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1
& 세계수 (6)
거주지는 어느덧 마을 티가 났다.
오두막 옆으로 튼튼한 돌집이 늘어났다. 그리고 흙담과 함께 화단도 곧잘 보였다.
배수로가 파였고 조경에 신경 쓰는 사람까지 나왔다.
그들을 사람이라고 부르는 게 맞는 것인지는 모르지만, 그들은 적어도 스스로 사람이라고 불렀다.
과거 한 기사가 코다로에게 물었다.
“마을 이름을 뭐로 지을까요?”
“뭐긴 그냥 마을이지.”
여기에 인간이라고는 우리밖에 없으니까.
비교할 대상이 없으니 굳이 마을에 이름을 붙이지 않았다.
구분하길 좋아하는 게 인간의 생리라지만, 병사들 말고 일반 사람들은 빡빡하게 살지 않았다. 아주 작은 세금만 제외하면 그들은 자유였다.
작은 다툼이 일어나려고 하면 병사들은 자신들의 상처를 보여주었다.
당신들을 위해 이렇게 노력하고 있다고 말이다.
그리고 그들은 이미 죽음을 겪었다.
그렇기 때문에 삶의 소중함을 잘 안다.
세인의 마차는 더 확장되었다.
탁자가 늘어나고 천으로 만든 지붕이 늘어났다.
그래도 어지간하면 큰 집에 들어가 살라고 코다로가 말하곤 한다.
그러나 그렇게 말하는 그도 그냥 마차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이렇게 보니 사람들이 참 많군요.”
코다로는 체스판을 앞에 두고 중얼거렸다.
세인과 코다로는 시원한 그늘에 앉아 오후를 같이 보내고 있다.
세인의 마차가 있던 곳은 약간 높은 지대니까, 멀리까지 지어진 집들이 다 잘 보였다.
가까운 곳에서는 개울이 흐르고 있었기 때문에 아이들이 물장구치는 소리가 종종 들려왔다.
세인은 그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체스 말을 옮겼다.
세인과 달리 코다로는 부채질을 하며 체스 말이 따닥따닥하고 움직이는 소리를 들었다.
“코다로님, 제 자리를 비우게 될 것 같습니다.”
“오. 어디 멀리 가시나요?”
부재 이야기를 하다 보니, 둘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그중에는 진지한 이야기도 있었고 웃음을 자아내게 하는 이야기도 있었다.
코다로는 세인이 알면 알수록 신기한 사람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이런 질문을 던져 보았다.
“세인님의 꿈은 무엇입니까?”
“꿈요?”
“비비안님은 현명한 영주가 되는 것이라고 대답할 겁니다. 제가 보기엔 이미 이룬 것 같지만요. 세인님은 꿈이 뭡니까?”
“제 꿈은 그냥 평화롭게 사는 것입니다.”
“그런가요. 좀 의외네요. 세인님 같은 분위기를 가진 사람은 많은, 사람을 거느려야 어울릴 것 같거든요.”
세인이 체스판에서 시선을 떼어 코다로를 바라보았다.
세인의 시선을 받으며 코다로는 계속 말을 이었다.
“당신은 본인이니까 오히려 잘 모르는 것 같지만, 행동과 말에서 다들 느끼고 있을 겁니다. 당신의 그릇을요. 당신은 아주, 아주 많은 사람을 담아낼 그릇입니다. 제가 당신과 비비안님에게 보내는 호의를 떼놓고 생각해 봐도 그래요.”
“주위를 둘러보십시오. 이미 우리에게는 많은 사람이 있습니다. 이걸로 충분합니다. 코다로님의 꿈은 뭡니까?”
코다로는 씩 하고 웃었다.
이 남자와 사람들을 나누어 가진다는 것은 행운이었다.
영주는 고독한 자리다.
왜 아니겠는가?
보통 때에는 그게 불가능해서 그렇지.
친구가 있다면 참 좋은 것이었다.
“제 꿈은 좋아하는 사람 옆에서 싸우는 것입니다.”
“전사 같은 말이군요.”
