 그 손을 잡았다.
고목 가지같이 마른 그녀의 손가락은 힘을 주었다 놓기를 반복했다.
“모두 죽었어요. 비참히. 그의 기사들도… 병사들도. 수수깡처럼 무너져 내렸고 짓밟혔어요. 그들의 군대는 숲을 태우고 웃으며 사람들을 학살했어요. 나는 내 사랑하는 사람을…. 그의 칼로 찔러 죽였고, 동시에 내 버림받은 진심은 지옥의 가시덤불 속으로 떨어졌습니다.”
“….”
세인은 고개를 들어 벽화를 바라보았다.
벽에는 온통 그때의 치욕적인 일이 기록되어 있었다.
고작 벽화인데도 소스라칠 정도로 끔찍한 기록들.
무참히 죽어가고 조롱당하는 인간들.
그리고 다시 인간들.
하늘을 메운 메뚜기 떼.
기어 다니며 포식하는 괴물들.
한차례 둘러봤는데도 후각으로 피비린내가 느껴질 정도다.
그때 세인의 손에서 정신을 잃은 세리스의 손이 툭 하고 아래로 떨어졌다.
세인은 그 차갑고 커다란 방 안에서 한참을 서 있었다.
그러다 중얼거렸다.
“이곳은 환상이 아니야.”
바로 미래다.
모든 것이 종결되기 직전의 미래.
앞으로 일어날 일이다.
그것을 깨달은 세인은 고개를 돌려 옆의 까마귀를 보았다.
그리고 까마귀에게 말했다.
“날아가라.”
그는 홀리 디스트로이어를 놓아 주려는 걸까?
까마귀를 보며 세인은 다시 말했다.
“넌 미끼다. 이목을 흩트리는 역할에 지나지 않아.”
정답은 가장 가까이에 있다.
바로 까마귀보다 가까운 곳에.
그리고 그는 방에 붙어 있던 거울 앞에 가서 섰다.
그러자 거울에 역사 기록관의 모습이 비쳤다.
흐릿한 형상은 곧 여자의 모습으로 변했다.
역사 기록관….
“성검. 홀리 디스트로이어. 네가 날 여기로 유도했나….”
세인이 중얼거렸다.
그러자 세인이 움직이지도 않았는데, 거울 안의 역사 기록관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공교롭게도 엘라이저의 말이 떠올랐다.
- 당신이 어떤 꿈을 가져도 결국, 당신의 길은 하나뿐일 겁니다. 이 세상을 피로 물들이는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