“그 전사는 남에게 곤충을 먹이는 것에 꽤 요령이 있습니다.”
둘은 피식피식 웃었다.
이제는 웃을 수 있는 이야기였다.
“비비안 님만 남게 되었군요.”
“어디 가십니까?”
“호수에 낚시하러 갑니다. 좀 오래 있을 예정입니다.”
고개를 끄덕인 세인은 마을을 떠났다.
스톰이 준 퀘스트를 해결하기 위해서 말이다.
얼마나 걸릴지는 알 수 없었다.
그는 가벼운 복장으로 흑마 위에 올라탔고, 서쪽을 향해 직선으로 달렸다.
스톰의 말로는 가다 보면 안내인을 만날 수 있다고 했다.
그의 말대로 서쪽 끝에는 그를 기다리는 존재가 있었다.
바로 아름다운 다크 엘프였다.
“엘라이저.”
“알려주긴 했지만, 부르라고 한 건 아닌데요.”
커다란 나무에 기대어 있던 다크 엘프는 그림자 속에서 육감적인 몸매를 드러내며 이쪽을 바라보았다.
흘러내린 은발 속에서 그녀의 노란 눈동자가 깜박인다.
“그럼 뭐라고 부를까요?”
“그냥 부르지 마세요.”
흑마에서 내린 세인은 어깨를 으쓱했다.
엘라이저는 그림자를 벗어나 붉게 변한 후드를 눌러쓰며, 따라서 오란 손짓을 했다.
그녀를 뒤따라 가던 세인은 그녀의 부츠나 팔목에 마정석이 박혀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전에도 박혀 있었겠지만, 이제야 제대로 눈에 들어온다.
그런데 그 마정석은 세인이 구한 것보다 훨씬 검고 번들거렸다.
마치 흑진주를 박아 놓은 것만 같이….
“까칠하게 대해서 죄송해요. 동료들에게 이상한 오해를 받고 있어서 말입니다. 저도 모르게 그렇게 되었습니다.”
“오해?”
“남녀 간의 분위기 같은 겁니다. 신경 쓰지 마세요. 그보다 정말 스톰의 퀘스트를 하러 왔나요?”
“예.”
“굉장히 힘들 텐데요.”
“도전해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어렸을 때 성인식 대신해본 적이 있어요. 제 경우에는 복사된 저 자신과 싸우는 것이었습니다. 스톰과 나는 친하기 때문에, 제게 호의를 베풀어 줬습니다. 그건 제게 특별한 경험이었습니다. 지금은 당신이 제게 있어서 그래요. 스톰에게 당신이 퀘스트를 하는 목적을 들었거든요.”
과연 고약한 성미의 소유자끼리는 서로 통한다는 이야기인가.
스톰이나, 이 여자나 성격이 만만치 않을 테니까.
그렇게 생각한 세인은 엘라이저를 뒤따라가며 그녀의 뒷모습을 감상했다.
은발 몇 가닥이 그녀의 후드 뒤로 흩날렸다.
매혹적인 몸짓으로 이동하고 있으면서도 그녀의 작은 어깨는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마치 고양이가 걷듯이 사뿐사뿐 걷는데, 고개는 치켜세워져 있다.
“당신은 꿈이 뭔가요?”
오늘로서 두 번째로 듣는군.
그렇게 생각하며 세인은 아까 전과 다른 대답을 늘어놓았다.
“멀리 떠나는 겁니다.”
“당신의 고향을 생각하면, 여기가 그 멀리 아닙니까?”
“저 혼자서 멀리 떠나는 겁니다. 아주 멀리.”
다크 엘프는 침묵했다.
그리고 그런 그녀를 따라 징검다리를 건너며 세인은 계속 말했다.
어차피 이 여자는 철저한 타인이었다.
그래서 꿈을 솔직하게 말해줄 수 있었다.
자신에게 있어 아무런 가치도 없는 존재니까….
비웃든 말든 상처받을 이유가 없었다.
“괴물도 인간도 없는 곳에서 사는 거예요. 거기에서 저를 좋아하는 여자와 만나 사는 거죠. 아무도 저를 귀찮게 하지 않습니다. 자연 외에는 싸울 이유도 없고요. 뿌린 씨앗이 잘 안 자란다면 욕 정도는 하겠지만, 심하게 원망할 일은 없을 겁니다.”
그러나 정작 말하고 있는 세인도, 자신의 꿈이 이루어지지 않을 물거품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거기에서 제 관심은 오로지 그 여자의 치마 속에만 있습니다. 그런 제 생각은 저질이 아닙니다. 왜냐면 거기에서 저는 그냥 아내를 사랑하는 평민이거든요.”
“당신은 선이냐 악이냐를 떠나 많은 인간을 거느릴 분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그게 가능할까요?”
이것도 두 번째다.
세인은 이렇게 대답했다.
“검은 이리저리 봐도 누군가를 찔러 죽일 물건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을 때가 훨씬 좋죠.”
다크 엘프는 막상 그런 세인을 비웃지 않았다.
다만 팔짱을 끼고 조용히 걸었다.
그녀는 그녀대로 생각에 잠겨 있는 것 같았다.
그러다가 갑자기 홱 하고 돌아섰다.
그리고 말했다.
“이제 겨우 두 번째 만남인데, 저를 처음과 같이 적대적으로 보지 않는군요. 왜 그렇습니까?”
“당신네도 억지 일을 한다고 들어서요. 생존을 위해. 그 책임을 위해. 그게 바로 아까 말한, 검집에서 벗어난 검이 곧잘 하는 일이라서요.”
엘라이저의 눈이 그때 세인의 건틀렛에 머물렀다.
그리고 의미심장한 말을 했다.
어쩌면 그녀는 그녀의 왕에게 이미 건틀렛의 정체를 들었는지도 모른다.
“왜 다들 보물을 발견 못 하는지 알아요? 바로 욕심이 그 보물을 가리기 때문이에요. 우리가 행복을 품고 살아도, 행운만을 찾아 풀숲을 뒤지는 것처럼. 왕들은 그래서 바보같이 못 찾는 거예요. 그리고 여기를 떠나가고 있죠. 눈앞을 가린 큰 욕심을 쫓아…. 생각해 보면 그 왕들만 무능하다고 욕할 것은 아니겠죠.”
다크 엘프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왔다고 하면 누가 믿을까?
세인은 건틀렛을 낀 손을 쥐었다 폈다 해보았다.
그 움직임을 보며 엘라이저는 물어온다.
“그게 가끔 말도 거나요?”
“아뇨, 전혀.”
“굉장히 이상하게 들릴지도 모르겠네요. 그리고 당신이 노여워할 수도 있겠지만, 당신은 불쌍한 사람입니다. 왜냐구요? 그게 침묵으로 안배된 이유는 단 하나에요. 당신이 어떤 꿈을 가져도 결국, 당신의 길은 하나뿐일 겁니다. 이 세상을 피로 물들이는 거예요. 그 힘은, 그 길로 기필코 당신을 인도할 겁니다. 그걸 아니까 평소에 조용한 겁니다. 서두르거나 재촉하지 않아도 어차피 그렇게 될 걸 알기에.”
세인은 물끄러미 건틀렛에 시선을 주고 있는 그녀의 얼굴을 보았다.
그는 지금 엉뚱한 감정을 느꼈다.
이 여자는 반려가 있을까?
‘나는….’
이상하게 뭔가 아슬아슬해 보이는 다크 엘프에게서 연대감이 느껴졌다.
엘라이저는 얼핏보면 강하고 도도해 보이지만, 내면에는 부서질 듯한 뭔가가 잠들어있는 듯했다.
그는 갑자기 형용할 수 없는 기분에 휩싸였다.
세리스와 만났을 때, 그는 라이트닝 블러드로서 끌렸었다.
하지만 그 감정을 외면했다.
그때는 그런 감정이 타의에 강요받는 것 같아 억지스럽게 느껴졌고, 죽음이 목전에 있다고 느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어떨까?
‘나는, 그러니까 나는….’
세리스를 만났을 때와 달리….
정의 내릴 수 없는 강한 끌림을 느낀 세인은, 당혹스러운 시선 안에 엘라이저를 담아냈다.
다크 엘프는 그런 세인의 시선을 아는지, 모르는지 계속 건틀렛만 바라보고 있었다.
“당신은 그걸 모르겠죠?”
“알고 있습니다. 도망갈 길을 모르니까 가만히 있는 거죠. 당신이 내 비밀에 관해서 물어봤으니… 저도 실례지만, 민감한 것을 물어봐도 될까요?”
다크 엘프의 노란 눈이 세인의 얼굴로 향했다.
그녀는 약간 쌀쌀맞게 말했다.
“내 이름을 부르는 것만 빼고, 물어보는 것 정도는 괜찮아요.”
“다른 쪽 눈은 어떻게 된 겁니까.”
“별거 아닙니다. 어렸을 때부터 빈자리였었어요. 저는 그렇게 기억합니다.”
무안해진 세인은 볼을 긁적거렸다.
그거 굉장히 별거인데?
그 모습을 본 다크 엘프는 팔을 들어 올렸다.
그 팔 끝에는 검지가 뻗어 있었고, 붉게 물든 지대를 가리키고 있었다.
“대화가 너무 길었군요. 저기입니다.”
세인은 몸을 돌려 붉은 지대를 향해 걸어갔다.
이상한 일이지.
그냥 스톰의 퀘스트 하나만을 해결하는 일인데….
물론 그게 절대 간단한 일은 아니겠지만, 운명을 좇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는 걷다가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다크 엘프는 그에게 등을 돌린 채 걸어가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다가 다시 몸을 돌렸다.
그리고 다시 걸었다.
그때 다크 엘프가 뒤돌아보았다.
세인은 붉은 지대를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그 등을 잠시 보던 그녀가 등을 돌렸다.
세인이 다가가는 붉은 지대에는 눈에 띄는 것이 있었다.
장식마저 하얀 문 하나였다.
스톰이 만들어 놓은 것으로 보이는 문.
그때 스톰의 말이 떠오른다.
“내 퀘스트는 간단하다고 생각하면 아주 간단해. 물건 하나를 찾는 일이야. 잃어버린 곳도 알고 있어. 네가 원한다면 금방 끝날 거야. 그렇다고 해서 힘들지 않다는 이야기는 아냐. 네가 요구한 물건을 생각해 보면 이상한 일도 아니지.”
“그 물건의 이름은 뭐지?”
“들어본 적이 있을 거야. 성국의 물건이니까. 홀리 디스트로이어. 성검이지.”
“….”
세인은 하얀 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 물건은 스스로 깨어나 있어. 그런데 왜인지 응답하지 않아. 뭔가를 기다리고 있는 것으로 보여. 언제부턴가 내 창고에 연결되어 있지만, 도무지 말을 안 들어서 말이야. 그걸 찾아다 줘.”
라이트닝 블러드는 복수로 존재할 수 있지만, 엘릭서는 한 시대에 하나만 깨어나 존재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스톰은 그를 속인 걸까?
트렌트가 아는 스톰의 비밀은 간단했다.
스톰은 성검을 보관하고 있었다.
그래서 스톰은 평소에 괴물의 왕들을 맹인이라고 비웃은 것이다.
마검의 소식을 듣고 미친 듯이 웃은 것도 그런 맥락이다.
왕들은 얼마나 바보인가?
주변에 보물이 몇 개나 있어도 알지 못했다.
바로, 욕심에 눈이 가려서….
언제나 그랬다.
문제의 정답이나 보물은 가까이에 있기 마련이었다.
파랑새처럼.
세인은 문고리가 없는 하얀 문을 밀어 보았다.
큰 힘을 주지 않았는데 스르륵 하고 열린다.
안에는 어둠만이 가득했다.
세인은 그 안으로 들어갔고, 문은 소리 없이 뒤에서 닫혔다.